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51편을 통해 보는 <회개> 시51:5~8 11.05.04.설교녹취, 정리
20'~30'
최근 이 블로그에 게시되는 설교문들의 공통된 화두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입니다.
오늘날 <회개> 안 하고 복음을 믿는 신자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회개>가 무엇인가요?
아래 설교문이 그에 대한 모든 답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중요한 한 가지 답을 주고 있습니다...
◑회개란.. 자신이 ‘죄 공장’임을 자각하는 것
▲내가 지은 죄를 회개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
내가 지은 ‘죄’에 대한 애통도 소중한 것이지만,
그것보다 더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내가 ‘죄 생산 공장’임을 깨닫는 것이다.
참된 회개는.. 자기가 오늘 지은 A죄, B죄, C죄, D죄들을 회개하기 이전에,
자신이 A죄, B죄들을 지을 수밖에 없는 ‘죄 공장’임을 깨닫는 일이다.
내가 본성적으로 ‘선 공장’인데, 어쩌다가 실수해서 A죄, B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원래가 ‘죄 공장’이라서, 어쩔 수 없이 매일같이 ‘죄’를 생산해 내는 것이다.
자연인이 진정한 크리스천이 되기 위해서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야 하는데.. 막1:15등
여기서 ‘회개’란,
오늘 내가 지은 A죄, B죄를 용서 구하기 이전에,
나 자신이 본성적으로 ‘죄 공장’임을 철저히 자각하고 회개하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보통 사람이, 자신이 철저한 ‘죄 공장’임을 깨닫기가.. 그게 그렇게 쉽지 않다.
그래서 하나님은, 때로는, 성도가 죄를 짓도록 그냥 내버려두신다.
그를 회개로 인도하기 위함이다.
구약에서는 다윗이 그랬고, (모세 등 그 외에도 많지만)
신약에서는 탕자가 그랬다. (베드로, 바울 등 그 외에도 많지만)
교회사를 보더라도,
어거스틴, 루터, 웨슬리, 스펄전 등이
그저 피상적인 ‘회개’를 한 것이 아니라,
‘회개’하기 전에 벌써 수 년 동안 죄책으로 인한 고통을 겪고서,
그 후에야 은혜로 ‘철저한 회개’ 이른 것을 본다.
이 회개는, 자기가 무슨 특정한 죄를 지은 잘못을 회개하기 이전에,
자기의 원래 근본이 ‘죄 공장’인 것을 회개하고,
그 근본이 바뀌어 지는(회심하는, 방향을 돌이키는) 것이다.
※그래도 사람의 죄성은 죽을 때까지 그 부패한 심성이 100% 정화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어떤 근본적인 변화(회개, 회심)가, 한 번 있는 것이 좋다.
야곱의 경우에는, 이런 근본적인 변화가, 벧엘, 얍복강에서 일생에 2번 일어났다.
‘아니다, 그건 일생에 1번이다’ 라고 주장할 때는.. 얍복강이었다.
‘아니다, 그건 일생에 여러 번이다’ 라고 주장할 때는.. 창35장의 벧엘 체험이 포함된다.
▲시51편에서 다윗이 회개한 것은, 시51편을 자세히 보면,
자신이 밧세바와 범죄한 그 사건을 놓고 회개하기 보다는,
더 근본적으로 자신이 ‘죄 공장’임을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있다.
자신이 지어진 재질material이 온통 ‘죄’임을.. 철저히 자각하고 회개하는 것이다.
‘회개하고 예수를 믿어야 한다’라고 말할 때,
여기서 회개란, 시51편의 다윗과 같은 회개를 뜻한다.
자기가 무슨 사기, 상해, 음행, 기타 죄를 지어서 회개하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더 근본적으로
자기가 ‘죄 공장, 죄 자판기(꾹 누르면 죄가 나온다), 죄의 재질로 지어진 존재임을 깨닫고,
그 근본을 새롭게 바꾸어 달라고 간곡히 요청하는 것이.. 회개이다.
그런데 실제로 회개한 사람들을 보면,
그렇게 아파하고, 고민하고, 탄식하고 (수 년을 그렇게 하기도 한다) 하다가
어느 날부터 갑자기 방긋방긋 웃고 다닌다.
그렇게 아파하고, 고민하고, 탄식하며 산 것도.. 기이한데 남들은 다 잘 사는데..
어느 날부터 갑자기 웃고, 찬송하며, 행복해 하는 것은.. 더 기이한 일이다.
초자연적인 역사로, 그가 죄사함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의 회개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졌고, 자기가 죄짐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초자연적인 역사’라는 말은.. 뭔가 이 과정을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일종의 기적적인 (자기만 아는, 남들이 믿기는 어려운) 일이 일어난 것이다.
영화 <미션>에 노예사냥꾼이, 폭포 위에서, 그렇게 기뻐서 웃는 장면이 나온다. 사죄 받은 기쁨이다.
▲시51:5 나는 모태에서부터 죄인이었다. 어머니 배속에서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었다.
-다윗은, 자기가 ‘죄 공장’임을 고백한 것이다.
만약에 밧세바 사건이 아니었다면,
다윗은 아마 ‘나는 상당히 괜찮은 사람이야’ 하며 교만하게 살았을 것이다.
‘나는 여러분들과 등급이 달라!’ 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주권적으로.. 자기 백성을 그 자리로 밀어내신다.
(하나님이 범죄하도록 인도했다는 뜻은 아니고, 막지 않으셨다는 뜻)
▲시51:6,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다윗은, ‘주께서 원하시는 것은 진실이다’ 라고 말씀한다.
‘자신이 죄공장 임을 철저히 자각/회개하는 것을 하나님이 원하신다’는 뜻이다.
그것을 인정하고 회개하면, 하나님이 용서해 주시는데↙
▲시51:7, 우슬초로 나를 씻겨주소서. 그러면 내가 깨끗해질 것입니다.
나를 씻어주소서. 그러면 내가 눈보다 더 희게 될 것입니다.
우슬초는 출12:12에 나오는데, 최초의 유월절 밤에,
문 인방과 설주에 어린양의 피를 뿌릴 때, 우슬초 다발에 적셔서 뿌렸다.
‘우슬초’(식물)는 부정한 것을 정결케 하는데 사용되는 솔brush 같은 것이었다.
그러므로 ‘우슬초로 나를 씻겨 달라’는 말은,
어린양(예수님)의 피로 나를 정결케 해 달라는 뜻이다.
다윗이 시51:6에서 자신이 죄공장임을 깨닫고 철저히 회개하는데,
이어지는 :7에서, 자기의 어떤 공로로 인해 사죄함 받는 것이 아니라,
우슬초로, 어린 양의 피로 인해 사죄함 받는 것을 (성령에 감동해서) 말하고 있다.
즉, 우리 인간의 공로로, 죄용서 받는 것이 아니라,
내가 무슨 죗값을 치러서 내 죄를 용서 받는 것이 아니라, *죄값은 안 치르지만, 죄의 결과(열매)는 내가 치른다
죄용서는, 오직 어린양의 피의 공로로 받는 것임을.. 죄값은 예수님만 치르셨다.
다윗이 (성령에 감동해서) 노래하고 있다.
▲시51:8, 내 귀에 기쁨과 즐거움의 소리가 들리게 해 주소서.
주께서 ‘꺾으셨던 내 뼈’들이 즐거워하게 해 주소서.
여기서 ‘꺾으셨던 뼈’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의 뼈를 예표한 것이다.
(우슬초와 마찬가지로)
물론 예수님의 뼈는, 십자가에서 꺾이지 않으셨다.
(뼈를 꺾으려 했는데, 이미 죽으셔서 안 꺾고 넘어간 것)
이것은 뼈가 꺾인 것과 마찬가지다.
예수님은 ‘우리 뼈가 꺾여야 할’ 그 자리에서 죽으셨다.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예표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기 죄로 인하여 뼈가 꺾일 수밖에 없는 성도의 비참한 모습’을 그리고 있다.
즉 다윗은, 자기가 얼마나 죄인인가 하면,
‘뼈가 꺾인 정도로 비참한 죄인’이라는 뜻이다.
사람의 뼈가 꺾인 모습을 상상해 보시라. 얼마나 비참한가!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런 다윗의 자기 죄성의 고백과 탄식은,
그런 죄인을 대신해서, 대속하신(대신 값을 치르신)
십자가의 예수님을 예표하고 있다.
예수님이 내 대신, 십자가에서 뼈가 꺾이신 것이다.
실제로는 꺾이지 않았지만, 꺾인 것과 다름 없다고 했다.
이런 사전 지식을 갖고서 이 구절을 다시 읽어보면
내 귀에 기쁨과 즐거움의 소리가 들리게 해 주소서.
주께서 ‘꺾으셨던 내 뼈’들이 즐거워하게 해 주소서. 시51:8
그렇게 ‘뼈가 꺾인 사람처럼’ 통한의 회개를 한 사람은,
사죄(죄용서)의 기쁨과 즐거움을 갖게 된다는 뜻이다.
▲시51:17,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다윗의 회개의 핵심은.. <상한 심령>이었다.
자신이 죄공장, 죄자판기 임을 철저히 깨달았던 것이며,
그것을 깨닫고, 용서를 구할 떄.. 하나님이 자기를 멸시치 않으실 것도.. 확신했다.
▲정리하면
지금 신약의 첫 메시지인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에서
복음을 믿기 위해서는, 반드시 회개가 먼저 동반되어야 하는데,
그래서 ‘회개가 무엇인지?’를 살피고 있는 중이다.
다윗의 회개인 시51편을 통해서.
그래서 시51편을 살펴보니,
:5에서 자기가 ‘죄공장’임을 자각하고
:6에서 ‘어린양의 피’로 사죄함을 받으며, 내 공로가 아니라
:7에서 ‘꺾어진 뼈’처럼 비참한 상태에서, 용서받아 오히려 노래하게 되더라.. 이다.
여기서 제일 중요한 것은 (다 중요하지만)
:5의 <죄의 자각, 비통한 마음, 깨어진 마음, 상한 심령>이라고 본다.
그게 있어야.. :6, :7의 단계는 연속적으로 이어지는데,
:5의 첫 단추가 꿰어지지 않으니까.. 진정한 회개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끔 특단의 조치를 취하시는데,
그것은 성도가 죄를 짓는 것을 ‘방치’하시는 것이다... ↙
◑상한 심령을 가지라고.. 죄를 허용하신다.
▲다윗의 범죄를 막지 않으시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범죄(밧세바 사건)와 그 범죄의 폭로,
그로 인한 다윗의 고통과 자괴..
그 모든 것들을, 전능하신 섭리로
다윗의 구원을 위해, 회개를 위해, 사용하고 계신다.
이 말은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하니까, 죄를 짓자’는 식으로 오해하면 안 된다.
죄공장인 사람(다윗)이, 죄를 짓는 것을, 하나님은 막지 않으셨다.
충분히 막아 주실 수도 있었는데... 모세, 베드로, 바울도 마찬가지다.
전능하신 섭리로,
다윗을 ‘회개’로 인도하기 위함이었다.
다윗을 ‘상한 심령’으로 인도하기 위함이었다.
‘역사는 종말을 품고 창조되었다.’는 말이 있다.
하나님은 역사의 시작 시점에, 벌써 마지막 시점을 동시에 보고 계신다.
다윗이 범죄하는 순간에도, 다윗의 먼 미래를 동시에 보고 계셨다.
그래서 다윗을 막지 않으신 것이다. 회개하고.. 더 잘 되라고!
사46:10에도, ‘내가 종말을 처음부터 보았느니라’고 했다.
하나님은 창1:1시점에, 벌써 계시록 마지막 시점을 다 보고 계신다.
어쨌든 그래서 다윗의 범죄를 막지 않으셨다는 뜻.
나의 죄, 실수, 추악함, 모자람도 마찬가지다.
그런 나의 모든 (통칭해서) ‘죄악’도
나의 상한 심령, 나의 회개로 인도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
이것은 ‘은혜’이다.
내가 그렇게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가 나를 그렇게 이끌어 간다.
그래서 사람들이 조심해서 ‘6계, 7계, 8계..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고 말할 때,
칼빈은 더 높은 지점에서 이 ‘은혜’를 본 것이다. (두 관점 다 필요하다)
▲내게 적용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짓지 말고, 성결하고 거룩한 삶을 살기를 원하신다.
즉 ‘내가 온전한 것처럼, 너희도 온전하라, 내가 거룩한 것처럼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시지만
동시에
애당초 ‘우리는 근본적으로 타고난 죄공장입니다. 하나님 저를 제발 살려주세요.’
이것을 배우라는 것이다.
‘자기 성화의 노력’도 필요하겠지만,
그보다 앞서 ‘상한 심령, 깨어진 심령, 은혜가 아니면 안 되는 타락한 내 죄성’을 인정하고,
간절히 십자가를 붙들라는 것이다. 둘 다 봐야 된다. 성경에 둘 다 나오니까!
‘회개’란 지금 우리는 회개가 무엇인지 살피고 있는 중이다.
‘자기 성화의 노력’ - 자기가 지은 A죄, B죄를 회개하기 이전에
더 근본적으로, 더 앞서
‘자기가 죄 공장, 본성이 타락한 절망적 상태’임을 자각하고,
그걸 어떻게 자기 힘으로 도저히 고칠 수 없으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은혜/용서를.. 간절한 마음으로 붙드는 것이다.
그렇게 근본적으로 자기 죄성을 회개하려면,
먼저 자기가 철저히 타락하고, 더러운 죄인임을 자각하는 상한 심령이 되어야 하는데,
하나님이 은혜로, 우리의 죄성을 방치하신다. 그것 깨달으라고!
그래서 다윗을 막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회개는 은혜로 된다. 이어지는 죄용서의 확신도 물론 은혜이고..
※질문, 그러면 다윗처럼 범죄하지 않고,
다윗과 같은 무게로, 자신의 죄성을 깊이 깨닫고 회개할 수는 없나요?
답은 각자가 기도하며 찾아보세요.
제 생각은,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강도’는 아무래도 좀 약하겠죠.
이사야 6장에, 이사야는 하나님의 임재 체험으로, 자신의 추함을 깨달았고,
우리가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듣는 것은, 그런 학습을 통해, 죄성을 깊이 깨닫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학습으로 잘 안 되면.. 하나님은 체험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다윗처럼!
학습이나, 체험이나.. 둘 다 은혜입니다. 아예 그걸 못 받는 사람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탕자의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아버지는 탕자의 무리한 요구를 거절하고,
그래서 탕자의 범죄를 사전에 막을 수도 있었다.
재산을 안 주면 그만인데, 재산을 줘버렸다.
아버지는 ‘A죄, B죄’ 낱개로 세어서 탕자가 회개하기 보다는,
보다 근본적으로 자신이 죄악 가운데 출생한 ‘죄 공장’임을 자각하기 원하셨다.
그래서 탕자가 한 번 빗나가도록 방임하신 것이다.
미래를 다 내다보시는 아버지의 근본 의도는,
‘탕자의 방임’이 아니라,
그로 인해 ‘탕자의 회개’를.. 은혜로.. 미리 내다보시고, 그 길로 인도하셨다.
그런데 혹자들은
마치 기독교의 핵심이 성화가 전부인 것처럼 주장하는데.. 저는 우려한다.
(성화가 기독교의 핵심 중 하나인 것은 맞지만, 전부는 아니다.)
성화 sanctification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근본적으로 더 중요한 것은,
시51편의 다윗, 또는 탕자처럼
근본적으로 자신의 죄성, 죄공장임을 깨닫고, 회개하는, 상한 심령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은혜로 된다. 하나님이 은혜로 이루어주시는 회개와.. 또한 용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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