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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가 물 위를 걷는 것처럼 2675

LNCK 2010. 10. 4. 20:24

◈베드로가 물 위를 걷는 것처럼                      창44:20~22               10.04.28. 설교스크랩


믿음은 베드로가 물 위를 걷는 것처럼 하나님의 약속 위를 걷는 것입니다.



◑믿음이 부족해서, 쓸데없이 요셉을 걱정한 야곱   창44:20~22


'우리가 내 주께 말씀드리기를 그 아이는 그의 아버지를 떠나지 못할지니 떠나면 그의 아버지가 죽겠나이다' :22

 

이 말씀에 우리가 뭘 볼 수 있냐면, 야곱의 오래된 슬픔과 고뇌를 볼 수 있죠.

특별히 사랑했던 아들 요셉이 짐승에게 찢겨서 죽음을 당한 것으로 알고

야곱이 얼마나 오랜 생활동안 슬픔에 잠겨있고

야곱이 오랜 생활동안 (쓸데 없는) 마음의 고통을 겪었는지 그것을 알 수 있어요.


우리가 한 번 생각해볼 것이 있는데, 아브라함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아브라함은 이삭을 잃어버려야 될 위치에 있는데, 야곱하고 달랐어요.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그래서 독자 이삭을 잃을 수밖에 없는 그런 위치에 있었는데

아브라함은 야곱처럼 그런 슬픔이나 고뇌에 빠지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히브리서 11장에 나온 것처럼,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살았어요.

아브라함은 그 사건에 대해서 믿음으로 반응했어요.

이삭을 죽여서 번제로 드려야 되는 그것을 보지 않고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과거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았습니다.

“너와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이삭으로 말미암은 자라야 네 씨라고 칭할 것이다.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았기 때문에

심지어 아브라함은 어떻게 생각했냐면,

이삭을 죽여서 번제로 드릴지라도 ‘하나님이 그를 다시 살려낼 것’이라고 믿었어요.  히11:19 

그것이 히브리서에 기록되어있는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번제를 드리면 재밖에 남지 않는데, 죽은 자를 살리는 게 아니고,

재밖에 남지 않은 아들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다시 살려서

자신에게 주실 것이다... 그렇게 믿었어요. 그래서 그는 슬픔에 빠져있지 않았어요.

절망하거나 낙담하거나 마음의 고통을 당하거나 그것이 아니고

아침 일찍 일어나가지고 이삭을 재물로 드리기 위해서, 하나님이 지시하신 산으로 갔어요.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고,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쓸데없는 번민이 없었어요. 쓸데없는 고통을 당하지 않았어요.


야곱도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야곱은 요셉의 꿈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야곱은 요셉의 꿈 이야기를 들었고, 그것을 마음에 담아두었던 사람입니다. 창37:11


형제들은 시기해서 그것을 무시했지만, 성경에 보면 겉으로는 책망했지만,

야곱은 그 꿈을 마음에 담아두었다고 그랬습니다. 그 꿈을 기억했다 그랬습니다.

그 꿈에는 요셉의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 담겨있습니다.


마치 이삭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신 것처럼

그에게 직접주신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야곱에게도 하나님께서 약속을 주셨어요.

미래에 그가 어떻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약속을 주셨어요.


그(요셉)는 짐승에서 찢겨서 죽을 자가 아닙니다.

그는 짐승에게 찢겨 죽을 자가 아니고, 그는 통치자가 될 사람입니다.

그 형제들이 엎드려서 절하고, 오늘 본문 말씀들을 보면

그 형제들이 요셉에게 전부 와가지고 계속 하는 말이 ‘주께서’, ‘내 주께서’

요셉을 라고 부릅니다. 꿈이 그대로 성취되고 있는 겁니다.


요셉은 짐승에게 찢겨 죽을 자가 아니고 요셉은 통치자가 될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은 그 부모들이 그가 꾼 꿈 그대로, 나중에 야곱이 실제로 요셉에게 절을 하죠?

부모들까지도 절하게 될, 하나님이 통치자로 세울 사람이었습니다.


그 계획을 이미 요셉에게 가르쳐줬을 뿐 아니라,

요셉의 간증을 통해서 야곱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그 약속을 붙잡지 않았습니다.

그걸 마음에 담아두고도, 약속을 붙잡지 않았습니다.

그걸 생각했지만 그걸 붙잡지 않았어요.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여러 가지 염려, 근심, 걱정, 좌절감, 두려움,

그러면서 5년 10년 20년 30년을 마음고생을 하면서 지냅니다.

슬픔가운데서 지냅니다. 괴로움 가운데서 지냅니다.

왜냐하면 믿음으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살지 않고, 환경만 바라보기 때문에.

믿음으로 살지 않고, 현실만 바라보기 때문에.


믿음이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현실을 무시하는 것 같지만,

말씀 위에 서기 때문에, 현실을 무시하는 것처럼 잠깐 보이기도 합니다.

믿음은 그냥 현실을 무시하는 게 아니에요. 그냥 현실을 무시하는 것은 광신이에요.


믿음은 무조건 현실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이건 광신이죠)

말씀 위에 서야 하기 때문에, 말씀을 믿는 믿음에 우선하기 때문에,

잠시 현실을 등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평소에는 지극히 현실적으로 삽니다.


제가 그런 생각을 했어요. 다윗이 하나님이 왕으로 세운 사람인데

다윗이 겪은 과정들을 보면,

‘이게 어떻게 왕이 되는 길이냐, 왕에게 쫓겨나가고, 언제 죽을지 모르고,

얼마나 많은 배신들을 당하고, 얼마나 많은 어려움들을 당하고..’


(다윗처럼) 요셉도 통치자가 될 사람인데, 그 과정을 보게 되면,

이게 어떻게 통치자가 되는 길이냐. 팔려가고, 죄수가 되고, 잊혀진바 되고,

이런 극적인 단계를 걸쳐서,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시고

실제로 다윗을 왕이 되게 하시고, 실제로 요셉을 통치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지난날의 절망적인 순간들이 극적인 간증거리들이 됐어요.

극적인 간증거리들이 돼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어요.

그때 성령께서 여러 번 제게 감동을 주신 게 그것이었어요.


‘지금 네가 당하는 말 못 할 고난들은, 후에 극적인 간증거리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현실 때문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이런 현실 때문에 낙담하거나 절망하거나 걱정하지 말고 내 약속을 붙잡아라.

이 모든 것이 나중에 극적인 간증거리가 될지 어떻게 알겠느냐.’


‘현실을 바라보지 말고 약속을 바라봐라.

현실을 바라보지 말고 약속을 바라봐서

이 모든 것이 극적인 간증거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믿어라.’


   위에서 제가 아브라함과 야곱을 비교해서 설명 드렸습니다.

   아브라함은, 약속을 바라보았으므로, 그렇게 현실에 비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현실을 바라보았으므로, 아들이 죽은 현실에 비관적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나는, 아브라함의 길을 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야곱의 길을 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현실만 보고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절망감에 사로잡히고,

   걱정하고 우울해하고 심란해하고 이러면 안 돼요.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아야 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말씀하시고, 나중에 반드시 그것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그 약속 위를 걸어가야 합니다.

베드로가 물위를 걸어간 것은 말씀 위를 걸어간 것입니다.

“오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 위를 걸어간 겁니다.

바다위로 걸어간 것이 아니라, 말씀위로 걸어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 위를 걸어가야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 위를 걸어가야 됩니다.

우리는 현실을 걸어가는 사람이 되면 안 됩니다.


현실을 걸어가는 사람에게는 미래가 없어요.

우리는 현실을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위를 걸어가야 됩니다.

하나님의 약속 위를 걸어가야 됩니다. 그것이 믿음이에요.


믿음이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현실이 아니라,

또 현실을 무조건 무시하는 것도 아니에요.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 위를 걸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위를 걸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현실을 보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 위를 걸어가게 될 때

하나님의 말씀 위를 걸어가게 될 때,

우리는 대부분의 염려에서 벗어납니다.


예수님은 염려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말씀했습니다.

마6장에 보면 염려의 근원이 무엇인지 말씀했어요.

‘믿음이 적은 자들아 어찌하여 염려하느냐’ 그랬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뿐만이 아닙니다.


어떤 종류의 염려든지 어떤 종류의 걱정이든지

여러분, 믿음으로 행치 않기 때문에 염려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행치 않기 때문에 낙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면 염려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좌절감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자유하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어요.

아브라함의 영적인 자손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약속의 말씀 위를 걸어가면서 믿음으로 살아야 됩니다.


야곱은 그런 삶에서 일부분 실패했어요. 요셉에 관한 부분에서 실패했어요.

그러나 요셉은 가장 어려운 일을 당했지만, 그는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말씀 위를 걸어갔습니다. 그는 약속의 말씀을 끝까지 붙잡았습니다.

약속의 말씀을 끝까지 붙잡았고 그는 말씀 위를 걸어갔습니다.

그는 약속 위를 걸어갔습니다. 그래서 그는 위대한 간증의 소유자가 되었어요.


여러분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답게, 현실을 바라보지 말고,

현실을 바라보고 염려에 사로잡히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그 약속 위를 걸어가야 될 줄 믿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되어야 될 줄 믿습니다.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야 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레마)으로 말미암느니라.’

                       *레마 : 여기서 지식적인 말씀이 아니고, 믿음이 생기는 말씀이라는 뜻


이 시대는 지식은 많지만, 믿음이 적어요.

믿음의 말씀을 받은 자, 그 말씀을 붙잡고 사는 사람들이 적습니다.


신자들 중에서도 성경지식은 많지만 믿음이 적어요.

그래서 믿음으로 사는 자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그런 신자는 종교적이기 쉽습니다.


우리는 종교적이 되는 것을 거부해야 됩니다.

종교적이 되는 것을 거부하고 성령을 사모해야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야 됩니다.


성령은 지혜와 계시의 영이에요.

지혜와 계시의 영이신 성령이 우리에게 강력하게 임하면

같은 말씀이라 할지라도 그 말씀이 로고스가 아니라, 레마가 됩니다.

 

그 말씀이 계시가 되어서, 우리의 마음의 빛이 되고, 우리의 심령을 찌르는 검이 되고,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하는 불이되고, 우리의 심령을 부서뜨리는 방망이 같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지식의 사람이 아니라,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는 줄로 믿습니다.


그런 믿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응답을 받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승리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믿음으로 살라고 부름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지식으로 살지 마시길 바랍니다. 믿음으로 사시길 바랍니다.

현실을 바라보지 마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게 되시기 바랍니다.


현실을 걸어가지 마십시오. 힘 빠진 모습으로 터덜터덜 현실의 길을 걸어가지 말고

약속의 길 위를 걸어가십시오.


베드로가 바다 위를 걸었던 것처럼, 약속 위를 걸어가십시오. 말씀 위를 걸어가십시오.

그때 기적이 일어나고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고

그때 구원이 일어나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될 줄 믿습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자기를 배신한 가족을 돌 본 요셉   창45:3~11


요셉이 배신을 당한 것처럼 자기 가족들에게 배신을 당한 것처럼

저도 저희 가족들에게 배신을 당했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를 하면 여러분이 깜짝 놀라실 거에요.

무슨 소설을 읽는 것 같을 거에요.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는 않겠습니다.

뭐 그리 덕이 되는 이야기는 아니기 때문에...

요셉이 형제들에게 팔린 것처럼, 저의 가족들도 저를 배신했습니다.

 

저의 가족들도 저를 배신하고 모든 관계가 끊어졌습니다.

또 제가 인간에 대해 환멸감을 느꼈습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가족들이었습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철두철미하게 저를 배신했습니다.

인간 이하의 일들을 저에게 행했습니다.


저는 지금은 그분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은 그분들을 공양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그렇게 했기 때문에. 나에게는 더 이상 의무감이 없습니다.

모든 관계가 사실상 끊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러나 요셉이 그렇게 했던 것처럼 하고 있습니다. 그분들을 공양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그것이에요. 요셉이 꿈이 이루어졌습니다.

요셉이 꿈이 이루어져서 그가 애굽의 주가 되었습니다.

그가 애굽의 주가 되고 그가 치리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형제들에게 이런 말을 했죠.

‘당신들이 이곳에서 나의 영화를 보았거니와... 아버지께 아뢰고 모시고 오세요.’ 창45:13


그때 여러분 요셉은 어떻게 살았습니까? 그것이 불신자와 신자의 차이입니다.

불신자 중에도 성공하고, 출세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불신자들 중에도 많은 것을 소유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기를 위해서 삽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기만을 위해서 삽니다.

그리고 과거에 자기 원수들에게 보복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복을 주실 때 복 받은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복을 주실 때, 하나님이 여러분을 높여 주실 때

여러분은 요셉처럼 사명자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복을 준 것이 아니에요.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복을 주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기억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렀습니다.

‘내가 너를 창대케 하겠다. 내가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겠다.’ 무엇 때문입니까?

‘너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창12:3


하나님이 요셉을 불렀습니다. 왜 불렀습니까? 하나님이 요셉을 치리자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요셉을 꿈을 꾸게 하시고 또 꿈을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셨습니까? 요셉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요셉이 꿈이 이뤄지고 난 다음에, 평생을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라고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요셉은 그것을 통해서 부모를 먹여 살리고

자기를 배반했던 팔아넘겼던 형제들을 공양했습니다. 그들의 가족을 살렸습니다.

또 요셉은 그 뿐 아니라 애굽의 모든 사람들을 살렸습니다.

굶어죽을 수밖에 없었던 애굽의 모든 사람들을 살렸습니다.

주변국 모든 사람들을 살렸습니다.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것은, 요셉과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이것은 사업하는 사람뿐 아니라, 목회자들도 명심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 목사를 위해서 교회를 부흥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부흥하면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부흥하면 부흥할수록


이제는 도시에 대해서, 나라에 대해서, 열방들에 대해서, 그리고 다른 교회들에 대해서도

그리고 다른 선교단체에 대해서도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나눠야 될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공양해야 될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베풀어야 될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많이 가진 자가 나누지 않으면,

금방 타락해 버립니다. 그 가진 것이 썩고 부패해서.. 자기를 좀먹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은 이 땅에서 복을 받아서 그것을 누리면.. 복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닙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복을 받아서 누린다고, 복 받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야 복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베풀 수 있어야 됩니다. 나눌 수 있어야 됩니다.


우리는 베풀고 나누라고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베풀고 나누라고 복을 받는 것입니다. 그 마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그런 동기를 가진 사람들에게,                                                 ▣ 믿음론 (순종)  

그런 목적의식을 가진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복을 주십니다. 큰 복을 주십니다...(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