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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예정론에 관하여

LNCK 2010. 7. 20. 12:27

◈예정론에 관한 ‘오해’     행13:46~48   10.06.20.설교일부녹취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행13:48b

 

▲예정론

위 구절에서 ‘작정되다’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 ‘타쏘’는

‘지정하다. 지명하다’ 라는 의미다.

하나님께서 영생을 지정하고, 지정한 자는 다 믿더라는 뜻이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께서 개별적으로 하나님을 믿도록 지명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을 믿지 않더라는 뜻이 된다.

 

이런 여러 구절들에서 신학적 개념인 ‘예정론’이 나오게 되었다.

 

▲그런데, 예정론을 잘못 이해하면, 도리어 부작용을 초래하게 된다.

예정론은 성경적 진리임에도 불구하고, 잘못 오해할 소지가 매우 크다.

그 오해의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만약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영생을 얻기로 개별적으로 지명 받고 선택받은

즉, 예정된 사람이라면,

내가 이 세상에서 내 마음대로 산다 한들

영생을 얻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을 것 아닌가? 

 

또한, 내가 아무리 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온 정성을 다해 헌신하고 봉사한다 할지라도,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영생을 받도록 지명(예정) 받지 못한 사람이라면,

나는 결국 영생에서 제외될 것이 아닌가? 

 

이런 예정론 한쪽에만 치우친 생각이 발전되면,

하나님의 말씀을 또 세상에 전해야할 필요성도 없어진다.

(예정된 사람은 다 믿을 터이고, 예정 안 된 사람은 어쨌거나 안 믿을 터인데.. 전도할 필요가 없어진다.)

 

 

예정론과거를 되돌아보는 안경, 미래를 보는 안경은 아니다.

위와 같은 질문들은, 예정론을 미래를 향한 안경으로 잘못 사용한데서 기인한 오해들이다.

예정론은 미래를 향한 안경이 아니라, 과거를 되돌아보기 위한 안경임을 이해한다면,

그와 같은 오해들은 절로 해소되게 된다.

 

   ※예정론을 ‘미래적’으로 적용할 수 없는 이유는,

   그가 미래에, 장차 구원 받을 지, 못 받을 지..

   아무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를 단정적으로 ‘구원 받지 못할 자’로 그의 미래를 단정지을 수 없다.

 

오직 구원 받은 사람만, 자기가 예정에 의해 구원 받은 것을 알 수 있고,

지금 구원 못 받은 사람은, 앞으로 장래에 구원 받을 수도 있으므로,

살아있는 사람은, ‘그가/내가 예정 못 받았다’라고 단정할 수 없다.

 

▲내가 구원 받은 것을 보니, 예정론을 생각하게 된다. 아니고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어거스틴은 구원과 관련해서 예정론을 설명했다.

태어날 때부터 죄 공장에서 본질적인 죄인으로 태어난 인간에게는,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힘이나 능력이 전혀 없다.

 

의인은 없되 하나도 없다는 롬3:10절의 증언처럼,

이 세상에 있는 인간은, 그 누구도

자기 자신을 스스로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

 

만약에 인간이 자력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면,

인간에게는 메시아도 필요 없을 것이요, 하나님의 구원도 불필요할 것이다.

 

 

 

 

그렇다면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인간에게,

구원 얻을 수 있는 길은 한 길밖에 없다.

 

심판자이신 하나님께서, 인간을 심판하시지 않고,

구원의 은총과 자비를 그저 베풀어주시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세상 속에는,

하나님으로부터 그 구원의 은총과 자비를 얻지 못 한 사람들도 분명히 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의 은총을 입은 사람들은,

구원받은 크리스천의 삶을 살아가는 자기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아, 하나님께서 내게 영생을 주시기로 나를 지명(예정)하셨구나!’ 고백하면서,

감사드리게 되는 것이다.

 

▲내가 교회/교인 된 것을 보니.. 그것은 은혜/예정이었다. 아니고는 설명할 길이 없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교회와 관련해서 예정론을 설명했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사람들의 모임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이, 다 저절로 교회에 나오는 것은 아니다.

이 세상에는, 평생토록, 예배당에 단 한 번도 발을 디디지 않는 사람들이 더 많이 있다.

 

그래서 주님의 부르심을 입은 교회/교인으로 살게 된 사람들은,

자기가 크리스천이 된 삶을 되돌아보면서,

하나님께서 나를 지명하여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예정)하셨다고

감사의 찬양을 드리게 되는 것이다.

 

   (어거스틴이) 구원과 관련해서 보나,  

   (칼빈이) 교회와 관련해서 보나,

   우리가 우리 실력으로 구원을 받거나, 교회에 들어오게 될 실력이 없었는데,

   내 과거를 돌이켜보니, 뒤돌아보니

   내가 구원 받았고, 교회의 일원이 되어 있더라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아하, 하나님이 택하여, 예정해서, 불러주셨기 때문이구나!’

   그렇지 않고는, 내 실력으로는, 도저히 안 되는 일이, 내게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본문의 사도바울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도바울은 비시디아 안디옥의 유대인 회당에 들어가서,

그곳에 모여 있는 회중들을 한번 쓱 훑어 본 뒤에,

한 무리의 사람들을 향해서,

‘아, 너희들은 영생을 받기로 작정되지 못한 사람들이구나!’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행13:46

 

또 다른 무리를 향해서는 ‘여러분들은 영생을 받기로 작정된 자들이구나!’

이렇게 단정하지 않았다.

 

유대인 회당에 들어간 사도바울은,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반응에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방해한 유대교 지도자 무리들을 향해서는

결과적으로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되지 못한 자들로’,

 

그 하나님의 말씀을 기뻐하며 찬송한 이방인들은,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로’.. 판정한 것이다. ↓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행13:48

 

위의 말씀 역시, 미래를 향한 안경이 아니라,

현재의 시점에서, 그 이전을 되돌아보는 안경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구원에 관한 한,

인간의 철저한 무능, 무력, 무자격을 인정하면서,

내 실력으로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었는데,

 

하나님의 일반적인 은총을 강조하기 위한 예정론은,

미래를 내다보는 안경이 아니라, 과거를 되돌아보기 위한 안경인 것이다.

 

▲내가 예정 받고, 은혜 받고, 구원 받았다.

그렇다면 이 시간에, 우리 모두, 그 ‘과거를 되돌아보는 안경’을 쓰고,

나의 지난 세월을 한 번 되돌아보자.

 

내가 어떻게 지금, 영생을 얻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교회에 나와서 앉아 있을 수 있게 되었는가?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은 모두 예외 없이, 의례히 그리스도인이 되기 때문인가?

... 그렇지 않다.

이 세상에는, 크리스천보다 넌크리스천이 3배나 더 많다.

 

그렇다면 우리가 교회가 크리스천 아닌 사람들보다,

더 정의로운 사람들이기 때문에,

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 교회에 나와 앉아 있게 되었는가? ... 그것도 아니었다.

 

우리가 얼마나 흉측한 심보를 지닌 인간인지는,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에 대한 증인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어떻게 구원 받고, 지금 이 교회에 나올 수 있게 되었는가?

 

그 이유는 하나뿐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의 모든 허물에도 불구하고,

창세전부터 우리 개개인을 개별적으로 지명하시고, 선택(예정)해 주셨기 때문이다.

 

이사야서 43:1절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가?

야곱아, 이제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자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이처럼 하나님의 일방적인 구원의 은총으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개별적인 지명을 받고 영생을 얻는 크리스천으로

선택되었음을 믿는다면,                                                                             

우리는 더욱 겸손하며, 더욱 그 은혜를 의지하는 삶을 살게 된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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