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의 은사 고전12:10, 14:3 11.04.17.설교녹취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고전12:10
◑서론
▲1. 예언의 은사의 정의
웨인 그루던 박사는, 예언의 은사에 대해 이렇게 정의를 내렸다.
그의 캠브리지 박사 학위 논문이 <신약성경의 예언의 은사>이었다.
예언의 은사에 대해서는, 그분이 이 논문이 교과서처럼 읽혀지고 있다.
그 분은 이 책에서 예언을 다음과 같이 정의 내렸다.
‘하나님께서 마음속에 떠오르게 하신 것을, 단순히 인간의 말로 표현하는 것이다’
Speaking merely human words to report something God raised in the mind.
이 정의에서 볼 수 있듯이, 예언은,
그 사람이나 그 상황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즉흥적으로 받아서 전달하는 것이다.
▲2. 예언은.. 성경을 보충하는 것이 아니다.
예언 or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보충하는 것이나, 대신하는 것이 아니다.
혹자는, 예언이 성경에 덧붙이는 것이라 해서, 잘못된 것이라고 반대한다.
만약에 예언이 성경에 덧붙이는 것이거나, 성경을 보충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그런데 ‘예언의 은사’는 그런 것이 아니다.
예언은 성령의 은사 중의 하나로서, 성경과 조화를 이룬다. 아래에서 설명함
또한 혹자는, 성경이 완성되기 전에는, 예언이 필요했겠지만,
지금은 성경이 이미 완성되었기 때문에, 예언의 은사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이렇게 주장한다.
그런데 분명한 사실은
성경 어디에서도.. 성경이 완성되면, 예언이 끝날 것이라고 기록된 곳이 없다.
단 한 군데도 그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다.
◑초대교회.. 예언의 은사가 활발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예언은, 다 성경을 쓰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1. 예언을 통해, 일상의 삶과 사역에 인도함을 받았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예언이, 이렇게 모든 시대에 걸쳐, 모든 사람들에게
객관적으로 적용되는 하나님의 진리나 계시를 말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면, 행11:27에, 아가보가 그 시대에 흉년이 들 것을 예언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헌금을 시작했다.
또한 행21장에,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갈 때
아가보가 예언을 통해서,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경고한다.
이런 예언들은, 성경을 쓰기 위한 예언이 아니라, 일상생활을 인도하는 예언이었다.
그러므로 성경이 완성되었으니, 예언이 이제 더 이상 필요 없다는 주장은.. 맞지 않다.
성경속에서도, ‘일상생활을 인도하는 예언’이 종종 나오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살펴보면..
행13:1에 안디옥 교회가 성령이 말씀하심을 따라, 바울과 바나바를 따로 세운다.
성경에는 ‘성령이 말씀하셨다’고 되어 있지,
어떤 경로를 통해 말씀하셨다고는 안 나와 있다.
그러나 거기에 보면, 교회의 지도자들이 모였는데,
한 부류는 교사들이었고, 한 부류는 선지자들이었다.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13:1
교사들은 말씀을 잘 가르치는 사람들이었고,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전하는 자들이었다고.. 본다.
그래서 성령이 말씀하시되, 어떠한 방법으로 말씀하셨다고는 안 나와 있지만,
많은 사람들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예언하셨다고 본다.
행21장에, 두로에서 형제들이 모여서 기도하다가 성령의 감동,
즉 예언으로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권면했다.
▲2. 예언으로 성도를 위로/격려한다.
행15:32에 안디옥 교회에서 유다와 실라가 선지자로서
예언을 가지고 성도들을 권면하고, 위로했던 것을 볼 수 있다.
유다와 실라도 선지자라 여러 (예언의) 말로 형제를 권면하여 굳게 하고 행15:32
이 말은, 예언을 통해서 형제들을 권면하고 굳게 했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들을 ‘선지자라’ 고 했고, 선지자는 예언하는 사람이니까.
또한 ‘형제를 권면하여 굳게 하고’ 라고 했는데,
이것(권면, 위로)은 예언의 중요한 특징이다. 그래서 유다와 실라도 '예언'한 것이다.
▲3. 사역자에게 예언은 꼭 필요했다.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경계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딤전1:18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으로 말미암아 받은 것을 조심 없이 말며 딤전4:14
※성경이 완성되었다고, 예언이 필요없다고 말하는 것은.. 안 된다.
위의 내용들을 보면, 성경에 나와 있는 예언들은,
모든 시대에, 모든 사람들에게 객관적으로 적용되는
하나님의 진리(성경)를 말하는 게 전혀 아니었다.
위에서 말씀드린 이 예언들은,
그 당시 처해있는 그 사람들에게,
그들이 당면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것들이었다.
당연히 성경이 완성된 오늘날에도,
그러한 예언들이 우리들에게 절실하게 필요하다.
▲4. 고넬료의 예
뿐만 아니라, 성경에 보면 그 당시에 구약성경이 있었는데도,
하나님께서 다양한 경로로(예언으로) 말씀하신 것을 우리는 볼 수 있다.
그 좋은 예가,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고넬료의 집에 보내신다.
이 사건은, 드디어 복음이 이방인에게 증거되기 시작하는 중요한 출발점이었다.
너무나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런데 구약에 이사야서 등에 이미 ‘복음이 이방에 증거될 것’이 기록되어있다.
하나님은 그 구약에 기록된 말씀을 가지고,
베드로에게 ‘이방에 복음을 전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고,
꿈인지 환상인지.. 어떤 예언의 경로를 통해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기록된 말씀(구약)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없어서 그렇게 환상(예언)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다.
성경이 있었지만, 환상(예언)으로 말씀하셨다.
이러한 여러 가지 경우를 볼 때,
<성경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오늘날은 예언이 필요 없다>는 말은.. 맞지 않다.
성경 어디에도 그렇게 쓰여 있지 않다.
◑말씀과 예언의 조화
그러면, 성경말씀과 예언은 어떤 관련이 있는가?
우리 신앙의 기준은 예언이 아니라, 성경이다.
우리 삶의 기준도 예언이 아니라, 성경이다.
▲성경에 예언의 보완
이 성경이 우리의 신앙(신학)과 우리의 삶과 사역을 위한 하나님의 기준이다.
우리 신앙의 기준을, 말씀과 성경에 두어야 한다.
그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포함해서 예언은 뭐냐?
이 성경을 우리에게 적용하는 것이다.
성경에 더하는 게 아니라,
성경을 적용하는 차원에서 예언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주의 종이 되려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야 한다. 이건 예언이 도움을 준다.
부르심을 받았어도.. 목회자인가, 교수인가, 선교사인가.. 구체적인 예언을 받아야 한다.
선교사가 되더라도.. 해외 어느 나라로 갈 것인가, 거기서 무슨 사역을 할 것인가?
거기서 신학교, 긍휼사역, 교회개척, 캠퍼스 사역을 할 것인가?
이런 구체적인 것은 성경에 답이 안 나와 있다. 구체적인 예언의 인도함을 받아야 한다.
이런 예언은, 성경에 뭘 더하는 것이 아니다.
‘복음을 땅끝까지 전파하라’는 성경말씀을,
구체적으로 현실에 적용하고, 구현하는데 있어서.. 예언이 보완적으로 필요하다.
▲이런 하나님의 개인적인 인도를 부인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산다.
‘성경적 원리에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면,
여러분이 좋아하는 대로 행하면.. 그게 하나님의 뜻이다.’ 이렇게 주장한다.
그러니까 자기 마음에 뚜렷한 부르심이 있으면,
목회자, 교수, 선교사.. 아무거나 자기 하고 싶은 것을 선택하면 된다고 하며,
신학교, 긍휼사역, 교회개척, 캠퍼스 사역..
자기가 좋아하는 대로 아무거나 골라서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 제럴드 싯처/ 하나님 뜻이란?
그러나 많은 성공적인 사역자들의 간증을 들어보면,
자기가 ‘분명히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예언/인도함을 받고서 결정했다’ 라고 말한다.
또 예를 들면,
만약 내가 병에 걸리면
‘수술을 할까요, 말까요?’ 의사가 환자인 나에게 동의를 구할 때,
그 해답이 성경에 나와 있지 않다.
이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거나, 예언의 은사를 통해 분변해야 한다.
그래서 말씀의 원리를 갖지만, 성령의 인도를 동시에 받아야 한다.
▲성경은 교리의 기준뿐만 아니라, 우리 삶과 사역의 기준도 된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 심각한 것이,
우리가 ‘말씀 말씀’ 하면서도,
자기 교리를 뒷받침하기 위해서 성경의 중요성을 말할지 몰라도,
삶과 사역에 있어서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데 있어서.. 말씀을 오히려 반대할 수 있다.
원래 성경의 목적은..
올바른 교리를 위한 기준과 표준일 뿐만 아니라
우리 삶과 사역을 위해서도 기준과 표준이 된다.
오직 교리만을 위한 기준으로, 성경을 들이대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그런 교리가 맞다는 뜻도 아니다.)
▲물론 예언이 빗나가거나, 틀리는 등의 부작용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예언을 반대하고, ‘오직 성경'만을 내세운다.
그러므로 모든 예언도, 하나님의 음성도, 성경에 의해 분변되어져야 한다.
성경에 의해, 또한 다른 예언자에 의해 검증되어져야 한다.
◑예언의 유익
▲1. 가장 기본적인 유익은.. 덕을 세우고, 위로하고, 권면하기 위함이다.
사도바울이 예언에 대해 말하면서, 명백하게 말씀한다.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요..' 고전14:3,
어떤 때, A를 위해 기도하다 보면,
‘하나님이 A를 지극히 사랑하신다’는 마음의 감동을 주실 때가 있다.
그래서 ‘하나님이 A를 지극히 사랑하신다’는 메시지를 A에게 나누면,
그가 덕이 세워지고(신앙이 튼튼해지고), 위로를 받게 된다.
그런데 혹자는 ‘아니,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이 당연하지.. 그게 뭐가 예언인가.’
라고 반문하실 것이다.
①예언은, 성경의 내용을 적용하는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이 자녀를 사랑하신다’는 성경말씀을, A에게 적용시킨 것이다.
②무조건 아무렇게나, 제멋대로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신다’고 말하면,
공명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성령의 감동으로, 예언을 받아서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신다’고 말하면,
그게 반드시 공명이 일어난다. 듣는 사람이 공감하고, 진짜 격려를 받게 된다.
(이런 위로, 권면의 단계는 초보적 예언이다.
아래는 좀 더 차원 높은 단계의 예언이다.)
▲2. 예언은 죄를 드러나게 한다.
①예언은, 성경의 내용을 적용하는 것이라고 했다.
성경에 수많은 ‘죄의 지적과 회개의 메시지’가 나온다.
설교자는,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그런 성경을 본문으로 삼아, 개인과 공동체의 죄악을 예언(설교)할 수 있다.
이것이 참 성령의 인도함을 받은 것이라면.. 청중들에게 공감을 일으킬 것이다.
그래서 회개로 인도될 것이다.
이것이 참 성령의 인도함을 받은 것인데.. 청중들이 반감을 일으킬 수도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다스리실’ 것이다.
② ‘예언을 하면..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그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 전파하리라.’ 고전14:24~25
개인적으로 죄를 드러내는 것도, 특별한 성령의 감동으로 그렇게 될 때도 있다.
예언은 보통 위로, 격려, 덕을 세우는 목적이지만 (이 단계는 초보적 예언)
남의 죄를 드러내는 예언은 ‘성숙자 단계’이므로, 초보자는 조심해야 한다.
교회의 질서를 어지럽히지 않는 것이 좋다. 초보자가 잘못된 예언(죄 지적)을 받기도 하기 때문이다.
▲3. 예언은.. 교회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 준다.
안디옥교회가 바울과 바나바를 따로 세운 것은 엄청난 일이었다.
복음이 유대와 사마리아를 지나서, 소아시아와 유럽까지 전파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놀라운 일은, 예언을 통해서 주어졌다.
행13:2,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위에서 ‘성령이 가라사대’ 라고 한 부분은,
성경말씀이 아니라, 예언을 가리킨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예언, 성령의 인도에 민감한 개인과 공동체는
앞으로 나아갈 사역의 방향에 인도함을 받는다.
그런데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한 곳에 오래 머무르고 움직이지 않았던 적이 있었던 것처럼,
성령의 인도하심과 예언이 오래도록 주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때는, 그 자리에 계속 머무르면서, 하던 일을 계속하면 된다.
하나님이 지금 이 시대에 무엇을 행하고 계시고,
우리가 지금 어디에 가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구체적으로 읽어내야 한다.
예언을 분변해서 그 방향성을 받아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예수를 믿어도, 봉사로 섬겨도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지금 오른쪽 다리가 가려운데, 왼쪽 다리 긁어봐야 아무 소용없다.
우리가 분변하지 못하면, 엉뚱한 다리 긁느라 수고하지만.. 결과는 없다.
하나님의 의도와 방향성을 읽고서, 흐름을 같이 타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하셨는데,
노아가 방주는 안 만들고, 집집마다 다니면서 전도했더라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모든 사람에게 ‘예언의 은사’가 기본적으로 조금씩 있지만,
특별히 그것을 많이 받은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또 다른 은사에는 부족하고, 약하다.)
그러니까 자기가 ‘예언의 은사’가 없더라도,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을.. 분변해서.. 따라가면 된다.
지도자 한 사람이, 모든 은사를 골고루 다 가질 수는 없다.
(만약 그렇다면 그는 하나님의 자리에 앉는 것이다.)
겸손한 지도자는.. 다른 사람의 은사를 인정하고.. 그 분야에서는 그를 따라간다.
성령의 인도함과, 주님의 인도함을 따라가기 위해서다.
▲4. 예언은.. 교회를 권고하시고, 책망하신다.
계2장과 3장에 나오는 7교회에 보낸 편지는,
한편으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라 했고, 동시에 성령이 교회에게 말씀하셨다고 했다.
‘성령이 교회들에게 말씀하신 것을 들으라’고 일곱 교회에 빠짐없이 말씀했다.
에베소 교회를 향한 칭찬을 보면, 그 교회가 얼마나 훌륭한 교회인지.. 놀랍다. 계2:1~3
아마 그 에베소 교회가 오늘날 한국에 있으면, 정말 놀라운 교회로 칭송 받을 것이다.
그런 훌륭한 에베소 교회에, 성령께서는 예언으로 책망하시고 권고하셨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계2:4~5
오늘날 우리가 ‘예언의 은사’를 무시하면,
성령의 인도함을 받지 못하는 교회가 될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훌륭한 교회라도.. 곧 그 ‘촛대가 옮겨질’ 것이다.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잘 돌아가고 있는 것 같지만,
예언과 성령의 인도는.. 그 에베소 교회의 부족한 점을 정확하게 짚어내었다.
이 예언은 정말 소중한 유익이요, 은사다.
▲5. 예언은.. 하나님이 세우신 일꾼을 분변하게 한다.
청년 사울이 예수 믿는 자들을 체포하러 다메섹으로 가다가, 실명했다.
하나님은 아나니아에게 ‘예언의 말씀’을 주셨다.
이 사람(사울)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행9:15~16
사실 사도바울이, 자기의 소명을 발견하게 된 결정적 원인이
위 행9:15~16절의, 아나니아가 받은 예언이었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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