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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주일을 맞이하여 2778

LNCK 2010. 12. 6. 19:03

 

◈종교개혁주일을 맞이하여               갈1:6~10             10.10.31.설교일부녹취, 정리 



◑종교개혁자들의 2가지 강조점


오늘은 493주년째 되는 종교개혁주일이다.

1517년 10월 31일, 마르틴 루터가 독일의 비텐베르크 성당 정문에

95개조의 반박문을 붙임으로써 종교개혁이 시작되었다.


당시 가톨릭교회의 신학적, 도덕적 타락을 지적하면서

교회의 본질적 모습을 회복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 종교개혁의 중대한 주장 2가지는, 다음과 같다고 생각한다.


▲1. 루터를 비롯한 개혁자들이, 종교개혁을 일으키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 성경책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였다.


당시 가톨릭교회는 공로주의 신학을 갖고 있었는데,

이에 반하여, 개혁자들은 로마서, 갈라디아서에서 이신칭의,

- 즉, 믿음으로, 은혜로 구원받는 복음의 진리를 발견하고,

그 소식을 널리 전파함으로써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것이다.


▲2. 종교개혁자들의 두 번째 큰 바램은,

당대로 모든 개혁이 다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교회는 성경의 원리에 따라서 끊임없이 개혁되어야 한다.

- 이것이 개혁자들이 주장했던 종교개혁의 또 하나의 주제였다.


그런데 오늘 우리 종교개혁의 후예들은

여전히 ‘이신칭의’의 신학에만 매달려 있고, ①

‘교회는 끊임없이 개혁되어져야 한다’는 ②

또 다른 중요한 원리는 무시되고 있는 것 같다.


더욱이 ‘이신칭의’ 신학 그 자체도,     *이신칭의以信稱義 - ‘믿음으로써 의롭게 칭해진다’

그 본래 뜻을 잃어버리고, 많이 오용되고, 남용되고 있지 않나...

이런 생각을 특별히 종교개혁주일을 맞이하여 설교자(조광제 목사님)가 하게 된다.



◑‘이신칭의’ 신학에 관하여


성경은 구원에 대해 훨씬 다양한 설명들을 하고 있는데,

그래서 우리가 구원에 대한, 성경의 다양한 설명들을 더 알면 알수록,

더 풍성한 삶을 살 수 있고

또한 더욱 온전한 구원에 이를 수 있을 터인데,


그런 유익들을 오늘날 우리가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해 보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구원에 대해서, 오직 이신칭의 신학에만 갇혀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구원을 ‘이신칭의’로만 설명하지 않는다.

성경에는, 구원을 설명하는 방식이, 80가지가 넘는다.

일례로, 갈라디아서 2:20절에서는 ‘그리스도와 연합’이라고 설명한다.


성경은,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매우 풍성하게

‘구원은 이런 것입니다...’ 라고 설명하고 있다.

거기에서 이신칭의의 복음은 그 80여 가지 중에 단 한 가지에 해당된다.

그 의미는 ‘의롭게 됨은, 인간의 공로가 아니다. 믿음으로다’는 것이다.


우리가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신칭의의 복음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 단 3번(단락)밖에 나오지 않는다. (구절 수로 계산하면 여러 구절 될 것임)


그 많은 성경의 분량에서, 구원이 무엇인지 다양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그 나머지 부분에 대해 귀를 꽉 막고,

오직 ‘이신칭의’에 관련된 몇 구절들만 너무 중요한 것으로 강조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본다. (우리에게는 66권의 성경이 있다.)


그래서 오늘 우리들이 구원 받았다고 하는 성도들의 모습이

정작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과는 동떨어져 있는 그런 결과를 초래하게 되지 않았나..

우리가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이신칭의만 강조되고, 그렇게만 믿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개혁 시대에는 이신칭의 신학이 매우 중요했다.

왜냐하면 가톨릭이 공로주의 구원론을 표방했기 때문이다.


개혁자들은, 그와는 반대로.., 인간의 공로는 소용없고,

오직 믿음으로만,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 당시에는 매우 강조해서 주장해야 했었다.

그래서 이신칭의 신학을 주창/강조하게 된 것이다.

(물론 모든 시대에 강조되어야 하지만, 그 때는 더욱 그랬다!)


하지만 그 다음시대에, 또한 오늘 우리 시대에는

복음에 대한 더 다양하고 풍성한 설명들을

우리가 이해하고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그렇게 될 때 우리 가운데 예수님을 닮아가며

더욱 온전하게 구원을 이루어가는 성도의 모습들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이신칭의’ 말고도, 성도가 구원 받기 위해서, 성경은 다양한 설명을 하는데,  

-‘그리스도와 연합’

-‘그리스도의 신부’

-‘그리스도와 동행’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 받아’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

-‘별세의 삶과 영성’

-‘그리스도의 제자’


-‘충만한 삶’(에베소서)

-‘이기는 삶’(계시록)

-‘십자가를 지고 따르기’

-‘한 알의 밀알로 살기’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기뻐하기’(빌립보서)

-‘역사와 창조의 주재이신 그리스도께 복종’(골로새서)

-‘재림의 소망으로 사는 삶’(데살로니가서)

-‘고난 중에 인내하며 천국을 바라보는 삶’(베드로서)

설교자는 80여 가지가 더 있다고 말한다.


▲‘바른 복음’이 중요하다.

갈라디아서의 전체 주제는 ‘바른 복음’이다.

그 이유는,

갈1:6~10절이 갈라디아서 전체의 핵심주제를 설명하고 있는데,

(나머지 구절들은, 이 단락의 세부 설명 및 변론이다.)


이 단락을, 한 마디로 더 줄이면,

잘 아시는 대로 ‘다른 복음은 없다’ 이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설령 천사라 할지라도 그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갈1:8

라면서, 바울은 아주 강력한 어조로 ‘바른 복음’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도, 종교개혁주일에 즈음하여, 바른 복음에 대해서 깨어 있어야 하겠다.

내가 알고 있는 이 복음이, 과연 성경이 말하고 있는 복음이 맞는지..

이런 부분들을 잘 점검하고, 매우 주의를 기울여서

바른 복음을 믿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왜냐하면, 복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에 따라

    우리 영생(현세의 풍성한 삶 포함)과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올바른 성도의 삶, 열매 맺는 성도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구원론에 대한 다양한 이해가 필요하다. (위에서 말한 80여가지는 아니더라도 8가지만이라도..)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열매 맺는 성도의 삶을 살지 못하는 이유가,

    '이신칭의' 신학에 있다고 본다.

    사실 '이신칭의' 신학은, 믿음만 강조하지, 삶의 열매, 순종의 삶 등은 전혀 강조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신칭의'만 믿는 개신교 성도들에게 있어서, 삶의 열매가 없는 것은,

    어쩌면 신학적으로 볼 때 당연한 결과다.

 

그래서 바른 복음에 대한 관심은,

(비록 이것에 대한 이해가 어렵고 까다로운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중요한 지식이기 때문에,

구원에 관해 바른 지식을 알기위한, 나의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하겠다.


▲사람은, 자기 머리속으로 분명히 이해되지 않는 것은, 몸으로 살아내려 하지 않는다.

과거에 강제노동수용소에서 사람을 가장 미치게 하는 일이,

아무 의미 없이, 하루는 재소자들에게 큰 구덩이를 파게 하고,

그 다음날은 다시 그 구덩이를 메우게 하는 등..

아무 의미 없는 일을 반복해서 하게 하는 것이었다.


사람은, 자기 머리로 분명히 이해되는 일을,

적극적으로 따라가게 되어 있다.

자기 머리로 이해되지 않는 일은.. 따라가지 않는다. 괴로워한다.

물론 아는 대로 다 행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일단 알아야’ 한다.


만약에 이해가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일을 행하고자 한다면,

위선적인 방향으로 나가거나, 종교적 습관들을 내 몸에 형성시켜 나갈 수도 있다.

아직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에, 그냥 습관적으로 종교행사를 반복하는 것이다.


우리가 복음에 대해서도, 문제의식을 갖고서 의논하고 토론해야 하는 이유는,

이해되지 않은 채 습관화된 그 부분들을 그냥 밀고 나갈 때,

즉, 이신칭의 외에는 다른 구원의 원리는 없다!’라며 나아갈 때,


우리는 현재에 풍성한 구원의 삶/성도의 열매 맺는 삶을 살 수 없을 뿐더러

미래에도 온전한 구원을 받을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에 대해, 복음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데까지는 이해하는 것이.. 나 자신에게 좋다.                    ▣ 믿음론 (순종)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