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마5:4 11.05.11.설교일부녹취
◑‘애통’이란.. 극한 슬픔을 나타내는 단어
성경에는 ‘슬픔’을 나타내는 단어가 약 9가지 나오는데,
본문 마5:4에 사용된 애통(펜테오)은.. 그 중에서 가장 극한 슬픔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같은 단어, 펜테오(애통)가 쓰인 다른 구절을 살펴보면,
막16:10, 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이 슬퍼하며(펜테오)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알리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예수와 함께 했던 사람(제자)들이 망연자실해서 슬퍼하는 모습.
본문의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의 애통은.. 그런 극한 슬픔,
즉 자기와 아주 가까운 사람(예수님)이 죽었을 때, 슬퍼하는 애통을 뜻한다.
계18:15 바벨론으로 말미암아 치부한 이 상품의 상인들이 그의 고통을 무서워하여
멀리 서서 울고 애통하여 (펜테오)
-상인들이 졸지에, 일 시간에, 모두 망했다.
수십~수백억 대의 자산가가, 투자한 사업에 망해서 졸지에 거지가 되었다.
그래서 울고불고 하는 모습.. 그것이 본문이 말하는 ‘애통’과 같은 단어이다.
계18:19 티끌을 자기 머리에 뿌리고 울며 애통하여(펜테오) 외쳐 이르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이 큰 성이여 바다에서 배 부리는 모든 자들이 너의 보배로운 상품으로 치부하였더니 한 시간에 망하였도다,
-사업가에게, 재산과 사업체는 자기 생명과 같다.
가난한 사람이 망하는 것과, 큰 부자가 망하는 것은.. 그 슬픔의 강도가 틀린다.
그 큰 부자가 망해서 울부짖는 모습이.. 바로 애통(펜테오)이다.
정리하면,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에서 애통은
극한의 비극적인 상황에서, 극한의 슬픔을 표현할 때 사용되던 말이었다.
'나는 이제 망했다'며 슬퍼하는 애통이다.
▲그렇다면, 그런 ‘펜테오의 애통’으로, 내가 죄인임이 자각된 적이 있는가?
(자세한 설명이 나와 있지 않지만)
본문 마5:4절은,
누가 죽어서 애통한 것이기 보다는..
누가 사업이 망해서 애통하는 것이기 보다는..
자기 죄로 인해서 애통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우리가 지금까지 오래 동안 신앙생활 해 오면서,
또한 지금까지 교회에서 설교를 들으면서,
또한 지금까지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가운데,
본문의 ‘펜테오의 애통’처럼, 극한 슬픔으로 몸부림쳐 본 적이 있으신가?
내 죄책과 죄짐이 너무 슬프고 무거워서,
마치 누가 친한 사람이 죽어서 슬픈 것처럼 울부짖으며..
마치 내 사업이 졸지에 깡그리 망한 것처럼, 망연자실해서 울어본 적이 있으신가?
-있다면.. 예수님 말씀처럼 복된 자요, 위로를 받은 자이고,
-없다면.. 앞으로 있게 되기를 사모해야 할 것이다.
자기가 ‘죄 공장’임을 인식하고, ‘펜테오의 애통’으로 탄식하기를 사모해야 한다.
▲지금까지 한 번도 ‘펜테오의 애통’ 없이 신앙생활 해 오셨다면.. 참 애석한 일이다.
설교만 들으면
‘당신은 다 잘 될거야’ ‘만사형통, 소원성취’
‘기도만 하면 하나님이 다 이루어 주실 겁니다.’
‘집 팔아서 헌금 바쳐 봐요. 몇 배로 뻥튀기해서 돌려받을 것입니다.’...
주로 이런 설교를 즐겨 들으시고, 또한 큰 소리로 “아멘!”으로 호응하셨을 것이다.
※이런 설교들이 일면 맞는 면이 있지만, 이런 설교로 일관(도배)할 때는.. 참 복음이 아닙니다.
그런데 본문 말씀
마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이 구절을 8복 전체 문맥과 더불어 생각해보면,
‘애통하지 않으면.. 천국에도 못 들어간다’는 뉘앙스로 이해되어 진다.
예수님도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고 하셨는데 막1:15
<회개하지 않으면, 애통하지 않으면, 그것은 참 믿음이 아닐 수 있다>는 말도 된다.
그런 ‘쉬운 믿음’으로는, 구원 받기 힘들다는 뜻이다.
▲참고로, ‘성령이 아니고는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할 수 없다’는 구절을
이제까지 우리는 너무 쉽게 이해해 왔다.
이 말씀을 너무 얏보아 왔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고전12:3
그러나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것은, 말이 쉬운 것 같지만, 실제로는 쉽지 않다.
‘예수를 주님으로’ 즉 나의 주권자로 ‘로드십 Lordship’을 고백하며 사는 것은
자기 재산 다 팔아서 기꺼이 나눠주고 주님을 섬길 각오,
또는 자기 목숨 다 내 놓고 주님을 섬길 각오를 뜻하는 것이.. 원래 의미이다.
그저 우리가 기도할 때 입술로 ‘주여, 주여’ 하는 것은
사실상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가지 못 한다’ 마7:21에 더 가깝다.
왜냐하면 기도는 ‘주여, 주여!’ 하면서도, 실제 삶은 자기가 주인이 되어서 사니까.
◑적용
▲건강한 신앙인, 건전한 신앙인을 추구하는 신자들도 가만히 보면,
이런 ‘펜테오의 애통함’ 없이, 또는 ‘심령의 가난함’없이, ‘회개’ 없이
뭘 좀 자기 생활을 더 개선해서,
좀 더 성실하게, 좀 더 사회에서 칭찬 듣는 크리스천이 되자고 하는데..
이게 다 참 복음이 아닐 수도 있다.
참 기독교 복음은, 사회적으로 사람들보기에, 좀 더 윤리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이런 것이 필요하더라도, 그것이 근본 목적은 아니라는 뜻
참 기독교 복음은, 자기 죄의 실상을 보면서, 자기가 죄 공장임을 인식하고,
‘펜테오의 애통’으로 울부짖는 사람이다.
‘주여,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라고..
▲이건 세상으로부터 ‘자기가 잘못해서, 미움 받아서 앓는 소리 내는 애통’과도 다른 것이다.
-시어머니가 구박해서, 며느리가 슬퍼서 우는 울음,
-자기 인격이 모나서, 직장에서 상사로부터 구박 받아서 우는 애통.. 이런 것은 아니다.
정말 자기의 비참한 상태,
마치 10년 동안 한 번도 열리지 않았던 복개천이나 시궁창 뚜껑을 열면,
그 컴컴하고 음침하고 썩은 하수구 내부와 같은,
인간이 타고난 자기 죄성.. 그것을 보고서 애통하고, 울부짖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도의 애통은
자기 육적 자아가 죽었을 때, 나오는 울음이요, 애통이다.
왜냐하면 ‘애통’이란 헬라어가 ‘자기와 가까운 사람이 죽었을 때의 슬픈 울음’인데
다시 말하면 ‘나의 육적 자아가 깨어져서 죽을 때, 비로소 애통이 나오는’ 것이다.
반대로 내가 아직 애통(펜테오)하지 않았다는 것은,
내 육적 자아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뜻이다.
▲다시 한 번 점검해 보자.
나는 나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펜테오의 애통을 해 보았는가, 또는 하고 있는가?
-예수님 말씀에 의하면, 그는 ‘복 받은 사람’이다.
무슨 아파트 청약이 당첨되어서, 프리미엄이 억으로 붙은 사람이 ‘복 받은 사람’이 아니라!
오늘날 교회 강단에서, 성경이 말하는 참 복을 가르치지 않고,
점쟁이가 복채 얻으려고, 손님에게 듣기 좋은 소리하듯이, 세상 복을 남발하는 분들은,
나중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크게 혼날 것이다.
어떤 성도님들이 제게 이렇게 말한다.
‘제가 목사님의 설교를 듣다보니까, 제가 아직 성도가 아닌 것 같아요.
어떻게 예수 믿고, 제가 아직 이렇게밖에 못 사는 것이죠?’
‘제가 착한 선행을 하겠다고 했던 그 자체도, 그 동기를 보니까 죄던데,
도대체 제가 예수를 이제까지 헛 믿은 것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애통’이다.
이런 고민을 하면서, 신앙생활 하시는 분들이.. 정말 복 받은 분들이다.
▲어떤 분은 분개한다. ‘아니, 왜 사람들이 나를 이렇게 막 대놓고 무시하고 비난하지?’
사람들이 잘못 본 것이 아니다.
아니다. 도리어 잘 본 것이다.
내가 내 실상(전적 타락)을, 내가 정확히 못 보기 쉬운데,
사람들이 그 허상을 막 부수어 주고, 내 실상을 올바로 볼 수 있게 해 주니까..
즉 ‘내가 벌레요, 찌끼요, 사람이 아니라’ 고 욕을 해 주니까,
오히려 따지고 보면 고마운 것이다. 그 욕을 듣는 순간은 욱 하게 되지만..
그래서 신실한 주의 종들은, 욕을 먹을 때 오히려 이렇게 고백한다.
‘고맙습니다. 실상은 제가 그 보다 더 악한 자인데,
그 정도로 후하게 평가해 주시니.. 감사한 일입니다.’
한경직 목사님도 후배 목회자들에게, 주의 일을 하다가 욕을 들으면
‘맞습니다. 당연하지요.’로 겸손히 응대하라고 당부하셨다.
욕 먹는 것이, 인격적으로 큰 상처를 당하는 일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내 인격을 오히려 성숙시키고, 내 실체를 파악하고 애통하는 일에는.. 보약이 된다.
‘왜 날 이렇게 벌레 취급하지?’
아니다. 우리 실상은 그 수준이 맞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애통의 기회로 삼으면.. 얼마나 복이 되는지..
▲그러므로 애통은, 하나님이 복으로 주시는 것이지, 성도가 벗어날 것이 아니다.
오해하지 마시라. 예수를 믿고, 애통함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 애통함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예수 믿기 전에는, 양심의 거리낌 없이 잘도 살다가,
이제 참으로 예수를 만난 후에는, 이전에 없던 애통이 생기게 된다.
주님은 우리 눈물을 닦아주시기도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애통함 속에서 울게 하신다.
그리고 그 애통함이 복이라고 말씀하신다. 마5:4
‘내 인생은 왜 이리 지지리 복도 없어!’ 하지 마시라.
하나님의 복은, 물질이 아니라, 눈물/애통이 될 수도 있다.
▲개인적인 애통에서 → 사회적 애통으로 발전해야
겔9:4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에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를 그리라 하시고
5 그들에 대하여 내 귀에 이르시되 너희는 그를 따라 성읍 중에 다니며
불쌍히 여기지 말며 긍휼을 베풀지 말고 쳐서
6 늙은 자와 젊은 자와 처녀와 어린이와 여자를 다 죽이되
이마에 표 있는 자에게는 가까이 하지 말라. 내 성소에서 시작할지니라 하시매
그들이 성전 앞에 있는 늙은 자들로부터 시작하더라
그러므로 애통이 없는 성도, 또는 공동체는
참 교회가 아니고, 참 공동체가 아니요,
오히려 하나님의 심판의 칼이 예비된 성도요, 공동체일 수 있다.
오늘도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과 공동체는
하나님이 애통을 주신다.
애통하며 기도하게 하시고,
애통하며 씨를 뿌리게 하신다.
그러므로 오늘 애통하고 있는 당신은
참으로 복된 성도요, 당신이 바로 하나님의 사람인 것이 맞다!
........................................
▲본문 마5:4와 병행구절인 눅6:21에는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라고 하였다.
여기서 ‘운다’(클라이오)는, 마5:4의 애통(펜테오)과 비슷한 말로서,
‘사랑하는 자가 죽어서, 슬피 우는 울음’을 뜻한다.
일례로 눅7:13에서, 나인성 과부가 자기 자녀가 죽었을 때,
슬피 울었다(클라이오)에서, 같은 단어를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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