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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구원의 목적 2829

LNCK 2011. 1. 14. 14:36

 

◈내 구원의 목적              마28:18~20       10.12.12.설교녹취, 교정예정



◑구원의 ‘확신’ 보다 더 중요한 구원의 ‘목적’


현대교회의 성도들에게 유행하는 개념은 ‘구원의 확신’이다.

내가 구원받은 사실을 확신하기 원한다. 강단에서도 이 ‘확신’이 강조되는데...


저/설교자는 좀 다르게 생각한다.

물론 ‘구원의 확신’을 갖는 것도 성도의 삶에 중요하지만,


그런데 성경을 찬찬히 읽어보면,

성경이 강조하는 것은, 내 ‘구원의 확신’이 아니라, 사실은 ‘구원의 목적’이다.

그 목적이란.. 너를 세상에 복음의 전파자로 불렀다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우리가 구원의 확신 가운데서 안주하고 사는 것이.. 기독교의 본질이 아니다.

내 구원의 목적을 깨닫고,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그릇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구원의 ‘확신’만 너무 강조하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


결혼을 비유해서 설명해 보면,

남녀의 만남과 결혼은 새로운 삶의 시작이 되어야 하는데,

너무 사랑한 나머지 결혼 자체가 목적이 된 경우,

결혼 직후부터 부부싸움 할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남자가 여자를 너무 사랑해서, 오직 결혼만 목숨 걸고 달려왔다면,

일단 결혼식을 올리고 나면, 자기 목적이 성취되었으니까.. 방만해지게 된다.

그런 가운데서 부부싸움이 자주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혼은.. 결혼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남녀가 결혼을 통해 ‘새 삶을 시작한다’는 각오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날마다 겸손함과 초행길을 가는 조심스런 마음으로.. 결혼에 임해야 한다.

그때 그 가정이 평안할 것이다.


결혼을 예로 들었지만, 다시 우리 신앙으로 돌아가서,

‘구원의 확신’을 목표로 신앙생활을 했다고 치자.

그런데 어느 날 ‘구원의 확신’을 받았으면.. 이제 방만해진다.

‘원하던 구원을 받았으니까!’ 이제 다른 데 눈 돌리게 된다.


구원받는 것 자체, 구원의 확신이

우리 신앙의 궁극적 최고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성경이 그렇게 가르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 결혼이 두 사람의 새로운 삶의 시작이듯이,

구원받음도 새로운 천국생활의 시작이다. 다 끝난 것이 아니라, 시작에 불과하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구원의 확신이 아니라,

도대체 나를 왜 구원했는지, 그 구원의 목적을 깨닫는데 있다.

(그 목적은 오늘 본문 마28:18~20절이다.)


성경은 구원 그 이후에 대하여, 더 많이 기록하고 있다고 본다.

성경은 ‘구원 받아라. 그게 끝이다’라고 끝나는 책이 아니라는 것이다.


-구원 받은 이후에 계속되는 순종의 삶이 있으며

-구원 받은 이후에 온전함과 성숙함을 성경은 가르치며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의 증인이 되라’는 것이다.

널 부르신 그 목적을 깨닫고, 그 사명을 완수하고 살아라는 것이다. 

 

교회라는 단어가 (헬) 에클레시아 인데,

우리나라 말로 가르칠 교敎에, 모임 회會자로 번역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의 교회 개념은 유교에서 말하는 서당 개념이다.

교회 敎會란.. 그 한자어 자체로 가르치는 곳, 배우는 곳이란 뜻이다.


저는 그런 번역에 별로 동의하지 않는다.

원래 교회란 말은 하나님이 각자를 불러내어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모임’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걸 뭘로 번역해야 하나? 召會?

지금 ‘용어’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아니다. 용어보다 중요한 것은 그 의미와 본질이다.)


에클레시아의 뜻 부르심은 많되, 택하심은 적다 -클릭-


교회가 ‘부름받은 자들의 모임’이라면,

주님이 왜 우리를 부르셨을까?

그 이유, 목적을 우리가 모른다면,

우리는 관중석의 한 관중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아주 높은데...


구약시대에는 성전에서 제사장이 나팔을 불 때, 회중들이 모여들었다.

신약에 에클레시아란 단어는 구약성경에서 나왔는데,

이 단어는 성전에서 제사장이 나팔을 불 때, ‘그 나팔소리를 듣고 모여드는 회중’,

그 회중을 가리키는 단어다. 이 단어를 신약에서 에클레시아로 번역했다.


구약에서 성전에서 초대했을 때 ‘부름 받아 오는 사람’이 교회이다.

교회라는 뜻은 구약과 신약에 똑같다. 부르심을 받은 자이다.


그러나 신약과 구약의 교회가 다른 점은,

구약시대에는 그 성전에만 주님이 임하셨다.


그런데 신약시대에는, 예수님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일으키리라.. 이것은 주님 자신이 성전 되시고,

몇 천 년 동안 내려왔던 구약의 성전, 그것은 모형과 그림자일 뿐이다.


예수님은 돌아가시자마자, 실제 성전의 모형된 예루살렘 성전의 휘장이 찢어진다.

그 안에만 머무시던 성령이, 이제는 밖으로 우리에게 나오실 준비를 하신 것이다.

그리고 오순절날 부름 받아 모여진 회중들에게 성령이 부어졌다.


이제는 성령, 주님의 임재가 성전에 머무시는 것이 아니라,

성전에 모이는 회중들에게 임하신다.

여러분은 지금 예배드리는 가운데 교회가 어디인가? 여러분 각자가 교회이다.

이 위에서 선 저는, 예배를 섬기는 종이다.

이것이 신약의 개념이다. 주1)


현대 교회는 어쩌면 아직도 구약을 살고 있다.

예배의 프로그램이 개발되고, 여러 가지 방법이 계발될 지라도,

사람 속에 있는 생각의 개념이 구약을 살고 있다는 그 말이다.


여러분, 여러분은 축구장의 관중석, 극장의 객석이 아니라, 여러분들이 선수요, 배우이다.

여러분들이 무대에 올라가서, 그 안에서 살아서 움직여야 하는 선수요, 배우들이다.

저는 여러분의 예배를 돕는자일 뿐이다.


제가 준비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의 불을 꺼트리지 않고,

말씀의 검을 무디지 않게 하고 들고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불과 칼을 손에 잡은 것에 비유함)


그런데 여러분의 믿음으로 준비한 어린 양이 없다면, 이 예배는 성립될 수 없다.

구약은 그래서 성전 중심이었기 때문에, ‘예배자’라는 것이 구약신앙의 컨셉이다.


그러나 신약시대는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신약은 예수님이 ‘제자’라는 컨셉을 말씀하셨는데,

이 컨셉의 뜻은, 마28:18~20에서 보듯이.. 나가서 전파하는 사람이다.


신약의 성도는 ‘제자’이지, ‘예배자’가 아니다.

(‘예배자’가 필요없다는 뜻은 아니고, 가장 중요한 개념은 아니라는 것이다.)

신약을 사는 성도는.. 나가서 전파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각자를 ‘교회’로 부르신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교회/성도들을 보면

‘예배자’로 만족하거나,

‘구원의 확신’으로 다 끝난 것처럼 만족하고 있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제자 안 되면, 유대선민주의에 빠진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은

부활하셔서 승천하기 전에 갈릴리에서 하신 말씀이다.


18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줘서 제자를 삼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서 제자를 삼고

지키게 하여 제자를 삼으라.


이 문장의 주동사가 ‘제자 삼으라’ 이기 때문에,

문장을 풀어서 읽어보았다. ↑


중국의 공산화 혁명이 진행되기 전에 많은 주류 교회들이 있었다.

선교사들이 세운, 지원하는, 주요 교단 교회들이었다.


그러나 공산화(문화)혁명이 시작된 이후,

한 달 만에, 중국의 교회는 표면적으로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한 달도 못 버텼다.


로마제국의 박해를 받은 초대교회는 10명의 황제가 바뀌어도 3백년을 버텼는데,

그러면서 초대교회는 오히려 더 부흥했는데,

그런데 1960년대 초 당시에 중국의 주류교회는, 안타깝게도 단기간에 전멸하고 말았다.

핍박에 와르르 와해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주류 교회가 알지 못했던, 또는 무시했던                *주류mainstream

중국북부 산간지방에 예수 가정Jesus Family라는 소수 교회 교단 와,

중국남부 시골에 소군小群(교단)교회 little flock라고 있었다.

교세도 처음에는 그 소박한 이름처럼 작았다.


그런데 이 작은 교회들은, 중국의 공산화가 시작된 다음부터

오히려 부흥하기 시작했다.

중국에 가정교회가 번지면서 남부 소군교회와 북부 예수가정교회는 서로 하나가 되었다.

그들의 근본이 서로 같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중국의 지하가정교회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래서 문화혁명 이후 20년이 지나서, 1980년 경부터,

중국가정교회의 실체가 외부로 차츰 알려지기 시작했는데,

벌써 그 때 5천만 명 이라는 세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전부 가정교회였다.


중국 문화혁명이 진행된 1달 뒤에, 그 혁명 세력의 주동자 였던 강청 여사는,

‘중화인민공화국에 기독교는 박물관에만 있다.’고 말했다.

서방세계는 그 말에 동의했다.


그러나 그 중국의 공산화 혁명의 주체세력들도 몰랐고,

서방교회도 몰랐던,

참 교회를 지금 우리는 보고 있다.


문화혁명 당시(1966)

모든 선교사는 다 추방되고, 교회는 모두 폐쇄되고, 성경은 모두 불에 탔다.

공식적으로 중국에서 기독교는 금지 되었다.

그래서 완전히 멸절 되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선교사들이 세운 것도 아니요, (선교사의 영향을 받긴 했지만)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등 주류교단도 아닌데,

완전히 성령님이 주도하여 세우신 가정교회가.. 풀뿌리처럼 마구 번졌던 것이다.


여러분, 현재 우리는 어디에 속해 있는가?

공산화 혁명이 진행되었을 때, 사라질, 거대한 조직교회로 가고 있는가? (조직 무시 아님)

아니면 조직은 없을지라도, 아무도 없앨 수 없는,

오히려 핍박을 받으면 받을수록, 그 핍박의 압력 때문에

믿음의 인내가 더 정금처럼 변화되는 그런 생명의 교회로 나아가고 있는가?


그것은 여러분과 제가 주님의 제자의 삶을 사느냐/아니냐.. 거기에 달려 있다.

여러분이 지금 이 자리에 나와서 예배를 드릴 만큼 신앙이 있다면,

여러분의 신앙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줄 힘이 있다.


주님이 그것을 위해서 우리를 구원하셨다.

그냥 ‘네가 구원 받은 확신으로 만족하며 살아라’가 아니다.


▲특별히 선민사상에 빠지면 안 된다.

어떤 목사님이 말하기를, 주님이 자기를 목사로 부르신 이유는,

다른 사람은 그냥 둬도 신앙생활 잘 하는데,

자기는 목사가 아니면 도저히 신앙생활 잘 할 수 없을 것 같으니까..

하나님이 자기를 목사로 불렀다는 것이다.


거의 유머로 들리지만,

정말 주님의 마음을 깨달은 진정한 목회자의 고백일수도 있다.


여러분, 여러분은 왜 구원했는지, 주님의 목적과 이유를 발견케 되시기 바란다.

여러분이 오늘 많은 세상 불신자들 가운데, 예수를 믿은 것은,

우리가 제일 잘 나서 부르신 것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유대 선민주의와 똑같다.)


우리는 제일 부족한 사람들이지만,

주님께서 우리를 도구로 해서 세상을 구원하기 원하시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에게 먼저 은혜를 주시고, 제일 먼저 우리를 부르셨다.


그런데 이런 부르심의 목적을 망각하고,

‘내가 구원 받았네, 축복 받았네’ 이렇게 자랑만 하고 있다면,

그래서 세상에서 아직 안 믿고, 구원 못 받은 사람들을 처량하게 보고, 무시하고 만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그 몹쓸 유대선민주의와 다를 게 뭐가 있는가?


내가 구원 받은 것은, 자부심도 아니요, 자랑도 아니요,

사명이요, 책임이다.

내가 무슨 직분자가 된 것도, 계급장도 아니고, 벼슬도 아니다.

사명이요, 책임이다.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자부심이 넘쳐서 자랑만 하고 있다면,

중국의 주류교회들처럼, 어려움이 오면, 와르르 와해되고 말 것이다.

(공산주의도 핍박이지만, 물질주의, 세속주의의 핍박도 있다.)


교회적으로도 마찬가지다. 직분적으로도 마찬가지다.

내가 잘 나서, 우리가 잘 해서, 우리가 잘 믿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직분을 주시고, 우리를 잘 되게 하신 것이 아니다.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유대선민주의에 빠진 것이다.)


하나님이 부족한 나를 부르신 것은

(성경에 하나님은 부족하고, 미련한 자들을 불러 쓰신다고 하지 않았는가)

다른 이유가 아니다.

나를 통해서, 우리 공동체를 통해서, 세상을 구원하시기 원하심이다.


이런 사명감을 망각하고,

‘내가 머리가 좋아서 그렇지.. 내가 잘 믿어서 그렇지..

우리 조상 적부터 우리 가문이 어쩌구 저쩌구..’ 다 미련한 말들이다.



◑나가서 전파할 때, 내게 능력이 생긴다.


여러분 예수님은 자발적으로 세리와 죄인의 친구가 되셨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성전에만 계시지 않고, 세상으로 나아 가셧다.

구약에서 모범적인 사람은, 성전을 떠나지 않았던 사람들이었다.

사무엘, 여호수아, 특징이 성막을 떠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신약의 모범생들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이다.

특별히 세리와 죄인들이 있는 곳으로.. (잘 가지 않는 곳으로)


마태복음은 승천하기 전에 하신 일을 기록했다.

그런데 마가복음은 승천하신 이후의 일을 기록했다.


막16:19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20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


승천하기 전에는..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말씀을 깨달았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을 가르치셨을 때 사람들이 놀랐다.

‘권세 있는 자의 교훈이로다.’ 하며 그 교훈에 놀랐다.

주님께 나아오는 자는, 말씀과 능력을 통하여 교훈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는,

제자들이 말씀을 깨닫는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그 깨달은 말씀을 갖고서, 예수님의 제자로 세상에 나아가서 말씀을 전하는

제자/증인의 삶을 살았다.


그 때 제자들은 깨닫게 된다.

이 말씀이 능력임을!

그리고 또한 주께서 친히 역사하사,

주님이 세상에 나가는 제자들에게 함께 역사하사,

따르는 표적으로.. 그 말씀이 능력임을.. 주님은 확증해 주셨다. 마16:19~20


우리가 주님께 나아갈 때는 주님께 말씀을 통해 교훈을 배운다.

그러나 말씀을 가지고 세상에 나아가서, 세리와 죄인의 친구가 될 때,

여러분이 말씀을 선포할 때 놀랄 것이다. ‘어, 내가 전하는 말씀에 능력이 있네!’


여러분, 지금 우리의 문제는,

주님께 더 가까이 가지 못해서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구약의 고민이었다.


신약에서 예수님은 제자를 세우자마자 몇 날이 못 되어서

너희는 가서 각 성과 촌에 다니며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고 전하라고 하셨다.

성령이 임하시기도 전이다. outreach를 강조하신 것이다.

 

주님이 말씀하신 것이 이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모르는 교훈을 주노니’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내가 사단을 제어할 권세와, 병들을 제어할 능력과 권세를 주었노니,

너희는 가서!

제자는.. 세상으로 나아가는 사람이다.


여러분, 예수를 주님으로 믿는 자는 권세와 능력이 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그런데 익숙한 구절인데, 그 권세는 현대교인들이 익숙하지 않은 것 같다.

자기에게 권세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에게 이런 권세가 분명히 있다.

이 권세는 오직 나가서, 선포할 때 (제자의 삶을 살 때) 생기는 것이다.

안 나가고, 선포하지 않을 때는.. 그게 잠잘 뿐이다. 그래서 없는 것 같다.


한국 사람들은 ‘은혜 받았어요?’라는 말을 잘 쓴다.

영어로는 ‘Do you receive the grace’ 이런 영어 들어보지 못하셨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은혜 받았어요?’ 이 말은, 한국 신자들만 잘 쓰는 표현이라는 뜻이다.


무속신앙은 뭘 ‘받는’ 것을 좋아한다.

그런데 기독교 신앙은 ‘나누라, 전하라’는 것이다.

제자의 삶의 본질은 ‘받는’ 것이 아니라 ‘나누는’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아주 신앙이 어릴 적부터

나가서 outreach하는 훈련을 시키셨다.

그들을 제자학교에서 졸업을 시킨 다음에 보내지 않으셨다.

공생애 중간 중간에도 그들을 보내셨고,

승천하시면서도 그들이 나가서 전할 것을 명령하고 부탁하셨다.


여러분, 나가서 주님을 증거하시기 바란다. 이것이 제자의 삶의 본질이다.

그 때 놀라운 일(능력)이 일어난다.

여러분의 성격을 뛰어넘어, 주님을 위하여 나눈 얘기에 능력이 임할 것이다.

기대하지도 않은 결과에 깜짝 놀라실 것이다. 


내 안에 있을 때는 능력이 아닌데, 내 속에서 밖으로 나갈 때는

내 말이 능력이 된다.


내 머리 속에 있을 때는 ‘'개념’에 불과한데, 다른 사람에게 전할 때는

‘능력’이 된다. 주께서 친히 함께 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이 확실히 증거되도록

도와주시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예수님 주위에 무리 수 만 명이 있는데, 그들이 흩어질 수도 있는데 내버려 두시고,

제자에게 먼저 길게 말씀 하셨다.

누가복음 12장 전체는 수 만 명에게 말한 설교가 아니라,

매일 같이 다니는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여러분, 부흥이 다수를 통해 온 적은 2천년 교회사에 없다.

부흥은 언제나 소수를 통하여

예루살렘 같은 수도가 아니라, 베들레헴 같은 변방에서,

예루살렘 같은 센터가 아니라, 갈릴리 같은 곳,

사람들에게 버림 받은 곳, 상처 입은 곳, 환란 받은 자들 가운데.. 부흥은 왔다.


부흥은 유족하여 부족함이 없는 곳에 온 것이 아니라.. 가난한 곳에 왔다.

부흥은 기뻐하는 곳에 온 것이 아니라.. 고통 받는 곳에 오셨다.

여러분, 그곳에 나아가시는 주님의 제자들 되시기 바란다.


너무 예배에만 목숨 걸지 마시라. 대신에 제자로서 파송받아 나가는 삶에 목숨 거시라.

예배를 드린 후에 세상으로 여러분이 파송 받아 나가셔야 한다.

나아가서 여러분 머리와 가슴에 있는 것들을, 입으로 발하시기 바란다.

손을 펴서 전달하시기 바란다. 그때 내 생각속의 개념은, 주님의 능력으로 변한다.


여러분의 승리는.. 여기 예배당이 아니라, 거기 현장에서 시작된다.

왜냐하면 휘장은 찢어졌고,

성령은 더 이상 우리가 만들어놓은 건물 안에 머물지 않으신다.

여러분 각자 안에 머물고 계신다.

여러분이 알지 못하지만, 여러분 위에 능력으로 머무신다.

 

............................


주1)

그런데 오늘날의 교회는, 사람이 적건 많건, 마치 축구장에 관중석과 같다.

예배를 드리려 하기 보다는, 예배를 보러 간다.

예배를 본다는 단어 자체가 객석에 앉아있다는 말이다.


여러분, 교회는 이 교회에서 하는 사역자들은,

실재적 교회인 여러분의 예배를 돕기 위해 존재한다.

여러분이 앉아 있는 곳은 지금 객석/관중석이 아니다.

여러분이 앉아 있는 자리 형태는 극장의 객석처럼 되어 있지만,

그런 구조에 속지 마시라. 여러분 각자가 교회이며,

여러분 각자가 신령한 영적 예배를 지금 드리고 있는 것이다.


천명이 모이건, 만명이 모이건, 관중석에 앉아서 관중으로서 드리는 예배는

합당하지 않다.                                                                                     ▣ 제자 양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