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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07

거짓 선지자

LNCK 2010. 10. 13. 19:49

 

◈거짓 선지자      마7 :15           07.11.22.설교녹취                            

 

본문에 나타난 ‘거짓선지자’의 특징은 다음 2가지다.

 

◑1.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가 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마7 :15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고 했다.

이리가 노략질을 왜 하는가?

장식품으로 걸어놓으려고 노략질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배고프기 때문에, 자기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노략질을 한다.

 

‘속에는 노략질 하는 이리’는 기가 막힌 표현이라고 본다.

이 한 마디로, 너무 중요한 얘기를, 충분히 깊게 설명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여러분, 거짓선지자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다.

누가 굶주린 채로 누구에게 접근한다는 것은.. 다 거짓성을 띄고 있을 수 있다.

 

친구가 친구에게 선한 목적(또는 아무 목적 없이)으로 접근해야

서로 친구관계가 올바로 유지되는 것이지,

뭔가 자기 이기적 목적을 갖고서 친구관계를 유지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속에는 노략질 하는 이리’가 있는데,

‘친구’의 탈을 쓰고 접근하는 것이 된다.

 

 

뭔가 굶주린 채로 엄마가 아이에게 접근하면 ‘거짓 엄마’가 될 수 있다.

굶주린 그 자체는 죄가 아닐지 모르나, (사람이 그럴 수도 있지)

그러나 그 자기 굶주림을 채우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이용하는 것은,

그것은 죄가 된다. 노략질하는 이리가 되고, 거짓 선지자가 된다.

 

엄마는 자기 명예에 굶주릴 수 있고, 가문의 영광에 굶주릴 수도 있다.

또 ‘아이를 잘 키운 신사임당 같은 엄마’라는 평가를 세간에 듣고 싶을 수도 있다.

어쨌든 자기의 어떤 굶주림을 갖고서, 아이를 키운다면,

본의 아니게 ‘거짓 엄마’가 될 수도 있다.

 

참된 복음을 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뭔가를 자꾸 주려고 한다.

뭘 얻어내거나, 빼앗으려고 하지 않는다.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면서,

자기 속에서 넘쳐나는 어떤 것들을, 자기 주변 사람에게 자꾸 주게 된다.

이 세상에서 자기의 야망을 불태우려 하지 않는다.

자기 야망은 없고, 만약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야망(소원)’이다.

 

이렇게 예수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하는 사람,

예수님 한 분으로 충분한 사람,

예수님을 모시고 날마다 은혜와 기쁨이 충만한 사람은,

자기 스스로 만족한 삶을 살기 때문에,

남에게 뭘 요구하지 않는다. 남에게 뭘 (괜히) 기대하지 않는다.

 

자기 기대는 오직 하나님께만 한다.

자기의 필요도 있지만,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늘 자족하며 살며,

혹시 자기 필요가 있을 때에도, 괜히 주위사람에게 치근덕거리지 않는다.

 

이렇게 하나님으로, 예수님으로만 만족하는 사람만이

‘거짓선지자’를 면할 수 있다.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가 아니라,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다.

 

우리 모두 날마다 예수로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한다.

아니면, 끊임없이 주위 사람들을 노략하는 ‘이리’가 된다.

그래서 세상은, 예수가 없으면,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장소가 되는 것이다.

끊임없이 상대방을 괴롭히고 빼앗아야, 내가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부자지간, 형제지간도 마찬가지다.

예수가 없으면, 다 서로가 서로에게 이리가 되기 십상이다.

(늘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본성 속에 그것이 잠재되어 있다가

때가 되고, 기회가 되면 ‘이리’가 불쑥불쑥 튀어나온다는 것이다.)

 

 

엄마가 말로는 ‘내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지만

자기가 (명예심에, 세상 자랑에) 허기가 져 있기 때문에,

자식에게 이래라 저래라 이야기/잔소리하는 것이다.

 

정말 자식을 사랑하는 엄마는,

자식이 어느 대학에 꼭 들어가야 된다고 닦달하지 않는다.

자기 야망을 자식을 통해 성취/대리만족하려고 하지 않는다.

 

왜 꼭 그 대학에만 들어가라고 닦달하는가?

말은 너의 장래를 위해서라고 하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자기의 체면과 만족감과 얼굴을 위해서인 경우가 많다.

 

 

선지자, 목회자도 마찬가지다.

자기 속이 허한 상태로 목회를 하면,

그러면 교인들을 위한다면서, 온갖 좋은 말을 다 하지만,

그러나 한꺼풀 벗겨서 그 말의 근본 동기는, 노략하는 이리가 될 수도 있다.

 

속이 예수로 가득 찬 선지자는, 

누구에게 접근을 해도, 뭘 자꾸 주려고 한다.

기도를 주려고 하고, 사랑을 주려고 하고, 염려를 대신 해 준다.

자기 속에 예수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내 마음이 완전히 기쁘고 행복한 상태가 되지 않는 한,

내가 누구를 만나든, 그 상대방에게 뭘 원하게 되고,

그 사람을 위한다고 말은 하지만, 그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이 자기에게 뭘 채워주기를 늘 바라게 된다. 굶주려 있기 때문이다.

 

    나는 뭘 남에게 늘 채워주려고 안달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나는, 늘 남들이 나에게 뭘 주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사람인가?

    그것이 ‘예수로 채워진 사람과/ 예수로 채워지지 못한 사람’의 차이다.

 

그래서 과거에 한 때, 그런 적이 있었다.

사람들이 길에서 목회자를 만나면 부담스러운 것이다.

목회자가 불쑥 심방을 오면, 더더욱 부담스러운 것이다.

 

뭔가 바라는 것 같고, 뭔가 도와줘야 될 것 같고,

하다못해 밥이라도 한 끼 사줘야 마음이 편안할 것 같았다. (오래전 얘기)

일부 목회자의 눈빛에

‘뭔가 바라는’ 그 소원이 너무 강렬하니까,

성도들이 자꾸 목회자를 회피하고, 꺼려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목사님은 ‘전도하라, 전도가 생명’이라고 강조하지만,

어떤 못된 성도는 ‘누구 야망을 채워주려고, 제가 전도해야 됩니까?’

라고 반문하기도 했었다.

 

물론 이런 말을 하는 그 성도님이 좀 못된 사람이지만...

정말 전도마저도, 교회 봉사마저도,

목회자가

자기가 채워지지 않으니까..

 

영혼이 구원받아야 되고, 뭐 다른 고상한 말을 다 하더라도,

교인수가 늘어야 한다는 목회자의 배고픔,

교인수가 적어서 만족을 못하는 그 목회자의 허기짐,

 

만약에 이런 것들이 표출되어서, 전도를 강조한다면,

그것도 겉은 아무리 미사여구로 꾸미고, 하나님의 뜻을 운운하더라도

어쩌면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가 될 수 있다. (전도, 봉사하지 말자는 뜻은 결코 아님) 

물론 최종 판단은 하나님만 하시겠지만...

 

    그런데 현장에서는, 교인들을 닦달하지 않으면, 목회가 안 된다고 한다.

     그런 식으로 하면, 교회가 부흥은커녕, 사양길로 접어든다는 것이죠.

     현실이다.

     그러면 교인들을 닦달해서 교회가 북적거리면,

     그것은 목회가 본질적으로 성공한 것입니까?

     사양길로 접어드는 가운데서, 묘한 부흥의 역사,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이..

     답이 아닐까? 

 

 

그러므로 목회자도 괜한 웃음이 늘 나와야 한다.

성도 숫자가 아주 적고, 교회 재정이 미약하더라도,

자기 속에서 주님이 주시는 그 샘솟는 기쁨으로 인하여

늘 히죽히죽 웃고 다녀야 한다.

뭐가 부족해서 늘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찾아다니지 말고..,

 

한참 교회성장을 강조하던 1980~90년대 그 즈음에,

교회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하고, 온갖 이벤트를 다 했는데,

그게 다 목회자가 자기 내면이 채워지지 않아서, 속이 허기져서,

괜히 교인들을 동원하여 교회가 북적거리는 것을 보면,

자기 속이 그제야 만족이 되던 때도.. 한때 있었다고 본다.

 

그렇게 비본질적인 것으로 교인들을 쥐어짜면.. 다 등 돌리게 된다.

교인이 신앙생활 하면서, 주님을 위해 살면 살수록, 삶이 더 풍성해져야 하는데

교인이 교회 조직을 위해서 살고(희생양 되고),

목회자의 허한 마음을 채워주기 위해서 여러 가지 교회 봉사를 하며 살다 보니까

교회봉사를 하면 할수록.. 지쳐버리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다 그럴 수 있다. ‘속에는 노략하는 이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제는 교인들이 그런 목회자의 요구를 잘 따라주지 않는 단계에 이르렀지만...

 

저 자신도 가끔 오락가락 할 때가 있다.

그래서 우리가 서로를 위한 중보기도가 필요하다.

 

내가 말씀으로, 성령으로, 하나님으로 충만해진 상태에서

누구에게 접근해야, 그 사람과 참된 관계를 맺게 된다.

 

그러기 전까지는, 내가 어쩌면 노략질하는 이리가 되어

나도 모르게 상대를 괴롭힐 수도 있다는 것이다.

 

(누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고, 나도 그럴 수 있고,

우리 모두가 말씀에 근거해서,

이런 경각심을 갖고 살자는 뜻입니다.

특별히 어떤 배고픔이 생길 때는, 사람을 만나서는 안 될 것입니다.)

 

 

◑2. 양의 옷을 입고 나아옴

 

 

거짓 선지자는 양의 옷을 입고 나아온다’고 했다...    마7 :15

 

주님은 무엇을 보시고, 이리가 양의 옷을 입고 끼어들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일까?

(이리가 ‘양의 옷을 입었다’는 말은,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는 자기의 참 모습을 가리기 위하는 목적 때문이겠지만,

그 의미를 약간 상징적으로 이렇게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거짓선지자가 특별히 양의 옷을 입는 것은,

양들과 섞여서 구분이 가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차별이 생기지 않도록 변장을 하는 것이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목자는, 양에게, 신앙적 가치관,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가르쳐 주어야 하는데..

 

여러분이 살면서 생활 속에서 가지는 여러 가지 소원이 (사실은 욕망이)

어느 거짓선지자 앞에 가면,

그들은 그 욕망을 고스란히 다 인정해 준다. 오히려 더 강화시켜 준다.

 

사업의 번창을 원하면.. 무조건 사업의 번창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해 주고,

자녀가 출세하기 원하면.. 무조건 자녀가 출세하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말한다.

 

거짓선지자가 양의 탈을 쓰고 있으므로,

양과 전혀 구분이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생각, 그 가치관, 그 말, 그 욕망이.. 양과(세상 사람과) 하등 다를 게 없다.

 

여러분, 제가 만약에

여러분 좋아하는 것을 저도 좋아하고,

여러분 싫어하는 것을 저도 싫어하고,

만약 그렇다면,

설교를 준비할 때, 제가 좋아하는 것들을 그대로 설교하면 된다.

그러면 여러분도 다 맞장구치고 좋아할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렇게 설교하셨는가?

아니다. 성경과 예수님은 세상과 ‘구별’됨을 엄격하게 가르치셨다.

성경에 거짓선지자의 특징이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다.  

레10 :10, 겔22 :26, 42 :20, 44 :23 등

 

그러니까 여러분이 갖고 있는 (세상적) 판단기준과 가치관을

제가 그대로 인정해버리고

여러분이 돈이 안 벌려서 울상을 지으면,

그 분을 앉혀놓고, 돈 잘 벌게 해 달라고 힘껏 땀나도록 기도해 드린다면,

이것이 목자(거짓선지자)가 양과 아무런 구분이 가지 않는 것이다.

 

본문이 말하는, 양의 탈을 쓴 거짓선지자를.. 저는 이렇게 생각해 보았다.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는 것이라면,

예전에 믿기 전에 갖고 있는 현세적 모든 소원/욕망이

참 선지자를 만나면 그 소원이 (성경적 가치관으로) 바꿔져야 하는데,

 

과거에 그가 세상에서 갖고 있었던 소원을 그대로 인정해주고

그것이 지고한 가치로 그대로 인정해주는 것..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

여러분, 이것은 아주 무서운 것이다. 바로 거짓선지자이다.

 

여러분들이 여기 오시는 이유는, 세상 사람들과 함께 살아갈 때,

여러분 마음속에 생긴 그 소원이나 그러한 바램,

그 가치 기준을 강화시키려고 온 게 아니다.

자기 욕망을 더 쉽게 채우는 길을 찾아서 나온 것이 아니다.

 

교회에 오시면, 내 욕망, 세상적 소원이.. 다 성경적 기준으로 바뀌어져야 한다.

 

그런데 목회자가, 세상과 사물을 보는 시각이

기업 회장이 세상을 보는 시각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면,

이거 의심해 봐야 한다.

 

거짓선지자가 어떤 특정한 사람으로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지는 말자.

한 사람의 삶 속에서도 어떤 때는 거짓되고, 어떤 때는 참되고

그러는 양면성을 가진 것이 사람이다.

 

베드로도 신앙고백을 잘 해서, 예수님께 칭찬받았지만,

바로 그 즉시로 십자가를 방해하는 말을 하다가,

예수님께 ‘사탄’이라는 말을 듣게 된다.

 

그런 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특정한 거짓 선지자가 있다고, 이 설교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어떤 때는 거짓선지자도 될 수 있고, 참선지자도 될 수 있다는

그런 관점에서 접근해 주시기 바란다.

 

 

‘선지자’라고 한다면,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는 사람이다.

하늘에서부터 보냄을 받아서, 하늘적 가치관을 갖고 오는 사람이다.

그런데 세상 가치관과 똑같은 것을 말한다면,

세상 사람이나 양떼와 그 바램과 소원이 별로 다르지 않다면,

그게 바로 양의 가죽을 쓴 거짓선지자가 아닌가?...

저는 이렇게도 생각해 보는 것이다.

 

 

◑3. 하나님은 악한 목자에게서, 양떼를 빼앗아 선한 목자에게 주신다.

                                                                                 

에스겔서 34장은, 전체가 ‘자기만 먹이는 악한 목자’

또한 ‘양떼를 착취하는 못된 목자’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내 양 떼가 노략 거리가 되고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된 것은 목자가 없기 때문이라

   내 목자들이 내 양을 찾지 아니하고 자기만 먹이고

   내 양 떼를 먹이지 아니하였도다.  겔34 :8

 

결론은, 34장 끝부분에 나오는데,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의 양떼를, 악한 목자에게서 빼앗아

‘다윗과 같은 선한 목자’에게로 이끄신다는 것이다. 

 

   내가 한 목자를 그들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지라.  겔34:23

 

   또 그의 종 다윗을 택하시되 양의 우리에서 취하시며

   젖 양을 지키는 중에서 그들을 이끌어 내사

   그의 백성인 야곱, 그의 소유인 이스라엘을 기르게 하셨더니

   이에 그가 그들을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르고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  시78 :70~72

  

이 ‘다윗과 같은 선한 목자’는 물론 장차 오실 예수님을 뜻한다.

그러나 오늘 우리 시대에 있어서는,

다윗의 성품을 닮은 목자를 뜻한다.

 

여기서 다윗의 성품이란, 물론 예수님의 성품인데,

양떼를 좋은 꼴로 잘 먹이는 목자를 뜻한다.

 

‘목자’에게는 여러 가지 임무와 사명이 있지만,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뭐니뭐니해도

양떼를 좋은 꼴로(말씀으로) 잘 먹이는 것이다.

 

정리하면,

하나님은 친히 재량권을 발동하여 역사하실 때가 있는데,

그 때 하나님은, 양떼를 착취하는 악한 목자에게서

당신의 양떼를 빼내어

양떼에게 살진 꼴로 먹이는 선한 목자에게 인도해 내신다는 것이다.

 

지난 2천년 교회역사가 그렇게 되어 왔다고 본다.

또한 2천 년 전에 예수님도, 양떼들을, 좋은 꼴로 살지게 먹이셨다.

 

오늘날에도 이런 역사는 계속되어질 것이라고 본다.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역사, God's initiative!

그것은, 악한 목자에게서 양떼를 빼앗아,

양떼를 살진 꼴로 먹이는 선한 목자에게로 옮겨주시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주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늘 기도해야 할 것이다.                  

 

          ▣ 리더쉽, 목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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