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 요14:27~28 스크랩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14:27
◑유언 1.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Peace I leave with you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는 영어로 Peace I leave with you
직역하면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입니다.
부모님을 여읜 분들, 부모님들께서 떠나가시기 전 마지막으로 남기신 유언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유언으로 보통 어떤 말씀을 남기십니까?
저희 할머님께서는 돌아가시기 직전 자식들을 모두 불러 모으셨습니다.
그리고 단 한 가지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오락가락하시는 와중에도 똑똑한 목소리로 세례를 받고 싶다고 말씀하셨고,
또 당신이 떠나시고 나면, 가족 모두가 교회에 입교하길 바란다는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보통 부모님들의 유언은 주로 어떤 내용이겠습니까?
주로 자식들에 대한 걱정을 위주로 한 유언이라고 합니다.
안쓰러움 끝에 나온 유언, 오직 자식들 잘 되기만을 바라는 유언이었습니다.
‘마음 비우고 대범하게 살아라, 형제들끼리 화목해라,
늘 서로 용서하며 살아라, 서로 베풀고 도와주며 살아라...’ 등
▶위 본문은 그 성격상, 제자들에게 남기시는 예수님의 유언과도 같은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유언은 뜻밖에도 평화를 빌어주는 유언이었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Peace I leave with you
유대인들이 자주 사용하는 인사말이 ‘샬롬’입니다. 평화를 빈다는 인사말입니다.
머지않아 떠나가실 예수님이셨습니다. 스승이 옆에 꼭 붙어있어도 저 모양인데,
당신이 떠나시고 나면 제자들 어떻게 살아갈까, 고민도 많으셨을 것입니다.
정작 당신이 떠나가고 나면, 갈팡질팡 우왕좌왕할 제자들의 미래가.. 눈에 선하셨을 것입니다.
스승의 부재로 인해 잔뜩 겁을 집어먹고 불안해할 제자들의 안쓰러운 모습이
예상되셨던지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My peace I give unto you. 요14:27
바로 자상한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자식들을 끔찍이도 챙기는 인정 많은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떠나 가시면서도 계속 자식들 걱정 때문에 여념이 없으십니다.
▶이런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미래를 바라볼 때, 언제나 낙관적이어야 합니다.
주어진 현실이 아무리 암담하다 할지라도
절망 속에서도 하나님 존재로 인해, 희망해야 합니다.
매일을 승리의 눈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영원한 승리자이자 평화의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언제까지나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고,
우리에게 평화를 남겨주셨기 때문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지금 나에게 평화가 없다면, 내가 아직 못 찾은 것입니다.
평화는 내 가까이에 와 있습니다. 주어져 있습니다. 내가 찾아내야 합니다.
◑유언 2. "너희는 마음에 염려하지 말라" 요14:28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요14:1
▲걱정은.. 신앙적으로 해결해 나가야할 문제
지난날 제 삶을 돌아 볼 때마다, 참으로 후회되는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제 성격이 지나치게 걱정이 많은 성격,
만사를 비관적으로 보는 성격이었다는 것입니다.
돌아보니 저는 ‘참으로 걱정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가끔씩 식사시간에 늦어 외식이라도 할 상황이면
"도대체 뭘 먹어야 하나?"하고 걱정했습니다.
큰 야외행사를 앞두고는 몇 주 전부터
"만일 비라도 오면 어떡하나?"하고 지레 겁을 먹었습니다.
누군가 안색이라도 좋지 않으면
"저것이 나 때문에 저러나? 내가 뭘 잘못했나?" 하고 걱정하기 일쑤였습니다.
만일 걱정이 없다면 "왜 걱정이 없나?"하고 걱정했습니다.
사실 모든 사람이 다 이렇습니다.
신앙생활을 해나가면서 저의 이런 소심함과 끝도 없는 걱정의 근원이
도대체 무엇일까? 하고 곰곰이 생각해봤었는데
결국 신앙문제에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진정으로 제가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진실로 그분의 자비를 굳게 믿는다면 걱정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결국 저의 숱한 걱정 그 이면에는
하나님 자비에 대한 의심, 결국 하나님께 대한 신뢰심의 부족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잔느 귀용의 말대로
"걱정은 자신이 하나님이 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당부하고 계십니다.
크게 포기하면 크게 자유를 얻습니다. 과감하게 우리 삶의 전부를
예수님 그분 앞에 던져버리고 맡겨버리면 좋겠습니다.
전적으로 투신하면, 반드시 전적으로 해방되는 큰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내가 주님과 거리가 멀어지면.. 걱정이 많아집니다.
내가 주님과 거리가 가까워져 있으면..
극단적 예로 병원에서 석달 판정을 받아도,
얼굴이 환합니다. 주님께 다 맡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평화가 고갈되면.. '거리'를 좁혀야 합니다.
▶상대적 평화와 절대적 평화
우리가 돈이나 명예 또는 변하기 쉬운 사람의 마음과 같이
세상의 불확실하고 상대적인 것들에서 우리의 평화를 찾으려 한다면,
우리는 언제나 불안 속에 머물게 됩니다.
우리는 존재의 근원이신 절대적인 하나님께 우리 마음의 닻을 내릴 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에서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변하기 쉬운 상대적 평화가 아닌, 절대적 평화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세상의 상대적 평화들을 절대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세상의 돈과 명예, 부질없는 욕망과 같은 결코 영원하지 않는 상대적인 것에
우리 마음의 닻이 내려져 있다면
그것이 없어질 때 우리의 평화도 없어집니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존재에 내 마음의 닻이 내려져 있다면
결코 내 평화는 깨어지지 않습니다. 주님만이 절대적 평화를 주십니다.
지금 내 마음의 닻은 어디에 내려져 있으며, 어디에서 평화를 찾고 있는가요?
우리가 참된 평화를 누릴 때는, 존재의 근원 God과 함께함을 느낄 때입니다.
그런 존재론적 행복을 느낄 때 우리는 우리 존재 자체에서 기쁨을 찾게 됩니다.
또한 그런 존재론적인 평화 안에 머물 때
우리는 비로소 상대적인 것들에 대해
보다 여유로운 마음을 갖게 되고
부질없고 헛된 세상 욕망에 집착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소들이 평화로이 풀을 뜯는 목장에서
'평화'를 주제로 하는 그림 그리기 대회가 열렸습니다.
두 어린이의 그림이 최종 결선에 올라왔습니다.
하나는 목장의 평화로운 풍경을 사실적으로 옮겼습니다.
그런데 다른 하나는 목장의 평화로움과는 정반대의 그림이었습니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깎아지른 절벽 한 귀퉁이에
아기 새가 어미 품에 안겨 있는 그림이었습니다.
선생님들은 어미 품의 아기 새 그림을 장원으로 뽑았습니다.
▲참 평화를 누리는 분
예배를 마치고, 다과를 나누는 시간에,
몸이 불편하게 보이는 자매님이 있어, 다가가 안부를 물어보았습니다.
"실은 앞이 잘 안보여요. 제 작년에 실명을 했지요..." 라고 했습니다.
자매님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실 우리 바깥양반이 나 몰래 담당의사에게 갔었데요.
자기 눈 하나 없어도 좋으니, 제발 좀 이식 좀 해주라고 떼를 썼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목사님 그거 아시유? 지가 시력은 잃었지만, 더 많은 것을 얻었당게유."
"도대체 뭘 얻으셨는데요?"
"비록 앞은 안보이지만 아직 귀는 멀쩡하잖유.
그래서 이렇게 예배에 나와서 목사님 설교도 듣고...
집에서는 매일 설교방송에 채널을 고정시켜놓고, 하루 종일 말씸 안에서 산당게유."
그러고 나서 가만히 그 자매님의 얼굴을 보니
비록 앞이 안보여 무척 불편하실 텐데, 얼굴은 얼마나 평화로운지요.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시종일관 싱글벙글하셨습니다.
양쪽에 서 계셨던 도우미 두 자매님들까지도, 덩달아 행복한 표정들이었습니다.
그 자매님들이 집으로 돌아가신 뒤, 솔직히 개인적으로 많은 반성을 했었습니다.
그렇게 앞이 전혀 안보여 왕불편한 가운데서도
천국을 사는 듯이 평화와 고요함 속에 지내시는 자매님의 얼굴과..
갖은 근심 걱정으로 찌들린 데다 세파에 시달릴 데로 시달리다 못해
팍 삭은 제 얼굴이 너무도 선명하게 대조가 되었습니다.
진정한 평화란, 주님으로 인한 평화입니다.
주님을 우리 삶의 중심에 둠으로 인한 평화,
주님만을 최우선 가치관으로 선택함으로 인해 따라오는 평화가 참평화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세상 물질과 문명의 혜택이 주는 평화와는 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유언3. “나는 갔다가 너희에게 돌아온다.” 그러므로 평화하여라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나는 갔다가 너희에게 돌아온다'고 한 내 말을, 너희는 들었다." 요14:28
끔찍이도 자식들을 챙기는 어미 새의 모습을 옆에서 지켜본 적이 있습니다.
먼저 지극정성으로 둥지를 만들더군요.
그냥 대충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엄청 신경을 썼습니다.
천적들의 공격으로부터 새끼들을 방어하기 위해 은밀한 장소를 물색합니다.
그리고는 부리가 다 상할 정도로 최선을 다해 ‘건축자재’들을 운반해옵니다.
정말 눈물겨운 모성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새끼들이 부화되면 또 다른 전쟁이 시작됩니다.
금방 먹어놓고도 틈만 나면 입을 쫙쫙 벌려대는 어린 것들의 왕성한 식욕을 채워주기 위해
어미 새는 이른 아침부터 저녁이 될 때까지 눈코 뜰 새 없이 바쁩니다.
먹이사냥, 이거 만만한 일이 결코 아닙니다.
먹잇감을 구하기 위해 이리 저리 숱하게도 날아다녀야 합니다.
두드리고 또 두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겨우 찾은 먹잇감,
자신도 먹고 싶지만 꾹 참고 어린 것들의 입에 넣어줍니다.
어찌 그리도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모습과 흡사한지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헐벗고 고생하는 우리에게.. 따뜻한 영혼의 보금자리를 제공하기 위해서가 아닐까요?
궁극적으로 영원히 머물 참 보금자리인 낙원을 마련해주기 위해서가 아닐까요?
어미 새가 둥지 밖으로 날아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어린 것들을 버려두고, 혼자 살겠다고 가출한 것이 아닙니다.
먹이를 구해 어린 것들의 허기를 채워주기 위해서입니다.
오래지 않아 먹이를 물고 둥지로 돌아올 것입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잠시 떠나시지만 영원히 떠나시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를 위한 ‘환상적인 둥지(천국)’를 마련하시고
우리를 그리로 데려가시려고 잠시 떠나신 것입니다.
이런 당신의 계획을 분명히 밝히고 계십니다.
“나는 갔다가 너희에게 돌아온다.” 요14:28
이것이 제자들이 평안해야할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적용
▶진짜 평화를 깨는 요인은, 내 속에 있습니다.
인간의 3대 욕망은 오래 사는 것, 부자 되는 것, 복수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욕망을 그대로 내버려두면.. 내가 평화를 잃게 됩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언젠가 빅토르 위고의 단편소설에서
이런 이야기를 본 기억이 있습니다.
대포를 실은 배가 태풍을 만났습니다.
태풍으로 생긴 배가 흔들거리다가 글쎄 대포를 묶은 쇠사슬이 끊어진 것입니다.
배를 타고 있었던 선원들은 대포를 고정시키기 필사적으로 노력했지만
자신들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따라서 이제 그 대포를 피하는 수밖에 없었지요.
혹시라도 무거운 대포에 부딪히지 않기 위해서
그들은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대포를 피했습니다.
이러한 긴장의 순간, 선원들은 깨달았다고 하지요.
‘우리를 진정 위험에 빠뜨리는 것은 외부의 태풍이 아니라,
제멋대로 굴러다니는 대포다.’
많은 이들이 평화를 원합니다.
그리고 이 평화를, 내 욕망들을 채울 때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래서 세상이 주는 평화를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평화는 멀리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 내부에서 제멋대로 굴러다니는 욕망들을 잠재울 때
평화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한 제자가 스승에게 고민을 털어 놓았습니다.
“스승님, 인생의 고뇌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없습니까?”
스승은 제자의 얼굴을 한참 쳐다보더니 말없이 걸음을 옮겼습니다.
제자는 어리둥절했지만, 스승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숲에 이르자 스승은
“지금부터 너에게 인생의 고뇌에서 벗어나는 법을 가르쳐 주겠다.” 고 말하고는
커다란 나무에, 자기 온 몸을 밀착시키며 큰 소리로 이렇게 외쳤습니다.
“놔 달란 말이야, 이놈의 나무야. 제발 나를 놓아줘!”
제자는 스승의 행동에 놀라 달려가 스승을 나무에서 떼어놓으려고 안간힘을 썼습니다.
하지만 스승은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제자는 나무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하는 것은 나무가 아니라
스승이란 점을 깨달았습니다.
제자가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나무가 스승님을 붙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승님이 오히려 나무를 꽉 붙잡고 놓지 않고 계십니다.
왜 나무에게 놓아 달라고 소리 지르시는 겁니까?”
스승은 빙긋이 웃으며 나무에서 팔을 풀었습니다.
“이것이 인생의 고뇌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실제로는 세상 고통이 나를 놓아주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그 고통을 붙잡고 놓지 않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고뇌는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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