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품 안의 위로 이사야66:10-14 10.07.04.설교스크랩
*원제목: 어머니처럼
▶10절, 예루살렘을 사랑했기에, 무모하게 귀환했습니다.
이사야서의 앞부분은 유다 왕국이 아직 멸망하기 이전에 기록된 것이었고,
마지막 부분은 유다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다가
유다 백성들이 다시 옛 땅 예루살렘에 돌아 온 이후에 기록되었습니다.
유다 백성들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사실 그건 무모한 일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더 이상 옛날의 예루살렘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한때 한 나라의 수도로 영광을 누리던 곳이었지만,
지금은 잡초만 우거진 황무지일 뿐이었습니다.
그런 곳으로 돌아온다는 건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냥 페르샤에 남아 있어도 아무 문제없었습니다.
이제는 포로로 끌려온 지 한참 되어서 옛날만큼 서러움을 당하지는 않게 되었고,
생활도 어느 정도 안정이 되어서 먹고 사는 데도 큰 문제는 없었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예루살렘에서 사는 것만큼 힘들지는 않았습니다.
실제로 유대 백성들 중에도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은 사람들이 많이 있었고,
그렇다고 그게 특별히 무슨 문제가 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무런 대책도 없이, 무작정 돌아왔습니다.
본문은 바로 그런 상황에서, 그런 귀환민들에게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사람들아! 그 성읍과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예루살렘을 생각하며 슬퍼하던 사람들아, 너희는 모두 그 성읍과 함께 크게 기뻐하여라.” 사66:10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사람들,
또 예루살렘을 생각하며 슬퍼하던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그들이 굳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것이
예루살렘을 사랑하기에 그렇게 한 것이라는 사실을
주님께서 알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을 떠나 살면서, 늘 예루살렘을 생각하며 슬퍼했습니다.
예루살렘이 황폐하고 예루살렘이 모욕당하는 것이 못 견디게 괴로웠습니다.
예루살렘을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은 하나님을 사랑했기에, 무모하게 귀환했습니다.
예루살렘이라는 도시를 사랑하고, 예루살렘이라는 도시 때문에 슬퍼했던 게 아니었습니다.하나님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사랑한 건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도성 예루살렘을 사랑한 것이고,
하나님의 성전이 있던 땅 예루살렘을 생각하며 그토록 슬퍼했던 거였습니다.
사랑하면 그렇지 않습니까?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 사람의 모든 것,
그 사람과 관련된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됩니다.
예루살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겁니다.
그들은 나라가 망해서 포로로 끌려갔어도,
거기서 모욕당하고 고생하며 살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사랑하고,
언젠가 하나님께서 다시 자기를 기억하셔서 회복시켜 주실 거라는 것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예루살렘을 생각하며 슬퍼하는 건, 예루살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바로 그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들 귀환민들에게, 기쁨을 주십니다.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사람들아! 그 성읍과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예루살렘을 생각하며 슬퍼하던 사람들아, 너희는 모두 그 성읍과 함께 크게 기뻐하여라.” 사66:10
▶11절, 그들에게 풍성한 어머니 젖을 빠는 기쁨을 주겠다.
그들이 기뻐할 이유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는, 너희로 하여금, 위로를 주는 예루살렘의 품에서, 젖을 빨아 배부르게 하고,
또한 너희로 하여금, 풍요한 젖을 빨아들여 기쁨을 누리게 하려 함이다.” 사66:11
유대의 백성들이 그렇게 그리워하고 사모하던 예루살렘을 돌아가서,
마치 아기가 엄마의 품에 안기듯이 예루살렘의 품에 안겨서,
예루살렘의 젖을 빨아 배부르게 되도록 해주겠다는 약속입니다.
하지만, 지금 예루살렘은 폐허입니다. 황무지입니다.
아무 것도 없습니다. 유다 백성이 그 품에 안길만한 곳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복을 주기로 하십니다.
▶12절, 예루살렘을 복 주기 위해서, 주변 나라들을 복 주십니다.
“내가 예루살렘에 평화가 강물처럼 넘치게 하며,
뭇 나라의 부귀영화가 시냇물처럼 넘쳐서 흘러오게 하겠다.” 사66:12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을 복되게 하시고,
예루살렘이 복되게 하시기 위해서, 주변 나라들에게 부귀영화를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이상하지요? 그냥 하나님의 백성에게 복을 주시기만 하면 될 텐데,
뭐 하러 이렇게 복잡하게 여러 단계를 거쳐서 일을 하실까요?
꼭 이렇게 두 단계, 세 단계 거쳐서 복을 주셔야 할까요?
그런데, 이게 바로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방식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복을 주실 때,
이런 식으로 하십니다.
나에게 무엇인가 필요하다고 할 때, 하나님은
‘너 이거 필요하지? 옜다 이거 너 가져라,’ 이런 식으로 하시지 않는다는 겁니다.
물론 그렇게 하실 때도 있지만, 그러나 오히려 그게 예외적인 경우이지,
하나님의 방식은 아니라는 거지요.
하나님은 우리가 나 혼자 복 받고,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게 되는 걸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여러 사람이 같이 있는데, 나 혼자만 복 받고 살라고 하시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그게 나에게 좋은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동네에서 아이들이 모여서 놀고 있습니다.
한 아이의 엄마가 간식을 만들어서 가져옵니다.
아이들이 한참 재미있게 놀고 있는데, 자기 아이만 따로 불러내서
그 아이한테만 먹을 걸 줍니다.
다른 아이들이 자기들도 먹고 싶어서 쳐다보면,
“얘, 저리 가, 이건 우리 아이만 먹을 거야!” 그럽니다.
자, 그 간식을 먹은 아이는 그 뒤로 어떻게 될까요? 왕따가 되겠지요.
다른 아이들이 그 아이하고 놀아주지도 않고, 오히려 해코지할 지도 모릅니다.
그 간식이 아이에게는 복이 아니라 독이 될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실 때, 그냥 달랑 우리에게만 주시지 않습니다.
우리 환경을 변화시키시고, 우리 주위 사람들에게도 복을 주셔서,
그들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하십니다.
우리가 있는 곳,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을 풍성하게 하셔서,
그 안에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우리도 풍성하게 되도록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려고, 우리 가정, 우리 직장,
우리 사업, 우리 교회에 복을 주셔서 복되게 하시고, 풍성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그 안에 있는 내가 그 복을 누리게 하신다는 겁니다.
혹시 아까우세요?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가 하나님께 기도했는데,
나한테만 복주시지 않고 왜 쓸데없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복을 주실까?
뭐 하러 그 사람들도 풍성하게 하셔서 그를 통해 나에게 복을 주실까?
그럴 복이 있으면 몽땅 다 나한테 주시지. 그런 생각이 드십니까?
그러면, 회사는 망해도 나 혼자 복 받으면 행복할까요?
집안 식구들 다 불행한데, 나 혼자 하나님의 복 받으면 즐거울까요?
가뭄이 들어서, 땅이 쩍쩍 갈라지고, 곡식이 다 타버리고,
먹을 것이 없고 마실 물이 없어서 동네 사람이 다 굶주리고 있는데,
우리 집만 수돗물이 콸콸 나오고 창고에 곡식이 차고 넘친다면, 행복할까요?
아니, 그럴 수가 있기나 할까요?
사방이 말라 비틀어져 가는데, 나만 풍성하고 나만 차고 넘치는 게 가능하기나 할까요?
또, 그러면 내가 행복할까요? 남들 굶어 죽어 가는데,
나만 배부르고 나 혼자 쓰고도 쓰고도 남도록 차고 넘치면, 나는 정말 행복할까요?
그래도 내가 하나님을 사랑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복 주시는데,
나한테만 주셔야 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다른 사람은 주지 말고 나한테만 복주시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런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일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그런 사람의 사랑을 기뻐하실까요?
자본주의 사회는, 빈부격차가 갈수록 더 심해지는 것이, 역사의 증명입니다.
자기 성실성의 이유도 있겠지만, 어쨌든 가만 두면, 격차는 벌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열심히 일해서 부자가 되는 게 뭐가 문제겠습니까?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가난한 것을 보고서도, 그걸 그대로 둔 채
내가 부자가 된 것만을 기뻐하고 행복하다고 한다면,
그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기적인 사람으로 사는 걸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렇게 몰인정한 사람이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비록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우리 때문에 그들을 기억하시고 우리 때문에 그들에게도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착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골고루 햇빛을 주시고 비를 내려 주십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사랑하는 우리도 그 햇빛과 그 비를 맞게 될 테니까요.
이건 거꾸로 말하면, 우리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복을 받게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은,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복을 받게 되어서,
아브라함과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우리 이웃을 위해, 우리 직장을 위해,
우리나라를 위해 기도하고 하나님께 간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때문에 우리 이웃에게, 우리 직장에,
우리나라에 복을 주신단 말입니다.
바로 우리 때문에,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예루살렘에 평화가 강물처럼 넘치게 하며,
뭇 나라의 부귀영화가 시냇물처럼 넘쳐서 흘러오게 하겠다.” 사66:12
▶12절b, 그렇게 해서 결국은, 예루살렘이 엄마 품의 아기처럼, 젖을 빨게 됩니다.
“너희는 예루살렘의 젖을 빨며,
그 팔에 안기고, 그 무릎 위에서 귀여움을 받을 것이다.” 사66:12b
지금 예루살렘은 말라비틀어진 나뭇가지처럼,
건드리기만 해도 바스러져 가루가 될 것 같은 모습인데,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하여 예루살렘을 다시 살리시고, 풍성하게 하셔서,
하나님의 백성이 그 품 안에서 만족을 누리며 행복하게 살게 해주시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 때문에 예루살렘이 복을 받아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인해서 행복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유대 백성들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그동안 바벨론에서, 그리고 페르시아에서, 온갖 모욕과 천대를 받으며
닦아놓은 기반을 다 포기하고 폐허가 된 예루살렘에 돌아왔는데,
돌아오기는 했지만 예루살렘의 모습을 보고 하도 기가 막혀서 말도 나오지 않았는데,
하나님께서 유대 백성 때문에 예루살렘에 복을 주고,
그 예루살렘에서 기쁨과 만족을 누리며 살게 해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듣고,
유대 백성들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사실 중요한 건 물질이 아니었습니다.
물질 때문이었다면, 물질적인 풍요 때문이었다면, 여기까지 올 이유가 없었습니다.
페르시아에서 훨씬 풍족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우리가 교회 다니는 것도 물질 때문은 아니지 않습니까?
물질 때문이라면, 가장 세속적으로 사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길일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부자 되게 해줄 테니 나를 믿으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길은 부자 되는 길이 아니라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려고 하는 것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13절, 자식을 위로하는 어머니 같은 위로,
“어머니가 그 자식을 위로하듯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이니,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을 것이다.” 사66:13
유대 백성들이 삶의 기반을 포기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유도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위로였습니다.
하나님의 품 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온 몸으로 느끼고 확인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품 안에서, 세상 누구보다,
세상 무엇보다 사랑하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으며,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요즘 교회도, 우리 기독교인들도, 너무 재물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모든 가치의 기준은 재물을 많이 가지는 것이 되었습니다.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선이고 정의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위로는 말씀이 아니라 구체적인 물질로 표현되는 게 제일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우스개소리로 하는 말이지만, 아내가 남편에게 가장 원하는 건 사랑받는 건데,
사랑을 마음으로만 하지 말고, 구체적으로 표현했으면 좋겠다고 하지요.
그냥 마음으로만 사랑하지 말고, 구체적으로,
예를 들면 반짝반짝 빛나는 걸로 표현했으면 좋겠다고 한다지요?
우리도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때, 그냥 마음으로만 하지 마시고,
구체적으로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재물로 주시면 좋겠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건 그게 아닙니다.
돈이 가장 귀한 것이라고 말하는 세상 사람들도,
돈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거라고,
그래서 있으면 있는 대로 살고, 없으면 또 없는 대로 산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도 그러는데,
하물며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한갓 재물과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우리에게 정말로 절실하고 절박한 건, 하나님의 위로입니다.
주님의 품에 안겨서, 주님이 주시는 위로를 받으며 사는 것,
지금 우리에게 그것보다 더 절실한 건 없습니다.
또 생각해 보면 그보다 행복한 것이 어디 있겠어요?
유대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또 페르시아에서 살면서,
시간이 갈수록 물질적으로는 채워지는데,
도무지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과 절박함이 있었습니다.
다른 어떤 것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과 아쉬움이 갈수록 커져 갔습니다.
재물로도, 쾌락으로도, 어떤 것으로도 가슴에 뚫린 커다란 구멍을 채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거기가 하나님이 주신 땅이고,
거기 하나님이 계시니까, 거기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겠다고,
거기서 하나님의 위로를 받고 싶어서, 다 버리고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안에도, 어쩔 수 없는 외로움과 허전함이 있습니다.
아무리 가진 게 많아도, 아무리 유명해져도,
아무리 높은 자리에 올라가도, 여전히 채워지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이번 월드컵에서 독일은 여전히 강팀 면모를 보여주었습니다.
공격도 공격이지만, 독일의 수비는 그야말로 철벽입니다.
그 가운데 골키퍼의 역할도 대단했습니다.
그런데, 독일의 벤치에는 항상 유니폼 하나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뭔가 했더니, 작년 11월에 죽은 엔케라는 골키퍼의 유니폼이라고 합니다.
엔케는 독일 국가대표 주전 골키퍼였는데,
4년 전에 2살된 딸을 심장병으로 잃고는 그 공허함을 견디지 못해서
작년(2009) 11월 달리는 기차에 몸을 던져 자살을 했답니다.
세계 최고의 팀의 주전 골키퍼라면,
그 명성과 인기와 부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래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 돈으로도, 인기로도 채울 수 없는 것이 있었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우리를 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머니가 그 자식을 위로하듯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이니,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을 것이다.” 사66:13
어머니가 그 자식을 위로하듯이!
물론 세상의 모든 어머니가 다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러나 역시 자식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자식의 아픔을 자기의 아픔으로 느끼는 건 어머니입니다.
세상에서 상처입고 아파하는 자식에게 가장 큰 위로는 어머니의 품일 겁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다 욕하고 외면해도,
마지막까지 자식을 믿어주고 안아주는 것이 어머니입니다.
새들이 그렇게 많이 날아도
구름이 그렇게 멀리 떠가도
그런 것은 다 하늘 안에 있는 것 같이
이 세상에 어머니보다 큰 것은 없지.
사랑도 미움도 그 안에 담기는
자랑도 허물도 그 안에 묻히는
파랗기만 한, 파랗기만 한
저 하늘같은 엄마의 품.
어느 초등학교 선생님이 쓴 시라고 합니다.
그런 어머니의 품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품어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어머니의 사랑보다 더 큰 사랑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사실 예수를 믿는 게 마냥 좋기만 한 건 아닐 수도 있습니다. (현세적 관점에서)
세상에서 즐기며 사는 것보다 불편하고 재미없을 수도 있고,
세상에서 예수 믿는 사람으로 살기가 껄끄럽고 답답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당장 돈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예수 믿지 않을 때는 결코 하지 않았을 양보나 희생을 해야 하기도 하고,
예수를 믿기 때문에 손해나 불이익을 당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 때마다 우리가 그 모든 아프고 속상한 일들을 참아내고 견뎌낼 수 있는 건,
그렇게 우리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것은, 하나님의 위로 때문입니다.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고, 끝까지 우리를 용서하시고,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를 믿어주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힘들 때도, 아플 때도, 외로울 때도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우리를 돌보시고 위로해주시니,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아버지처럼 우리를 사랑하기도 하시지만,
하나님은 어머니처럼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잘잘못을 따지기 전에 먼저, 말없이 우리를 품어주시고, 그 품 안에서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평강으로 인도하시고 풍성하게 하십니다.
우리의 상황을 통해서, 우리의 환경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우리 마음을 어루만져 주시고, 우리에게 새 힘을 주시고, 우리를 사랑해주십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그 사랑으로 우리가 삽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우리가 평안을 누립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기억하시고, 우리에게 복을 주셔서,
우리가 오늘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가진 게 많지 않아도,
세상 부귀영화는 누리지 못해도,
때로는 아프고, 때로는 슬프고, 때로는 많이 외로워도,
언제나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용서하시고, 나를 그 따뜻한 품에 안아주십니다.
그 사랑으로 우리가 삽니다. 우리는 그저 그 사랑에 감사하고 감격할 뿐입니다.
▶마치는 말
하나님은 종종 ‘아버지’로 묘사되지만,
본문처럼 ‘어머니’로 묘사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 품에 돌아오면,
①어머니의 젖과 같은 풍성함을 주시며, (그렇게 하기 위해, 우리 주변을 축복하십니다.)
②어머니의 품과 같은 위로를 주십니다. ▣ 복음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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