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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데반의 설교 2827

LNCK 2011. 1. 13. 14:58

 

◈스데반의 설교                 행7:1~53                   10.11.21.설교녹취 


 

▲전체 주제, 개요

사도행전 7장을 자세히 읽어보면,

길고 장황해서 그 대의와 주제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으나  주1)

결국 압축하면 유대 , 지도자, 성전에 대한 스데반의 설교이다.

이 3가지 주제에 대해, 당시 유대인들이 갖고 있던 잘못된 개념을, 스데반이 바로 잡고 있다.


①땅이란..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유대 땅’안에서만 역사하는 분으로 아는 것은 잘못이며

이 '택하신 땅' 개념은, 하나님이 유대인 만의 하나님이라는 개념도 자동적으로 포함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온 세상에 역사하시는, 온 세상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을 유대 땅에 가둬서는 안 된다. 

 

②지도자..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세우시고 보내신 지도자를 항상 배척하는 역사라는 것이다.

-종국에는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마저 배척했다는 것이다.  :52


③성전.. 유대인들은 (’땅’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거룩한 성전 안에서만 역사하신다’

잘못된 개념을 갖고 있었지만,

그런 것은 ‘성전 우상화’요, 성령을 거스르는 것이라는 설교이다.  :49~51


스데반은 땅, 모세, 성전의 폐기론을 주장했다고 고소를 받았지만,  :1

사실은 땅, 모세, 성전에 대해서, 올바른 성경적인 진술을 하고 있다. 

 


◑1. 가나안 ‘땅’에 대한 올바른 시각


▲유대인의 착각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살고 있는 가나안 땅이,

하나님이 택하신 특별한 땅이며,

하나님은 오직 이 가나안 땅 안에서만 역사하신다며.. 그 땅을 신성시(우상화)했다.


정답부터 말씀드리면,

하나님은 온 세상의 하나님이시며, 모든 민족의 하나님이 되신다.

not 유대인의 하나님, not 가나안 땅의 하나님이시다.


그럼 왜 가나안 땅과, 유대민족을 특별히 선택하셨는가?

그것은 그들을 도구로, 온 세상에 하나님을 전파하기 위함이었다.


유대인들이 가져야 할 자부심은, 자기들이 도구로 선택되었다는 것인데,

사실 이것은 책임감이요, 사명이었다. 슥8:23, 겔5:5


그러나 실제로는, 그들은 선택된 민족으로서의 책임감은 망각하고,

유대민족 우월사상, 가나안 땅 우월사상.. 이렇게 교만으로 번졌다.

‘선택받았으니까 우리가 최고야!’ 이렇게만 생각하며,

이방인에 대한 선교적 사명을 까맣게 망각하고 있었다.


▲스데반의 교정

하나님을 그들이 거하는 이스라엘 땅에 제한된 하나님으로 인식하면,

그들의 선민적 우월의식이 고취되겠지만 (우리만 선택된 땅에 사는 선민이야!)

나쁜 것은, 하나님을 ‘유대 민족만의 하나님’으로 국한 시키게 된다.


하나님을 ‘유대 땅’에 가두어 버리면,

자동적으로 하나님을 ‘유대인만의 하나님/민족신’으로 가두게 된다.

그렇게 유대 땅을 우상화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스데반의 설교는 그것을 지적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①아브라함의 예

2 스데반이 가로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3 가라사대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하나님이, 아브라함이 메소포타미아(이방 땅)에 있을 때 나타나셔서 말씀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 유대 땅에만 갇혀 있지 않고,

하란을 넘어서, 더 멀리 메소포타미아(갈대아 우르) 그 이방 땅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

(그래서 여러분 부형들이 가나안 땅에 가두는 것은 잘못이다!)


②12조상들의 무덤의 예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굉장히 부정unclean적으로 생각하는데,

스데반은, 요셉을 배척한 조상들을 언급하면서, 충격적인 사실을 하나 밝히고 있다.


15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가 자기와 우리 조상들이 거기서 죽고

16 세겜으로 옮기어 아브라함이 세겜 하몰의 자손에게서 은으로 값 주고 산 무덤에 장사되니라.


세겜은, 당시 유대인들이 터부시하는 사마리아 사람의 본거지다.

사마리아인들은 혼혈아고, 신앙적으로도 이단이고, 그렇게 나쁘게 인식하고 있는데,


지금 스데반은 유대 역사를 인용해서

야곱과 그의 12아들들이 세겜으로 이사 갔고, 세겜에 장사되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15~16


출애굽 할 때, 유대인들은 요셉의 시신을 메고 나왔다.

그때 요셉의 시신과 아울러 그의 형제들

즉 12지파 조상들을 모두 세겜에 묻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사실은 창세기를 아무리 읽어도 이 내용이 안 나온다.

여호수아서에 나온다. 그만큼 스데반이 성경에 대해 능통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우리 조상들은 세겜에 매장되어 있다는 것이다.

지금 여러분들이 멸시하는 그 세겜(사마리아 땅)에

12조상들의 묘지가 있으므로, 그 땅을 부정하게 여길 수 없다는 것이다.


과거 유대인들은(지금까지도 그렇지만), 장례문화.. 이게 굉장히 중요하다.

어디에 묻히느냐, 잘 매장되느냐.. 이것은 축복/저주, 구원/비구원을 가늠하는 척도였다.

(히브리적 문화개념을 말하는 것임)


그래서 12조상들이 세겜에 묻혔다는 것 자체 만으로도

그 땅은 매우 신성한 곳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유대 땅의 하나님’으로 국한시키는 것은,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말은 ‘오직 유대 민족의 하나님’으로.. 절대 국한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맞는 말이다.

그럼 왜 당시 유대인들은 ‘유대 땅의 하나님’으로 국한시켰는가?

괜한 유대선민주의 때문이다. 그걸 주장하다보니까.. 자연히 그렇게 된 것이다.


▲적용

만약 우리가 신앙생활 오래 하다가,

하나님은 ‘우리 교회/교단/민족만의 하나님’으로 착각할 수 있다.

다른 교회/교단/민족은 다 이단이거나 사생아이고,

자기(들)만 하나님의 특별은총을 받는다는 선민사상에.. 쉽게 빠져들 수 있다.


이런 사상을 ‘기독교 근본주의’(부정적 의미)라 부른다.

그래서 자기/자기교회/자기민족에 맞서는 자는.. 무조건 대적이요,

심지어 하나님의 적으로까지 여기며, 당연히 섬멸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사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스데반을 죽였던 것이다.

자기들에 맞서는 자는 다 하나님의 적이다.)


내가 하나님을 열심히 믿는 것은 좋지만,

하나님을 내 안에, 내 교회 안에, 내 민족 안에만 가두는 것은.. 큰 잘못이다.


그러나 역사를 보면, 항상 그런 잘못을 되풀이하여 저질러왔다.

몇 해 전만 해도 ‘이라크=바벨론, 사담 후세인=느부갓네살의 화신’으로 여기고

성전聖戰을 외치던 사람들이 있었고,


오늘날에도 지역교회에 대한 공격을 사탄의 무리로 규정하고,

그들에게 대적하는 일을, 성전聖戰개념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나님을 ‘자기 교회, 자기만의 하나님’으로 국한시킨 결과이다.


사실 오늘날 지역교회들이 과도하게 ‘전쟁수준’으로 자체 방어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교회는 십자가를 지고 죽는 곳이지, 무슨 ‘조직’처럼 세속화 되어서는 절대 안 된다.

그런 人本主義 교회, 그런 지도자에게는 절대 성령이 역사하지 않는다. 절대 역사하실 수 없다.

안타까운 것은, 그런데 이런 인본주의적 교회가 점점 더 늘어가고 있다. 큰 일이다.


그래서 링컨 대통령은 이런 모순을 일찍 깨닫고서

‘내가 과연 하나님 편에 서 있는지..’ 늘 심각하게 고민했던 것이다.

우리도 그런 가정을 해야 한다. ‘내가 하나님의 반대편에 서 있을 수도 있다’



◑2. 유대 역사는.. 선지자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이란 뜻) 배척의 역사


▲1. 요셉을 배척, 7:9~19


:9 여러 조상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았더니 하나님이 저와 함께 계셔서

 

한 마디 '시기하여' .. 로 설명한다.

요셉이 고자질 했더니, 색동옷을 입었더니.. 물론 그런 사소한 이유도 있었을지 모르나,

배척의 핵심 이유는 ‘시기’이다.

스데반은, 그 핵심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그런데 형제들에게 버림받은 요셉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요셉이 된다. (창39장에 2~3번 나옴) 

요셉이 하나님과 함께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해 주셨다.


그래서 자기 가족을 구원하게 되고,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4백년 동안 살면서

어마어마한 숫자로 생육하고 번성해서 중다하게 되는데 발판을 제공했다.


▲2. 모세를 배척,  7:20~40

두 번째 배척한 지도자는 모세이다.


20 그때에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주2)

    그 부친의 집에서 석 달을 길리우더니..


모세가 40년동안 학문을 닦으면서 자기 스스로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되려하다가,

결국 모세는 살인자가 된다.

40년 동안 그는 미디안 광야에서 양떼를 치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다. 주3)


40년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모세를 배척했는데..

      ※7:26~28 및 35절을 지칭하는 듯..

40년 후에 모세를 또 배척했다는 것이다.

       우리 조상들이 모세에게 복종하지 아니하고자 하여 거절하며

       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향하여 :39


하나님은 뜻과 계획이 있어서 지도자를 세우셨는데,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내고 광야 길을 인도하려고 했는데,

그 배척한 결과가 무엇인가?


첫 번째 배척의 결과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탈출하는 것이 연기된 것이고,

두 번째 배척의 결과는,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제대로 경배하지 못하고,

희생제물과 예물을 드리지 않고, 우상숭배의 죄에 빠지게 된 것이다. 7:41~43


▲3. 선지자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했다.   7:52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선지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예수 그리스도)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52


역사의 미스터리는, 하나님께서 지도자를 세우실 때에

매 시대마다, 그 시대 사람들이,

하나님이 세운 지도자를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고 배격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 정도로, 의외의 인물을 세우신다는 뜻도 된다.)


이것은 단지 이스라엘의 역사만 그런 것이 아니라,

세계 역사를 봐도,

또한 TV 사극史劇을 통해 한국역사를 봐도,

‘악화가 양화를 구축kick out하는’ 양상을 잘 볼 수 있다.


서양 역사도 마찬가지다.

거의 간신들이, 권모술수를 총 동원해서

충신을 쫓아내고 배척해 온 것이.. 이 세상의 역사였다.


하나님이 세운 요셉을 배척한 조상들,

그들을 본받아서 그의 후예들은,

하나님이 세운 모세를 배척한 것을 이스라엘 역사의 중심으로 삼았고,

더 나아가서 모세의 후계자들인, 모세의 전통을 받은 선지자들을 배척한 것이

이것이 우리 조상의 역사이다. 이것은 배척의 역사다... 라고 스데반이 설교하고 있다.


▲적용 / 하나님이 세우시고 보내신 사람들, 또는 선지자를 배척하는 것은

그 사람, 그 선지자를 배척한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 심각성은.. 선지자들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배척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충만한 스데반이 말한다.


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똑같이) 하는도다.


52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53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이제는 성령충만한 스데반을 거스려,

그를 고소하고, 그를 돌로 쳐서 죽이고자 했던 것이다.


선지자의 말을 들어야 하는 것은.., 그가 자기 말을 하면.. 들을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고 있다면, 반드시 그 말을 들어야 한다.


‘선지자’란 말의 뜻은 ‘대언자’ 또는 요즘 말로 ‘대변인’이란 뜻이다.

하나님은 직접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하나님께 민감한 선지자들을 택하셔서 그들을 통해 말씀하셨다.


아마 하나님이 말씀하셔도, 선지자가 아닌 사람들, 즉 영적 민감성이 무딘 사람들은,

(이들은 다른 은사가 계발되었을 수 있다. 다만 선지자적 은사는 무딘 것이다.) 

그 하나님의 메시지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을 것이다.


선지자의 말을 안 들으면, 하나님이 뜻을 왜곡하기 쉽다.

하나님을 유대 땅 유대 백성에 국한 시키고,

더 나아가 하나님이 세우신 선지자를 배척하고

결국 어떤 결과에 도달했는고 하니, 성전까지도 우상화 했다. ↙



◑3. 성전의 우상화


스데반은 ‘땅(민족)의 우상화’, ‘선지자들을 배척함’에 이어서

마지막으로 ‘성전의 우상화’를 맹렬하게 지적하고 있다.

그들이 하늘처럼 섬기는 성전은.. 사실은 ‘우상화’라는 것이다.


44 광야에서 우리 조상들에게 증거의 장막이 있었으니

이것은 모세에게 말씀하신 이가 명하사 저가 본 그 식대로 만들게 하신 것이라


이 장막이 광야생활에서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에 들어가서 다윗 때까지 있었다.


46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케 하여 달라하더니

47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48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의  말한 바


49 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


50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위 말씀을, 잘 이해하셔야 한다.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

위 말씀은 성전을 지은 것 자체가 하나님의 뜻을 배반한 것처럼 보인다.


그게 아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지은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이 성전에 대한 태도가 잘못되므로,

결국 성전이 우상화의 도구가 되었다는 뜻이다.


성전의 우상화란.. 성전 안에 하나님을 가두어 버리는 것이다.

하나님은 성전 안에 계시니까,

우리가 성전 안에 계신 하나님께로 찾아와서 희생제사를 드리고,

화목제 번제 속건제를 드리고, 우리가 삶의 현장에서는 아무렇게 살아도 괜찮다...

제사만 잘 드리면 용서를 받으니까..


그런 내용만 강조하면, 결국 제사장들만 배불러지게 되는 것이다.

제사를 많이 드릴수록, 수입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요점은 이것이다.

제사를 잘 드리는 것이 핵심이 아니고, 

제사를 드림을 통해서, 신앙을 무장해서,

평소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는데,


그런 ‘순종의 삶, 삶의 예배’는 강조하지 않고, 무조건 ‘성전 제사’만 잘 드리면,

모든 것이 OK인 것처럼.. 그런 신학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왜곡된 성전관을, 이사야, 예레미야 시대는 물론이고,  

예수님 당시나, 사도행전 시대에도 여전히 갖고 있었다.

이에 스데반은 말한다.


48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의  말한 바.. 주4)


▲적용

지금 한국교회는 예배가 많이 우상화 되어 있다. 구약의 제사처럼!

어떤 신자는, 예배만 잘 참석하면, 하나님이 우리 삶을 보장하고 축복한다고 굳게 믿는다.

예배만 잘 참석하고, 헌금만 잘 드리면, 하나님이 사업을 보장해 주시고,

자손들도 잘 되게 해 주신다는 것이다.

교회 건축을 위해서 우리가 거하게 헌금을 드리면, 하나님이 축복해 주신다... 이렇게 믿고 있다.

 

자기 삶은.. 전혀 변화가 없으면서, 형식적인 예배가 신앙의 본질인줄 착각하고 있다. 


물론 일면 맞는 말이지만,

예배의 우상화, 헌금의 우상화에 빠지면 안 된다.

그런데 알게 모르게, 과거부터 지금까지 우리가 이 우상화의 길을 걸어왔다.

특별히 이 2가지가 강조된 이유는, 그것이 교회성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제대로 예배드리고, 제대로 헌금 드려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과정이고, 그렇게 예배를 통해 무장하고 충전한 다음,

최종 목적은.. 직장에서, 가정에서, 일터에서, 생활에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하나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 .. 기독교 신앙이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변화된 삶을 살고,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 사는 것이다.

 

그런데 더 중요한 목적 ‘직장, 가정, 일터, 생활의 예배, 순종, 자기 삶의 변화’ 등은

슬그머니 감추어버리고,

오직 ‘주일성수, 십일조생활’ 2개만 집중 강조했던 것이다. (이것도 해야 하지만...)


그 결과 성도들은,

주일 지키고, 헌금 드리면.. 자기 신앙은 만사 OK로 여기게 되었던 것이다.

실제로 평소의 삶에 있어서, 하나님과 동행, 교제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면서, 하나님 뜻대로 사는 삶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교인과 교회가, 점점 형식적인 신앙으로 탈바꾸어져 갔다.

새벽기도회도 원래는 기도하려고 모인 자리인데,

기도는 거의 안 하고, 예배드리는 모임으로 점점 변하고 있다.

그래서 새벽기도 마치자마자, 5분 내로 집으로 돌아가는 신자들이 많다.

(물론 새벽기도회에 나온 것은 잘 한 것이지만)


이런 것들은, 어찌보면 ‘예배 우상화’에 빠진 것으로 보인다.

예배 참석이 중요하고, 그 외 다른 것은 다 별로인 것이다.

물론 이것은 참된 신앙이 아니다.


진정한 예배의 완성은 가정에서 직장에서 삶의 현장에서 있다.

헌금의 완성도 삶의 현장에서 있다.

그 정신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성전에 가두어 놓고, 하나님은 유대인을 위한 하나님,

하나님은 유대 땅에만 국한 되어 있다는 이런 잘못된 시각에 사로잡혀 있는 자들에게

스데반이 성경을 옳게 가르치니까,

오히려 스데반을 시기하여, 자기들 (잘못된) 신학에 반대하고, 도전한다고

그를 미워하여, 그를 돌로 쳐죽이고 말았다.


과거 역사에 언제나 있었듯이,

하나님이 세운 선지자들을 배척한 유대 사람들이

그 시대에도, 하나님이 세운 스데반을 배척하고 말았다.


54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이를 갈뿐만 아니라, 스데반이

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57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58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왜 귀를 틀어막았는가?

‘안 듣기로 결심했다’는 것이다.



▲마치는 말

항상 우리는 고민해야 한다. 교회가 건강하게 나아가려면,

또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내가 건강하게 나아가려면,

‘하나님이 세우신 종이 누구인가?’ 기도하며 살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그 음성을 들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면..

그것이 내 방향, 내 계획, 내 사역과 부딪히는 한이 있더라도,

그 사람이 아니라, 그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안 그러면, 우리도 행 7장의 비운의 대적자들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람(신자)들이, 하나님의 길을 오히려 막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 역사는, 행7장에서 보여주는바,

우리는 그렇게 대적하고, 반대하기가 오히려 쉽다는 것이다. 유대 역사가 줄곧 그랬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민족의 역사, 세계역사도 마찬가지다.

항상 순종보다는, 불순종할 가능성이 잠재적으로 더 많다는 사실을

이런 본문을 통해.. 또한 세계 역사를 통해.. 우리가 재인식하자는 것이다.


내가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이 맞다면,

저 분의 사역이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역이 분명하다면,

따라가야 한다.


내 의견과 안 맞아도, 그 의견이 성경과 위배되지 않고 일치하다면,

자기 의견을 내려놓고 따라가야 한다.


내가 성령의 인도를 받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면,

성령의 인도를 받고 있는 사람과 보조를 맞춰서 함께 가게 되어 있다.


혹시 내가 하나님 세우신 종,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과

장기간 보조를 어긋나게 가고 있다면,

지금 나는 성령의 인도를 받고 있지 않는다는 증거이다.


성령님의 역사는 하나이기 때문에,

성령의 인도를 받은 사람들은, 그것이 성령의 역사인지, 아닌지

반드시 분별할 수 있다.


때로는 내 생각, 내 뜻, 심지어 내 이익과 반대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성령님을 따라가야지,

내 이익과 내 체면을 따라갔다가는

‘역사의 죄인’이 되고 말 것이다.


그리고 내 뜻, 내 목적 성취는

99% 잘 되는 것 같다가도, 끝에 1% 때문에 안 된다. 물거품으로 끝난다.

그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 사람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내 의견과 내 생각을 따라가서는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는.. 성취될 가능성이 2%밖에 안 되어도,

98%의 부정적 가능성을 모두 물리치고 반드시 이루어지게 된다.

성령의 역사, 하나님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역사를 따라가야지, 인간의 역사를 따라가면 안 된다.


    특히 지도자들은, 운전을 잘 해야 한다.

    운전수가 방향을 잘 못 잡으면,

    그 기차/버스에 탄 사람들이 모두 잘못된 방향으로 가기 때문이다.


행7장의 교훈은, 유대 역사의 교훈이요,

세상 역사의 교훈이요, 우리 역사의 교훈이다.


이 역사의 교훈을 거울삼아서,

오늘 우리가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51

라는 책망을 듣지 않도록, 

나 자신부터 깨어있어야 하겠다.


.................................

 

 

주1) 제/설교자가 1993년도에 사도행전 주석서를 쓴 적이 있다.

제 기억에, 그 주석서를 쓸 때, 가장 어려웠던 부분이 바로 행7장이었다.

내용이 길기도 하거니와, 그때 제가 행7장을 아무리 읽어봐도,

도대체 그 주제나 문맥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저는 이를 악물고,

제가 마치 산헤드린 법정에 앉아서, 스데반의 설교를 듣는 심정으로

행7장을 테이프로 틀어놓고, 엄청나게 많이 반복해서 들어 보았다.


그러다가 마침내 가닥이 잡혔는데,

오늘 이 내용을 여러분과 함께 나눠 보고자 한다.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을 가나안 땅에 한정키고,

모세 등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에 대해 배척하고

또한 하나님의 임재를 성전에 가두는 것에 대한 잘못을.. 바로잡는 설교였다.


이 구약의 장황한 역사를

행7장에 이렇게 요약해서, 핵심만 일목요연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은

더욱이 ‘사도’도 아닌, ‘집사’인 스데반이 그랬다는 것은.. 우리를 놀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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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2)  행7:20 그때에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그 부친의 집에서 석 달을 길리우더니..


창세기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셨는데,

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문장은, 창1장에 7번이나 나온다.

 

이 문장이, 창세기1장 다음에 최초로 등장하는 곳이, 모세의 탄생 때이다. ↖

 

모세는 하나님께서 ‘새 시대를 위해서 준비하신’

6일 동안 세상 만물을 창조했던 것과 같은 아름다운 존재라는 것이다.

 

위 번역의 더 정확한 뜻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이다.

모세가 그런 존재라는 것이다.

 

이것이 그의 아버지나 어머니가 육안의 눈으로 봐서는 절대 깨달아지지 않았을 것이다.

핏덩어리 애가 뭐가 그리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게' 보였겠는가? 

남의 집 아이를 보면 특히 더 그렇다. 애들은 날 때 보기에 아름답지 않다.

핏덩어리 애를 보고,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것은 영안으로 본 느낌이었다.


우리 자녀들을 볼 때도, 하나님의 눈으로 그들을 쳐다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상상을 초월해서 귀중한 존재를 하나님이 우리 집에 주셨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실 것이다. 아무리 키우는 일이 괴롭고 힘들더라도..


하나님이, 아이를 이 땅에 보내실 때는, 뜻이 있어서 보내셨고

뭔가 이 땅에서 이루고자 하는 뜻이 있어서 보내신 줄 믿는다.


................................


주3)

그런데 이 부분을 소개하면서, 스데반은 ‘모세’를 강조해서 말하는데, 

먼저 개역성경에는 이렇게 되어있다. 

 

35 저희 말이 누가 너를 관원과 재판장으로 세웠느냐 하며 거절하던 그 모세를

(하나님은 가시나무 떨기 가운데서 보이던 천사의 손을 의탁하여 관원과 속량하는 자로 보내셨으니)


36 이 사람이 백성을 인도하여 나오게 하고 애굽과 홍해와 광야에서 40년 간 기사와 표적을 행하였느니라


37 이스라엘 자손을 대하여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


38 시내 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및 우리 조상들과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생명의 도를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


위와 같이 한글 번역의 어순이 뒤죽박죽 되어있는데,

원문에 보면, 35, 36, 37, 38절에

문장의 맨 앞에, 서두에, ‘모세’라는 단어가 제일 먼저 나온다.


35 그 모세를... 저희 말이 누가 너를 관원과 재판장으로 세웠느냐 하며 거절하던 


36 이 사람이 백성을 인도하여 나오게 하고

   애굽과 홍해와 광야에서 사십년 간 기사와 표적을 행하였느니라.

 

37 이 모세를... 이스라엘 자손을 대하여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입니다.


38 이 사람이... 시내 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및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생명의 도를 받아 우리에게 주던 분입니다.


‘이 모세는, 조상들이 거절하던 바로 그 사람입니다.’ 라는 뜻이다. 

문장의 서두에 4번씩이나 모세를 가장 앞세워서, 그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


주4)

48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의  말한 바


이 말씀은 아래 구절과 연결된다.


41 그때에 저희가 송아지를 만들어 그 우상 앞에 제사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하더니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우상에 대한 완곡적 표현이다.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에 이 표현이 종종 나온다.


신자가 절간에 가서 ‘이거 우상이야’ 라고 말하면, 그것은 무례한 언사다.

그러나 ‘이것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이야’ 라고 말하면, 누구도 부인할 사람이 없다.

우상을 이렇게 완곡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조각가가 조각한 것처럼, 건축가가 자기 손으로 만든 것처럼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50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그런데 너희가 나를 위해서 집을 짓는다고

그 성전 안에 나를 가둬 놓는다고?


그래서 솔로몬 성전이 우상화 된 것을,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나니..’ 라고 말씀한다.                   ▣ 선지자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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