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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2장 2779

LNCK 2010. 12. 7. 12:51

 

◈갈라디아서 2장                          갈2:1~21                10.10.31.설교녹취, 정리   



본문 갈라디아서 2장은, 종교개혁자들이, 종교개혁을 일으키는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성경적 근거가 되는 말씀들 가운데 하나이었다.


 

◑1장 대지 

 

갈1:1~5  인사

갈1:6~10 갈라디아서 주제 설명, ‘믿음 외에 다른 복음(율법)은 없다. 안 된다.’

갈1:11~24 ↓



◑2장의 서론 : 바울이 전한 복음(이신칭의)의 권위


갈라디아서 1:11~2:10절의 배경을 잘 설명해 주고 있어서, 정리해 봅니다.

갈라디아서를 늘 읽어도, 평소에 제 편집자가 잘 몰랐던 내용입니다.


▲1. 바울이 전파하는 복음은 -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깨달은 것이다.       갈1:11~24

그래서 권위가 있다고 말한다.


갈1:1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12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바울의 복음은, 누군가(사도들)에게서 배워서 알게 된 것이 아니었다.

바울은, 자신이 전한 그 복음이,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알려주시고,    

깨닫게 해 주셨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주1)

그래서 매우 권위 있고, 신빙성이 있다는 뜻이다.


바울은 이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예루살렘에 올라간 자신의 행적에 대해서 길게 설명하고 있다.


▶바울이 자신의 예루살렘 첫 번째 방문을 언급하는 이유

-바울의 메시지(이신칭의)는, 사람에게 배운 것이 아니다는 사실을 주장한다.


바울이 예루살렘을 첫 번째 방문했을 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이렇게 설명한다.

                    

갈1:18 (다메섹 도상 체험) 그 후 3년 만에 내가 게바를 심방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저와 함께 15일을 유할새

19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들 보지 못하였노라.


‘15일 동안만 있었고,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만나지 못했다’는 말의 의미는

내가 그 사도들에게서 깊은 복음의 교리를 배울 시간도 없었고,

나에게 그런 것을 가르쳐줄만한 사람들도 없었다..는 사실을 말한다.

게바, 야고보 말고는 만나지도 못했다는 것이다.


    정리하면, 바울이 깨달은 복음의 메시지(갈라디아서의 이신칭의)는

    사람/사도들에게 배운 것이 아니요, 전적으로 그리스도로부터 온 것이다.

    그래서 그만큼 그 메시지의 권위가 확실하다는 뜻이다.



▲2. 바울이 전파하는 복음은 - 사도들에게 인정을 받았다.       갈2:1~10

그래서 권위가 있다고 말한다.


갈2장에서 바울이 자신의 예루살렘 두 번째 방문을 언급하는 이유는,

-거기서 사도들에게 인정을 받았다/교제의 악수를 했다는 것을 주장한다. 

그래서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또 권위가 있다는 것이다.

 

    *관련글 : 바울 연대표 http://blog.daum.net/ygbhygbh/8325827


    ‘교제의 악수’의 원래 목적은,                                 2:9

    예루살렘 교회가, 신생 안디옥 교회를 인정했다는 뜻이다.

    지금 바나바와 바울은, 신생 안디옥 교회의 대표로서,

    안디옥 교회의 부조를 걷어서, 예루살렘 교회를 도우러 간 길이었다.  행11:30


    그러나 바울이, 이미 안디옥 교회에서 가르치던 것은,

    율법의 행위에 의한 복음이 아니고, 믿음의 도에 의한 복음이었다고 볼 때,

    예루살렘 교회가 안디옥 교회와 악수했다는 뜻은,

    예루살렘 교회가, 안디옥 교회를 인정함과 동시에,

    바울이 전한 ‘믿음의 도’의 복음을 인정했다는 뜻이 된다.  주2)

    (그 후로도 약 4년 후, 예루살렘 공의회-행15장-에서 또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된다.) 


2:3, 함께 올라간 헬라인 디도를 억지로 할례 받게 하지 않았다.

이때도 바울은 '율법의 행위'를 따르지 않았다는 뜻이다.

사람이 의롭게 됨은, 율법/할례에 있지 않다는 것을, 바울이 몸소 보여준 것이다.


만약 이때 디도가 할례를 받았으면,

아마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세상의 모든 신자들은 할례를 받아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구원받음은, 믿음+할례(율법의 의식을 행함)로 고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헬라인 디도가 할례 받지 않은 것이.. 그만큼 중대한 의미가 있어서, 바울이 갈라디아서에 쓰고 있다. 


2:6. 유명하다는 이들 중에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저 유명한 이들은 내게 더하여 준 것이 없고

 

‘저 유명한 자들’이란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 같은 사도들이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다.


‘그들이 나에게 더해 준 것이 없다.’

그들로부터 내가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내가 가르침을 받지 않았다는 뜻이다.

(만약 가르침을 받았더라면, 바울이 ‘율법적 유대주의적 복음’을 따랐을 가능성이 있다.

안 배우기 다행이다. 물론 그리스도의 계시 /1;12 때문에, 바울이 흔들리지는 않았겠지만)


바울은, 자신의 복음이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온 신적인 기원을 갖고 있으며,

사람/사도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1장에 이어, 2장에서도 거듭 강조한다.


2:9, 사도들이 나와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했다.

이 사실은 바울이 계시로 받은 복음(이신칭의)을, 인정한다는 뜻이 되겠다.

권위가 있고, 올바르다는 뜻이 된다.


    ※서론이 너무 길어서 죄송합니다만,

    이 부분의 배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갈2장의 본론 : 바울이 전한 복음, 이신칭의 설명    2:11~2:21


▲1. 복음을 따르지 않고, 율법의 행위를 따른 게바를 책망   2:11~18

이 단락은, 안디옥에서 있었던, 게바(와 바나바)의 외식을 예로 들면서,

사람이 의롭게 됨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라고 주장한다.


음식 먹는 문제에 있어서, 베드로가 위선적인 행동을 보이자,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유대인 크리스천들이 들어보자, 베드로가 자리를 급히 피했다.)

바울은, 자신이 베드로를 책망했던 그 경험을 갈라디아서에서 소개하고 있다.

 

베드로가 유대인 신자들이 두려워서 복음대로 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베드로가 '율법의 행위'를 아직 버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2:12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저희가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13 남은 유대인들도 저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저희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이것은, 자신이 베드로보타 더 낫다는 말을 하려는 뜻이 아니고,

복음은, 즉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됨을 설명하기 위함이었다.

↳ 여기서는 ‘이방인과 함께 식사’ (율법에서는 금했음) 를 의미함. 다른 곳에서는 '할례'


그래서 게바를 책망함에 이어서, 즉시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그 유명한 바울이 그리스도께 받은 계시, 이신칭의의 복음이

비로소 2:16절부터 소개되고 있다. 게바의 외식을 빗대어서, 믿음의 도를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이 설교문에서 중점적으로 다루는 것은,

이신칭의가 아니라 (우리가 대강 다 알고 있다. 더 이상 설명 불필요)

이신칭의와 연결되는 그리스도와 연합이다.

 

이신칭의를 믿는 사람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연합까지 나간다는 것이다.  (아래에서 계속 설명)

 

 


▲2. 믿음은.. 그리스도와 연합    2:19~21

지금까지 우리가 가장 많이 들었던 복음의 내용은 ‘이신칭의’이다.

이것이 바울신학의 핵심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래서 루터와 같은 종교개혁자들은, 이신칭의와 관련된 내용이 나오지 않는

야고보서 같은 서신서들을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격하시키기도 했다. (이것은 잘못임)


그런데 이신칭의의 복음만 강조됨으로써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데,

은혜로/믿음으로 구원받는 이 원리를 강조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고

로마 가톨릭 교회의 부패에 맞서 싸우는데 좋은 원리가 되었는데

이것이 어떤 점에서 문제가 되는가 하면,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모습이

전혀 나타나지 않게 만드는 교리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삶의 변화되지 않는 것이다.

‘믿기만 하면 의롭게 된다’고 했더니,

실제로 예수님 닮은 크리스천들이 나오지 않더라는 것이다.


다 마음속으로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라고 고백하고 있지만,

정작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그리스도인은 별로 나오지 않더라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고민을 하게 된다.

왜 성경의 진리를 받아들였음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이루어가는.. 예수를 닮아가는 모습들이 나오지 않는 것일까?


갈2장을 보면, 2:16절에는, 이신칭의를 설명하면서

이어지는 2:19~21절에서는, 그리스도와 연합을 설명하는데,

오늘날 우리는, 전자(이신칭의)는 가르치면서,

후자(그리스도와 연합)은 빼 먹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왜곡된 복음이다.

성경을 문맥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전달하지 않고,

어떤 특정구절만 쏙 빼서 전달한 결과,

결국 바울이 전한 갈라디아서를.. 왜곡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믿음은.. 또 다른 측면은..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주인으로 사는 것이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 받은 것이 사실이고, 내가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믿는 그리스도가 -성령을 통해서-

내 안에 사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요즘 잘 쓰는 말로 ‘내가 죽고 예수가 사는 것’이다. 갈2:20


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이신칭의 -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인데, 거기서 뭘 믿는 것인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것이다.

그 십자가의 의미는.. 위 19절과 아래 20절이 말해 준다.  

그 십자가의 죽음에, 나도 함께 못 박혀 죽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도 함께 부활했다는 것이다.

그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지금 내 안에 (내가 성령을 받음으로) 내주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이신칭의에서 '믿음으로 의롭다 함 얻었다'만 믿어서가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났음을 같이 믿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사는 새 인생을 살게 된다.

이신칭의가 갈2:20절까지 연결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마치는 말

오늘날 너무 많은 사람들이,

이신칭의는 믿는데,

예수님이 내주하시고, 동행하는 인생을 살지 않는다.


그런데 바울은, 갈라디아서2장에서

2:16절에서 이신칭의를 설명하면서,

이어지는 2:19~20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을 설명한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사는 법’이다.


오늘 우리가 종교개혁주일을 맞이해서 반성해야 하는 점은,

예수를 믿는 것(이신칭의)까지는 문제가 없는데,

예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 되는 데(그리스도와 연합)까지는 못 나가는 것이다.


그 이유는,

성경 속에서, 몇 구절만 따서 가르치기 때문이라고 본다.

전체 문맥이나 흐름을 놓치고 있다고 본다.


오늘 한국교회의 문제는, 종교개혁자들이 외쳤던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이신칭의)의 문제가 아니라,

그 사실을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깊은 통찰과 자기 성찰이 없는 것이다.


이신칭의만 강조해서 가르치고,

다른 중요한 성경의 가르침들을 거의 다 무시하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5~6년 전에, 서대문에 있는 감신대학에서

굉장히 중요한 논의가 있었다.

목원대학의 어느 교수님이 발표했는데,


‘이제 한국교회는 이신칭의의 진리를 버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진짜 버려야 된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만 강조해서는 안 된다는 뜻인듯)

이신칭의의 진리 때문에 한국교회가 망한다는 것이다.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는 진리에 너무 익숙해져서

사람들이 제멋대로 산다는 것이다.

 

그 결과 도덕도, 예의도, 존엄성도,

교회에, 성도에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문제의 근원에, 이신칭의의 교리에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교회가 이런 점을 ‘표면적으로 드러내서’ 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신칭의 진리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종교개혁자들의 가르침이기 이전에, 성경의 가르침이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그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 인생의 주인되도록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갈2:20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은,  갈2:16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내 삶의 주인으로 사시는 사람이다.  갈2:20


내가 왜곡되게 알았거나, 주관적으로 잘못 알았거나, 잘못 배웠거나

잘못된 것을 알았으면,

하나님의 말씀의 빛 아래서 겸허하게 그 잘못에서 돌이켜서

새롭게 변화된 길을 걸어가야 할 것이다.

 

 


주1)

이 내용을 오늘 우리가 적용함에 있어서,

이렇게 바울처럼 ‘은혜를 받아서 성령의 지식을 가져야 한다’가 되어야 하는데,

‘봐라, 바울도 직접계시를 받지 안않느냐? 나에게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배움‘이 필요 없다.

내가 깊이 기도해서 직접 계시를 받겠다.. 이렇게 나오면 곤란하다.


바울이 직접 계시를 받은 것은, 

직접 계시를 받으려고 의도해서 그런 시간을 가진 것이 아니고,

어쩌다보니, 하늘에서 직접 계시가 임한 것이다. 자기의 의도적 노력이 아니다.



주2)

    이때 두 번째 예루살렘을 방문한 후,

    1, 2차선교여행을 마시고,

    3차 선교여행 중에 에베소에서 체류할 때(행19장)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기록한 것으로 본다. 

    갈2:1절에서, 바울은 약 10년 전 일을 회상하며, 지금 갈라디아서를 쓰고 있는 것이다.   ▣ 믿음론 (순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