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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가 설명하는 십자가

LNCK 2010. 10. 8. 15:38

 

◈누가가 설명하는 십자가                    눅23:32~43                출처, 정리

 

 *부제 : 십자가에서 보여진 예수님의 용서의 사랑 

 

 

예수님께서 두 강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리신 사건은

사복음서에 4번 모두 다 나옵니다

그런데 유독 누가복음에서만 그 중 한 편 강도가

구원받은 기록이 나와 있는데요

그 구원받은 이유가 바로 예수님의 용서 때문이었습니다... 자세히 알아봅니다.

 

▲문제 제기 : 골고다의 십자가는 과연 무엇을 말하려 하는가?

 

십자가를 볼 때마다, 십자가를 생각할 때마다, 그리고 십자가를 설교할 때마다.

 

우리는 종종 울게 됩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단지 슬픈 감정만 불러일으키는 신파극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슬픈 감정 이상의 것이 있습니다.

 

십자가에는 우리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신비가 있습니다.

 

 

 

십자가는 우주의 운명을 바꾼 능력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십자가를 하나님의 지혜라고 말했습니다. 고전2:7

 

 

 

오늘 우리가 십자가를 깊이 묵상할 때, 단지 슬퍼하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가를 들을 것입니다.

 

 

 

저는 특별히 여러분들에게 두 사람(양편 강도)을 소개할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이 십자가에서 무엇을 보았는지를 우리도 볼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이 반응했던 것처럼, 우리도 그 같은 반응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함께 십자가의 장소로 가봅시다. 

 

 

 

▲<가상 칠언 架上七言>의 비교, 누가복음을 중심으로

 

예수님은 우리 죄인을 사랑하셨습니다. 십자가가 그것을 증거 합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을 읽으면 그 사랑이 얼마나 철저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십자가상의 일곱 말씀架上七言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각 복음서가 어떤 것을 기록하고 있는지를 살펴본다면,

 

각 복음서를 이해하는 눈이 열리게 됩니다.

 

 

 

제일 먼저 기록된 마가복음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즉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한 말씀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막15:34

 

 

 

그 다음에 기록된 마태복음은 마가복음을 그대로 따라갑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27:46

 

 

 

가장 나중에 기록된 요한복음상대적으로 많은 4개의 말씀을 보여주는데

 

그 중에 “내가 목마르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요19:26, 27, 28, 30

 

 

 

이렇게 복음서는, 십자가의 영적인 고통과 육적인 고통을 모두 숨김없이 보여줍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은 고통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자기를 따라오는 무리들을 향해서 위로하십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눅23:28

 

 

 

그러므로 우리는 누가복음을 읽으면서,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상대적으로 숨겨있는 중요한 메시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고난 자체를 말하기보다는

 

그 고통을 초월한 그 무엇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십자가라는 극한의 고통까지도 초월하여 계속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십자가에서 완성되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누가복음은, 특별히 한 행악자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을 기록합니다.

 

그 사람은 바로 ‘이름 없는 행악자’입니다.

 

누가복음을 주의 깊게 읽어보면,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사랑이

 

한 행악자에게 나타났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강도’라고 알고 있는 이 내용은, 사복음서에서 오직 누가복음에만 나옵니다.

 

(보통 ‘오른편 강도’가 구원받았다고 알고 있는데, 성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냥 ‘한 편 강도’로 나옵니다.)

 

 

 

 

 

 

 

◑주인공 한 행악자

 

 

 

▲일반적인 이해로는, 본문의 강도 두 사람은

사형을 받아 마땅한 중죄인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행악자는 어쩌면 독립투사였을 수도 있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인데,

-십자가 위에서도 두 사람의 태도가 비교적 당당하는 것과

-십자가 형을 받았다는 점입니다. 십자가 형은 가장 중범죄자에게 내려지는 극형으로

  지방정부 전복 시도가 있었거나, 반란을 일으킨 죄인들에게 내려지는 형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들은 처음에는 로마에 반기를 든 독립투사들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또 로마군에 쫓겨서 도망 다니면서

마을 사람들을 약탈하는 산적으로 전락했을 수도 있습니다.

 

     세리나, 유대인이면서 로마군에 차출된 '성전경비대'등은      로마제국에 소속된 신분의 '강도'였고 (민생을 착취했을 경우)

     본문의 강도들은, 강도이지만 그 속에 독립군 이미지가 겹쳐overlap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사형제도는 특별히 국가에 대한 반역자에 대한 형벌

로마는 법제도가 잘된 최초의 고대국가였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사형을 아무에게나 내리지 않았습니다.

거기에 해당할 만한, 즉 로마제국에 반역하는 자에게, 십자가 사형을 언도했습니다. 주1)

 

십자가형은 가장 효과적이었습니다.

피지배국 사람들이 봉기를 일으킬 때마다

독립군을 잡아다가 산위 높은 곳에 십자가로 메달아 놓으면,

사람들은 두려워하고 잠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 군사들이 예루살렘에서 멀지 않은 골고다에 십자가 사형터를 잡은 것도

바로 여기에 이유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것을 기념하는 민족적 해방기념일 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자유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로마는 중요한 명절마다 그 앞서 이렇게 십자가 사형을 집행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시무시한 선포입니다: “로마에 반기를 드는 자는 이렇게 망하리라!”

 

 

▲유대인들이 로마에 계속 반역한 이유는, 부활 신앙 때문이었음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절대로 자신들의 힘으로는

로마의 강력한 군대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은 왜 자기 목숨을 버려가면서까지 투쟁했을까요?

 

그 이유는 당시의 유대인들은 부활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부활을 믿었습니다.

왜냐하면 구약 성경에 약속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당시 유대인들이 즐겨 읽었던 말씀은 이사야와 다니엘이었습니다.

이사야는 포로에서 회복될 것을 약속했기 때문이고,

다니엘은 억압받는 상황에서 회복되고 아울러 부활할 것을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 12:2~3

 

 

그래서 당시에 성경에 정통한 바리새인들은 부활을 믿고 있었고

강도도 목숨 걸고 반란에 가담한 것은, 그런 유대교 신앙적 이유도 있었을 것입니다.

 

위 다니엘서 말씀을 왜곡, 또는 자의적인 해석을 하게 될 때,

그 사람은 독립군이 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회복과 부활을 믿는 신앙이 있었기 때문에,

반란에 가담했을 것이고, 결국에 받게 될 십자가형도 어쩌면 무섭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십자가 사형은, 명예로운 자리

다시 말하자면 자신의 소신이 옳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그는 십자가 앞에서도 당당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오히려 로마제국이 무서워서,

그 앞에서 무기력했던 일반인들과 대조되는, 그들 자신들의 명예였습니다.

당당한 애국자요, 독립군이었던 셈이지요.

 

 

▲그런 ‘십자가’에 안 어울리는 예수님

그러므로 일반 사람들이 볼 때에나, 그리고 로마 군병들이 볼 때에나,

예수님은 전혀 십자가에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전혀 로마에 반란을 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칼 쓰는 법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손에 굳은살이 박힌 이유는, 칼과 방패를 잡아서가 아니라,

대패와 망치와 톱을 잡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에 대항하는 사람들만 죽을 수 있는 일종의 명예의 장소였던 십자가에

예수님이 달리셨다는 것은,

당시의 사람들이 볼 때에, 뭔가 어울리지 않는 구색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죽음은, 다른 두 강도의 죽음과는 달리,

어쩌면 강도들이 보거나 구경꾼들 보기에,

좀 세속적으로 볼 때 명분이 없는, 억울한 죽음, 또는 소위 '괘심죄'이었던 것입니다.

지도층인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에게 계속 밉보인 결과.. 무슨 혐의를 뒤집어썼는데

사실은 '괘심죄'였죠.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명예, 명분.. 이것이 대단히 중요한 시절이었습니다.

두 강도는, 어쩌면 명예와 명분이 절반 있었을 것입니다.

 

   요즘도 아랍의 자살폭탄 테러리스트들이, 이런 이슬람의 부활신앙을 믿고,

   자신과 가문의 명예를 위해,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을, 감행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한 편 강도가, 예수님을 비방했습니다.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39

 

여기서 '구원'이란 말은, 영혼구원 이라기 보다는

'유대 나라의 회복'을 뜻할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지금 강도는 불신자입니다.

그리고 초대교회가 태동되지도 않았던 시기에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바 '구원'이란 개념을, 이 강도가 이해하고 있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가 이해하는 '그리스도'라는 개념은 정치적 메시야이며

그가 말하는 '구원'은 (단어가 같은 헬라어 Sozo 라도) 그 의미는

당시 시중에서 이해하던 의미의 구원,

즉 '지금 자기를 십자가에서 내려오게 해 달라' 이거나

또는 '유대나라의 회복, 다윗왕국의 회복'이었습니다.

 

이 강도가, 독립군이란 증거가 여기서 잘 드러나는 거죠.

독립군들이 가장 관심있어하는 독립, 즉 유대나라의 구원을

그는 예수님께 나무라는 투로 얘기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받았던 수치는 바로 이런 측면도 있습니다.

 

“아무나 받을 수 없는 일종의 명예스러운 십자가 죽음을,

아무 것도 아닌 네가 받다니! 오! 예수여, 부끄럽지도 않은가!”

 

 

그래서 우리가 읽은 본문에는

예수님의 육체적 고통을 보여주는 것과 아울러

바로 예수님이 당하신 이 수치를 보여주고 있다는 겁니다.

 

풀어서 말하면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여기에 매달릴 이유(독립투쟁)라도 있지만, 당신은 도대체 왜 여기에 있는 것이냐?

당신이 그리스도, 다시 말해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명으로 사형을 당한다는 말인가?

가당치도 않다! 당신이 독립운동을 위해서 한 일이 뭐가 있느냐? 있으면 말 좀 해 봐라!’

 

 

 

◑십자가에 달려서, 변화된 한 강도

 

그런데 놀라운 변화가 나타납니다. 바로 ‘한 강도’입니다.

아마 성령님이 그의 마음을, 십자가 위에서 변화시켜 주셨던 모양입니다. 

 

그는 예수님에게 던져지는 모든 수치들이 옳지 않다고 선포합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에게 이렇게 부탁합니다.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42

 

그렇습니다. 바로 이것이 부활 신앙의 표현입니다.

중요한 점은, 그는 십자가에서,

자신이 평생토록 굳게 지켜왔던 자신의 생각을 바꾸었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저주한 다른 강도는, 자신의 길이 옳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다니엘의 말씀을 이루는 ‘영원히 빛날’

명예로운 부활을 할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비방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강도’는 십자가에서 변화되었습니다.

아마도 그 사람 역시 다니엘의 말씀을 믿으며

‘의로운 일을 위한 반란’에 자신의 일생을 걸었을 것입니다.

그 길을 위해서 살인과 방화, 약탈과 전쟁을 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길이 하나님의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점차로 그는 깨달았습니다. 이 길은 하나님의 길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그것은 눅23:40-41절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

 

▲아마 <용서>때문에, 한 강도가 변화되었습니다.

본문은 왜 이 강도가 마음을 바꾸었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본문은 그 강도가 마음을 바꾸었다라고 말합니다.

바로 십자가에서 말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34절의 말씀에 두 가지 측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34

 

넓은 측면은,

자신을 못 박은 사람을 포함한 세상 모든 죄인을 용서해달라는

예수님의 끝없는 사랑의 표현일 것입니다.

 

좁은 측면이라면,

32-33절과 연관해서 볼 때, 놀라울 정도로 소름이 끼칩니다.

32-33절은 철저하게 두 강도가 중심적으로 등장합니다.

그리고 34절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즉 두 강도를 향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렇게도 볼 수 있습니다.

     그 증거는 '강도가 변화되어버린 것'입니다. 예수님께 충격을 받았던 것이죠.

 

저 양지웅 목사는 이 말씀이, 좁은 측면에서 엄청난 힘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자신들이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생각했었지만,

그들은 정말 자기가 했던 일이 무엇이었는지도 몰랐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저/설교자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한 강도에게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가, 그 자리에서, 예수님께 자신을 의탁하였던 것입니다.

42.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적용

 

▲자신의 명예가 → 수치였음을 깨닫는 곳, 십자가

본문의 메시지는 바로 이것입니다. 두 강도에게 십자가는 명예의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것은 전혀 가당치 않은 말입니다.

자신들은 그것을 명예로운 죽음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하나님과 전혀 상관이 없는, 자기 인간의 자랑과 '자기 의'를 드러내는 명예였습니다.

 

어쨌든 그들은, 수 년 동안, 아니 일평생 힘써서

자기들이 의롭다는 일(유대나라의 독립)을 했지만,

최종적인 결과는 자신들의 헛된 죽음,

(벌거벗고 새 밥이 되는) 수치스런 죽음뿐이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뜻 아래에서 자신의 의지가 180° 전환되는 장소입니다.

자신이 명예라고 붙잡았던 것을, 십자가 앞에서 내려놓는 것입니다.

결국은 그것이 수치임을 발견하는 장소입니다.

 

   서두에서도, 이들은 두 이미지가 겹친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자기들 스스로는, 자기가 독립투사라고 생각했을 것이고,

   구경하는 사람들 중에 다수는, 그들이 강도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성경도 ‘강도’라고 기록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자기가 ‘독립투사’(의인)라고 철두철미하게 스스로 인정해 왔는데,

   삶의 마지막 순간에 보니, 그것은 허무한 스스로의 인정에 불과했습니다.

   삶을 끝내는 순간에 보니, 자기가 강도(죄인)인 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어떤 사람은 사업가로, 어떤 사람은 각종 직업인으로서

우리 각자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각(착각)하고 살 것입니다.

 

그러나 삶의 마지막 순간에, 또는 삶의 어느 순간moment에

우리는 깨닫습니다. ‘나는 죄인이다’라는 수치스러운 사실을 말입니다.

나는 명예스런 직장인 OOO이었지만, 뒤집어보면 죄인 OOO입니다.

우리도 이렇게 두 이미지가 겹치는 overlap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 그 사실을 깨닫습니까?

(강도의 십자가처럼) 삶의 위기의 순간에, 모든 기반이 흔들리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우리는 까마득하게 인정하지 않았던 사실을 비로소 인정하게 됩니다.

‘내가 자랑스런 독립투사였지만, 동시에 또 아담의 죄성을 물려받은 죄인’임을

 

삶이 잘 나가던 시절에는, 혹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만,

(강도처럼) 삶의 위기의 순간이 찾아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게 됩니다. 그리고 구세주를 요청하게 됩니다.

 

▲그 수치스런 자리에서, 한 강도는 예수님의 용서를 받아들였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34

 

그리고 변화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이런 변화가 오늘날 우리에게도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용서를 체험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변화입니다.


이 설교문의 제목이 '누가가 설명하는 십자가'입니다.

사복음서중에서 누가만 특별히 '십자가 위에서 매달려서 회심한 강도'이야기를 적고 있습니다.


그는 일평생, 자기가 옳은 일, 선한 일을 한다고 자부하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요즘 안타깝게도 지난 정권 인사들이 많이 고생을 하고 계신데요

그분들이 이구동성으로 하시는 말씀이 '자기는 나라를 위해서, 옳은 일 하는 줄 알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본문의 주인공들과 비슷한 처지가 되고 말합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 모두가 크고 작게, 동네에서 소규모 자영업을 한다 하더라도

자기는 뭔가 이 사회를 위해서, 세상을 위해서, 적어도 가정을 위해서

공헌하고, 헌신하고, 봉사한다고 자부하면서.. 무슨 일을 해 오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되돌아보니 우리의 이미지는, 아담의 원죄의 후손인지라,

강도의 이미지와 오버랩(겹쳐짐) 됩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고 계시며

우리가 용서 받기를 원하시고, 기도해주시고, 나아가 주님과 함께 낙원에 거하기를 원하십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34

 

또 하나 기억할 것은,

똑같은 강도요, 똑같은 십자가에 달렸지만

이 예수님의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은 다른 편의 강도입니다.

그는 자기가 옳다며, 십자가 위에서 죽기 일보직전까지도, 예수님을 나무랐던, 조롱했던 사람입니다.

우리 주변에 이런 사람이 절대 생기기 않도록, 우리는 전도하고

그를 위해서 예수님처럼 기도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 후략 ........................

 

바로 이런 경험을 바울 사도가 했습니다.

그도 이전에는, 스스로 의로워서, 예수님 따르는 자를 핍박하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아마 스데반 순교를 계기로, 또한 다메섹 만남을 통해서)

성령의 감화로, 자신의 죄성을 깨닫고, 수치를 깨닫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용서를 받아들인 사람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담대하게 자신의 목회 철학을 이렇게 말합니다(고전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한 강도도 그렇고,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로, 

    그들이 처음부터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 인류의 대속을 위한 죽음이었다고 깨닫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다만 '개인적 차원의 용서'의 예수님을 처음에 만났다가,

    바울은 차츰 성경을 계속 연구하면서, 

    그 분의 십자가 죽음이 '온 인류의 대속(대신 용서)' 이었다는 사실을, 나중에 차츰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 바울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서 선교를 하게 됩니다.

그 자세한 내용이 바로 사도행전에 나와 있습니다.

이 선교 여행 중에 바울은 누가를 만나게 됩니다(행16:10).

 

누가는 의원이었습니다. 그는 엘리트였습니다.

왜냐하면 그 누가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지만,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역사적인 사료들을 모아서 꼼꼼하게 정리된 글임에 분명합니다(눅1:2-3).

 

다시 말해서 아무나 이런 글을 쓸 수 없다는 말입니다.

정말 누가는 엘리트였음에 분명합니다.

그는 의사로써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러던 그가 바울을 만나서 자신의 인생을 바꿉니다.

그는 이제 바울과 함께 선교를 떠납니다.

 

저는 그 이유가 십자가의 용서에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입을 열면 십자가였고, 눈을 뜨면 십자가였기 때문입니다.

바울을 변화시킨 십자가의 능력이 누가의 삶도 바꾸었기 때문입니다.

 

누가는 사람의 몸을 살렸지만, 십자가는 사람의 영을 살립니다.

그렇다고 누가가 의사직업을 그만둔 것은 아니었습니다(골 4:14).

그는 의사를 계속했지만, 주객이 바뀐 것입니다.

 

그 동안 누가는 자신이 의사이기 때문에 사람의 몸을 고쳐주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만난 누가는 그가 십자가의 사람이기 때문에,

그 십자가의 사랑과 능력으로 사람을 고쳤습니다.

 

 

..............................

 

 

▲중략된 부분

그런데 한 강도의 이 비난은 사실은 네 번째에 해당합니다.

1) 첫번째는 <관리>들이 똑같은 내용으로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

눅23: 35.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2) 두번째는 <군인>들도 조롱합니다.

36.<군인>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37.이르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38.그의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더라

아마 유대인의 왕이란 죄패 때문에 더욱 조롱을 당했을 것입니다. 

 

3) 다른 성경에는 지나가는 행인들도 조롱하고 비난했다고나옵니다.

마27:39~40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40.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4) 본문의 한 편 강도가 똑같이 비난합니다.

정말 예수님은 정말 사면초가의 상황입니다.

 

그런데도 정작 예수님은,

그들의 용서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눅23: 34.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