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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교회, 큰 목회 2554

LNCK 2010. 7. 16. 17:32

◈작은 교회, 큰 목회                신4:5-8              07.06.24. 설교스크랩



◑1. 정말 좋은 것은 규모size에 있지 않다.


사람들은 모두 큰 인물이 되기를 좋아하고, 자신의 사업이 커지기를 바랍니다.

작은 집보다는 큰 집을 좋아하고, 작은 가게보다는 대형 마트를 좋아합니다.


작은 것은 모두 나쁜 것이고, 무엇이든 큰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크다고 해서 무조건 좋은 것도 아니고, 작다고 해서 모두 나쁜 것이 아닙니다.


이런 흐름에 있어서 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할 수 있는 대로 큰 교회를 찾습니다.

교회의 규모가 크면, 거기에 뭔가 다른 것이 있을 것이며,

뭔가 좋은 것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바르고 참되게 살아감으로 성장하는 교회가 있습니다만,

교회가 외형적으로 커지는 데는 그 밖의 여러 요인들이 작용할 수 있습니다.


반면, 외적인 규모가 작더라도 그 안에 성령의 역사가 있고,

성도 간에 참된 교제가 있으며, 교회로서 마땅히 할 일을 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외형적으로 크다 혹은 작다가 우리의 가치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목사이기 때문에 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미 식자층에 널리 읽혀온 바 있는 경제학자 슈마허 Ernst F. Schumacher가

그의 책 <작은 것이 아름답다 Small Is Beautiful>에서 설득력 있게 밝힌 바 있는 진리입니다.


그는, 서구 경제와 정치를 지배해 온 ‘거대주의 gigantism’의 우상숭배를 버려야만

인류가 재앙을 피할 수 있다고 경고하면서,

때로는 작은 것의 미덕을 고집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한 바 있습니다.

정말 좋은 것은 규모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경제학자가 증언한 셈입니다.



◑2. 모세가 소원한 ‘큰 나라’


오늘 읽은 신명기의 말씀은 ‘큰 나라’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진정으로 ‘큰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를 깨우쳐 줍니다.

(표준새번역 성경에서는 ‘위대한 나라’라고 번역했습니다.)


지금 모세는, 40년의 고단한 출애굽의 여정을 마치고

가나안 땅에로의 입성을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모세는 이미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계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수많은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출애굽의 여정을 이끈 모세는

요단 강 건너편에 보이는 가나안 땅을 밟지 못하고 죽어야 했습니다.

그는 이제 이스라엘의 미래를 내다보면서 백성들에게 유언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 유언에서 모세는 거듭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큰 나라가 되라”고 당부합니다.


그런데 어떤 나라가 큰 나라입니까?

‘큰 나라’라는 말을 들을 때, 미국 혹은 중국 같은 거대한 영토를 가진 나라

혹은 막강한 국력을 자랑하는 나라를 생각하게 되지 않습니까?


이 세상의 대부분의 권력자들은 그런 큰 나라를 꿈꿉니다.

나폴레옹도 그런 꿈을 꾸었고, 히로히토 일본 천황도 그런 나라를 꿈꾸었으며,

히틀러도 그런 큰 나라를 꿈꾸었습니다.

그렇다면 모세가 말한 ‘큰 나라’가 그런 나라를 말합니까?


6절 이하에서 모세가 하는 말을 잘 귀담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는 지켜 행하라. 이것이 여러 민족 앞에서 너희의 지혜와 너희의 지식이라.

그들이 이 모든 규례를 듣고 이르기를,

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로다 하리라.          *great nation : '위대한 나라'라는 뜻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 그 신이 가까이 함을 얻은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

오늘 내가 너희에게 선포하는 이 율법과 같이

그 규례와 법도가 공의로운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  신4:6~8


이 본문에서 ‘큰 나라’라는 말이 세 번 나옵니다.

그런데 모세가 생각하는 큰 나라는 거대한 영토를 소유하고,

수많은 백성을 지배하며, 막강한 군사력과 경제적인 부를 소유한 나라가 아닙니다.


모세가 볼 때, 정말 큰 나라는

영토나 군사력이나 경제력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한 나라의 크고 작음은 그 나라 백성들의 삶의 질에 의해 결정된다고 믿었습니다.


그 나라가 운영되는 방법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았습니다.

그 나라의 사상과 종교성에 의해 결정된다고 믿었습니다.

한 나라의 사상과 도덕과 종교와 문화의 힘이야말로

그 나라를 진정으로 ‘크게’ 하는 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이 그런 큰 나라가 되기를 기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여 이집트의 압제로부터 해방시키시고

약속의 땅을 주시며 율법을 내리신 이유는,

정신적으로 큰 나라, 도덕성에서 큰 나라, 영적으로 큰 나라가 되어,

다른 민족들에게 감화와 영향을 주게 되기를 바랬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여 모든 민족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고,

그렇게 하여 모든 나라들을 큰 나라로 만들려는 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불행히도,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정착하면서 이 유언을 망각했습니다.

사사 시대를 거쳐 사울과 바울과 솔로몬 왕으로 이어지는 동안,

이스라엘은 지중해 연안 국가들과 겨루어 패권을 잡기에 몰두했습니다.


아직도 유대인들은 다윗 시대의 영화를 그리워합니다.

그 시대처럼 거대한 영토, 막강한 군사력, 엄청난 경제력을 소유하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지금까지 중동 지방을 화약고로 만들고 있는 주요 원인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모세의 유언을 까맣게 잊은 것입니다.


진정으로 큰 나라, 참으로 왕 같은 제사장(royal priest)의 나라가 되는 길은

물리적으로 혹은 외형적으로 커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지키고 그대로 순종함으로써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문화적으로 순결한 나라가 되는 데 있음을 망각한 것입니다.



◑3. 큰 나라의 큰 사람 오기병 장로


1958년 4월 25일, 금요일 밤 9시 경, (52년 전, 아주 오래전 얘기입니다.)

펜실베니아 대학교에서 유학 생활을 하고 있던 오인호 씨가

부모님에게 편지를 부치기 위해 집 앞에 있는 우체통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근처에서 어슬렁대던 흑인 불량배들이 그를 덥쳐

불랙잭과 깨진 콜라병으로 참혹한 폭행을 가하고,

그의 호주머니에 있던 35센트를 털어 도망쳤습니다.


주민의 신고를 받고 달려 온 경찰은 오인호 씨를 병원으로 데려갔으나, 이미 늦었습니다.

26세의 나이로, 꿈을 채 정리도 하지 못하고, 아까운 죽음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얼마 후, 이 범행에 가담했던 11명의 흑인 청소년들이 붙잡혔고,

이 사건은 펜실베니아뿐 아니라 미국 전역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여론은, 비록 그들이 청소년들이지만, 극형에 처해야 한다는 방향으로 몰려가고 있었습니다.

결국 재판정에서 범인 11명 중 3명이 살인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게 되었고,

시민들의 애도 속에서 오인호 씨의 장례식이 집전되었습니다.

필라델피아의 시장도 장례식에 참여하여 애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얼마 후, 필라델피아의 시장에게 한국으로부터 편지 한 통이 날아왔습니다.

오인호 씨의 부친인 오기병 장로께서 보낸 편지였습니다.

그 편지에는 미화 500달러가 동봉되어 있었습니다.

그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슬픔을 승화시켜 기독교적 소망을 주신 것에 감사합니다. ……

인호의 사망 소식을 들었을 때 믿을 수가 없었고, 큰 충격과 비탄에 빠졌습니다.

하지만 살인자들의 구원받지 못한 영혼과 인간성 마비에 대해서도 슬프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어떻게든 살인자들의 영혼을 구원하고,

이들에게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는 도구가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 가족은 가족회의를 열어 법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가장 관대한 판결이 내려지도록 청원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범죄 행위가 희생자 본인과 그의 가족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몰랐을 것입니다.


오기병 장로께서는 같은 편지에서 500달러를 동봉한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습니다.


교육적 빈곤이 살해의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가족은 이들이 석방된 뒤에 직업 교육 및 사회 적응의 목적으로

쓰일 수 있도록 기금을 적립하기로 했습니다. ....


이것은 죽임을 당한 이와 죽인 자들에게 생명을 주는 일이며

우리를 기독교적 사랑과 친교 안에 연결되게 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


우리는 다만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성령으로

우리의 소망을 밝혔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미국 국민들과

특히 우리의 피붙이인 아들을 죽게 한 이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어떠십니까, 여러분. “진짜다!” 싶지 않으십니까?

참된 믿음의 힘을 느낄 수 있지 않으십니까?


필라델피아 시장을 통해 공개된 이 편지는

또 한 번 미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습니다.

신문마다 이 이야기를 대서특필했고,

그로부터 4년 후, 미국 장로교회에서는 이 이야기를 <한국인으로부터 온 서신서

An Epistle from the Koreans>라는 제목의 영화로 만들어 보급하기도 했습니다.

흑백으로 만들어진 약 20분 정도의 이 단편영화는, 인터넷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4. 한국이 ‘큰 나라’에서 ‘작은 나라’로 바뀐 이유


이 이야기를 읽는 제게는, 가난한 나라 한국의 오기병 장로님이

부강한 나라 미국의 그 어떤 사람보다 더 커보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이야기만 두고 보면,

당시 한국이 미국보다 더 큰 나라처럼 느껴졌습니다.


아들을 참혹하게 살해한 범인들을 용서할 수 있는 그 믿음,

그리고 범인들의 교화를 위해 써 달라며 내 놓은 장학금은

참된 신앙 인격의 힘을 느끼게 해 줍니다.


1958년 당시, 한국에서 성인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많아 보아야 35센트였음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기병 장로께서 필라델피아 시장에게 보낸 돈 500달러는,

그분이 사업을 하는 분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엄청나게 큰 돈이었습니다.


국민 대다수가 미국의 구호물자에 의지해 살던 시기였기 때문에

그분의 행동이 더 특별해 보입니다.


오기병 장로의 아드님(오덕호 목사)의 증언에 의하면,

장로님은 하루에 세 번 예배(새벽기도, 가정예배, 직장예배)를 드리지 않고는

하루 일과를 시작하지 않을 정도로, 늘 하나님과 동행하는 분이었으며,

이 위대한 행동은 어쩌다가 발생한 사건이 아니라,

그분의 삶의 태도로 보아서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고 합니다.


평소에 아버님께서 사셨던 방법과 말씀을 생각해 보면,

그런 행동을 하고도 남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그분의 삶 속에 고루 배어들었다는 증언입니다.


이 이야기와, 저는 ‘버지니아 공대에서 일어난 사건’과 비교해 보았습니다.

(한국계 청년이 대학생들을 총기로 무차별 살해한 사건)

그랬더니, 제 마음에 이런 질문이 들더군요.

“오기병 장로 같은 큰 사람을 길러냈던 한국 그리고 한국 교회가

어쩌다가 이렇게 작아졌을까?”


지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로 취급받던 1958년에 비하면,

이제 경제력으로 따져 세계 10위권에 있다고 하는 우리 조국과 우리 민족이,

어떻게 세계적인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을까?


뉴스를 보니, 우리 국민들이 이제 가난한 나라로 여행 다니며

돈의 힘으로 더러운 폐를 끼치는 민족이 되었다고 합니다.


미국 다음으로 세계에서 가장 많은 선교사를 보낸다는 한국 교회 그리고 한국 기독교인들이

오기병 장로같은 숭고한 이웃 사랑을 드러내는 일은 아주 희귀한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거대하게 성장했다는 평을 듣는 한국 교회가

사회적 영향력에 있어서는 갈수록 더 작아지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 하나는 바로 경제학자 슈마허가 지적한 바,

‘거대주의라는 우상 숭배’ 때문이요, 물질주의 때문입니다.


교회마저도, 기독교인들마저도,

외형적으로 큰 것, 물질적으로 큰 것에 마음을 팔려 버렸기 때문에,

신앙의 핵심이랄 수 있는 것, 즉 하나님과의 사귐을 통해

전인격적으로 변화하는 것에 대해서는 마음을 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회가 섬기는 우상을, 교회도, 기독교인들도 섬기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실로 추구해야 할 ‘큰 것’이 무엇인지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진실로 크게 만드는 것, 진실로 위대하게 만드는 것은

물량적인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으로 빚어지는 거룩한 속사람, 우리의 신앙 인격이요,

그것이 만들어내는 거룩한 삶입니다.


그것을 잊고 살아왔기 때문에 이런 안타까운 일이 벌어졌다 할 수 있습니다.



◑5. ‘작은 교회, 큰 목회’의 비전


저는 저 자신을 위해 혹은 우리 교회를 두고 기도하면서,

진실로 ‘큰 교회’, 진실로 ‘큰 신자’, 진실로 ‘큰 목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외형적인 규모에 있어서 큰 교회가 되자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으로 거룩해져, 신앙의 거룩한 능력을 발산하여,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며 살아가는 그런 교회, 그런 목사,

그런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 교회가 지향하고 있는 영성 목회(contemplative ministry)는

바로 그것을 이루자는 것입니다.

성도들 모두가 영적 생활에 전념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으로 변화되어,

인격과 성품과 삶이 변화하는 일에 최우선의 관심을 두고 살아가자는 것입니다.


교회 전체가 꿈 꾸고 사역을 하는 데 있어서

인간의 야망을 가지고 최대, 최고를 지향하지 말고,

하나님의 참된 꿈을 향해 힘쓰자는 것입니다.


저는 “작은 교회, 큰 목회”라는 캐치프레이즈catch-phrase를 내걸었습니다.

‘작은 교회’라는 말은 거대주의, 물량주의의 우상 숭배를 거부하자는 뜻입니다.

‘큰 교회’를 꿈 꾸되, 외적인 규모에서 큰 교회가 아니라,

세상에 미치는 거룩한 영향력에서 큰 교회가 되기를 꿈꾸자는 뜻입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작은 교회’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성도의 수가 많아질수록 더욱 더 작아지는 노력을 하자는 뜻입니다.


수적으로 커지더라도 작은 교회로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속회 활동이 가장 중요한 방법입니다. 속회는 작은 교회랄 수 있습니다.

속회 활동을 통해 작은 교회들이 역동적으로 살아 있으면,

교인 수가 아무리 많아져도 교회의 본질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일은 우리 교회가 교회로서의 자격을 유지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이민 교회에서 목회하다 보니,

여행 왔다가 우리 교회에서 예배드리고 가는 한국 교회 교인들을 자주 만납니다.

그분들을 만나면서 뚜렷이 확인하는 점이 있습니다.


서울에 있는 유명한, 초대형 교회 교인들은,

많은 경우, 마치 자기도 그렇게 큰 사람인양 행세합니다.

그런 교회의 직분을 가진 사람들은 더 그렇습니다.

꼭, 백화점 주인이 동네 구멍가게를 둘러보는 듯한 태도로 둘러보고 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경험을 하면서, 교인 수가 늘어날수록

더욱 작아지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다짐을 하곤 합니다.


‘큰 목회’라는 말은

오늘 우리가 들은 모세의 유언을

우리의 교회와 성도들의 삶 속에서 나타나도록 하는 목회를 말합니다.


작은 목회는 교회가 자신의 확장과 필요만을 위해 행하는 목회입니다.

작은 신앙은 모든 신앙생활의 목적이 자신의 물질적인 축복에 집중된 신앙입니다.

그렇게 하는 한, 아무리 프로그램이 많고 아무리 많은 사람이 모여도,

그 목회는 ‘작은 목회’입니다.


그렇게 하는 한, 아무리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아무리 많은 돈을 헌금으로 바쳐도, 그 사람은 ‘작은 신앙인’입니다.


‘큰 목회’란, 교회가 바깥 사회를 마음에 품고,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사회의 질병과 아픔과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섬기는 목회입니다.


‘큰 신앙’이란 오기병 장로님처럼

나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을 먼저 생각하는 신앙입니다.


저는 그동안 릭 워렌(Rick Warren) 목사님을 반신반의하면서 지켜보았습니다.

릭 워렌 목사님은 캘리포니아에 있는 새들백 교회를 초대형 교회로 일구고,

<목적이 이끄는 삶>(Purpose-Driven Life)이라는 베스트셀러의 저자입니다.


그분의 목회적인 능력, 교회의 외형을 확장시키는 능력,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능력에 있어서는 탁월하지만,

과연 그분이 정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분인지,

얼마 전까지 넉넉히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점점 그분의 믿음이 진짜에 가깝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대개, 교회를 초대형 교회로 키우고 나면

그 다음에는 목표가 없어져서 타락하기 쉽습니다.

인간적인 야심으로 교회를 키워온 목회자는 더욱 그러기 쉽습니다.


하지만 릭 워렌 목사님은 지금 ‘큰 목회’를 위해 아프리카의 오지를 돌아다니며

질병과 가난과 재해로부터 인류를 구출하는 일에 헌신하고 있습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책의 인세 수입이 많아지자,

십일조가 아니라 십의 구조를 바치고, 십분의 일로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제 교계 안에서만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이 아니라,

종교와 인종의 경계를 넘어, 믿음의 선한 영향력을 세상에 끼치고 있습니다.

그분이 섬기는 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에는

한 번도 그가 큰 목사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는데, 요즈음에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릭 워렌 목사님이 그같이 큰 목회를 위해 눈을 뜨자,

새들백 교회의 목회 방향도 달라졌습니다.


모세가 오늘의 말씀에서 말한 것 같은 현상,

즉 믿지 않는 사람들이 그 교회가 행하는 일을 보고,

“아, 이 교회야말로 큰 교회다!”라고 인정하게 되는 그런 일이

새들백 교회에 일어날 것만 같은 좋은 기대감이 제 마음에 있습니다.


우리가 마땅히 꿈 꿀 일은 이런 큰 목회입니다.

이런 목회는 교회의 규모가 커야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담임목사가 외국을 돌아다니며 구호 활동을 해야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목회이 초점이 어디에 가 있느냐에 있습니다.

교회에서 행하는 모든 일들의 초점이 어디에 있느냐에 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영성의 회복을 위해 일하며,


또한 그렇게 회복되어가는 사람들이 하나가 되어

세상의 아픔과 상처를 싸안고 씨름하며 헌신하려는 방향과 중심만 분명하다면,

5명으로 개척을 시작하고 있다 해도, 그 교회는 ‘큰 목회’를 하고 있는 것이며,

그 교인들은 큰 교인들이고, 그 목사는 ‘큰 목사’인 것입니다.


▶마치는 말

우리도 그런 꿈을 꾸십시다.

모세가, 당신의 백성들이 장차 다른 민족들로부터 “아, 진실로 큰 민족이로다”

라고 인정받게 되기를 바랬던 것처럼,

우리 교회도 그렇게 되기를 꿈꾸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 그 꿈을 좌절시키고 말았음을 기억하고,

경각심을 가지고 더욱 하나님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는 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능하게 하셔서,

‘작은 교회, 큰 목회’를 위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 거룩한 꿈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이 거룩한 꿈으로 인해

우리 교회 성도들이 모두 삶의 이유를 새롭게 발견하게 되기를 빕니다.

이 꿈 안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을 발견하고 헌신할 수 있기를 빕니다.

주님께서 이 일을 이루어주실 줄 믿습니다. 아멘.


이스라엘을 사랑하셨듯, 교회를 사랑하시는 주님,

이스라엘에게 희망을 두셨듯, 교회에게 희망을 두고 계시는 주님,

그러나 교회가 행하고 있는 모습으로 인해 실망하고 계실 주님,

이 시간, 모세의 유언을 저희에게 주시는 말씀을 받습니다.


주님, 주님의 말씀과 계명을 배우고 지키게 하소서.

더욱, 말씀으로 거룩해지는 일에 힘쓰게 하소서.

그 일을 위해

저희로 하여금 더욱 작아지게 하시고

저희의 믿음과 목회는 커지게 하소서.

세상의 아픔을 품어 않고 살아가는 성도와 교회가 되도록

저희를 깨우시고 흔드시고 이끄소서... 아멘.                                                                         ▣ 교회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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