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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필사원 수도사들의 노고

LNCK 2010. 9. 9. 16:11

◑성경 필사원 수도사들의 노고                             도서 스크랩

<불량직업 잔혹사> pp.44~48. 읽고 정리.

 

15세기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발명 이전까지

성경이나 신앙서적은 순전히 필사원들의 베끼는 노고에 의해서

세대를 거쳐 전달되어왔고, 또 사방에 퍼져나갔다.

 

    스코틀랜드의 아이오나(Iona) 섬은 지금도 기독교 유적들이 많다.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복음화의 전초기지가 되었던 지역이었다.

    563년 이탈리아의 성 콜롬바가 스코틀랜드의 아이오나(Iona) 섬에서 선교를 시작했고,

    이 섬은 영국, 북유럽, 및 스칸디나비아 복음화의 전초기지가 되었다.

   

아이오나 섬에 위치한 수도원들은 ‘필사본’으로 유명하다.

이곳의 수도원들은 모두 ‘문서 필사실’을 갖추고 있어서,

거기서 책을 제작하거나 필사하는 일을 상시로 하고 있었다.

 

수도원의 다른 건물들과 마찬가지로, 문서 필사실은

대개 짚을 엮어 지붕을 이은 수수한 건물이었지만,

그 안에는 풍부한 지식들이 후대를 위해 보존되어 있었다.

 

영국의 암흑기(아직 복음화가 덜 되었던 시기)인 6~7세기에, 필사작업은

기독교 문화를 보존하기 위한 위대한 선교 노력의 일환이었는데,

주로 수도원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수도사들에게 맡겨졌다.

 

 

교회의 선교활동에 있어 복음서는 지극히 중요했다.

비록 설교와 개종은 말을 통해 이루어졌지만, 그 말을 뒷받침해 줄

성경이나 기독교 문서가 절실히 필요했다.(절대 부족했다.)

 

또한 유럽대륙으로 건너간 영국의 아이오나 섬의 켈트 선교사들은

기본적인 선교활동을 위한 토대(텍스트 자료, 필사본)를 마련해 줄 것을

본부에 지속적으로 요청했다.

 

 

켈트 수도사의 필사본 제작과정 중 정말 힘든 일은

텍스트를 한쪽, 한쪽을 공들여 옮겨 적는 것이었다.

수도사들은 성경과 전례서, 신학서, 교부의 저서는 물론

키케로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저자들의 고전 텍스트를 포함한

온갖 종류의 서적을 필사했다.

이것이 쟁기질(육체노동)보다 더 힘든 일이었다.

 

중세의 그림 중에는, 책에 글을 쓰는 수도사들의 모습이 종종 등장한다.

하지만 이것은 예술적 허구다. 사실은 전혀 멋있지 않았다.

(세상 사람들 관점에서 보면 '잔혹한 불량 직업'이었던 셈. 이 글의 책 제목)

 

당시에는 각각 낱장의 고급 피지(가죽)위에 글을 모두 적고 나서

그것들을 모아 책으로 엮었던 것이다.

그들은 긴 의자에 앉아 작업했고, 동물의 뿔로 된 잉크병을 사용했다.

 

 

피지 위에 글자들을 적는 것은, 오히려 새기는 작업에 가까웠다.

그 모습은 만년필로 글을 쓴다기보다,

글을 두드리는(새겨 넣는) 것이었다. 종이가 가죽이니까.

 

일단 글을 곧게 쓸 수 있도록 자로 줄을 그은 다음에

피지에 글자 모양대로 (바늘 같은 것으로) 구멍을 냈다.

이렇게 구멍과 구멍을 연결시켜 글씨를 써 나갔다.

 

 

그들은 필사작업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필요한 재료 일체를 자기들이 직접 조달했다.

잉크를 얻으려면 적당한 오크나무를 뒤져, 그 속에 있는 흑벌 알을 찾아야 했다.

 

호크나무의 껍질에 알을 낳는 흑벌은, 알을 낳고 곧 죽지만

알은 부화하면서 타액을 분비한다.

그러면 오크나무 껍질에는 유충을 감싼 단단한 덩어리인 ‘벌레혹’이 만들어진다.

 

수도사들은 이 벌레혹을 모아 황산제일철과 아라비아고무와 함께 사발에 담아 으깬 뒤,

식초, 계란 흰자, 빗물, 포도주를 첨가해.. 잉크를 직접 제작했다.

 

 

또한 당시에 수도원에는 난방장치가 거의 없었다.

그런 곳에서 필사작업은, 수 시간을 요하는 것이었다.

또한 당시에는 창문에 아직 유리를 끼우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이에 수도사들은, 한겨울에, 새어 들어오는 바람을 그대로 맞으면서

필사작업에 임했던 것이다.

 

필사는 힘들고 지루하며, 또한 엄청난 집중력을 요하는 작업이었다.

사소한 실수는 칼로 긁어내어서 교정했고,

큰 실수나 얼룩이 번지면.. 해당 쪽을 아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이런 필사 작업은, 15세기 구텐베르크의 활자인쇄술의 발명까지 계속되었다.

 

무명의 수도사들은, 우리에게 이 최악의 직업에 대한 감회를 기록으로 남겼다.

훗날 중세 시대 필사본의 여백에 그들이 남긴 낙서는

활자 시대 이전의 서구 문화의 보존을 위한 필사원들의 고통스러운 작업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낙서 중에는 탄식의 글도 있다.

 

‘필사작업은 너무 어렵다. 눈도 피곤하고 허리도 아프고 손발에서는 경련까지 인다.’

‘주님, 춥나이다.’

‘드디어 끝났다. 포도주 한 병만 다오.’

 

이들 필사원들은, 추위에 벌벌 떨면서도 결코 잊혀 지지 않을 귀중한 작품들을 만들어냈다.

그 최고의 필사본들은, 겉표지가 보석과 귀금속으로 장식되었다.

(요즘도 성경에 금박을 입히듯이, 완성된 필사본에 각종 장식을 했던 것이다.)

 

뜻밖에도, 그래서 이 성경 필사본들은

8세기에 접어들어서, 바이킹들의 영국 침입 때, 약탈의 표적물(박힌 보석 때문에)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다시 거금을 주고, 되찾아 오기도 했는데,

 

물론 그렇게 약탈되어져 갔던 성경 필사본들이

아이러니하게도,

스칸디나비아 반도 복음화에 귀하게 공헌했음을.. 추즉할 수 있다.

 

<불량직업 잔혹사> pp.44~48. 읽고 정리.

 

 

▲유럽 대륙에 기독교 전파를 가져온 아이오나의 켈트족 수도사들 / 5~7세기

 

기독교 역사에 의하면, 그들은 5~7세기 경, 해외선교의 선두주자였다.

 

그들은 선교사로 떠날 때 ‘빼레그레나찌오’ 라는 서약을 하고서 떠났다.

 

그 서약을 하면, 그들에게 3가지 색으로 된 조그만 깃발을 달아주었다.

 

(마치 프랑스 국기와 모양이 비슷하다)

 

 

 

 

이 3가지 색깔의 깃발은

 

<내 인생 가운데 3가지를 포기하겠다고 나는 서약했다>는 것을 뜻했다.

 

-나의 사랑하는 가족을 포기한다.

 

-나에게 익숙한 고국/문화/환경을 포기한다.

 

-나에게 편안한 모든 미래를 포기하겠다... 를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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