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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버이의 초상화

LNCK 2011. 6. 15. 09:43

◈어버이의 초상화               창22:1~14            11.05.08.설교스크랩



◑‘링컨’을 키운 두 어머니


미국의 역대 대통령 중에 존경받는 부동의 1위 대통령은 아브라함 링컨입니다.

그런데 대통령만이 아닌 인류 역사를 통해 가장 당신이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인가?

라는 설문을 미국인들에게 물었더니

1위가 예수 그리스도, 2위가 아브라함 링컨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 빼놓고 가장 존경받는 사람 링컨의 삶,

대체 어떤 영향으로 빚어진 결과 이었을까요?


링컨 자신의 대답을 들어보겠습니다.

“내가 성공을 했다면 오직 천사와 같은 어머니의 덕이다.”


한 링컨의 전기 작가는 또한 이런 증언을 남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링컨에게 위대한 사람이 될 만한 조건은 한 가지도 주시지 않으셨다.

다만 그에게 가난과, 훌륭한 신앙의 어머니만을 주셨을 뿐이다.”


링컨의 첫째 어머니 낸시는 황무지 개척자의 아내로서

또 두 자녀의 어머니로서 척박한 자연 환경과 싸우며, 가난한 시골 생활을 견뎌냈습니다.


그녀는 하루 종일 바쁜 농사일과 허드레 일을 감당하면서도

무엇보다 아들 링컨의 마음속에 신앙과 꿈을 심어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잠시의 틈새가 나면 아들 링컨에게 찬송가를 불러주고

재미난 성경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러나 링컨의 나이 9살이 되던 해 풍토병을 앓다가 세상을 떠나게 되자(당시 34세)

그녀는 어린 링컨의 손을 잡고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깁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이 성경책은 내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란다.

내가 여러 번 읽어 낡았지만 우리 집안의 값진 보물이란다.

나는 너에게 100에이커의 땅을 물려주는 것보다

이 한권의 성경책을 물려주는 것을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한다.


아들아, 너는 성경을 부지런히 읽고

성경 말씀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다오.

이것이 나의 마지막 부탁이다. 약속할 수 있겠니?”


그런데 링컨에게 주어진 놀라운 축복은

그를 낳아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첫 어머니 못지않게 아니 그보다 더 훌륭한 믿음의 새 어머니가

다시 선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의 새 어머니는 어린 링컨을 품에 안고

자주 그의 이름 이야기를 반복했다고 합니다.

 

“네 이름이 왜 에이브, 아브라함인지 아니?

네가 아브라함 같은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원한 우리 가족의 기도란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사람이고 순종의 사람이었다.

이런 아브라함을 보시고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복을 주셨단다.


그래서 그를 믿는 사람들의 조상이 되게 하셨고

그의 후손을 통해 메시야, 예수님까지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셨단다.

그러니 너도 커서 아브라함처럼 신앙심이 깊고

하나님께 칭찬받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니?”


링컨은 자기 이름에 담겨진 소중한 의미를 기억하며

자긍심을 가진 믿음의 사람으로 자랐고

후일 링컨은 이런 어머니가 바로 자기의 아브라함,

자기의 믿음의 조상이었다고 또한 고백하였습니다.

 

   

          두번째 어머니 세라                              링컨의 생가 통나무집 원룸 (모형)



◑본문 설명, 어버이의 초상화


오늘은 어버이 주일, 본문 아브라함의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소중한 믿음을 전수해 주신

우리들의 어버이들의 초상화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자녀의 장래를 절대 포기하지 않고 믿는 어버이들의 초상화입니다.


우리들 자식들이 우리들의 어버이가 기대하지 않은 길에서 방황하고 있었을 때

우리의 스승들은 우리를 포기한 때가 있었습니다.

우리의 친구도 우리를 포기했고

우리의 이웃들도, 우리 사회도.. 우리를 포기한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포기하지 않은 유일한 존재-그들이 우리의 어버이들이 아니었습니까?

본문에서의 아브라함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번제로 아들을 드리라는 명령에는 순종하면서도

하나님께서 아들의 미래를 준비하실 것이라는 믿음의 흔적을 발견합니다.


창22:5절에 보면 아브라함은 자기 종들에게

‘내가 저 산에 가서 아이와 함께 예배하고 아이와 함께 돌아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니 산에서 제물로 바치면 그만이지 어떻게 돌아온단 말입니까?

그러나 이 모순을 아브라함은 믿은 것입니다.


지금 아브라함은, 자녀가 곧 번제물로 바쳐져서 죽을 것이지만,

‘다시 돌아온다’고 자기 종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결코 포기하지 않는 부모의 사랑>을 엿보게 됩니다.

<아들의 미래를 책임지실 하나님을 믿는> 아버지의 사랑을 엿보게 됩니다.


아들 이삭이 묻습니다. “아버지, 제물은 어디 있습니냐?”고.

아버지는 대답합니다.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시리라”


어떻게 그 일이 가능할 수 있겠습니까?

히11:19절이 그 대답을 보여줍니다.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이것이 아브라함의 부활신앙이었습니다.

그가 부활신앙을 갖게 된 것은, '아들 이삭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절박한 심정에서 생기게 된 부활 신앙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변함없는 순종을 확인하시고

이삭대신 제물로 바칠 어린 양을 준비하십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그 어린 양을 번제로 드린 그 땅을

여호와 이레라 불렀다고 기록됩니다.  창22:14

“하나님이 준비하십니다” 이것을 믿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아들 내 딸의 미래를 준비해 주실 것이라고.. 믿은 것입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포기해도 우리의 어버이들은 이것을 믿은 것입니다.


그래서 자식된 우리들이 그래도 여기에 있어 이 만큼의 인생이나마 살아갑니다.

포기하지 않고 우리를 믿어 준 우리 어버이들의 믿음 때문에...


▶2. 자녀를 맹목적으로 사랑해 주신 어버이들의 초상화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우리들의 어버이처럼 자가 아들을 사랑했습니다.

100살이 다 되어 얻은 기적의 아들, 약속의 아들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아들은 자기의 미래요 자기의 희망이었습니다.

본문에 의하면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얼마나 사랑했습니까?


2절에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 과연 얼마나 사랑했을까요? 정답은 <우상이 될 만큼>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더 이상 그 아들이 우상이 되지 않게 위하여

아브라함을 시험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브라함만 그럴까요? 우리들의 어버이들은 달랐을까요?

우리가 한창 자라나던 계절 내 이름을 부르며 내게 다가오던 우리들의 어버이에게

나도 그들의 미래, 그들의 희망, 그들의 우상이 아니었나요?

그것은 거의 맹목적이고 절대적인 사랑이 아니었나요?


시인 박목월이 그의 시 <모성>에서 정의한 것을 들어보십시오.

“그것을 무엇이라

명명할 것인가

다만 어린 것의 손을 잡고

안으로, 보다 높은 세계로

맹목적으로 달리는

안으로 타오르는

이 꺼질 날 없는 불덩이


다만 그 어린 것의 손을 잡고

보다 높은 삶의 세계로 줄달음치는

그것(모성)은 회의하지 않는다.

그것은 망설이지 않는다.

다만 줄달음치는

이 백열적인 질주

이 아름답고 눈물겨운 본능


빅토르 위고의 소설에 보면,

전쟁 중 군인들이 거리를 지나다 배고파 쓰러진 여인을 발견하고

한 군인이 배낭을 열어 빵 한 개를 그 손에 쥐어 주자

이 여인은 벌떡 일어나 뛰더니

거리 한 모퉁이에 울고 서 있는 소년에게 빵을 건네줍니다.


빵을 건네준 군인의 철없는 동료가, “저 여자는 배가 안고픈 모양이자”하자

군인은 혀를 차며 이렇게 말합니다.

“그것도 모르는가! 저 여자가 어머니야, 어머니이기 때문이야, 어머니는 다 그런 거야!”


▶3. 자녀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신 어버이들의 초상화입니다.


우리가 우리들의 어버이의 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즉각적으로 기억되는 모습은

그들의 ‘희생의 초상화’입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들의 어버이들의 밤을 지새도 다할 수 없는

희생의 이야기보따리 들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5월이 오면 우리는 민족의 고전이 된 노래

“낳실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어머님의 희생은 가이없어라” 이 노래를 마치 찬송가처럼 불러왔습니다.


영국 황실에 앨리스라는 공주가 있었습니다.

그녀의 딸이 디프테리아 전염병에 걸렸습니다.

로얄(황실) 닥터인 주치의는,

그녀에게 절대로 딸을 접촉하지 않도록 주의를 주었으나


어느 날 애처롭게 우는 딸을 보고 키스하고

그 결과 자신도 감염되어 생명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공주는 죽어가면서 “나는 내 딸에게 키스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는

말을 남깁니다. 그녀도 어머니였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성경 본문에 나타난 가장 큰 희생자는 누구일까요?

아버지 아브라함입니다.

어머니 사라는, 아마 아들이 제물로 바쳐지는 그 상황을 감당할 수 없어서

아브라함은 아내에게 알리지 않고 산으로 왔을 것입니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드리라는 명령을 받고

아브라함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기 시작합니다.

자기 아들을 번제로 태울 나무였던 것입니다.


이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던 아브라함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설교가 스펄전은 “그때 아브라함은 나무를 쪼갠 것이 아니라,

자기 심장을 쪼개고 있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창22:4절에 보면 사흘 길을 갑니다.

“제 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그 사흘 길은 바로 십자가의 길이었던 것입니다.

모리아 산길은 바로 갈보리 산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희생의 제물로 바치기 위해 가던 그 길은

바로 독생자 예수를 대속의 제물로 내어 드리고자 예수께서 걸으셨던 그 길이었습니다.


등에 나무를 지고 모리아 산으로 오르던 이삭의 모습에서

십자가를 지시고, 갈보리 산길로 향하시던 예수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까?


마침내 그가 십자가에 달리시던 순간

하늘조차 빛을 잃고 침묵하던 그 고통의 순간,

더 큰 고통으로 이 언덕을 내려다보던 하늘 아버지의 고통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식들이 아파할 때마다 그것이 내 죄이고 내 업보인 것처럼

더 아파하고 더 힘들어하던 우리들의 어버이의 희생을..

우리 자녀들은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자녀를 위해 모든 수고와 고생과 목숨까지 희생하시는

어버이의 모습을 보면서,

똑같은, 아니 그것보다 더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희생>까지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찬의 자리에 나아올 때마다

“이 희생을 기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들의 희생일까요? 아닙니다.

아들을 내어주신 아버지의 희생, 어버이의 희생을 말입니다.

 

그래서 자녀를 잘 키운 부모들은,

자동적으로 '신실한 신앙심'을 자녀에게 물려주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그 부모의 사랑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거기(부모의 사랑)에 투사해서 깨닫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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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글을 쓰는 작가 이철환의「연탄길」에 보면

<눈 치우는 할아버지>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겨울과 봄에 눈이 내리면 얼어붙은 육교 계단을 오르내리며

삽으로 눈을 떼 내는 할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 지역에 새로 발령을 받은 사회 복지과 직원이

너무 힘들고 안쓰러워 보여 물었다고 합니다. “할아버지, 고생이 너무 많으시네요”


“고생이랄게 뭐가 있겠소? 누구라도 할 일인데...

미끄러지는 날엔 천하장사라도 큰 봉변을 당할 터인데”


자신이 공무원이어서 미안한 생각이 든 그는

“그래도 이런 일은 저희들 젊은이들이 해야 할 인데요”하자,

“젊은이들은 회사 나가 일해야지 이런 일 할 시간이 어디 있소?”

그래도 미안한 생각이 들어 다시 물었다고 합니다.


“할아버지 이 근처 사세요?”하자,

조금 떨어진 저 건너 동네에 산다고 대답하시더랍니다.


“근데 어떻게 여기 까지 오셔서...”하자

할아버지는 한숨을 쉬시고 말씀을 이어가셨다고 하십니다.


“실은 내 아들이 이 육교에서 넘어져 머리를 다쳐 3년채 일어나지 못하고 있거든...

이거라도 해야 내 응어리 진 마음이 풀려.

이 일은 내 아들놈 빨리 일어나게 해달라는 나의 기도야!

그리고 다른 사람도 내 아들처럼 되지 말라고 비는 나의 기도지”


이것이 우리들의 우리 자식들의 미래를 짊어지고 걱정하시던

모든 어버이들의 믿음의 초상화가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