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10장 작은 책 계10:1~11 계42강 녹취
▲7인, 7나팔의 재앙의 말미에 삽입 부분이 나온다.
6째 인과 7째인 사이에 ‘삽입 부분’이 등장한 것처럼 ‘계7장 - 흰 옷 입은 사람들’
6째 나팔과 7째 나팔 사이에도 ‘삽입 부분’이 등장한다. ‘계10장 - 작은책’이다.
6째 인을 마칠 때,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계6:17
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 대답이 계7장 ‘흰옷 입은 사람들’이다.
그 진노의 큰 날에, 능히 서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6째 인과 7째 인 사이의 삽입부분이다.)
6째 나팔을 마칠 때, 에도 마찬가지로
이런 무시무시한 나팔 재앙들을 당하고도
‘그 재앙 중에 살아남은 인간들이 회개하지 않더라’ 라고 끝난다. 계9:21
그러나 그 중에도 회개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계10장, 작은책(복음)으로 사는 사람들’이다. (6째 나팔과 7째 나팔 사이의 삽입부분이다.)
그래서 본문 제10장 전체 구절, <삽입부분>을 공부해 보면, 아래와 같다.
◑1절, 힘센 다른 천사
계10:1 내가 또 보니 힘센 다른 천사가 구름을 입고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그 머리 위에 무지개가 있고 그 얼굴은 해 같고 그 발은 불기둥 같으며
▲힘센 다른 천사
계시록에 예수님을 ‘천사’라고 표현한 적이 없다.
그런 면에서, 이 ‘힘센 다른 천사’를 예수님으로 보기는 어렵지만..
그러나 ‘힘센 다른 천사’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고 본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대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계7:1~3에서도, 해 돋는 곳으로부터 올라와서
땅과 바다를 해칠 그런 권세를 가진 4천사에게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고 외친 그 천사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대신하던 천사였다. 여기 10:1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사탄이 ‘떨어지는’ 헬라어 동사는 ‘핍토’이고,
예수님이 ‘내려오시는’ 헬라어 동사는 ‘카타바이노’인데,
계10:1절에서도, ‘내려오는데’를 ‘카타바이노’로 쓰고 있다.
‘예수님’이거나 ‘예수님의 권한을 위임받은 천사’라는 뜻이다. 사탄이 아니다.
▲구름을 입고
구름은, 종종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는, 구름을 타고 오신다고 했다. 마24:30, 계1:7
그러므로 본문의 ‘힘센 다른 천사’가 구름을 입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은
예수님의 위임을 받은 천사이다. 예수님과 같은 권리를 가졌다는 뜻.
오늘날에도 위임장이 있으면, 주인과 똑같은 권리를 행사한다,
▲머리 위에 무지개가 있고,
이런 표현은, 하나님의 현현(나타나심)을 묘사한다.
계4:3 앉으신 이(하나님)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렀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겔1:28 그 사방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 (무지개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한다.)
▲그 얼굴이 빛난 해 같다.
역시 계1장에서, 예수님의 얼굴을 ‘빛난 해’로 표현하고 있다.
계1:16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힘센 다른 천사는) 발이 불기둥 같았다.
계1:15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정리하면, ‘힘센 다른 천사’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대행하는 대리자 천사이다.
그리스도라고 봐도 된다. 구약에도 소돔 성 멸할 때,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천사,
또한 얍복강에서 야곱에게 나타난 천사도.. 때로는 직접 ‘하나님’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여기서 왜 예수님을 <구름, 무지개, 빛나는 해, 불기둥>이란 표현으로 묘사할까?
그런 단어들이 구약의 어디에 쓰였는가 살펴보면,
출애굽할 때, 하나님은 백성들을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보호하고, 인도해 내셨다.
또한 홍해 앞에서 애굽을 심판할 때도, 불기둥, 구름기둥이 쓰였다. 출14:19, 24
또한 무지개는.. 노아의 홍수 때 등장했다.
그 모두가.. 1~6째 나팔의 무서운 재앙 속에서도
힘센 천사 (혹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을 보호하신다는 메시지를 주고 있다.
그것이 바로 <구름, 무지개, 빛나는 해, 불기둥> 같은 상징적 언어들이
여기서 (7나팔의 무서운 재앙 가운데) 등장하는 이유이다.
그 무서운 재앙들 가운데서, 성도들의 안심, 보호, 승리를 상징하는 표현들이다.
◑2절, 그 손에 작은 책을 드셨다.
2 그 손에 펴 놓인 작은 책을 들고, 그 오른발은 바다를 밟고 왼발은 땅을 밟고
▲그 오른발은 바다를 밟고 왼발은 땅을 밟고
이렇게 땅과 바다를 한발씩 동시에 밟았다는 뜻은,
온 세상을 장악하고, 관장하는 존재라는 뜻이다.
▲작은 책
‘작은 책’은 계5장에 나왔던 ‘일곱 인으로 봉한 그 책’이다.
5장에서는 봉인되어 있었지만, 본문 10장에는 열려 있다.
그 동안에 ‘일곱 인’이 다 떼졌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곱 인을 이미 다 공부했다.
(※일곱 나팔의 재앙은,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듯, 그저 하늘에서 울려 퍼진 소리.)
계5장에서 나왔던 책과, 지금 10장에 나오는 책은 <동일한 책>이다. 주1)
그 이유는
(1) 5장과 10장, 양쪽 다, 공통적으로 ‘힘 센 천사’가 등장한다. 5:2, 10:1
같은 책을, 반복해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2) 요한은, 5장에 인봉한 책에 관한 내용과
10장에 작은 책의 내용을
겔2:9~3:3절까지 연결되어져 나오는 말씀을
둘로 나누어서, 각기 인용하고 있다. ↓
에스겔서 |
계시록 |
겔2:9~10 내가 보니 보라 한 손이 나를 향하여 펴지고, 보라 그 안에 두루마리 책이 있더라.
그가 그것을 내 앞에 펴시니 그 안팎에 글이 있는데 그 위에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되었더라.
|
계5:1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책이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이 책은, 일곱 인의 재앙이 기록된 책이다.) |
겔3:1~3 또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발견한 것을 먹으라.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하라 하시기로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를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
계10:9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책을 달라 한즉 천사가 가로되 갖다 먹어 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같이 달리라 하거늘
10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책을 갖다 먹어 버리니 내 입에는 꿀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
위 비교표에서 보듯이
에스겔서 2:9~3:3절을(이어지는 한 단락을)
계5장에서 절반,
계10장에서 절반 인용했다. (히브리 식으로 문체를 쓸 때, 그런 기교법이 있다고 한다.)
계5장의 책과 계10장의 책이.. 원래 같은 책, 같은 내용이란 뜻이다.
▲그래서 5장과 10장의 책을 연결해서 보면
보좌에 앉으신 분(하나님)의 손에서, 5:1
어린양이 책을 취하신다. 5:7
그리고 그 인봉을 떼시고, 책을 펼치신다. 5:5, 6:1
그 책은 힘센 다른 천사에 의해서 취해져서 땅으로 내려오고, 10:1, 2
요한에게 주어진다. 그리고 요한은 그 책을 먹는다. 10:8~9
▲계10장에서 <삽입 부분>이 나오는 목적
그 인봉한 책에는 무엇이 기록되어 있었는가?
그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인이 떼어질
하나님 나라 완성에 대한 비밀, 즉 복음이 적혀 있는 책이었다. 계10:7
왜, 회개를 촉구하는 ‘심판의 일곱 나팔들’ 중간에
이 <복음이 적힌 작은 책>이 등장하고,
왜 그것을 요한이 받아먹는 장면이 등장할까?
심판은 회개를 의도하는 것이다.
그 중간에 복음이 적힌 작은 책이 등장한다는 것은,
인간은, 재앙/심판으로는 절대 회개하지 않더라..는 것이다.
아무리 두들겨 맞아도, 죄인은 회개하지 않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을 바꿀 수 있는 것은, 복음 밖에 없다는 것이다.
오직 타락한 죄인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7가지 재앙의 나팔’이 아니라,
‘작은 책 - 복음’ 이라는 사실을
여기 본문 계10장 ‘삽입부분’에서 한 번 보여주신다.
◑9~10절, 입에는 달지만, 배에는 쓴 맛
9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책을 달라 한즉 천사가 가로되 갖다 먹어 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같이 달리라 하거늘
10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책을 갖다 먹어 버리니
내 입에는 꿀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그런데 그 복음이 적혀 있는 책을, 요한이 받아먹었는데,
입에서는 무척 달았지만, 배에서는 아주 썼다. 무슨 뜻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승리로 말미암아
인이 떼어진 그 복음은.. 우리에게 무척 단 것이다.
그런데 단맛만 있지 않다. 복음에는 쓴맛도 있다.
시19:7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8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
9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규례는 확실하여 다 의로우니
10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이 시편 기자가 말씀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송이 꿀보다 더 달다고 했다..
그러나 실제로 말씀으로 말미암아 우리 삶이 점점 변화되어갈 때,
우리는 말도 못할 고통을 겪게 되어 있다.
생각해 보시라. 수 십 년 동안 습관, 중독되어진 것들을 떼 내는 것이 쉽지 않다.
게다가 우리가 크리스천으로서 삶과 입술로, 바른 복음을 전하게 되면,
세상은 우리를 가리켜 ‘독선적이다. 너만 잘났냐?’ 하며 핍박한다.
정말 그것은 쓴 것이다.
역사를 봐도, 많은 신앙선배들이
신경쇠약에 걸리고, 잠도 못 자고, 괴로워했던 것을 본다.
그 복음이 요구하는 대로 살아낸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다.
용서하고, 사랑하고, 나를 죽여서 남을 살리는 것은.. 복음을 몸으로 살아내는 것은.. 정말 쓴 맛이다.
▲후사는.. 고난도 함께 받아야 진정 후사(공동상속자)이다.
롬8: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함께 한 후사’는, 공동상속자joint-heirs라는 뜻이다. *신클레로노모스
우리들도 예수님과 공동상속자라면,
예수께서 받으신 모든 분깃을, 우리도 똑같이 나누게 된다.
예수님이 받은 것 중에, 안타깝게도 고난이 있다. 그것도 똑같이 나눠야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고난이 꼭 필요한 것이다.
만약 내게 고난이 없다면.. 나는 공동상속자는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내 삶속에, 십자가의 고난이 나타나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도, ‘너희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 것이다.
요한은,
그리스도의 승리와 고난이 적혀 있는 그 책을 받아먹었다.
그 책은 달지만, 또한 쓰기도 했다.
그렇게 달지만, 쓴 것이 우리 크리스천들의 삶이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선지자들이 그런 삶을 살았다. - 달면서도 쓴 삶
예레미야가 말씀을 받아먹었더니, 처음에는 기쁘고 즐거웠다.
그런데 17절에 보니, ‘쓴 맛’을 이렇게 고백한다. ↓
렘15:16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 (단맛)
17 내가 기뻐하는 자의 모임 가운데 앉지 아니하며, 즐거워하지도 아니하고,
주의 손에 붙들려 홀로 앉았사오니, 이는 주께서 분노로 내게 채우셨음이니이다. (쓴맛)
18 나의 고통이 계속하며 상처가 중하여 낫지 아니함은 어찌 됨이니이까?
주께서는 내게 대하여 물이 말라서 속이는 시내 같으시리이까? (쓴맛)
◑11절, 복음을 ‘먹은 자’가 예언한다.
11 저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하더라.
사도요한은, 복음을 먹었더니 ‘입에는 달았지만, 배에는 썼다.’ :9~10
그 쓴맛까지 체험한 후에,
예수님(그 천사)이 말씀하시기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하더라.
라고 말씀 전파의 사명을 주셨다.
에스겔도 마찬가지였다.
에스겔이 그 두루마리 말씀을 먹은 후에 비로소 겔3:3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에게 가서 내 말로 그들에게 고하라. 겔3:4
하시면서, 말씀을 대언하는 사명을 에스겔에게 주셨다.
(먹는다 - 몸으로 살아낸다는 뜻. 에스겔서에는 '쓴맛'이 직접적으로는 안 나온다.)
무슨 뜻인가?
말씀의 단맛만 아는 사람에게는,
그 대언의 사명을 주시지 않으신다.
계10:9~11절의 사도요한이나,
겔3:3~4절의 에스겔은,
그 말씀의 단맛과 쓴맛을 모두 맛본 뒤에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사명을 받았다.
여기서 쓴맛을 맛본다는 것은,
자기가 실제로 그 말씀대로 한 번 살아보니까,
정말 몸이 아플 정도로.. 고통이 심했다는 뜻이다.
누구든지 말씀을 실제로 몸으로 살아내는 데는.. 그런 고통이 반드시 따른다.
◑적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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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하면
지금 본문 계10장은 7나팔 재앙 중의 <삽입부분>이다.
요한은, 7나팔의 재앙을 한창 설명해 가는 중에,
중간에 부연설명이랄까? 참고 설명을 삽입하고 있다.
그 삽입부분의 내용을 크게 설명하면 3가지다.
(1) 7인도 마찬가지지만, 7나팔의 재앙으로는, 사람들이 돌이키지 않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복음(작은 책)을 주신다.
그러나 재앙이 아무 소용없다는 뜻은 물론 아니다.
재앙은.. 미신자들에게는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의 집행이요,
성도들에게는 성화를 통해, 그 믿음을 완성해 가시는 도구이다.
(2) 그런데 그 복음은, 단맛도 있지만, 쓴맛도 있다는 것이다.
교회/성도는 하나님 나라의 영광에 참여하기 전에,
복음을 믿는 성도는 반드시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반드시 그 십자가를 져야 한다.
그리고 주님은,
그 말씀의 쓴맛까지 아는 사람에게
대언자의 사명을 주신다는 것이다.
단맛만 알아가지고서는 안 된다.
(3) 오늘날 복음이,
주로 ‘단맛’ 위주로 전파되고 있다.
전도할 때, 모두 ‘단맛’만 말한다. 그래야 전도가 된다고들 하지만...
이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고의적으로 왜곡하는 것이요,
결과적으로도 그 개인과 공동체에 도움 안 된다는 것이다.
첫인상이 중요한데, 복음에 대한 첫인상이 잘못 박히면.. 평생 그게 고쳐지기 힘들다.
........................................
주1)
혹자는 5장의 ‘책’에 쓰인 헬라어 단어는 ‘비블리온’(작은 책, 작은 문서, 두루마리)인데,
본문 10장에 쓰인 ‘작은 책’에 쓰인 단어는 ‘비블라리디온’(작은 책)이다.
이렇게 쓰인 헬라어가 다르니까, ‘이 두 책은 다른 책이다’ 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헬라어에서는, 두 단어가 거의 같은 뜻이다.
예를 들어, ‘데라’(짐승)의 축소형은 ‘데리온 therion’이다. 단어는 약간 달라도, 같은 뜻이다.
당시의 성경 바깥 문서들을 봐도,
‘비블리온’과 ‘비블라리디온’은 혼용해서 썼다고 한다.
단순히 그 단어가 축소형(비블라리디온)이 쓰였기 때문에,
원래 단어(비블리온)와 다른 뜻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맞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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