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사함 받은 증거 눅7:36~50 07.05.16.설교녹취
※지난 호 참된 행복, 하나님 나라의 복 에서, 깊이 회개하고 죄사함 받은 것이 가장 큰 복이라고 했는데,
그 죄사함 받은 증거가 무엇인지.. 연장선상에서 한 번 생각해 봅니다.
◑본문 설명 (이 단락 점프 가능)
예수님이 하루는,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 초대받아 들어가셨다.
동네 사람들은 멀리 문밖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고,
본문의 주인공 여인도, 그 무리들 틈에 섞여,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보니까,
바리새인 시몬이, 예수님을 정식으로 손님 대접을 하지 않는다.
발 씻을 물도 주지 않고, 머리에 바르는 기름(발향제?)도 발라드리지 않았다.
이 장면을 지켜보면서, 이 여인의 마음이 찢어졌던 것 같다.
자기가 너무 사랑하는 예수님이,
바리새인 시몬에게 너무 무시 받으시니까, 예수님이 면전박대를 당하시니까,
이 여인이 견디지 못하고 일어나서
자신이 창녀 출신이라는 것을 알면서, 낯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었다.’ 눅7:38
이 여인이, 민망할 정도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행동을 표현한다.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이것을 예수님이 태연하게 고스란히 받아들이신다.
시끄럽던 식사자리가, 갑자기 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모든 사람들이 여자가 하는 행동을 주목하고 있었다.
▲상반된 2가지 반응
이때 바리새인 시몬은, 상황을 이렇게 생각한다.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이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눅7:39
이 창기가 하는 낯부끄러운 행동을 그대로 다 받아들이는 것을 보니까,
‘이 예수는 선지자가 아니다.’라는 논리다.
오늘날 어떤 남자는, 이발소에서 여성이 가벼운 안마를 한다고 해도
화들짝 놀라서 그 손길을 거부하는데
즉 예수님이 ‘저리가라, 어찌 그 더러운 손을 나에게 갔다대느냐?’ 하며 물리치셔야 되는데,
예수님은 능청맞게도 그 여인이 자기 머리카락으로 예수님 발을 씻기고, 막 만지는 것을
다 받아주고 계셨으니.. 바리새인이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상황을 다르게 보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저가 가로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가라사대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500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50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가라사대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눅7:40~43
◑‘죄 사함’ 받은 증거는 ‘사랑의 표현’
▲죄사함은 교리가 아니라, 현실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죄사함’ 사죄의 은총 이란 개념은 매우 종교적이고 신학적인 이야기인데,
예수님은 본문에서 아주 쉽게 ‘사랑’의 개념으로 설명하신다.
죄사함 받은 사람은.. 본문의 여인처럼, ‘주님을 사랑하는 표현’을 하게 되어 있으며,
만약 나에게 ‘주님을 사랑하는 표현’이 없다면..
교리적으로 이것을 배웠을 런지는 모르나..
죄사함 받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지금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죄사함’에 대한 이해가
반쪽 밖에 안 된다는 말이 된다. 불완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죄사함에 대한 이해를 너무 관념(이론/교리)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죄사함 받음의 문제를
‘내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으면 무조건 죄사함을 받는다’에서 그치고 있다.
이것은 이론에 불과할 수 있다.
그러나 본문에 의거해 볼 때,
죄사함을 받은 사람은.. 반드시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어 있다.
죄사함에는 반드시 죄사함의 현실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감기에 걸려서 기침을 하는데,
감기가 나았으면.. 기침을 더 이상 안 해야 한다.
그런데 감기가 믿음으로써 나았다는데, 내가 계속 기침을 하고 있으면,
머릿속으로는 고침을 받았는지 모르나, 실제로는 고침 받은 것이 아니다.
죄사함을 받았으면,
현실이 뒤따라 주어야 한다.
즉 본문의 마리아처럼, 뜨겁게 예수님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다.
▲극단적인 ‘이론적 죄사함론’
여러분, 우리가 기독교 신학이나, 신앙을
성령의 감화감동으로 이해해야 하는데,
이것을 그저 이론/지식/철학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만인구원론과 같은 ‘극단적 죄사함론’에 빠지게 된다.
만인구원론이란
요한복음에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을 보라’ 등의 말씀에 의거해서
예수님이 세상 모든 죄를 다 짊어지고 가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세상의 모든 죄를 다 해결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거나/안 믿거나 상관없이
그 죄를 예수님이 다 해결했기 때문에,
만인이 다 구원을 받게 되어있다는 논리이다.
따라서 ‘어떻게 선하신 주님이, 사람들을 지옥에 보낼 수 있느냐’며
심지어는 지옥의 멸망도 믿지 않게 된다. (어떻게 보면 말이 된다.)
지금 성경이나 신학이 ‘이론적으로만 치우칠 때’ 나타나는 폐해를
설명하고 있는 중이다.
▲위와 같은 ‘만인구원론’ 같은 이단에 치우치지는 않더라도,
오늘날 정통 기독교인들도 (강도는 약하지만) ‘극단적 죄사함’ 이론에 빠질 수 있다.
본문에서 보듯이, 죄사함은 꼭 사랑의 표현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는데,
주님에 대한 사랑이 전혀 회복되지 않고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도 없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도 없는 가운데서,
내가 예수님을 믿으니, 무조건 내가 죄사함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네스 호의 괴물을 믿느냐?’고 묻는 것은,
네스 호lake에, 공룡 같은 거대한 괴물이 숨어 살고 있어서
가끔씩 갑자기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한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믿는 지를 묻는 것이다.
여러분의 대답은 ‘예’일수도 있고 ‘아니오’일 수도 있다.
여러분은 그 괴물의 존재를 믿거나, 혹은 믿지 않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그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에게 별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이다.
이 경우 ‘믿음’이란 단지 지적인 문제다. 사실fact을 믿는 믿음에 불과하다.
성경적 믿음이 아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아스피린을 믿느냐?’고 묻는다면
여러분이, 고통을 경감시키는 약인 아스피린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당연히 알고 있을 것을 전제하고 묻는 것이다.
그 질문의 진의는 "여러분에게 두통이 발생할 경우, 아스피린을 복용하면
그 약효가 작용한다는 것을 정말 믿는가?"하는 것이다.
이 경우에 있어서 믿음은, 단순히 그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능력을 믿고 의지하는 것을 가리킨다.
바로 이 두 번째 믿음이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어야 할 믿음이다.
이것은 단지 예수가 존재하며,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사실fact을 믿는 차원을 넘어서,
그 분을 믿는 믿음이 ‘내 삶에 역사’을 일으키도록 하는 믿음입니다.
믿음이 ‘그 분과 나의 관계성’가운데서 작용하는 믿음이다.
죄사함을 받았다는데,
예수님에 대한 ‘사랑 표현’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어떤 이론(교리)을 믿은 것이지,
실제로 믿음의 역사가 나타난 것은 아니다.(아닐 가능성이 크다)
▲죄사함에 관한 이단적 가르침
시중에서 ‘극단/이단’이라고 정죄 받는 ‘죄사함의 이론’ 가운데
‘내가 죄사함 받았다는 사실을 무조건 확실히 믿으라’고
‘그 사실을 절대로 의심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당신이 죄를 사함 받았으니까, 의심하지 말고, 평안 안에 머물고,
구원 받은 감격 안에 머물러라..’ 라고 강조한다. 흔들리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이 ‘이론적인 믿음’이다. 옛날에 많이들 이렇게 가르쳤다.
그러나 저/설교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죄사함 받은 기쁨과 감격은, 단순히 죄사함 받았다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죄사함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서 기쁨이 오는 것이지
내가 죄사함 받아서만 좋은 것은 아니라고 본다.
물론 죄사함 받은 기쁨과 감격도 있지만,
주님과의 관계를 일절 무시하고(강조하지 않은 채)
무조건 죄사함 받았다는 사실만 갖고서 기뻐하라는 것은,
‘철학적/이론적/관념적 믿음’이라고 본다. 잘못된 믿음이라는 뜻이다.
죄사함을 받으면, 주님과 관계가 회복, 개선, 가까워진다.
다시 말해서,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게 된다.
그래서 주님과 매일 관계, 친밀함, 교제 속에서 기뻐하는 것이다.
무조건 죄사함 받았다는 이론만 알고서(믿고서), 기뻐하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어쩌면 많은 신자들이 이런 문제에 봉착해있다.
하나님이란 대상을 인격적으로 사랑/관계/교제하지 않는다.
매일 기도하거나, 말씀을 묵상하지 않는다. 헌신하지 않는다.
그리고 대부분 ‘자기문제해결’을 목적으로 교회에 다니고 있다.
그리고 죄사함 받은 것은, 이론적으로만 믿고 있다.
그래서 정말 본문의 여인처럼,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은
교인들 중에 많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교회에서 ‘죄사함을.. 이론/교리적으로만 서론처럼 가르치고,
그 다음에 축복과 성공을 본론으로 강조해서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어쩌면 우리는 교리적으로 예수를 믿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주님과 친밀한 인격적 관계가 매일, 매순간 저절로 형성되지 않고 있다면.. 그렇다.
그래서 오늘 이 비유는 굉장히 중요한
신앙적 포인트를 갖고 있다.
▲죄사함은.. 이론이 아니라, 관계의 회복이다.
죄란.. 하나님과 등진 것이 죄라고 볼 때,
하나님과 등진 그 죄과를 용서 받았다면,
하나님과 관계가 다시 회복되고, 하나님을 친밀하게 사랑하게 되는 것이
죄사함의 증거라는 것이다.
그런데 죄사함을 받았다는데,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하나도 없고, 옛날과 똑같고,
여전히 돈을 좋아하고, 세상을 사랑하면서
죄사함을 받았다고 룰루랄라하고 살아가고 있다면,
이게 정말 내가 죄사함 받은 것인지.. 깊이 생각해 봐야 한다.
그래서 죄사함은
내가 죄를 지은 것에 대해서 영벌 영원한 벌 받을 것이 사해진 것으로 끝나지 않고
죄사함의 핵심은 만남, 교제의 회복에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강아지를 껴안으려고 해도
오래 동안 강아지 목욕 안 시킨 상태에서 껴안을 수가 없다.
먼저 목욕을 시킨다.
개를 목욕시키는 이유는, 개를 껴안거나 가까이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이 나를 껴안으시려다 보니까, 내가 너무 지저분하고 더러우니까
나를 목욕(죄사함)시켜서, 하나님과 만남과 친밀한 교제를 가지려는 것이지..
죄사함은 그저 ‘이론’이나 ‘관념’이 아니다.
▲천국에 가는 문제도..
‘예수 믿고, 내가 천국 간다’ 그래서
우리가 사영리 등으로 쉽게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다.
우리가 천국(천당)가려고 믿는다는 뜻이,
그저 어떤 파라다이스에 간다는 개념이 중요한 개념이 아니다.
아버지와 예수님과 친밀한 교제를 위해서.. 천국에 가는 것이지,
무조건 천당 가기 위해서 믿는 것만은 아니다.
그 친밀한 교제가 없다면, 거기가 천당이라도, 천당이 아닌 것이다.
우리가 믿는다는 것이, 결국은 친밀한 교제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지,
무조건 천당이 좋아서, 우리가 천당 가기 위해서, 믿는 것은 아닌 것이다.
결국 친밀한 교제가 없다면.. 천당에 못 갈 수도 있다고 본다.
▲기독교가 극단에 빠지면,
그가 죄사함 받은 다음에
예수님에 대한 개인적, 인격적 사랑, 친밀함,
이런 것을 강조함 없이,
‘무조건 믿기만 하면 죄사함 받는다.’ 라고 가르친다.
이것은 교리적 죄사함이지, 실제 성경이 말하는 죄사함이 아니다.
죄사함을 믿고, 구속함을 받았으니 ‘할렐루야 나는 기쁘다’ 고백하더라도
주님을 사랑함이 없으면, 주님과 개인적, 인격적 관계가 유지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이비pseudo 죄사함의 기쁨이다.
유교는 공자의 인격을 만나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불교에서도 석가모니란 인격을 만나라고 하지 않는다.
석가의 가르침대로 따라가서, 너도 석가처럼 부처가 되라고 얘기할 뿐이다.(율법적 종교다)
그러나 기독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라고 강조한다.(인격적, 관계의 종교다)
그럼 현실적 문제로,
여러분 매일 집에서 기도/말씀 묵상 하시는가? 매일 헌신하는 직업적 가치관을 갖고 사시는가?
아니면 주일날이라고, 그 날만 특별히 교회에 나가시는가?
‘평소에 주님과의 인격적 만남, 교제가 있으신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예수를 추상적으로, 막연하게 믿어서는 안 된다.
그저 내 소원이나 이루어주시는 샤머니즘 적인 신앙으로 믿어서도 안 된다.
▲덧붙여서, 인격적으로 죄사함을 받으려면, 먼저 자기가 죄인 됨을 철저히 깨달아야 한다.
이것은 주로 성령의 역사,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한 것인데,
이 은혜를 받은 사람의 증거 한 가지는 - 남을 무턱대고 비판하지 않는다.
자신이 과거에 죄인 됨을, 또 현재에도 전적 타락한 죄성이 남아 있음을 깊이 깨닫기 때문이다...
(후략)
※관련글 : 바리새인은 500의 죄를 짓고도 50인줄 알았고,
여인은 500의 죄를 짓고도, 500인줄 알았다는 내용의 설교문 → 많이 사함 받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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