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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자신을 버리는 것’ 2781

LNCK 2010. 12. 8. 14:18

 

◈사랑은 ‘자신을 버리는 것’                 요일3:13~16              10.10.07.설교녹취



◑연어의 고향에서 받은 은혜


제가 가는 길에, 우연히 들릴 기회가 있어서, 연어의 고향 알라스카 캐츠칸을 방문했다.

수백만 수천만 마리의 연어들이 대서양에서 자라서,

자기들이 태어난 시냇물 상류로 모여들고 있었다.

씨름 선수의 팔뚝보다 더 큰 연어들이, 마구 몰려들고 있었다.


그 장관을 바라보다가.. 문득 이런 깨달음이 왔다.


연어는 강 상류에서 부화되고 난 다음에.. 대해로 나간다.

그리고 장성한 다음에, 자기가 태어난 곳으로 돌아온다. (회소본능)

돌아와서는 자기가 태어난 그곳에서 알을 낳는다.

그리고 새끼를 키우고, 자기 몸 전체를 다 새끼의 먹이로 준다.


새끼들은 어미의 살을 먹고 시내에서 성장한다. 성장한 새끼들은 대해로 나간다.

가서는 큰 연어가 되어서 돌아오고,

또 다시 거기서 알을 낳고 자식을 키우고 죽는다.

죽은 다음에 그 새끼 연어는 다시 대해로 간다... 이것이 바로 연어의 삶이다.


저는 이 연어를 주욱 바라보며, 제 인생을 되돌아보았다.


제가 14년 전에 칠레 선교사를 마치고, 이 교회에 부임할 때,

많은 목회자들이 저를 축하해 주셨다.

“허목사, 금의환향 하는구나!” 하시면서, 저를 격려해 주셨다.


그리고 이 교회에서 부임예배를 드릴 때,

김장로님께서 환영사를 하셨는데, 이런 대목이 있었다.

“우리 목사님, 세계로 나갔다가, 큰 연어가 되어서 드디어 돌아오셨다!”


그런 말들을 들을 때, 당시에 제 어깨가 우쭐해지고, 기분이 대단히 좋았다.

제가 어떤 대단한 사람이 되어서, 고국에 돌아온 것 같았다. 그 때 당시에는!


그러나 저는, 이번에 연어가 고향으로 돌아오는 모습을 보면서

새롭게 깨달았다. ‘아하, 그 때 내가 잘못된 생각을 했었구나!’


연어가 돌아오는 모습을 보니,

그들이 왜 돌아오느냐?

영광받기 위해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죽기 위해 돌아온다는 사실을,

연어를 보면서 새롭게 깨달았다.

 

주변 사람들이 ‘금의환향’이니, ‘큰 대어’가 되어 돌아왔다고 축하해주는 말을 들으면서,

그때 제가 잠시 착각했던 것이다.


나는 그 알라스카 강둑에서 연어들을 바라보면서, 생각을 고쳐먹었다.

‘나도 연어처럼, 고향에 돌아와 죽어서

하나님의 교회의 생명을 이어나가고,

열방의 생명을 이어나가고

성도들에게 생명을 이어나가기 위하여

내가 돌아온 것이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서서 기도했다.

‘주님 제가 이제 교회에 돌아가면,

저는 죽고 하나님의 교회의 생명을 이어나가는

연어 목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런 기도를 드렸다.


우리의 모든 삶이 그렇다.

결혼도 사실은 내가 편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죽고, 나를 버려서

그런 나로 인해, 내 자녀들을 바로 키우기 위해

연어처럼 알을 낳고/자식을 키우고 죽는 존재들이.. 바로 가정의 부모이다.


내가 일하는 직장에서 어떤 자리에 있든지,

내가 영광 받기 위해 내가 편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나를 버리기 위하여,

나로 인해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내가 직장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란다.


우리 모두 ‘연어 아빠’, ‘연어 직장인’이 되자!


그 연어들이 돌아오는 바다와 강이 연결되는 곳에서,

수많은 연어낚시꾼들이 낚시를 하고 있었다.


연어들은 빨리 상류로 올라가서 알을 낳고 죽어야 하는데,

그 길목에 어떤 유혹이 도사리고 있었다. ‘낚시꾼들의 미끼’였다.


연어들이 빨리 자기 사명을 감당하러, 강 상류로 올라가야하는 길목에  

낚시꾼들이 진을 치고, 미끼를 드리우니까, 그 아래에 연어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거기서 쓸데없는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낚시꾼들을 연어를 낚으려고 노력하고,

연어들은 혹시 뭔가 먹을 게 있는가.. 머뭇거리고 있었다.

제가 위에서 보니까, 연어의 등에 얼마나 많은 낚시 바늘의 상처가 남아있든지..


한두 번 당했으면 빨리 죽으려 가면 될 것인데,

연어들은 거기 머물러서 계속 쓸데없는 싸움을 하고 있었다.


저는 그 모습을 보면서 묵상했다.

‘나도 자칫 잘못하면, 저 연어처럼, 빨리 올라가서 죽지 않고

자꾸만 그 어귀에서 쓸데없는 감정싸움이나 탐욕투쟁을 하겠구나!’


    또한 여러분, 연어 낚시꾼들이 되지 마시라.

    우리는 서로 함께 격려하며,

    주님처럼 갈보리 골고다로 올라가야할 주님의 사람들이다.


    서로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면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이 가신 골고다 언덕길로 함께 올라갈 사람들이다.

    괜히 남의 십자가 길에, 미끼를 놓는 낚시꾼이 되지 않아야 하겠다.

    (잠언에 그런 ‘올무를 놓지 말라’고 많이 나온다.)




◑큰 그릇이라도 금이 가거나, 구멍이 나면.. 소용없다.


풀러신학교에서

리더십에 관한 강의로 유명한 로버트 클린턴 박사의 강의를 들었는데,

그 강의 중 제 마음속에 한 문장이 비수처럼 와서 박혔다.

‘사역은 존재로부터 흐른다.’


‘무슨 대단한 일을 하느냐?’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하는 사람이 더 중요하다’는.. 뜻이다.


무슨 지위에 올라서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사람이 되느냐..’ 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어떤 대단한 것을 내 그릇에 담느냐’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담을 수 있는 좋은 그릇이 되는 것,

즉 새지 않는 그릇, 깨어지지 않는 온전한 그릇이 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그릇에 만약에 구멍이 나 있다면,

아무리 좋은 것을 그릇에 담아도, 새버리니까.. 아무 소용없다.


우리는 그릇의 재질이나, 그 그릇가운데 무엇을 담느냐에 관심이 많다.

얼마나 비싼 것을 담느냐, 얼마나 많은 것을 담느냐.. 여기에 관심을 많이 갖는다.


요즘은 그런 사람들이 없지만,

우리들 어릴 때, 동네마다 ‘땜장이 아저씨’들이 있었다.

‘솥이나 냄비 양은 그릇, 구멍 난 것 때웁니다!’ 하고 고함을 지르며 다녔다.


오늘 우리는, 나의 존재를 살펴보는 시간이 되기 바란다.

땜장이 아저씨가 구멍 난 냄비를 조심스럽게 살펴보듯이,

이번 연말에 다시 한 번, 내 존재를 조심스럽게 살펴보기 바란다.


존재’에 대해 고민하고 기도하던 저에게

주님은, 제 존재 상태를 검사할 수 있는 중요한 척도 하나를 가르쳐 주셨다.

그릇이 크냐, 작냐.. 그것은 주님의 관심이 아니다.

그릇이 어떤 재질로 만들어졌느냐.. 그것을 주님은 알기를 원치도 않으신다.


주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질문은 이것이다.

‘사랑하느냐, 사랑하지 않느냐?’


아무리 큰 일을 하고 있어도, 사랑으로 하지 않으면.. 금 간 그릇이라는 말씀이다.

아무리 귀한 일을 하고 있어도, 사랑으로 감당하지 않으면.. 구멍 난 그릇이다.


그러나 비록 작은 일을 하고 있지만,

그 사람의 속에 사랑이 있다면

그의 그릇은 온전한 그릇이다.


제가 어느 선교사의 사역지를 방문했던 적이 있다.

아를 돌보고 있는 사람이었는데, 몇 명 안 되는 고아들을 돌보고 있었다.

그의 자동차를 타고 고아원으로 이동하고 있었는데,

그 선교사의 운전석 앞에 이런 쪽지가 붙어있었다.


‘작은 일을, 큰 사랑으로 감당하자! Do small thing with great love’

얼마나 가슴에 와 닿았던 말인지..

(마더 테레사가 자주 인용하던 말이었다.)



◑‘존재’의 시금석은 - 사랑


요일3:14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주님은 우리 마음 상태를 평가하실 때,

너무나 분명한 평가 기준이 여기에 있다. - ‘사랑하느냐, 사랑하지 않느냐?’이다.


여러분, 지금 함께 살고 있는 사람을, 정말 사랑하시는가?

내가 지금 섬기고 있는 사람을, 정말 사랑하시는가?

 

그렇다면 우리 마음 그릇은 문제가 없다. 든든한 그릇이다.


만약에 함께 살고 있는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지금 내 마음 그릇은 금이 가 있는 상태다.

지금 함께 일하는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고 있다면,

내 마음 그릇은 구멍이 나 있다고 보면 된다.


이런 마음에서는 하나님의 은총을 담아내기 어렵다.

주님이 귀한 것을 그 속에 채워주셔도,

금이 가거나, 구멍이 나 있으면.. 그것을 유지할 수 없다.

받는 것도 ‘실력’이지만, 그 받은 것을 유지하는 ‘실력’은 더 어렵다고 하지 않는가.


제가 칠레 선교사로 10년 사역하는 동안에, 제일 큰 문제가 바로 이것이었다.

사역에 문제는 없었다. 점점 확장되어 개척교회들이 세워지고, 학교도 세워졌다.


그런데 문제는, 어느 날부터인가 칠레 원주민들이 꼴보기 싫어지기 시작했다.

사실은, 싫어할 이유가 있었다.

얼마나 거짓말을 잘 하는지.. 숨 쉬는 것만 빼고는 다 거짓말이었다.

또 배반을 얼마나 잘 하는지.. 또 저를 관청에 고발하기도 했다.


이렇게 저렇게 어려움을 당하다 보니까,

어느 날부터인가 정말 칠레 사람들이 꼴보기가 싫어졌다.

뒷모습도 쳐다보기 싫어졌다.

얼마나 얼마나 제가 힘이 드는지..


그런데 그것을 깨닫고 난 순간, 저는 위기에 빠졌다.

‘주님, 주님의 사랑의 복음을 전하러 왔는데, 이들이 미워지니 어찌합니까?’

저는 울며 주님 앞에 부르짖었다.


주님이 저를 새롭게 하시던 그 밤을, 저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주님은 은혜로 제 마음 그릇을 만져주셨다.

밤새도록 주님의 은혜를 받고, 제 마음을 주님 앞에 내려놓았을 때

주님은 다시 저를 새롭게 만들어 주셨다.


아침에 눈을 뜨고, 지나다니는 사람을 보았는데,

얼마나 얼마나 그들이 아름다워 보였든지!


제 마음 그릇이 다시 회복되자,

주님은 제 마음 그릇 가운데 은혜를 담아주셨고, 사랑을 담아주셨고,

또한 귀한 사역들을 담아주셔서,

그 마음으로부터 사역들이 흘러넘쳤던 기억들을.. 제가 지금도 잊지 않는다.


여러분, 우리의 마음 그릇에 문제가 생길 때 나타나는 처음 증상은,

옆에 있는 사람이 사랑스럽지 않는 것이다.

 

여러분, 진정으로 사랑하시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내게 있다면, 내 인생은 희망이 있다.


그 사랑하는 마음으로부터 귀한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서

다른 사람에게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의 승리는 우리 인생 가운데 분명히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에 오늘 하나님 말씀 앞에 자신을 살펴볼 때,

사랑하지 않는다는 결론이 나오면,

그렇다면 지금 내 마음은 금이 가 있다.

다른 중대한 일을 다 내려놓고,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드리자.



◑버리는 것이.. 사랑


주님이 우리에게 ‘사랑하라’ 명하실 때,

주님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되도록.. 어떤 대책을 마련해 놓으셨다.

아무 대책도 없이 무조건 ‘사랑해라’ 이렇게 명하지 않으셨다.

그 대책이란 - 주님이 몸소 ‘당신을 버리셔서 사랑의 본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것은 바로 마지막 순간까지 인간들을 사랑하셨던 사랑의 완성자이시며,

그리스도 그가 보여주신 사랑의 원형, 바로 버리는 사랑이다.

우리 하나님의 사랑은 버리는 사랑이다.


요일3: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우리 예수님은 몸이 깨어지는 경험을 하셨다.

십자가 위에서 몸이, 손이, 발이 다 찢어지셨다.

채찍을 맞아 그 등이 다 찢어지셨다.

가시 면류관으로 그 머리가 찢어지셨다. 그 몸을 다 버리셨다.

그러나 그 마음은 찢어지지 않으셨다.


마음이 매우 외롭고 힘드셨다.

그러나 한 번도, 그 고통을 주는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으셨다.


제자들이 배반했다. 멀리 떠나갔다. 그러나 그들을 원망, 미워하지 않으셨다.

로마 병정들, 자기를 고소하는 유대인들을 미워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이렇게 부르짖으셨다 십자가에서

‘주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옵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당신의 몸을 다 버리시면서도, 끝까지 그들을 사랑하신 것이다.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바로 버리는 사랑이다.

아들까지도 다 버리셨다.

죄인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는 예수님의 마음은

역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릇으로 우리에게 남아있다.


바로 사랑이 넘치는 그 주님의 그릇으로부터,

귀한 복음이 흘러넘쳐서 우리를 다 구원하셨다.

세계 모든 열방을 덮는 놀라운 은혜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버림이 그 출발점이었다.

(서두에 연어의 버림을 기억하시라!)


그가 이루신 모든 사역은, 사랑이 넘치는 그의 마음으로부터 흘러 나왔다.

그는 아무리 궁지에 몰려도, 그 마음 그릇이 깨어지지 않았다.

미움으로 금가지 않았다.


그는 사랑의 그릇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모든 사람에게 흘러 보내는 놀라운 사랑의 주님이셨다.


사랑할 능력도 없이 미움 속에 있는 우리에게 주님은, 사랑에 대하여 보여주셨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를 위하여 내 생명을 버렸어, 내 자존심과 명예를 버렸어,

버리는 게 사랑이야.

너는 그렇게 할 수 없다지만, 나는 너를 위하여 버리는 사랑을 했어,

그래서 이제 너도, 나를 본받아, 버리는 사랑을 할 수 있어! 내가 본을 보여 주었잖아!’


영화 ‘카사블랑카’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상처 받기 위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 상처받는다.’

그 얼마나 깊은 의미가 있는 말인지..


다른 사람은 사랑하다가 상처를 받는다. 그래서 사랑하기를 무서워한다. 포기한다.

여러분 기억하시라.

사랑하면.. 정말 사랑하면.. 상처받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다.


다 버려도 좋다. 우리를 엄청나게 사랑하셔서 모두 버리고 상처 받으신 그 주님,

그 주님은 우리의 희망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상처 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


진정한 사랑은, 상처 없이 되는 법이 없다.

하나님의 아들을 잃어버리신 놀라운 그 사랑, 아들을 보내신 사랑,

자신의 생명을 우리를 위하여 버리신 사랑,

자신의 체면을 버리시고, 명예를 버리시고,

자신의 편함을 다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

 

버리신 주님, 그 상처 받으신 주님이

오늘 우리를 초대하고 계신다.


‘나도 버렸으니, 너희도 버려라!

나도 목숨을 버렸으니, 너희도 목숨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나도 내 명예를 버렸으니, 너희도 너희 명예를,

사랑하기 위하여.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말씀하신다.

 

16절을 다시 한 번 읽어보자.

요일3: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 사 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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