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교회의 두 가지 오류, 결단주의와 쉬운 믿음 고후13:5 -스크랩 글, 출처보기-
아래 본문에서, ‘복음을 열심히 전파할수록, 교회와 세상은 복음과 더 멀어져 가며,
현실은 더욱 비복음으로 넘쳐난다’고 합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뜻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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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 교회에 가장 탁월한 성경 해석자요, 존경받는 목회자인 존 맥아더 목사는
오늘날 복음주의 교회를 오염시키는 가장 잘못된 두 가지 오류로서
결단주의와 쉬운 믿음을 지적하고 있다.
▶결단주의
결단주의란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향한 모종의 결단적 행위나 확신이 있다면
즉 자신이 믿기로 결심만 하면, 구원을 받게 된다고 믿는 신앙이다.
복음전도집회 같은 곳에서 흔히 목격할 수 있는 현상인데,
복음을 소개받은 사람들이
-마음으로나 행동으로든 구원초청을 받아들였다고 생각하거나,
-결신을 촉구하는 이의 말이나 기도를 따라하거나,
-그의 제안에 따라 설교단으로 나아오거나
공개 석상에서 구원받았음을 인정하고 선포하는 행위에 참여한 사람은
모두 구원을 받았거나,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결단주의를 극단적으로 신봉하는 사람들 중에는
신자의 구원 여부를, 이러한 형태의 결단을 경험한 구체적인 날짜나 상황에 대한
기억의 유무(有無)로써 판단하려 한다.
(즉,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회심/구원/마음의 변화에 관계없이
자기가 자체 생산한 믿음으로, 자기 결심과 결단에 의해서
요3:16절이나 전도지에 제시된 몇 가지 설명을 들은 후에,
영접기도를 따라함으로써, 자기가 구원받았다고 믿는 것이다.
사실 이렇게 ‘결단주의’로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 중에
정확한 데이터는 아니지만 상당수가 신앙생활을 중간에 중단할 것이다.)
▶쉬운 믿음
두 번째로 쉬운 믿음이란
말로써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기만 하면, 구원이 보장되는 것처럼 이해하는 신앙이다.
이것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기독교 복음은 개인적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만 하면
누구든지 구원을 받는 것이 약속되어 있으므로,
복음은 곧 그 사람에게 더 할 나위 없는 좋은 소식(good news)이 된다고 말한다.
이들은 이 간단하고 쉬운 구원을 소개할 목적으로
복음의 메시지를 최소화 내지 축소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공의와 예정과 같은 주제 보다는,
쉽고 간편하게 구원을 받아들일 사람을 위해 마련된
하나님의 멋진 선물과 축복을 소개하는데 관심을 둔다.
특히 쉬운 믿음으로 전도에 효과를 본 사람은 복음을 소개함에 있어서,
불신자로 하여금 구원을 받아들이는 데 장애가 될 만한 부정적인 요소들을
감추거나 제거한다.
예를 들어, 죄와 회개와 심판과 지옥 같은 내용은
전도 때 언급하거나 강조해서는 안 될 금기 사항들이다.
대신에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구원을 선택하는 경우에
세상과 천상에서 누리게 될 행복과 만족과 유익을 우선적으로 제시한다.
(이런 결단주의와 쉬운 믿음이 활개 치는 데는,
지난 1980~90년대에 유행했던 <교회성장주의>가 한몫을 단단히 했다고 본다.
자로 가나 모로 가나, 일단 교회는 건물 크게 짓고, 사람들이 와글거려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교회성장에 긍정적 측면이 많지만,
복음과 교회가 세속주의와 타협하는 어떤 교두보가 되었다고 본다.
교회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모든 인위적 방법을 다 동원했던 것이다.)
▶결단주의와 쉬운 믿음이 결코 진정한 복음일 수 없는 10가지 이유
지난 수십 년 동안 많은 사람들이 교회 성장과 수적 부흥에 골몰하던 사이,
결단주의와 쉬운 믿음은 수많은 목회자들과 성도들에게
보편적인 복음으로 점점 인식되어 왔다.
오히려 이것에 의문을 품거나 비판하는 이는
순수한 복음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불순분자나
교회와 세상에 대해 포부와 자신감이 결여된 나약한 신자로 간주되었다.
이렇듯 이 시대의 교회들이 목청껏 복음을 강조할수록
도리어 진정한 복음으로부터 멀어져 가는 역설적 모순과
그로 인한 참담한 영적 현실을 목도하고 있다.
그러나 표면적으로는 결단주의와 쉬운 믿음 역시
일부 성경 구절을 인용함으로써 그 근거를 마치 성경에 두고 있는 양 행세하지만,
실제로는 복음을 가장한 ‘다른 복음’이다. 왜 그러한가?
① 구원은 인간의 주도적인 선택적 행위의 결과로서 주어진다고 믿는다.
② 인간의 근원적인 죄악과 부패성의 깊이와 정도를 강조하지 않거나 간과한다.
③ 신앙을 갖는 동기가 그릇되어 있으며, 자기만족적 신앙에 집착한다.
④ 성경의 참된 의미를 전체 맥락 속에서 찾지 않고,
부분 혹은 일부 성경 구절만을 인용하여 자기주장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삼는다.
⑤ 역사적인 교회 신앙의 산물인 신앙고백과 교리를 부정하며,
세상적인 유행이나 방법론에 더욱 민감하다.
⑥ 피상적이고 무익한 믿음을 강조함으로써
거짓 확신과 거짓 소망에 물든 종교적 위선자를 양산한다.
⑦ 내적이고 심오한 영적 성숙에 관심을 갖기 보다는
현세적이며 외형적인 현상을 구원의 증거로서 제시한다.
⑧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미명하에
거룩과 경건과 인내의 삶을 성도가 감당해야 할 책임과 의무로서 여기지 않는다.
⑨ 그리스도를 구원을 주시는 분이라고 고백하면서도
전 삶의 영역을 통치하시는 주인으로서 인정하지 않는다.
⑩ 그리스도께서 값없이 주신 은혜와 믿음을 값싸게 취급한다.
▶참된 복음과 거짓 복음, 어느 길에 설 것인가?
생각보다 훨씬 쉽고 간편한 방법과 절차를 통해 누구나 교인이 될 수 있고,
단순히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고백이나 여타의 교회와 관련된 경험을 가진 것만으로도
구원을 받았으며,
삶 속에서 신앙고백이 없는 불신자의 삶과 다를 바가 없음에도
스스로를 구원받은 성도라고 확신하며,
또한 그러한 구원에 대해서 의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향해,
성경은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
엄히 요구하고 있다. 고후13:5
결단주의와 쉬운 믿음은
성경에서 말하는 참된 구원과 바른 믿음의 본질에 위배되며, 불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뿐만 아니라 사도들 그 누구도
이러한 형태의 신앙을 기독교 복음의 핵심으로 제시하거나 용인한 적이 없다.
또한 진리의 증인을 살았던 루터, 칼빈,
그리고 수많은 종교 개혁자들과 청교도들 역시
한결같이 이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불명예스럽게 만드는
무모한 신앙으로 규정하였다.
참된 복음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거짓 복음을 좇을 것인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구원을 증거할 것인가,
아니면 사람을 좋게 할 구원에 만족할 것인가?
교회와 성도라고 자처하는 모든 이들은
이 엄중한 성경적 물음 앞에서 각자 진실하며 확고하게 답해야 할 것이며,
이것은 곧 참된 구원을 위한 최종적인 시금석이 되어 진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김병혁 목사(캘거리 개혁신앙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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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단락 왜 우리를 주목하느뇨? 에서 가져왔음
우리가 요3:16절, 롬10:17절 등을 암송하면서
‘나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습니다.’ ... 그러면 구원 받는 줄 아는데,
이런 개념의 문제점은 .. <자기가 생산하는 믿음>이라는데 있습니다.
자기가 생산하는 믿음은 .. 가짜 믿음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진짜 믿음은 .. <위에서 주시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위에서 주시는 믿음>은.. 회심conversion을 뜻하는데,
철저한 회개를 동반한 ‘삶의 변화’가 반드시 일어납니다.
소위 <청교도식 거듭남>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만,
철저한 회개, 청교도식 거듭남 없이, 즉 회심 없이,
그저 ‘나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 죄를 위해 죽으심을 믿습니다!’ 라고 고백하면
자기가 구원 받은 줄로 아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자기가 생산한 믿음>이며.. 신빙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믿음>은 반드시
-회심(삶의 방향 전환),
-통렬한 회개,
-죄를 미워하고, 거부함
등이 나타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에서 주신 믿음>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이 내용은 Paul Washer 목사의 인터넷 설교에서 들은 내용인데,
앞으로 곰곰이 생각하며 연구해 보려고 합니다./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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