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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임권위와 회중권위의 조화

LNCK 2010. 10. 6. 20:50

 

 

◈위임권위와 회중권위의 조화           행15:36~41         10.09.05.설교일부녹취

 

본문은, 마가의 거취를 놓고, 바울과 바나바가 심하게 다툰 이야기다.

 

▶신앙이 성숙한 지도자들도 서로 다툰다.

여러분, 바나바는 사도요,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요,

예전에 자기 재산을 다 팔아서 다 주께 바치고 주를 따른 사람이다. 행4:37

그런 바나바도.. 어떤 자기 입장을 주장하며.. 다투고, 끝내 갈라서는 것을 본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를 직접 만난 체험이 있는 사람인데,

그런 깊은 영적 체험을 한 사람도.. 형제와 싸울 수 있다.

심하게 다투고, 서로 갈라서는 것을 보게 된다.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행15:39

 

교회에서 성도가 상처를 받는 것은, 특별히 신령한 자로부터 상처를 받을 때이다.

아무리 영적으로 뛰어난 지도자라도,

영은 영이요, 육은 육이란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그러므로 교회에 다툼이 생길 때, 의아한 표정을 짓지 마시라.

대신에 ‘올 것이 왔구나!’ 하고 생각하시라.

 

 

바울과 바나바도 서로 싸우고 갈라질 정도면,

세상에 안 갈라질 교회나 성도는 없다는 뜻이 된다.

다툼은 필연적이라는 말이다.

 

문제는 다툼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는가?’

‘과연 하나님의 뜻대로 반응하는가?’ 이다.

그러면 다툼도 축복으로 바뀐다.

그런 예를, 본문의 바울에게서 엿보게 되는데...

 

 

▶바울과 바나바가 서로 다투었는데, 결과가 상이하게 달랐다.

바나바는, 사랑의 컨셉으로 마가를 용서하고, 그를 데리고 구브로로 갔다.

그도 사역하러 갔을 것이고, 주님을 위해서 갔으리라.

 

그런데 어째서인지 결과가 다르다.

바나바는 사도행전에, 그 이후의 행적이 공식적으로 나오지 않는다.

 

반대로 바울은 잘 되었다.

둘 다 똑같이 서로 다투었는데, 왜 그럴까?

 

좀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그 답이 성경 본문에 나와 있다고 본다.

 

행15:39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40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41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녀가며 교회들을 굳게 하니라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40

어느 날 성령께서 제/설교자의 눈을 열어서,

이전에 제가 전혀 주의하지 않았던 40절 말씀에 눈이 번쩍 뜨였다.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났다.

헬라어로 보니 ‘형제들 아래서’였다. under the brothers

 

바울은 사도이지만, 형제들(성도들) 아래서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recommend, 추천을 받았다는 뜻이다.

 

사도가 회중들에게 추천/파송을 받았다는 것이다.

(반면에 바나바는 그렇지 못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여기서 우리가 위임권위에 반하는 회중권위를 발견하게 되는데...

 

위임권위란, 하나님이 사도에게 주신 공식적인 ‘사도권’이고,

회중권위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회중들이 가지는 일종의 ‘권위’이다.

 

▶바울은, 사도로서, 자기 위임권위를 휘두르지 않았고, (반대로) 회중권위를 존중했다.

바울 사도는, 사도권이란 위임권위를 가졌지만,

그는 형제 아래서 회중권위를 인정하고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회중의 파송을 받아, 2차선교여행을 떠난 것이다. :40

 

성경은, 그래서 그런지, 이후로 바나바의 행적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오직 바울의 행적에 대해서만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그만큼 회중권위(그리스도의 몸의 권위)도 인정한다는 뜻으로 여겨진다.

위임권위와 아울러!

 

구약에도 회중권위가 나오는데, 요나단 왕자의 경우이다.

잘못된 위임권위인 사울 왕이 잘못된 정책을 세우는 바람에,

자기 아들 요나단이 죽게 되었다. (전쟁 끝날 때까지 뭘 먹으면 죽으리라!)

 

제비를 뽑으니 요나단이 걸렸다.

사울 왕은 말한다. ‘너는 죽어야 해!’

요나단이 말한다. ‘나는 죽어야 해’

 

그런데 갑자기 백성들이 일어나서 말한다.

‘오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주인공이 요나단인데, 그는 죽지 않아야 하리라’

 

이것이 구약성경에 나타난 회중권위 라고 본다.

결국 위임권위와 회중권위 사이에서 회중권위가 이겼다.

 

백성들이 왕을 이기고, 하나님까지 이겼다.

하나님이 백성들의 의견을 못 당하셨다. 왜인가?

회중권위도 인정한다는 뜻이다.

왕에게는 하나님께 부여받은 위임권위가 있지만,

그것은 회중권위와 조화를 이루면서, 하나님의 뜻을 실현해 나가야 한다는 뜻이다.

 

▶오늘날의 교회도 마찬가지다.

교회에 위임권위만 있고, 위임권위가 마음대로 휘두르면.. 결코 잘 되지 않는다.

우리의 경험으로는, 결과가 안 좋고, 역사가 안 좋다.

 

언제 결과가 좋으며, 역사가 아름답게 씌어지는가?

위임권위와 회중권위가 아름답게 서로 조화를 이룰 때이다.

 

백성들의 중지(회중권위)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공의를 움직였다.

그래서 죽을 운명인 요나단을 살렸다.

하나님도 언제나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휘두르지 않으신다.

때로는 회중의 의견을 물으신다.

하물며 교회의 위임권위자들이 마음대로 휘둘러서야 되겠는가? (안 된다)

 

 

▶요한삼서에 나오는 회중권위

요한3서에 보면, ‘데메드리오는 뭇 사람에게 인정을 받고, 진리에게 인정을 받으니

(사도인) 우리도 그를 인정하노라’ 라는 말씀이 나온다.  요삼:12

 

 

여기서 순서가 중요하다.

뭇 사람(회중권위)이 맨 먼저 나오고,

그 다음에 진리가 나오고,

맨 마지막에 사도(위임권위)가 나온다.

 

사도요한도, 사도바울처럼,

사도로서 위임권위인 자기의 사도권만 존중하지 않았다.

회중들의 인정(회중권위)과 조화를 이루면서, 교회를 다스려 나갔다.

 

가지를 치는 이야기이지만,

성도들 각자도,

어느 한 쪽 권위에 의해서만 인정받으려 하지 말고,

위 3가지 권위에 두루 인정을 받게 되시기 바란다.

그것이 올바른 권위의 인정recognition이다.

 

여러분, 영적인 지도자에게 인정을 받기 이전에,

나와 신앙 칼라도 다르고, 성격도 다른 뭇 사람에게서, 먼저 인정받으시기 바란다.

이럴 때 위임권위가 나중에 최종적으로 나를 인정해 줄 것이다.

 

 

(이것도 샛길로 빠지는 이야기이지만)

어떤 사람은 큐티만 집중하면서, 진리Bible에게서만 인정을 받는데

여러분, 큐티를 통해서 진리에게 인정을 받음과 함께,

데메드리오처럼 뭇사람에게 인정을 받게 되시기 바란다.

회중권위도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다.

 

 

▶정리하면,

교회는 위임권위로만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로부터 교회 지도자들에게 부여되는 위임권위는

그리스도의 몸의 회중권위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고, 인정해 주는 것이.. 올바른 권위의 행사라고 본다.

 

아무리 진리를 수호한다는 명목으로

누가 자기의 권위만을 주장하며 휘두른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몸을 깨며, 결국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덧붙여, 권위는 상처가 아니라 보호이다.

몸의 권위가 없었다면, 요나단은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교회는 권위에 의해, 부족한 사람들이 보호/사랑받는 곳이다.

 

오늘날 적지 않은 사람들이, 권위에 대해 상처를 받고, 환멸을 느끼기도 한다.

그 권위를 무조건 휘두르는 권위로 서로가 오해했기 때문이다.

 

위에서 요나단의 경우, 또한 사도바울의 경우를 예로 들었듯이,

참된 권위는.. 보호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권위를 두신 일차적 목적이다.

 

지도자는 위임권위로 회중을 보호하며,

회중은 회중의 권위로 지도자를 보호해야 하는 것이다.

 

저는 과거에 교회생활에 아픔이 많았던 사람이다.

권위자들에게 상처를 많이 받았다. 물론 제 잘못이 많아서였다.

그런데 지금은, 권위가 상처가 아니라, 보호인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지금도 여전히 부족하지만, 여러분의 회중권위에 의해

제가 보호받고 있음을 감사드린다.

 

제 뿐만 아니라, 우리 각자 모든 성도들이

좀 부족하더라도, 회중권위에 의해서, 보호/회복되어지기를 바란다.

 

 

▶가정에서도, 가장이 너무 자기 권위를 휘두르면 안 된다.

성경에 정통한 사람일수록,

가정에서도 위임권위는 가장에게 있다는 사실만 알고, 그것만 강조한다.

그러나 회중권위, 가정의 ‘몸의 권위’는 엄마와 자녀들에게 있다.

 

 

남편의 권위, 아버지의 권위는 성경의 질서이다.

이 권위와 질서는 반드시 세워져야 한다. 교회의 질서처럼!

 

 

그런데 문제는, 이 권위 한 개만 강력하게 주장할 때이다.

하나님께 받은 이 가정의 머리의 권위는

몸의 권위와 잘 조화를 이루어 나가야 하는 것이.. 성경 전체의 뜻이다.

 

하나님이 권위를 주신 것은

사랑하고, 보호하라고 주신 것이지, 섬기라고 주신 것이지,

휘두르라고 주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교회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