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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 40년은 예배 훈련 2637

LNCK 2010. 9. 7. 22:37

◈광야 40년은 예배 훈련                  출2:23                     10.08.08.설교일부녹취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  출2:23

  


◑참된 회개란?


생명의 탄생의 시각과, 죽음의 시각은 주님이 정하신다.

우리가 절대로 내 마음대로 결정, 선택할 수 없다.


내 인생의 시작마지막 시간을.. 주님이 결정하신다면,

중간의 시간도.. 마땅히 주님이 결정하셔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 중간의 시간, 즉 나의 일생을.. 내 마음대로 살아간다.

이렇게 내 인생이, 내 소유의 시간인줄 알고, 내 마음대로 살아온 인생을..

‘disordered life/무질서한 인생’ 이라 일컫는다. 


    여러분, 내 인생을, 와이셔츠 단추 끼우는 예를 들어서 생각해 보자.

    첫 단추는, 하나님이 끼우셔서, 잘 맞는다.    *태어나는 시각을 하나님이 정하신다.

    와이셔츠의 마지막 단추도, 하나님이 끼우시니까, 잘 맞아야 되는데, *죽는 시각

    그 중간 단추들을, 나 자신이 제 멋대로 끼우면, 끝 단추가 잘 안 맞게 된다.

   

    중간 단추가 안 맞으면, 와이셔츠의 끝 단추도 안 맞게 된다.

    이것이 ‘disordered life, 무질서한 인생’의 결말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와이셔츠를 입을 때,

끝에 가서 단추가 안 맞으면,

중간부터 다시 풀어서, 다시 제대로 끼워야 한다.

이것이 바로 <회개>이다.

 

여러분, 와이셔츠의 ‘끝 단추’만 맞출 수 없다.

잘못된 지점부터, 단추를 다시 풀어서, 다시 맞추어야 한다.

내가 지나간 세월을 다시 돌이킬 수는 없지만,

다시 바로 잡을 수 있는 것들은, 잘못 끼운 지점부터 다시 바로 잡아야 한다.

    (회개가 쉬우면서도, 이런 어려운 면도 있다.)



◑삶이 힘들고 바빠서, 도무지 기도할 시간이 없다는 분들께


히브리 백성들은, 바로 왕의 압제 밑에서, 힘들게 피라미드를 만들었다.

그 압제 아래서 히브리인들은,

사는 것이 나은지, 죽는 것이 나은지.. 분간이 안 되는 삶을 살았다.


그 피라미드를 만드는 중노동의 혹독한 고생 속에서

그들은 하늘을 향해 ‘부르짖었다.’  출2:23등

비로소 간절히 하나님을 찾게 되었던 것이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이렇게 말한다.

“저는요, 너무나 바빠서 도저히 기도할/예배드릴 시간이 없어요!”


그런데 히브리 백성들의 경우를 보니까,

중노동의 혹독한 고생이 가중되자.. 비로소 그들이 부르짖기 시작했던 것이다. 출2:23


그러므로 오늘날 ‘기도할 시간이 없다는 분’들에게,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다.

“피라미드를 몇 개 더 만들게 되시면, 아마 기도할 시간이 생기실 것입니다.”


지금보다 고생을 더 혹독하게 하게 되면, 누구나 기도하게 된다는 뜻이다.

아직 내게 간절한 기도가 안 나오는 것은, 아직은 덜 고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상이지만, 히브리 백성들이 피라미드를 한 개 만들 때에는

하나님께 기도하거나 예배드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몸이 피곤해서.. 그 시간에 차라리 잠을 잤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부르짖기 원하셨다.

그래서 바로 왕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다.

바로 왕은, ‘피라미드를 더 많이/빨리 만들어라’ 하면서

노역의 강도를 훨씬 더 높여 버렸다.

그제야 히브리 인들은, 하나님께 부르짖기 시작했다.


“여러분, 요즘 삶이 힘들어서, 기도가 나오지 않으시죠? 기도할 시간이 없으시죠?”

사실적으로 말씀드리면, 아직 진짜로 힘들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면 안 되는데) 제 입에서 이런 기도가 나올 때가 있다.

‘하나님, 우리 성도 아무개 님, 좀 더 힘들게 하여 주시옵소서!

도저히 괴로워서 잠이 안 와서, 기도 할 만큼, 힘들게 하여 주시옵소서!’


여러분, 제가 이렇게 모진 마음이 드는 이유는,

그렇게 해서라도 기도하는 인생이.. 복된 인생이기 때문이다.

영생을 볼 때, 그게 복된 인생이기 때문이다.

여러분, 기도/예배가 끊이지 않는 인생이.. 진짜 잘 되는 인생의 시작이다. 주1)



◑40년간 광야에서 훈련한 것은 - 예배


여러분, 쉬는 것이 (어떤 면에서) 제일 어렵다.

출애굽 당시 사정을 보면,

처음에는 히브리 인들이, 노예의 중노동에서 기를 쓰고 벗어나고 싶어 했다.


그래서 피라미드 만드는 중노동보다는,

(노동이 없는) 광야에서의 예배생활이 무척 쉽고 가볍게 느껴졌을 것이다.


히브리인들이 광야에 나와 보니, 이것은 큰 횡재나 다름없어 보였다.

왜냐하면 힘들고 고달픈 직장생활을 안 해도, 하늘에서 저절로 밥이 떨어지는 것이다.


요즘 젊은이들, 중장년층들이 직장을 못 구해서 애를 태운다는데,

이렇게 고마울 수가!

광야 백성들은, 구직광고를 보면서 헤맬 필요가 없었다. 전원 취업에 실업률 0%였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광야에서 한 가지 중요한 언약을 그들에게 주셨다.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것’이었다.


과거에 제/설교자가 대학을 졸업하고, 2년을 집에서 쉰 적이 있었다.

직장 없이 집에서 쉬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그것은 경험해 본 사람만 안다.

그 때 제가 제일 거북스러웠던 성경이

‘수고 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였다.


그 때 제 솔직한 심정은,

‘주님, 제가 이렇게 하염없이 집에서 쉬고 있는데, 또 쉬게 해 주신다고요?

그러지 마시고, 제발 직장 좀 제게 주세요!’이었다. (물론 절반은 농담)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지금 광야 히브리 백성이 ‘실직자였을 때의 저와 비슷한 심정’이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지금 40년을 어쩌면 ‘쉬고’있다. 일을 안 하고, 직장이 없으니까.

그들에게 주어진 일이란.. 오직 ‘예배하고 기도하는 것’이 주된 이었다.

속죄제, 속건제, 번제, 소제, 화목제...

만나 주워서 요리해서 먹고, 그 외 하루 종일 하는 것은.. 그것(예배와 기도)뿐이었다.


그런데 더 미치는 것은,

늘 (만나만 먹고) 쉬는데, ‘7일 중 하루, 안식일 날에 또 쉬라는 것이었다.


어쩌면 기가 찰 노릇이었다.

이 계명은 정말 지키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본다.

주중에 늘 쉬는데, 안식일에 또 쉬라니... (실업자에게 공휴일은 고통이다.)


그런데 민15:32~36절에 보면, 실제로 어떤 사람이 안식일에 나무 하다가,

하나님이 명령에 의해, 돌로 쳐 죽임을 당한다. 세상에나...


백성들이 애굽에 있을 때 피라미드 공사는, 중노동이요, 정말 고역이었다.

그때 그들은, 제발 노동을 면하고, 쉬기를 간절히 원했을 것이다.


그런데 노예 해방이 되어, 광야에서 40년간 계속 쉬게 되었는데,

이제는 안식일에 쉬는 것이 힘들어서, 어떤 사람이 일(나무)하다가,

돌에 맞아 죽는 해프닝이 발생한다.


중노동을 하는 것도.. 무지하게 힘들지만,

집에서 가만히 앉아서 아무 것도 안 하고 쉬는 것도.. 무지 힘들다는 것이다.


일하는 것이 힘들다고 부르짖어서.. 출애굽 시켰는데,

이제 일하지 말고 쉬라는데.. 백성들이 쉬지 않는 것이다.

사람의 생리가 이렇다는 것이다.


여러분, 광야에는 뭐 TV나 인터넷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전기도 없었다.

뭔가 뚜렷하게 할 만한 게 없었다는 것이다. 직장도 없었으니까.

하나님이 옷과 신발도 헤어지지 않게 해 주셨다고 했으니까, 신8:4

옷감을 짜거나, 신발을 만들 일도 없었을 것이다.


    번제에 쓸 양을 키우는 일은 아마 했을 것이다.

    그런데 양 키우는 일은, 큰 노동이 아니다.

    이스라엘 인들은, 오늘 우리가 집에서 개 키우듯이, 양을 키웠다고 한다.


광야에서 그들이 오직 집중 훈련한 것은

<6일 동안 일하고, 하루를 쉬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 예배/기도드리는 훈련이었던 것이다.


놀랍게도, 천지창조 때 아담과 맺은 언약도 ‘쉬라’는 것이었고,

노예를 해방시키고, 출애굽한 백성들과 처음 맺은 언약도 ‘쉬라(안식)’는 것이었다.

예수님도 ‘수고하고 무거운..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라고 같은 맥락으로 말씀하셨다.


재정의 문제가 있고, 가정의 문제가 있고,

인간관계의 문제가 있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오늘도 주님은, 우리를 쉬게 하시기를 원하신다.


    여기서 ‘쉰다, 안식한다, 안식일을 지킨다’는 개념은

    오늘날로 말하면, 예배이다. 하나님과의 교제이다.

    하나님은 그것을,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까지 40년간이나 훈련시키셨다.

    번제, 소제, 속죄제, 화목제, 속건제.. 여러 가지 예배가 있었다.

    그렇게 40년간 예배를 훈련시키고 난 다음에,

    비로소 가나안 땅(하나님이 예비하신 풍성한 삶, 안식과 기업)에 들어가게 하신 것이다.



◑성경대로 살면, 다 망한다?


여러분 ‘성경말씀을 내가 한 번 제대로 지켜 살아보겠다.’

그런 마음으로 한 번 성경을 심각하게 읽어보시기 바란다.

그때 어떤 마음이 드는가 하면, 우리 어머니의 느낌을 대신 말씀드리고자 한다.


(저는 우리 집안에서 제일 처음으로 예수를 믿었다.)

‘야, 네가 교회에 나가길래, 내가 염려 되서 성경이 어떤 책인지 한 번 읽어보았는데,

성경대로 살면, 사람이 꼭 굶어죽기 딱 알맞겠더라!’

 

여러분, 우리가 성경을 안 읽거나/건성으로 읽어서 그렇지,

성경을 정말 순종하겠다는 결심으로 한 번 읽어보시라.

‘야, 이러다가 내가 망하는 것 아냐? 성경대로 살다가는 다 망하겠네!’


본문의 광야의 출애굽 백성들 상황에서 말씀드리면,

10정탐꾼들의 보고에 의하면,

가나안 땅에는 철기문화가 먼저 발달해서, 철병거가 막 돌아다녔다고 한다.


625때 소련제 탱크를, 국군이 소총으로 당할 수 없었듯이,

가나안의 철병거(쇠탱크)를 보니까, 10정탐꾼이 기겁했던 것이다.


‘아니 이럴 것 같으면, 광야에서 무슨 각개전투 훈련이라도 좀 시키시지..

과거에는 피라미드 지을 때는 근육과 맷집이라도 있었는데..,

매일 예배만 드리는 훈련만 받다가 보니까.. 이제 근육도 다 없어지고,

이런 상태에서 가나안에 들어가라니.. 이제 탱크 밥 되라는 건가?’


지금 백성들은, 광야에서 2년이나 팍 쉬는 가운데서, (정탐꾼 파송 시기는 2년 후)

과거에 노역할 때의 근육도 다 사라져 버렸다.

거기에다 가나안 군인들의 몸집은, 거인에 가까웠다.


10정탐꾼과 대부분의 백성들은, 완전히 사기를 당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 어머니의 말씀이 바로 그것과 같다.

‘예수 믿으면 굶어 죽기 딱 알맞겠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아니 죽어라고 뛰어가도, 남들 쫓아가기가 힘든데,

주일마다 꼬박꼬박 지키고, 십일조 다 내고,

그거 다하고 어떻게 경쟁사회에서 살겠는가?

망하기 딱 알맞지!


▶만약에 하나님이 살아 계시지 않으시면,

하나님이 안 계셨더라면, 광야 히브리 백성들은

가나안의 철병거에 깔려서 다 죽었을 것이다.


하나님이 안 계시다면, 오늘날 우리들은

주일 꼬박꼬박 지키고, 십일조 다 내고.. 이러면 반드시 망한다.

성경대로 살면.. 반드시 망한다. 돈을 욕심 없이 다 나눠주면.. 반드시 망한다.


단 거기에는 조건이 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지 않으면!’ (성경대로 살면 다 망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살아계신다.

그래서 히브리인들이, 가나안 철병거와 여리고 성을 무너뜨렸고,

오늘날 우리들이, 주일 지키고, 십일조 내면서도, 거뜬히 승리하는 것이다.


10정탐꾼은, 자기 능력자기 실력으로 가나안 땅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두 정탐꾼은, 광야에서 기도와 예배의 훈련 가운데

자기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실력을 바라보았다.


예배가운데, 주님과 교제, 친밀함이 살아있는 사람은

가나안 철병거와 같은 험한 세상을 살아갈/도전해 볼 힘과 용기가 생긴다.

자기 힘이 아니라, 주님의 힘이 자기와 함께 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10정탐꾼들이 느낀 것은 자기 힘이었고, (이들에겐 형식적 예배가 있었다.)

두 정탐꾼들이 느낀 것은 주님의 힘이었다. (이들에겐 진정한 예배가 있었다.)


그렇다면 오늘 나는, 둘 중에 어떤 힘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려고 하는가?

그것은 ‘지금 내가 드리는 예배’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예배는.. 내 힘의 상실


     ‘잘 되는 나’, ‘적극적 사고방식’, ‘자기 계발’의 메시지가 한 때 유행했는데,

     그것은 결국 ‘자기 힘’을 극대화 하자는 것이다.

     결코 성경적인 메시지가 아니다.

     성경적인 메시지는 ‘내 힘을 빼고, 주님 힘을 공급받는’ 것이다.


예배는 내 힘의 상실이다.

내 힘이 연약해질 때, 주님의 힘이 강해지신다.

예배는 우리가 힘을 더 얻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예배는 내 힘이 잃어버려 지는 것이다.

내 힘을 더 추가하려는 예배는.. 잘못된 예배이다.


우리가 약할 때, 주님이 강해지신다. 그래서 연약한 나를 도와주신다.

우리가 강해지면, 대적이 더 강해진다.


그래서 참된 예배는,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며, 나를 더 약하게 만드는 것이다.

(‘자기 계발, 잘 되는 나’ 이런 것과는 정반대이다.)


▶예배의 자세는, 가난한 마음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한다.

‘하나님 제가 최선을 다해서 90%를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10%가 모자라서 안 됩니다.

그러니 제발 제게 10%만 더 도와주십시오!’


‘구원’이란, 내가 부족한 부분을 보충해 주는 개념이 아니다.


‘주님,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NOTHING입니다.

그게 진정한 예배의 자세이다. 자기를 완전히 비우고, 가난하게 만드는 것이 예배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대단히 멋있는 말이다. 또한 상식적으로도 맞는 말이다.

그러나 ‘주님은 스스로를 도울 수 없는 자를 돕는다!’ (도우신다.)


주님이 40년간 훈련시키신 것이,

자기들 힘과 근육을 다 빼는 것이었다.


그리고 오직 예배를 통해, 하나님만 간절히 바라보는 훈련이었다.

자기 경험, 노하우.. 이런 것 다 내려놓는 훈련이었다.


여러분, 인생이 축복은, 자기 노력을 통해 오는 것이 아니다.

겸손과 자기 비움을 통해 온다.


물고기를 한 마리도 못 잡은 베드로가, 주님의 은총을 체험했다.

아마 조금 잡았더라면, 조금 잡은 것으로 끝났을 뻔했다.

한 마리도 못 잡으니까, 거기서 주님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마치는 말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일도 안 하고, 예배하는 훈련만 받았다.

그 후에 비로소 가나안(안식과 기업)을 얻을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에게도 똑같은 도전과 시험이 있다.

예배 없이, 또는 형식적 예배로.. 이 세상을 내 힘과 능력으로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예배를 통해.. 이 세상을 주님의 힘과 능력으로 살아갈 것인가?

 

중요한 것은, 그 예배의 시험을 통과해야, (비록 40년처럼 길다 하더라도, 짧으면 더 좋고) 

비로소 가나안(안식과 기업)이 내게 주어진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현실은, 

(중노동의 노역을 면하는 것이 힘든 것과 마찬가지로)

안식하라는데, 안식 못하고 일하고 만다. 오직 믿음으로 살면서 안식/쉬는 것도 힘들다.

자기 힘으로 살지 않고, 주님의 힘으로 살리라는 믿음이 있는 사람만... 주일날 쉬게 된다.

 


............................... 더 읽으실 분 ..............................


 

◑하나님은 이미 주셨다


수1:13,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안식을 주시며,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시리라

하였나니 너희는 그 말을 기억하라


▶번역의 미묘한 차이

개역(개정)에는 ‘주시리라’ 라면서, 미래형으로 번역해 놓았지만

원래 성경에는 과거형인 ‘주셨다’로 되어 있다.  has given you this land

‘이 땅을 너희에게 주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히브리어 특징상 시제는.. 과거, 현재, 미래의 구분이 불분명한 경우가 많다.

일부러 과거형을 써서 강한 미래를 표시하기도 한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안식과) 가나안 땅을 이미 주셨다 has given.


성경을 다시 번역하면,

‘이 가나안 땅을 이미 주셨다 한 말을 기억하라’가 된다.


    여러분이 지금, 삶의 풀리지 않는 여러 문제에 봉착해 있어도,

    하나님은 ‘그 땅을 이미 주었노라’고 말씀하신다.


그 땅을 이미 주셨노라고 하지만,

우리가, 10정탐꾼처럼, 겁을 먹고 뒤로 도망칠 수도 있다.


하나님은, 내가 채우지 못한 10%를 돕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내가 아무 것도 아닐 때, 제로일 때, 이렇게 말씀하신다.


‘사람들이 안 된다고 말하느냐?

네 이성도 안 된다고 생각하느냐?

이제 내가 나의 영광을 나타내리라!

사람은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참고로, 가나안은 안식과 기업(땅)

이 구절에 ‘가나안’의 개념이 잘 들어있다.


수1:13,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안식을 주시며, 이 땅(기업)을 너희에게 주시리라


내 지식, 내 경험, 내 노하우를 버리면,

내가 나 자신을 신뢰하지 않을 정도의 바닥으로 떨어지면,

그 때 비로소

이전에 내 능력으로 덤빌 때 안 보이던 것이 보이기 시작한다.

과거에 내 노하우로 덤빌 때 안 들리던 말씀이 들리기 시작한다.


시편에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저는 이런 말씀을 보면, 한숨만 나왔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한 번도 내 인생에서 경험해 보지 못한 ‘그림의 떡’이었기 때문이다.

‘내 입을 채워주시지 않으셔도 좋으니, 제발 실패만 좀 그만두게 막아 주세요’

솔직한 제 심정이었다.


그런데 제가 완전히 밑바닥에 이르러,

회개하고 간절히 주님을 찾았을 때,

이전에 들리지 않던 말씀이 내 귀에 들리고,

이전에 보이지 않던 일들이 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사람이(내가) 할 수 없는 일을

주님이 나를 통하여 이루시는 것을 보았다...



주1)

여러분의 영혼이, 구원 받고 거듭났는가?

그러면 여러분은 반드시 기도/예배드리게 되어 있다.

이게 구원 받은 증거이다.


‘성경적 지식/사실’을 내가 객관적으로 믿는다고, 내가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마귀도 믿는다. 믿을 뿐만 아니라, 믿고 떨기까지 한다. 약2:19


구원이란.. 현재 내가 반드시 하나님과 예배, 기도, 교제하게 되어 있다.

현재가 없으면.. 미래구원도 없는 것이다. 과거도 불확실한 구원이었다.                        ▣ 예 배    

구원은 현재(하나님과 교제, 예배)가 중요하다. 현재가 되어야, 미래가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