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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들의 소명

LNCK 2011. 5. 16. 22:48

 

◈예언자들의 소명             아모스3:7                  출처보기



◑야웨의 ‘소드’                    *히, 소드 : 회의, 집회, 함께 앉음


구약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은 언제나 심판과 구원하는 일과 관련을 맺고 있다.

그가 그의 종들을 부르실 때 심심해서 그냥 부르시는 일은 결코 없다.

커피숍에 앉아 커피한잔 하기 위해 그의 종들을 부르시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그가 그의 종들을 불러내실 때는 사명을 주시기 위함이다.

사명 없는 소명(부르심)은 없다.


이 사실을 잘 표현하는 고전적 구절이 아모스 3:7에 나온다.

“주 야웨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히, 소드 : council, assembly, sitting together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여기서 예언자(선지자)를 하나님의 ‘종’이라 부른다.

종이란, 노예와 같이 아무런 생각 없이 시키는 대로 기계적으로 일한다는 뜻이 아니라,

‘심복’ 心腹 이란 단어가 그 뜻에 더욱 가깝다.

주인의 마음과 뜻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그 뜻을 실행에 옮기는 충실한 부하를 가리킨다.


또한 ‘자기의 비밀’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소드’로서,

히브리어 단어 ‘소드’는 예언자의 소명을 이해하는 열쇠 용어이다.


※히브리어 '소드'가 사용된 구절들 


구약에 21회 나오는데, 그 중 몇 구절만 살펴보면,


*렘23:18, 누가 여호와의 회의 counsel 에 참여하여 그 말을 알아들었으며

         누가 귀를 기울여 그 말을 들었느냐


*렘23:22, 그들이 만일 나의 회의 counsel 에 참여하였더라면

        내 백성에게 내 말을 들려서 그들을 악한 길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게 하였으리라


*창49:6, 내 혼아 그들의 모의 secret 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이것은 여호와의 어전회의가 아닌, 시므온과 레위의 비밀회의)


*시25:14, 여호와의 친밀하심 secret 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암3:7,  위에서 설명했음. ↑


이 용어는 아주 가까운 사람들끼리 모여 회의를 하는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일종의 비밀회의라 할 수 있는데,

그 회의에 참석한 자들만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어떤 안건이 상정되었는지,

어떤 결정들이 내려졌는지를 알게 된다.     


성서학에서는 종종 이 장면을 '천상의 어전회의' divine council 이라 불리는데,

야웨 하나님께서 천상의 왕궁에서

그의 신실한 종들(천사들)을 불러 모아, 회의를 하는 장면이다.


바로 이런 회의(소드)에 참석해서, 그 회의에게 내려진 야웨의 칙령을 받아

지상에 선포하는 사람이.. 예언자이다.


이에 대한 좋은 예가, 왕상22장에 기록된, 예언자 미가야에 관한 이야기다.

미가야 내러티브는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의 차이가 뭔지를 잘 보여주는 고전적 에피소드다.


미가야와 대척점에 있었던 종교인, 거짓선지자인 시드기야와 그의 일당 400명은

이스라엘 왕 아합의 정벌 전쟁에,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며 적극적 지지를 표현했다.


하나님으로부터 아무런 계시나 징조를 받지 않은 채로, 하나님의 이름을 거론하면서

전쟁의 승리를 확신한다고 한 것이다. 그들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올라가소서. 주께서 그 성읍(길르앗 라못)을 왕의 손에 넘기실 것입니다!” 왕상22:6

“여호와의 말씀이, 왕이 이것(철로 만든 뿔)들로 아람 사람을 찔러 진멸하리라 하셨다 하였습니다.” :11

“길르앗 라못으로 올라가 승리를 얻으소서. 여호와께서 그 성읍을 왕의 손에 넘기실 것입니다!” :12


아무리 확신 있게 전쟁의 승리를 선포하였어도, 그들의 말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했다.

“야웨의 소드(סוד)”, 즉 “야웨의 어전회의”에 참석해 본 일이 없는 자들의

허황된 말이었기 때문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예언자 미가야는,

천상에서 열리는 야웨의 어전회의에 참석하여, 그것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과

야웨 하나님의 결정 사항들을, 친히 듣고 보는 경험을 하게 된다. 왕상22:17, 19


미가야가 아합 왕 앞에서 한 말 중에 “내가 보니” 라는 문구가 있다. 왕상22:17, 19

그는 시드기야와 그의 일당들과는 달리,

친히 천상의 어전회의(야웨의 소드)에 참석했던 주의 종이었다.


그는 누구보다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과 경륜과 의지를 경험한 주의 종이었다.

그리고 그가 거기서 받은 야웨의 뜻을 남김없이 그대로 전달하였다.

그의 예언 대로, 현실이 이루어졌다.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거짓 예언자들은 사회적으로 종교적으로 용납되는 직업적 단체에 속한 자들이었다.  

하나님으로부터 분명한 부르심이 없이,

아니 ‘하나님의 어전회의’에 참석해 본 경험이 없이

예언자 학교에 입학한 사람들이 많다는 말이다.


이것은 지금의 문제만은 아니다.

이미 오래전 이스라엘 사회에도 이런 일이 많았다.



◑예언자들의 소명 이야기  


목축업자이며 뽕나무 재배업을 하던 아모스

어느 날 하나님의 강권적 부르심에 압도되어 예언자가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예언자가 되었다는 말이다.


남쪽 유대 출신인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끌려 북쪽 이스라엘로 가게 된다.

그는 예언자의 사명, 즉 하나님이 북 이스라엘에 대해 갖고 계신 비밀스런 계획을

유감없이 선포하게 된다.


그 때 그는 그 땅의 대표적인 ‘종교인’인 아마샤에게 저지를 당한다.

그는 북 이스라엘의 대표적 성소인 벧엘 성소의 대제사장으로서

아모스의 예언자 사역을 방해한다.


그리고 ‘너는 유대 당으로 돌아가서, 거기서 일이나 해서 먹고 살라’고 종용한다.

그러자 아모스가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선지자도 아니요, 선지자의 아들도 아닙니다!”  암7:14


이게 무슨 뜻인가?

“나는 당신이 알고 있는 그런 종류의 직업적 선지자도 아니요,

그런 사람들이 모인 선지자 학교의 생도도 아니란 말이요!”라고 한 것이다.


당시 선지자 학교가 있었던 모양이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신학교라 할까?

그런데 문제는 상당수 학생들이 진정한 소명감도 없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 본 일도 없이,

신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제도화 되어버린 신학교육과 그 기관에서 대량 배출되어

이리저리 잡(Job)을 찾아 헤매는 신학생들의 모습이

더 이상 낯설지 않은 현실인 것은 웬일일까?


문제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배출되느냐, 얼마나 탁월한 학생들을 배출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하나님의 부르심(소명)에 충실한 사람들을 만들어 내느냐가 중요한 관건이다.

 

소명감이 없는 사람은, 장차 자신만의 왕국을 세우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자기를 부르신 하나님의 부르심에 충실하지 못하다면

그것은 모두 가짜이며 위선이며 신성모독이다.

소명! 다시금 생각해야할 중심주제이다.


학자들은 하나님이 어떤 특정한 사람을 불러 예언자로 세우실 때

다음과 같은 일정한 패턴이 있음을 알려준다. 1)


▲1. 하나님께서 그를 찾아오신다.  Divine confrontation

앞으로 자기를 위해 일할 사람을 불러내기로 작정하신 하나님은

그 사람을 직접 대면하신다. 모세의 소명 이야기가 좋은 예이다. 출3:1~3


야웨의 천사가 불타고 있는 가시덤불 가운데서 모세를 만난다. 아무런 생각 없이,

달리 말해 모세는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날 것이라고는

눈곱만큼도 기대하지 않았던 상황아래서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아니 만남의 이니셔티브(주도권)는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있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란 그런 것이다.

자신의 삶의 방향을 180도 바꾸게 된 결정적 주도권이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소명에 있어서 모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나님의 예기치 못한 출현에 모세는 당황하였으며

그는 ‘이 이상한 광경’을 보기 위해 돌이켰다.  출3:3

      여기서 “돌이키다”는 용어는 물리적으로뿐 아니라

      심리적으로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시려는 말씀을 들으려는 자세를 가리키는 말이다.


▲2. 하나님이 사람들 불러 자기의 예언자로 삼으실 때,

하나님께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리시고,

왜 그에게 나타나셨는지 그 이유를 말씀해 주신다. Introductory word


모세의 경우로 말하자면,

하나님은 자기가 모세의 조상들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언약의 하나님이라고 밝히신다.


그리고 자기의 언약백성을 애굽의 폭정에서 구출하시려는 의도가 있다고 모세에게 알리신다. 출3:10


예레미야의 경우, “하나님은 너를 여러 나라를 위한 선지자로 세웠노라” 1:5

“오늘 너를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 위에 세워 네가 그것들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 하였느니라.” 1:10 


▲3. 소명의 셋째 요소로는 공식적인 사명위임이 있다.

동시에 위임된 권한 commission 이 주어진다.


예언자로 부르시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사명이 부과되지 않는 소명은 없기 때문이다.

그에게 주어지는 특수한 임무가 공적으로 부여된다. 거기에 권한/권세도 따른다. 


종종 “가라” “내가 너를 보내노라”와 같은 용어가 사용된다.

모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자, 이제 가거라!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노라.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라.”


예레미야의 경우, “너는 네 허리를 동이고 일어나

내가 네게 명령한 바를 다 그들에게 말하라.” 렘1:17


▲4. 부름을 받은 예언자가 망설이거나 머뭇거리며,

부르심에 적극적으로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objection from the prophet


소극적 반응을 넘어서 “저는 아닙니다.” “저는 할 수 없습니다.”

“저와 같은 사람은 그런 막중한 임무를 감당할 자격이 안 됩니다.”

등과 같은 부정적 반응을 보인다.

 

이런 현상은 이해할 만하다.

 

어떻게 하나님의 엄청난 구원 사역을 감당할 수 있단 말인가?

부름을 받은 자는 자신의 부적격함, 자질이 없음,

중요한 덕성들과 품성이 잘 준비 않았음을 고백하면서 소명에서 물러나려한다.


모세의 경우 역시 “저는 말을 잘 못합니다. 저는 설득력이 없습니다.

저는 대중 연설을 잘못합니다.” 출3:11 등과 같은 변명을 댔다.

충분히 이해할만한 이유들이다. 아마 우리들의 경우도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아주 교만하거나 자기의 자격을 은근히 내세우는 사람일지 모른다.

이사야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아이고, 저는 망했습니다. 저로 말하자면 저는 입술이 더럽고 부정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제가 감히 만군의 왕이신 야웨를 뵈었습니다.” 사1:6


모세를 닮아서인지 예레미야 역시

하나님께서 그를 열방의 예언자로 삼겠다고 하시지만

그는 이렇게 한 발을 뒤로 뺀다.

“아이고, 무슨 소리 하십니까? 주님, 저는 아이입니다. 말을 할 줄 모릅니다.” 렘 1:6


▲5. 사명에 대한 확신을 하나님으로부터 새롭게 다시 얻게 된다는 것이다. Reassurance from God

 

앞서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 반신반의하면서 뒤로 움츠리며 물러갔던 사람,

즉 “내가 할 수 있을까? 나는 자격이 없어. 나는 안 돼.

내게는 특별한 재능도 없고 기술도 없고 언변도 안 되고,

그렇다고 가문이 좋은 것도 아니고 연고도 없고... 나는 별 볼일 없는 존재야”라며

뒤로 물러선 사람에게

하나님은 다시 다가오셔서 확신을 심어주시고 용기를 주신다.


고마우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순종하면서 걸어가게 되는 매 순간마다,

매 발걸음마다 하나님께서 그와 같이 하시겠다는 약속을

하나님께서 연약한 예언자 후보자에게 맹세하신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염려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무슨 일을 당해도 내가 너를 버리지 않겠다”라는 말씀으로 확신시켜 주신다.


▲6. 하나님은 소명을 받은 자에게 어떤 징표를 보여주신다. Signs from God

하나님은 말씀으로뿐 아니라, 가시적 징표로 소명 받은 자를 격려하시고 힘을 북돋아 주신다.


모세의 경우,

결코 죽지도 사그라지지도 타버리지 않는다는 징표로서.. 불타는 가시덤불 형상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21세기에도, 하나님께 진정 소명(부르심)을 받은 사명자는,

그에게서 어떤 초자연적인 역사가, 그 사명수행과 관련해서 필요한 경우, 나타나게 된다.


▲나가면서

이상의 6가지 요소가 구약의 예언자 소명 이야기에서 발견되는 공통점들이다.

물론 모든 예언자를 부르실 때마다, 이상의 6가지 요소가 모두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종합해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그렇다 해도 우리에게는  많은 의문점들이 남는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각 예언자들에게 임했을 때, 어떤 현상이 있었을까?


부르심이란 것이 내면의 목소리인가? 아니면 초자연적 현상을 수반하는 소명인가?

예언자의 의식세계를 상대로 한 것일까, 아니면 그의 무의식 세계를 향한 것일까?

황홀경에 빠지는 현상은 없었는가? 그들이 보았다고 하는 ‘환상’은 어떤 상태인가?

어떤 상태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메시지를 받았는가?


소명과 함께 사명을 받게 되는데, 왜 어떤 예언자는 이상한 짓을 하는가?

이러한 아직도 풀어야할 많은 신비에도 불구하고

예언자의 소명과 사명은 분명하다.


천상의 왕이신 야웨 하나님의 메시지를 온전하게 충실하게 전달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남자와 여자가 예언자였다는 사실이다.


예언자의 직에 있어서 성차별은 없었다.

모두 하나님의 메시지를 분명하고도 역동적으로 선포한 주님의 종들이었다.

하나님은 양 날개가 다 필요하셨을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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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표적인 논문으로는, N. Habel, "The Form and Significance of the Call Narratives,"

ZAW 77 (1965), pp. 297-3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