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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언약 안에 살고 계십니까? 2529

LNCK 2010. 7. 1. 11:09


▣ ‘새언약’ 관련글 모음


새언약 안에 살고 계십니까?    (아래 글 ↓)


구약과 연결해서 보는 바울의 믿음론    


▶  새 언약으로 탄생한 교회


큐티 묵상 두 편 (3) 中1항


복음 속의 율법

  

하나님과의 친밀함  (서두)

 

성찬식은 새언약을 상기하는 시간  성찬과 유월절 중에서 일부




◈새언약 안에 살고 계십니까?             렘31:31~40         10.06.20.설교녹취


 

◑옛언약의 불완전함


▲성경을 구약과 신약으로 나눕니다.

구약은 옛언약(옛 구久)이란 뜻이고, 신약은 새언약이란 뜻이다.

(본문 렘31:31~40절은, 옛언약과 새언약의 연결고리다.

예수님을 통해 성취되어질 새언약에 대해 구약에서 최초로 예언한 말씀이다.)


성도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새언약의 수혜자들이 되었다.

그런데 그 새언약을 현재 정말 누리며 살고 계신가?


신약성도인 우리에게는, 새언약의 축복이 주어져 있다.

그 어떤 어둠도, 밝아오는 태양을 가로막을 수 없듯이,

그 어느 것도, 새언약의 축복을, 우리에게서 무효화시킬 수 없다.


▲새언약 위에 굳게 서야 하는 이유

우리가 죄악된 습성을 갖고 있어서, 죄가 쉽게 내게서 떨쳐지지 않는다.

바울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라고 고백했듯이,  롬7:24

하나님 뜻대로, 말씀에 순종해서 살고 싶은 소원은.. 내게 있으나

그 뜻과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고 살지 못하는.. 죄악된 현실이 내게 엄연히 있다.


이때 바울이 뭐라고 탄식하는가?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롬7:19~20

그래도 이렇게 느낄 수 있는 바울은, 깨어있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런 죄를 짓고 번뇌하는 갈등의 날이 하루 이틀 계속 지나가면, 타성에 젖어서

‘모두가 다 죄를 짓는데, 뭐 어떠하랴?’ 하면서

죄악의 어두운 커튼 속에서, 자기 영혼이 깊은 잠에 빠져 버릴 때가 있다.   주1)


   이렇게 자포자기하며 살지 말고, 그 쓴 열매는 반드시 자기가 거두게 되어 있다.

   여러분, 새언약 위에 굳게 서시기 바란다.


▲옛언약은 무가치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 언약관계에 실패하고 말았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법(옛언약, 시내산 언약)은

그들을 살리시는 말씀이었고,

그 당시 그들에게는 은혜의 말씀이었다.

(※후대 선지자들의 말씀은, 모두 옛언약의 재해석, 또는 상기)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시내산에서 결혼식을 하셨다.

피덩이처럼 던져져 있었던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품으시고, 키워주시고,

이제는 하나님의 아내 삼으시고, 나와 함께 영원히 같이 살자고 언약식을 하셨지만,

이 여자가 바람이 나서, 탐욕에 빠지고, 음란에 빠지고 말았다. (렘31:32, 겔16장, 호세아서)


오늘날로 말하면, 세상 쾌락의 신을 섬기고, 물질의 탐욕의 우상에 빠져들어서,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를 -인간편에서- 깨뜨린 것이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새언약을 주시게 되었다. 옛언약 갖고는 안 되겠다는 것이다.



◑새언약이란?


▲렘31:31절: 예수님의 피로 세우진 새언약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렘31:31


새언약이 맺어져야 하는 중요한 이유 중 한 가지는,

옛언약(계약조항)에는 축복도 씌어있지만, 동일하게 저주도 씌어있었다.


이스라엘이 반역하므로, 저주의 대상이 되어서,

옛언약이 작동되면 작동될수록,

그들은 파멸과 파국으로 치달아갔다.


그래서 하나님이 새언약을 주신 것이다.

이것이 예레미야와 에스겔(겔36:27)을 통해 예언되었고,

그 성취를 예수님이 오셔서 이루셨다.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눅22:20


즉, 예레미야가 외쳤던/예언했던 렘31:31절의 새언약이란,

다름 아닌,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이루어지는 ‘새언약’이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셔서,

그분의 피를 남김없이 우리를 위해 다 흘려주시고,

옆구리에 창에 찔리셔서, 마지막 남은 한 방울의 피까지

모두 우리를 위해 쏟아주심으로써,

하나님과 우리 가운데 새언약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스도의 피로 세우신 새언약은

옛언약 가운데 있는 율법의 저주를

자신의 피값으로 대속하시고,  대신 치르시고

새롭게 세우신 언약이다.


▲32절 : 부부관계가 아니라 부자관계의 언약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옛언약)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렘31:32


깨어져서는 안 되지만, 깨어질 가능성이 있던 (부부관계란 깨어지기 쉬운 것)

남편과 아내 관계의 옛언약 대신에

결코 깨어질 수 없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우리를 묶어주셨다. (父子관계는 언제나 견고함)


이 언약은, 고귀한 보혈의 대가가 지불되어서 세워진 언약이기 때문에,

아무도 파기할 수 없는 영원한 맹약이다.



◑새언약 아래서 사는 삶이란 어떤 것인가?


우리는 (이조시대부터) 율법주의적인 전통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여전히 율법주의적 환경에 머무르려는 속성이 강하다.

그래서 이 은혜의, 새언약의 환경으로 나아가기를 주저할 수 있다.

우리는 옛언약의 무지의 커튼을 걷고, 새언약의 밝은 태양빛 아래로 나아가야 하는데...


▲1.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이는 삶 (:34b)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31:34b 


기억하실 것은, 이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언>이시다.

하나님이 용서해 주시되, 어떤 조건을 요구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그들의 악행을 용서하시고, 기억하지도 않겠다고 약속하셨다.


이것이 새언약의 축복이며,

우리가 그것을 누리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옛언약에도 ‘용서’가 있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자신을 계시하실 때,

   ‘(여호와는)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출34:6

   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구약에서 죄용서 받으려면, 양, 염소, 비둘기를 죽여서 제사 드려야 했다.

   속죄의 제사는 피의 제사가 필요했고,

   화목을 위해서 화목제사가 필요했다.


그러나 새로운 언약 아래 있는 신약성도들에게는

영단번의 제사가, 십자가를 통해 이미 치러졌다. (영단번 : 영원 속에 단 한 번)

그래서 하나님과 우리가, 십자가의 제사로, 죄용서 받고, 이미 화목하게 된 것이다.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고후5:18~20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감히 나아갈 수 없었던 우리들이, 나아가면 즉사했던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당당히 나아갈 수 있도록 축복받은 것이다. 히10:20, 22


▲그래서 두려워하면서도, 당당히 나아간다.

사실, 하나님을 우리가 알면 알수록, 겁이 난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모르는 사람들이나 가볍게 살지,

하나님이 누구신지 아는 사람은.. 그 분을 경외fear&honor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을 느끼는 사람은, 누구나 경외하게 되어있다.


그분은 죄악을 진노하시고, 심판하신다.

그분의 죄악에 대한 진노를 우리가 느낄 때,

우리는 그분 앞에 서서 부들부들 떨 수밖에 없다.


그러나 동시에, 신약성도인 우리는 탕자의 비유를 함께 생각해야 한다.

예수님이 십자가로 새언약을 이루어놓으셨으므로,

탕자 같은 우리들이라도, 하나님 앞에 경외하면서도 당당히 나아가는 것이다.


▲탕자의 비유가 주는 새언약적 교훈

필립 얀시의 형이 약간 부랑아적 기질이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는데 선교사이었고, 어머니는 성경교사였다.


그런데 얀시의 가정에, 한 가지 근심이 있었는데,

부랑아 형과, 성경교사인 어머니 사이가 너무 나쁜 것이었다.

형이 너무 심하게 제멋대로 사니까, 어머니가 형을 쳐다보지를 않는 것이었다.


얀시는 너무 마음이 아파서, 어머니를 찾아가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원수도 사랑하라 하셨고, 잃어버린 양도 주님은 찾으시고,

탕자도 아버지가 받아주시는데, 형(아들)과 화해를 하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어머니는 이렇게 대답했다.

“너 얘기 한 번 잘했다. 그런데 성경을 보자꾸나.

눅15장에 3가지 비유가 나오는데,

잃은 양, 잃은 드라크마는 주인이 찾으러 나갔지만,

잃은 아들의 비유를 보면, 탕자가 제 발로 집으로 찾아왔다.

‘아들’은 자기가 집으로 돌아와야 하는 게야!” (네 형은 도, 드라크마도 아니라, 아들이야!)


얀시의 어머니는 성경교사답게, 성경을 정확하게 관찰하고 있었다.

틀린 말이 아니다. 탕자는 제 발로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런 요소가 반드시 있다.


   하지만, ‘탕자의 비유’가 핵심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탕자가 제 발로 돌아오는 것’보다

   ‘죄인을 용납하시는 아버지의 크신 사랑’이다.


   그것을 빼놓고, 아들이 제 발로 돌아와야 한다고 호통 치는 것은..

   성경을 오해한 것이다.


다시 ‘새언약’으로 돌아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지만,

우리가 아무리 더러운 죄인이라도,

아버지께 자기 발로 돌아갈 수 있는 그런 관계가 형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성’ 때문이다. 죄인인 아들을 용납하시는 아버지 때문이다.


   ※렘31:33절에는 ‘내 백성’이 되었다고 하는데.

   그러나 신약에서는 ‘양자로 삼으셨다’고 한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롬8:15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과 ‘형제’라 불리운다. 히2:11

   예수님이 우리 큰 형님이 되시는 셈이다.


아버지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다 끌어 안으셨기 때문에  눅15:20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 경외하면서도, 새언약 안에서, 하나님 품에 나아가 안길 수 있다.


아버지의 품에 안기기 전에는

‘아버지를 부끄럽게 하는 아들’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 아들을 품어주셨다. 이것이 새언약의 영광이다.

아들로 삼아주셨기 때문에, 아들관계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기억하셔야 한다.

아버지의 품에 안기기 전에는, 여러분의 힘으로 여러분의 죄를 해결할 수 없다.

내가 깨끗해진 후에,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시스템이 아니다.

내가 괜찮아지고 나서, 주님 품에 안기는,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냥 아버지께서 품에 안아 주시는 것이다.

그리고 씻기시고, 제일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라고 하신다.

신발을 신겨라.. 이제 더 이상 종이 아니다.

가락지를 끼워라.. 아들의 권위를 회복시켜 주신다.


(새언약 아래서 사는 삶이란)

▲2. 파기할 수 없는 자신의 정체성(아들 됨)을 받아들이는 것인데.. 설명하면..


주님은 십자가에서, 이미 우리와 평화, 화해하셨다.

우리는 믿음으로, 그 화해를 받아들여야 한다.

내가 탕자라도 주님의 아들 되어진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이 새언약 안에 사는 삶이다.

(그런데 탕자가 되어야, 오히려 받아들이기 쉽다. ‘큰 형’ 입장이 되면 오히려 받아들이기 어렵다.)


이런 상태에서 우리의 선택은 2가지다.

①자랑스러운 아들이 될 것인가,

②부끄러운 아들이 될 것인가?.. 의 문제이다. (‘아들’의 신분은 변함 없다.)


▲3. (새 언약 안에 사는 성도는) 마음의 거룩한 성을 건축한다.


보라, 날이 이르리니 이 은 하나넬 망대로부터 모퉁이에 이르기까지

여호와를 위하여 건축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31:38


여기서 ‘마음’이란 ‘행위’와 반대 개념으로, 보다 본질적인 순종의 마음을 뜻한다.

(예를 들면, 여인의 보고 음욕의 마음조차 품지 말아야 한다에서의 ‘마음’)


새언약을 통해, 심령이 변화된 자는, 심령이 새롭게 된 자는,

겉 행위(옛 언약)가 아니라, 속 마음(새 언약)에 거룩한 성을 쌓는다.


주님의 십자가는,

나를 죄의 구렁텅이에서 건져내는 것만 아니라①

내 마음에 아들의 형상을 본받도록, 즉 마음의 거룩한 성을 쌓도록② 역사하신다.

이 2가지가 온전히 함께 가야 한다. 억지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그렇게 된다.


자발적으로 되는 이유는,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의 능력으로 거룩해 졌기 때문이다.


   성경에 보면, 정착하는 ‘성읍문화’에 대해서는 다소 부정적으로,

   떠돌아다니는 ‘장막문화’에 대해서는 호평하시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래서 신앙인은 ‘떠돌아다니는 순례자의 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성도의 육신은 끊임없이 창조적으로 순례하더라도,

   그 마음은 굳세게 마음의 성을 쌓아야/정착해야 한다. 렘31:38

   죄와 세속이 침입하지 못하도록, 마음의 문을 굳세게 지켜야 하는데,

   새언약된 성도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내 마음의 문을 굳게 지킬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내 마음의 성을 굳게 지켜서 내가 거룩해지면,

내 가정에 거룩한 성이 쌓아지게 되고

가정이 거룩해지면.. 교회가 거룩한 성으로 건축된다.

교회가 거룩해지면.. 사회가 겨룩한 성으로 건축된다.

그러면 하나님의 불성곽의 보호가 임한다.

이것은 벽돌로 쌓은 성곽이 아니지만, 세상에 그 어떤 성과 비교할 수 없는 가장 견고한 성이다.


바깥으로는 내가 예루살렘의 둘레를 불로 감싸 보호하는 불 성벽이 되고,

안으로는 내가 그 안에 살면서 나의 영광을 드러내겠다. 나 주의 말이다.  스가랴2:5

  

다시 말씀드리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의 대가를 치르시고, 새언약을 주신 것은

나를 죄의 구렁텅이에서 건져내는 것만 아니라①

내 마음에 아들의 형상을 본받도록, 즉 마음의 거룩한 성을 쌓도록② 하기 위함이다.

 

※그동안 우리는 ①만 편향적으로 강조해왔으나, 앞으로 ②도 균형있게 강조되어야 한다.


 

주1) ▲새언약의 시대에, 성도가 새언약을 발견하지 못하는 이유

단체 여행을 하다가, 호텔방에서 자게 되었는데,

호텔의 두꺼운 커튼을 쳐놓고 잠들었다가, 아침이 밝았는데도

방안이 캄캄하니까 아침인줄 모르고 계속 자다가,

일행들이 ‘빨리 내려오라’고 로비에서 전화를 걸어줘야, 비로소 깨는 경우가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지금 신약성도들은, 새언약 가운데 살고 있지만,

자기 죄악의 커튼이 두껍게 드리워져 있으면,

새언약의 밝은 태양빛이 전혀 비취지 못하는 수도 있다.

그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신앙생활 할 수 있다.                                                                   ▣ 복음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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