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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46강 두 증인의 부활

LNCK 2011. 4. 7. 13:11

◈두 증인의 부활               계11:11~13                계46강 녹취


 

◑11절, 성도의 부활


사흘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저희 속에 들어가매

저희가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계11:11


▲사흘 반

사흘반=삼년반=한때 두때 반때=42달=1260일은

모두 ‘교회시대’를 가리키는 말이요,

좁혀서 보면, 우리 각자의 ‘일생’을 가리키는 표현이라고 앞서 설명 드렸다.


그런데 여러 표현 중에서

‘성도가 당하는 고난’을 표현할 때는.. 짧게 느껴지는 ‘사흘 반’ 또는 ‘삼년 반’을 쓴다.


그러나 (같은 시간이지만)

성도들이 세상에 복음을 전하며 ‘왕같은 제사장’노릇을 한다는 표현을 할 때는

1260일, 또는 42달 등.. 길게 느껴지는 표현을 쓴다.


교회시대 또는 성도의 일생 동안

‘성도가 당하는 고난’ 과 ‘성도가 누리는 영광’은

동시대에 같이 일어난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같은 사건이다.

고난 같은 사건인데.. 그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다.


계시록은, ‘성도가 당하는 고난은 곧 끝난다’는 위로를 주기 위해서

짧게 느껴지는 ‘사흘 반’이란 표현을 쓰는 것이다.


성도는 이렇게 사흘 반 동안,

즉 교회 시대 내내, 또는 우리 각자의 일생에 걸쳐서

세상과 마귀로부터 공격을 당하게 되어 있다.

세상이 보기에는 무참히 밟히는 모습으로 산다.

이것이 바로 계11장 본문에서 말하는 ‘두 증인’의 죽음이다.


그런데 이 ‘두 증인의 죽음’은

특별히 7나팔을 설명하는 가운데, ‘6째 나팔’과 ‘7째 나팔’ 사이에 나온다.

교회시대 내내, 이런 시험, 환란, 마귀의 공격이 있지만,

종말이 갈수록, 더 심화된다는 말이다.


앞서 ‘마귀의 잠깐 놓임(11:7), 마귀의 잠깐 승리’에 대해 설명 드렸다. (11:8~10)

예를 들면, 남북은 늘 대치상태에 있고, 준 전시상태에 있다.

그래서 늘 간첩을 보내고, 여러 공작을 꾸미지만,

특별히 폭격을 가해서, 천안함을 침몰시키거나, 연평도를 타격할 때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잠깐>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다.


성도는 늘 마귀와 영적전쟁의 대치 상태에 있지만,

그러나 <잠깐> 마귀의 집중공격을 받아서, 허를 찔릴 때가 있다.

그러나 그 시간을 제외한 <대부분의 시간은.. 성도의 승리>인 것이다.  :11:5~6


그 <잠깐, 사흘반>의 죽음 후에 성도는 다시 부활한다.

그 사흘반이 혹시 성도의 일생이라 하더라도, 영원에 비교하면 잠깐인 것이다.


생기가 저희 속에 들어가매

‘부활 때’의 모습을 설명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2중예언의 관점에서 오늘날 나의 시대로 끌어와서 해석할 때,

(성경은 모든 시대, 모든 독자들을 위해 쓰여졌다는 전제 하에)


성도가 잠깐 세상에서 마귀의 일격을 당할 때도 있지만,

결국 교회와 성도는 승리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지난 2천년 교회역사요,

또한 지난 4천년 구약성경의 역사였다. 구속사는 반드시 시대마다 이어졌다.


창3:15절의 말씀처럼,

마귀는 교회/성도를 공격했으나.. 고작 그 뒤꿈치를 물어뜯은 것에 불과했고,

교회/성도는 마귀의 정수리 급소를 밟은 것이다.

 

그래서 세상나라들은 역사에 흥망성쇠를 거듭하면서 계속 새로 일어났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영속적으로 계속되었다.

넘어질 듯 하다가도 오뚝이처럼 늘 다시 일어섰다.



◑12절, 세상이 성도의 부활을 구경한다.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오라 함을 저희가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저희 원수들도 구경하더라.  계11:12


▲구경하다                                            *헬. 쎄오레오

이 말은 그저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유심히 살펴서 바르게 깨닫다’는 뜻이다.

to view attentively, take a view of, survey


그제야 ‘어, 저 사람들이 맞았네!’ 하면서

세상이 성도들을, 믿음의 도를 올바로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예수님이 구름을 타고 하늘로 승천하셨다.

‘두 증인’이 부활해서(:11),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간다는 것은,

두 증인(우리 성도 각자)의 삶이.. 

이 땅에서, 예수님의 삶을 그대로 따라가는 ‘각은 예수의 삶을 살게 된다’는 뜻이다.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간다’는 말은 ‘휴거’를 의미한다.   *rapture, 잡아채어짐

예수님의 공중재림 때, 지상에 남아있던 성도들은 휴거/잡아채어짐을 당할 것이다.


‘구름’이 상징하는 바는.. ‘영광’이다.

성도는 종말에 휴거가 되든,

아니면 자기 일생을 마치고, 죽음을 맞이하여 천국에 올라가든..

‘구름을 타고’ ... 즉 ‘영광스럽게’ 하늘나라로 올라간다.


이 세상에서 ‘두 증인’의 삶을 성실하게 살은 성도들은,

‘증거의 삶을 충분히 마치는 동안에는’  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에 :7

사탄의 일격을 받아서 ‘잠시 죽는/패하는’ 때가 있지만, :8~10

반드시 부활하고.. :11

반드시 영광스럽게 죽는다/승천한다. :12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일생이요,

또한 작은 예수들인, ‘두 증인’의 일생인 것이다.


▲성도도 <사흘 반> 동안 죽을 때가 있다. :11

예수님이 장사되어 사흘 동안 무덤에 계신 것처럼,

성도의 삶에도 ‘사흘 반’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알고 신앙생활 해야 한다.


복음을 아무리 순교적 각오를 갖고서 열심히 증거 해도

우리의 삶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울 때가 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에서 복음 전하다가 감옥에 갇혔고,

다윗도 시91편에서 ‘전능자의 그늘’을 시로 지어 불렀다.


오늘날 우리의 최대의 유혹이,

cross 없는 crown을 바란다는 것이다.

자기가 복음을 위해서 헌신하면.. 만사형통 하기만 바라는 것이다.


그런데 복음을 위해 헌신하고, 집 팔아서 헌금했는데도

‘사흘 반’, ‘전능자의 그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만나면

자기 신앙이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등을 통해서, 탄탄한 성경적 기반을 갖추고 나면,

‘사흘 반’, ‘전능자의 그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만날 때,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게 된다. (아래 관련글, '고난의 참된 목적'를 보시라)


‘아하, 이것은 부활/승리를 위한 필수과정이구나!’

‘그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진짜 나에게 나타나고 있구나!’

‘사도바울의 빌립보 감옥 체험이, 나에게도 나타나고 있구나!’

 

‘어떻게 예수를 믿고, 교회 잘 다니는데도 지지리 이렇게 안 풀리냐?’

하고 한탄하면 안 된다. 기복주의적 신앙관을 가지면 안 된다.



◑13절, 성의 1/10이 무어지다.


그 시에 큰 지진이 나서 성 십분의 일이 무너지고, 지진에 죽은 사람이 칠천이라

그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여 영광을 하늘의 하나님께 돌리더라. 계11:13


▲성의 십분의 일(1/10)이 무너지다.

여기서 1/10은 십일조의 개념으로 이해하시면 된다.

십일조는 1/10을 바치지만, 전부10/10를 바친다는 상징으로 드린다.


애굽의 장자들만 죽은 것은, 그 가족의 대표가 죽은 것이다.

모든 가족이 다 죽어야 되는데, 그 상징으로 장자만 대표로 죽은 것이다.


마찬가지로 성 1/10이 무너졌다는 것은,

모든 성이 무너지고, 그 가운데 모든 사람이 죄의 삯으로 다 죽어야 하지만,

그중에 1/10만 상징적으로 죽는 것이다.

(아직 7대접 재앙이 남아 있기 때문에, 세상이 완전히 망하지는 않는다.)


마치 실로암의 망대가 무너졌을 때, 치어죽은 18사람과 같다. 눅13:4

모든 사람이 다 자기 죄로 죽을 형편이지만, 그 사람들만 죽은 것이다.


▲지진에 죽은 사람이 7천이라

열왕기상에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바알을 섬기지 않는 7천명을 남겼다’고 하셨다.

거기서는 ‘7천명’이 남아있는데,

여기서는 ‘7천명’이 죽는다.


엘리야 때의 ‘7천’은 상징적으로 보면, 꼭 7천명이 아니라

‘완전수’ 7에다.. ‘많은 수’ 1000을 곱하여

‘바알을 섬기지 않는, 하나님에 의해 남겨진 모든 자’를 상징한다.


본문의 지진에 죽은 ‘7천명’은

‘하나님이 그 시간에 멸망하기로 작정하신 모든 자’를 의미한다.

그 7천이 죽었다는 것은.. 그 죽기로 작정된 자들이 죽는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해석이 약간 모호하지만, 다음 기회에 더 자세히 살피기로 하고, 일단 넘어갑니다.


▲그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여 영광을 하늘의 하나님께 돌리더라.

‘두 증인’이.. 죽음을 무릅쓰고.. 증거의 삶을 살아내자,

엄청난 재앙 가운데서도 돌이키지 않았던 남은 자들이

하나님께 돌아와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더라... 로

‘두 증인에 대한 증거 계11:1~13’를 마치고 있다.


‘남은 자’는, 앞서 9:20~21절에도 똑같이 쓰인 단어다.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그 손으로 행하는 일을 회개치 아니하고

오히려 여러 귀신과 또는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금, 은, 동과 목석의 우상에게 절하고

또 그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적질을 회개치 아니하더라.


9장에서 ‘남은 자들’은.. 엄청난 재앙가운데서도 회개하지 않았는데,

11장 본문에서 ‘남은 자들’은.. 두 증인의 증거 사역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돌아온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인간은 재앙, 기적 등으로 절대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는다.

오직 ‘복음’에 의해서만 ‘전도자의 미련하게 보이는 증거’에 의해서만 돌아온다.


**또한 ‘두 증인’ 곧 성도의 삶은,

자신들의 비전과 꿈의 성취를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 -증거의 삶, 십자가를 지는 삶- 의 성취를 위해 살아간다.


그래서 본문은 ‘두 증인’의 삶을 마무리 짓는 대목에서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여 영광을 하늘의 하나님께 돌리더라

라고 기술한다.

 

즉, '두 증인'의 삶의 목적은.. 이 세상에서 '죽고-부활함'을 통해서,

그들을 바라보는 세상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즉, 주께로 돌아오는' 

바로 그것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죽는 삶을 증인에게 허락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기독교 신앙은,

우리의 정욕과 세상적 기대..

그걸 이루어 달라고, 우리가 예수 믿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아예 본문은 성도를 ‘증인’(마르투스)이라 부르고 있다.

‘순교자’(마르투스)와 같은 말이다. 계7:6



◑관련글 : 고난의 참된 목적

 

이런 생각 해 보셨는가?

예수님은 이 땅에 죽으시려고 오셨으면, 그냥 쉽게 죽으시면 되지,

뭐 하러 꼭 그렇게 비참하게 무시당하시고, 수난 당하셔야 했나?

 

십자가 지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길게잡아 딱 1주일, 십자가만 지셨으면... 좀 더 편하지 않으셨을까?

왜 공생애 3년 동안 내내.. 배반, 수모, 고난 이런 것까지 비참하게 당하셨는가?


그 이유를 알아야, 우리가 이 땅에서 수난과 고난을 당해야 하는

이유를 알게 된다.


▲고난을 통과해야 하나님이 정하신 뜻이 이루어진다.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  히2:10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히5:8

 

이 구절들을 언뜻 보면, <주님은 고난을 통해 온전하게 되셨다>고 말한다.


이 구절을 잘 이해해야 한다. 보통 오해하기 쉽다.

전에 뭔가 부족한 분이셨는데, 고난을 통해서 온전하게 되셨다는 뜻은.. 옳지 않다.


주님은 영원 전부터 온전하신 분이시다.

그런데 고난과 수난을 통과해서 온전하게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예수님께 시키신 일, 그 (구원) 사역이 온전하게 이루어졌다는 뜻이다.

고난을 통해서!


그러니까 고난과 수난은 하나님이 미리 작정하신 뜻이고,

그것을 반드시 통과해야만, 하나님의 정하신 뜻이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그 정하신 뜻이란? (아래에 계속 설명)

 

▲고난은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기회다.

예수님은, 자기를 돌로 치려는 자들을 향하여

사랑과 용서와 인내라는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주셨다.


자기를 낭떠러지에 밀어 떨어뜨리려고 했던 사람도... 품어주셨다.

이런 하나님의 성품으로 원수들을 대한 것이... 바로 고난이었다.


우리가 워낙 물질주의, 성공주의, 쾌락주의에 빠진 세상을 살다 보니까

고난 하면 - 사업이 망하고, 가난해지고, 이런 것으로 이해하는데...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고난이란,

내가 정말 힘이 있고, 내 성질대로라면 저걸 확 밟을 수 있는데도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야 하는 자로서 그것을 참고,

도리어 그런 수욕의 고난을...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기회로 삼는다> 이다.


▲고난을 통해 ...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빌2:5~11

 

예수께서 자기를 비우시고, 자기를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삶을 사셨더니

다른 말로 ‘고난을 당하셨더니’

위 본문은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더라고 증거 한다.

즉, 주님을 믿게 되었다는 뜻이다.


계시록 11장에 두 증인이 세상에 살면서 입술로 하나님을 증거 하는 삶을 살다가

결국 순교로 비참하게 죽었더니

남은 자들이 돌아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더라고 했다.  계11:13

이 구절도 빌2:11절과 같은 맥락으로 해석해야 한다.

 

즉, 사람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고,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해

두 증인의 순교의 고난을 허락하셨고, 예수님도 그런 고난을 당하신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이 미리 작정하신 뜻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전도, 구원하신다.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려고... 성도에게 고난을 주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비우시고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삶을 살다가 가셨더니,

‘많은 자들이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더라’고 했다. 빌2:5~11


성도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이 우리도 그 자리로 부르신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의 원리인 것이다.

즉, 나를 비우고, 나를 죽여서,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로 말미암아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 땅에서부터, 천국에 가기 전에 벌써, 이런 삶을 연습하는 것이다.

구원받은 사람은, 이것을 반드시 행해야 한다는 - 율법주의, 윤리도덕이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은, 이것이 반드시 자기 삶에 나타나게 되어있다는 - 당위성이다.

즉 나의 고난(죽음)을 통해,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살아나게 되는 역사다.


내 고난의 의미를 깨달으시라!

그러므로 여러분의 삶에 고난이 있다는 것은,

이 고난을 통해, 누군가가 지금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있다는 증거이다.


지금은 그가 누구인지 잘 모르지만,

나중에는, 여러분이 당하는 그 고난의 삶을 통하여

여러분이 용서하고, 인내하고, 참고 하는 그런 고난의 삶을 보면서

지금 누군가가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 고난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그 고난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어지도록 하나님이 미리 정하셨다.


제 친구 중에 봉수라는 이름의 친구가 있다.

20살에 온 몸에 관절이 다 썩고, 거기에 욕창이 나는 희귀한 질병에 걸렸다.

여름에는 거기서 진물이 나온다.


나는 그를 보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어떻게 저런 삶을 살면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살지?’


그는 말했다.

‘나에게 이런 삶을 주신 하나님의 목적과 뜻이 분명히 있을 거야!,

그러므로 내가 또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가야 한다면, 나는 이렇게 살아갈 수 있어!’


나는 깜짝 놀랐다. ‘어떻게 저런 고백을 할 수 있을까?’

그의 모습을 보고, 나와 다른 이들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을 보았다.


우리의 이 짧은 삶 속에서, 우리가 맡은 역할은 다 다르다.

그러나 자기 역할을 감당해 내는 중에, 고통과 수난을 감수하는 것이

그것을 보고,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되더라는 것이다.


▲계시록에 나오는 7나팔 등의 ‘재앙’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이 불신자들에게는 정말 재앙이요, 심판이지만,

성도들에게 그것은 우리의 거룩함을 이루어내고 완성시키는, 하나님의 도구이다.


당시에 성도들이 걸핏하면 끌려가서 사자에게 밥이 되고,

그렇게 극심한 핍박을 당하던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그들이 얼마나 속으로 드문드문 하나님을 원망했겠는가?

그들이 얼마나 자기 신앙에 대해 드문드문 회의적이었겠는가?)

 

하나님은 그들의 고난을 말려주지 않으셨다.

그들이 고난을 당하도록 놔두셨다.


그래서 요한은 계시록을 쓰면서 이런 메시지를 전해 준다.

‘아냐, 너희들은 지금 잘 가고 있는 거야!

예수님이 그렇게 사시다가 가셨잖아!

그러니까 힘을 내, 그게 맞는 거야!’


너희들(두 증인)은 큰 성 길가에서 죽임을 당하지만, 계11:8

그것은 결국 승리하는 길이란다.

그것을 통해서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더라는 것이다.  계11:13


그러면서 동시에 천상에 완성된 그들의 모습을, 계시록 중간에 간간히 보여준다.

그것이 요한계시록이다.

 

▲고난은... 여호와의 뜻을 성취한다.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사53:10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께 그 수난의 삶을 주셨다고 한다. 사53:10

왜 주셨는가?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서>이다.


예수님의 상함과 고난과 찔림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는

유일한 길이었다는 증거다.


오늘도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교회와 성도들에게

그런 수난과 고난의 삶을 주신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살전4:3

우리가 거룩해져야 그 나라는 완성된다는 뜻이다.

거룩하다는 뜻은, 우리 삶 속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자꾸 나타내야 한다는 뜻이다.

 

그것이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다.

그런데 성도는 고난을 통해, 더 거룩해진다.  


그러니까 모든 주제가 한 가지로 귀결된다.

성도의 존재 목적=하나님께 영광=하나님의 뜻=하나님의 형상과 성품을 드러냄

=성도의 거룩함=고난을 주신 목적=죄인들이 돌아옴 


우리가 대단히 잘 나가게 되고, 내가 성공하고,

크게 뭘 해내는 것이 (기독교의 일차적, 근본 목표가 결코) 아니다.


                     *이 단락 출처 http://blog.daum.net/rfcdrfcd/13717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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