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성과 타협 행21:17~26 스크랩
사도 바울은 3차선교여행의 끝에, 예루살렘에 도착했습니다.
▲행21:17 "형제들이 우리를 기꺼이 영접하거늘.."
형제들이 와서 기쁘게 저들을 맞아주었다고 합니다.
'제자들'이라고 하지 않고 '형제들'이라고 표현합니다.
사도행전에 있어서 예수 믿는 사람의 지칭이 첫째가 '그리스도인'이요,
둘째가 '제자'요, 셋째가 '형제'입니다.
특별히 여기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이 바울을 ‘형제’라고 부르는 데는
보다 더 높은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방인의 사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대사람을 위해서 봉사하는 사람이나,
이방인을 위해서 봉사하는 사람이나,
다같이 예수를 섬긴다는 입장에서 똑같이 ‘형제’라는 것입니다.
20절에도, 저들이 바울을 부를 때에 "형제여"하고 부릅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사람을 전도하는 사람이나,
이방에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나 마찬가지라는 뜻입니다.
그 동질성을 한마디로 이렇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요새 흔히들 '동질성 회복'이라는 말을 잘 하지 않습니까?
▲21:18 “그 이튿날, 바울이 우리와 함께 야고보에게로 들어가니, 장로들도 다 있더라.”
그 다음에 보니 바울이 먼저 야고보를 만났다고 합니다.
또 갈라디아서에도 야고보를 만났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으로서, 예루살렘교회의 1대 감독이었고,
30년 동안을 감독으로 일하다가 마지막에 순교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런고로 바울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자마자 맨 먼저 만난 사람이 야고보입니다.
예루살렘교회가 모든 교회의 어머니 교회요, 제1교회이기에 저를 만나게 됩니다.
사실 사도 바울은 안디옥교회의 파송을 받아 세계를 다니면서 전도를 했습니다.
예루살렘교회에서 파송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apostolic authority - 사도적 권위를 인정합니다.
(그래서 안디옥교회에 가서도 보고를 합니다만)
특별히 맨처음 교회 되는 예루살렘교회에 와서도
교회의 감독 야고보에게 보고를 하게 됩니다.
이것은 그의 겸손이요, 공동체 의식을 바로 하는 행위입니다.
그는 분명히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역사 합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보고할 필요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아요. 이 점에서 바울이 위대합니다.
그는 갈라디아서 1장에서 자신은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사람에게서 택함 받은 것도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로 직접 불러 택하여 세우신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같은 부름을 받은 사도 야고보에게 찾아가서
그간에 지내온 바를 보고합니다.
이것은 교회의 공동체성, 혹은 교회의 하나됨을 말해주는 중요한 증거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루살렘교회가 있고, 바울의 교회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예요.
다 그리스도의 교회요, 하나의 교회입니다. 그것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21:19a, "바울이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봉사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고하니"
여기서 사도 바울이 보고하는 부분을 눈여겨보세요.
이 짧은 문장에서 우리는 대단히 중요한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내가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고, 내가 몇 사람에게 전하고,
내가 몇 사람을 세례 주고, 어느 어느 교회를 세우고...' 이렇게 보고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일을 하셨습니다’ 하고 보고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깊이 생각을 해야 합니다. 자기 존재는 없어요.
'오직 하나님이' ― 이것이 사도행전의 주제입니다.
하나님께서 몸소 역사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신 사역, 하나님께서 놀랍게 이루신 일, 그것을 보고하고 있습니다.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이 애써서 이룬 업적이 아니예요.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사람이 교회를 세운 것이 아니예요.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입니다.
언제든지 이런 신앙적 인식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두고 내가 한 것이다, 또 누가 한 것이다, 하고 왈가왈부하는데,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 몸소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야고보에게 낱낱이 고했습니다.
▲21:19b, "바울이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봉사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고하니"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나를 통해서 역사 하신 것입니다.
내 입을 통하여, 내 말을 통하여, 내가 하는 설교를 통하여,
그리고 내 지혜를 통하여, 내 건강을 통하여, 내가 하는 수고를 통하여,
내가 뿌린 눈물을 통하여, 나아가서는 내가 당한 많은 핍박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을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 이것은 놀라운 것입니다.
나는 섬기는 것뿐입니다.
그 시작도, 그 과정도, 그 결과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요,
나는 봉사하고 있을 뿐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다 이루신다’고 하면서, 자기는 너무 수동적일 수 있습니다.
미국에 가려면.. 비행기(비유로 하나님)를 타면, 비행기가 데려다 주는데,
어떤 사람은, 비행기가 자기 집 문 앞에 와 주기까지 기다립니다.
아닙니다. 비행장까지 자기가 나가야 합니다. 그래야 비행기가 태워줍니다.
사실 어디까지가 하나님의 일이고, 어디까지가 인간의 일인지..
그것을 규명해 내기가 쉽지는 않습니다만,
바울은 ‘하나님이 자기를 통해서’ 하신 일을 보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나치게 한쪽에 치우쳐서, 극단적 신앙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어느 외과의사가 이런 재미있는 얘기를 합니다.
자기가 수술을 집도하는데, 수술 받고 나온 환자 가운데
다시 돌아와서 고맙다고 인사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고 해요.
퇴원할 때에 "고맙습니다"하며 꾸벅 인사하고 나가면 그만이랍니다.
죽을 목숨 살려주었는데도, 자기한테는 인사를 별로 안 하고
가만히 보니까 교회에 가서 감사헌금 드리더랍니다.
환자들이 ‘하나님이 고치셨다’는 것을 다 알고 인정한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그를 통해서 고치셨다’ 까지 나가면.. 더 훌륭하겠습니다.
또 반대로 어떤 사람은,
교회 성도들이 가서 많이 기도해주고, 온 교회가 기도해서.. 나았습니다.
그런데 ‘의사가 고치고, 약이 자기를 고쳤다’고만 믿더라고요.
아무리 기도를 해도.. 그건 그저 마음 편하라고 하는 것이요,
병은.. 수술과 약이 고친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는 극단적인 태도도.. 고쳐야 하겠습니다.
어떤 선교사가, 선교사역에 헌금이 필요해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기적적으로 전혀 예상 밖의 사람이 헌금을 해서, 요긴하게 쓰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헌금한 사람’이 너무 고마워서, 위해서 열심히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복을 빌며 기도하는데.. 속에서 이런 음성이 들리더랍니다.
‘너는 왜 내(하나님)게는 감사하다는 표현이 없니?’
사실은 ‘하나님이 그를 통해서’ 도와주신 것인데,
선교사는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도움 준 그 사람’만 고맙게 여겼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착각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도와주시겠지.. 나는 걱정 안 해!’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시니까, 다 알아서 처리하시겠지!’
맞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반드시 일을 이루십니다.
나의 봉사와 수고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내 눈물과 내 헌신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 봉사와 수고가 쓰임 받는 것은.. 무한한 내 영광이요, 내 특권입니다.
신앙이 좋다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쓰려고 하실 때, 사용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일하려고 하실 때, 자원해서 그 일에 동참하는 사람입니다.
그 센스, 그 민감성을 가진 그 사람이.. 신앙이 좋은 사람입니다.
(괜히 인간적인 일에 쓰임 받으려고, 애쓰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에서 하는 일 가운데도, 간혹 인간적인 일이 있거든요..)
▲21:20, "저희가 (바울의 선교 보고를)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이 ‘이방 가운데서 역사 했다’고 합니다. :19
하나님께서는 유대사람만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이방사람의 하나님도 되십니다.
이방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왔다.. 하는 보고를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20절)"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 이 얼마나 귀한 말씀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유대사람의 민족적 편견으로 볼 때에는 별로 달갑지 않은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내가 싫은 사람이 있고, 내게 비호감인 교회가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싫거나 비호감인 사람이나 교회에..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을 때,
우리가 쉽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 이 본문의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복 받는 것, 중요해요.
여러분이 잘사는 것, 중요해요. 여러분의 자녀가 잘되는 것도 중요해요.
그러나 여러분의 마음속에 정말 기쁨이 되는 것은,
아직도 예수 믿지 않는 그 누군가가 예수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처럼 좋은 것이 없고,
그것을 가장 큰 기쁨으로 생각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저 우리끼리만 복 받고, 신앙생활 잘 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는 것..
그런 국수주의적 신앙으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 합니다.
평소에 내 관심과 기도는.. 이방인(국내외 포함)이 주께로 돌아오는 소식을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모름지기 이것을 가장 큰 영광으로, 가장 큰 기쁨으로 생각할 줄 아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21:20 "저희가 듣고...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심 있는 자라"
‘저희’는 - 야고보와 장로들이고, :18
‘이르되’ - 아마도 장로들이 요청하는 것 같습니다.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예루살렘의 유대인 신자들 중에 믿는 자가 수만 명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아직도 유대교에 매여 있습니다.
"다 율법에 열심 있는 자라"
여기에 괄호하고 한마디 넣었으면 좋을 뻔했습니다.
‘예수는 믿으나 여전히 율법에 열심이 있는 자라’ 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골치가 아픈 거예요. 야고보도 어쩔 수가 없어요.
그 고집 때문에 예수는 믿으나 아직도 유대교에 열심이 있어서
유대교적 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할례를 소중히 여기고 안식일을 소중히 여기고 율법을 소중히 여깁니다.
극단적인 유대교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문제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 사람들이 마음을 열지 못하고 있다, 오해도 많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의 생각대로라면
기독교는 유대교의 한 분파에 그칠 뿐이요,
세계적인 교회가, 종교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에 바울이 만방에 가서 복음을 전한 것은
기독교가 유대교의 그늘에서 벗어나 세계적 종교가 되는 계기를 만든 것입니다.
바울의 역사는 그런 면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다시 말하면 유대교적 이미지에서 기독교적,
좀 더 나아가 세계 종교적 이미지로 바꾸는 그 큰 역사를 바울이 이루어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수만 명의 유대교 사람들이 고집을 부리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할례는 꼭 받아야 한다.. 율법의 의식은 다 지켜야 한다’
이런 식으로 고집을 부리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기에 오해가 있습니다...
▲21:21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하지 말고 또 규모를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저희가 들었도다."
-이것은 오해입니다. 유대사람은 할례를 받더라도,
이방사람들은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 바울은 분명히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그것이 바울의 메시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메시지가 어떻게 어디선가 잘못되어서
유대사람들도 할례 받을 필요가 없다, 라고 말했다고 전해진 것입니다.
그러한 오해가 지금 이 수만 명의 유대사람들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이 문제를 놓고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이제 바울이 나서서 이 수만 명의 고집스러운 유대교인들을 설득시키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방사람에게 그렇게 말한 것이지, 유대사람에게는 그렇게 말한 일이 없습니다.
사실이 이러이러하다고 설득하고 가르쳐야겠는데, 시간이 없어요.
언젠가는 오해가 다 밝혀지고, 알아들을 때가 있겠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해요.
편견으로 뭔가 잘못되어 있어요.
하지만 수만 명의 유대사람들을 설득시키기는 어렵고 해서
일단 바울 한 사람을 설득하여 타협을 요구합니다.
이것이 야고보가 내놓은, 예루살렘 교회 장로가 내놓은 대책입니다.
어찌 생각하면 유감스럽습니다. 옳은 것은 옳은 것인데, 오해는 오해인데,
왜 오해를 당장 풀 생각은 안하고 타협을 요구하는 것인지요.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지금은 시간을 벌어야 되기 때문에,
당장 부딪치는 것은 옳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 어떤 오해가 있어요. 당장에 가서 증거를 딱 보인다고 해서 마음이 돌아갑니까?
마음은 그렇게 빨리 돌아가는 것이 아니예요. 많은 시간이 걸려요.
더구나 상대가 수만 명이라고 할 때에는 몇 년 걸릴 것입니다.
문화인류학에서는 세계관이 한번 바뀌는 데에 40년이 걸린다고 말합니다.
참으로 어려운 것입니다. 북한이나 남한이나 다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이 있는 지금 이 시간에 오해를 풀어야 됩니다.
그러나 무슨 말로 해결이 됩니까? 바울이 말한다고 됩니까? 무슨 증거를 댈 것입니까?
그런 일은 소용 없습니다, 한다고 어디 됩니까?
더욱이 수만 명을 움직이는 데는 적잖이 시간이 걸립니다.
그런고로 당장은 바울 자신을 돌려놓으려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여러 사람의, 수만 명의 마음의 오해를 푼다는 게 얼마나 어렵습니까?
지금 당장 바울을 죽이겠다고 하는 판인데, 이런 사람들을 놓고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런고로 '바울, 당신이 양보하시오. 그렇게 안 해도 될 일이지만 참고 이렇게 해주시오'
하며 타협안을 내놓습니다. ↙
▲21:23~24, "우리의 말하는 이대로 하라 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
저희를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저희를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나실인으로 하나님 앞에 서원한 사람이 몇 있는데
이들과 같이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서, 바울이 비용을 내서 그 사람들의 머리를 깎고,
거기서 결례를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 말의 뜻은 이렇습니다.
이방에 다니면서 만일에 뭔가 잘못된 것이 있고, 율법에 어긋난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예루살렘에 돌아와 다시 유대사람이 되려고 할 때에는
회개의 뜻으로 결례 기간을 가지는데, 최소한 성전에서 7일 동안 머무릅니다.
그리고 30일 간은 고기와 포도주를 먹지 않습니다.
이 기간이 끝나면, 마지막으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립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 동안에 잘못한 것을 다 회개하고 씻어버리고
그 다음부터 당당하게 회중 속에, 같은 유대인들 속에 들어가서 섞이게 되는 것입니다.
공동체 속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바울더러 바로 그 예식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의 오해가 풀어질 것 같고,
당신을 율법을 지키는 사람으로 알게 될 것 같소'라는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잘못한 것 없으나, 일단 잘못한 것으로 해서 회개하라는 말입니다.
바울에게는 참으로 어려운 얘기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것이 평화롭기에 바울은 양보합니다.
교리에 대해서는 한 치의 양보가 없는 바울입니다.
갈라디아서 1장에서 보면, 내가 전한 복음 외의 복음을 전하는 자는
천사라도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할 만큼 그는 털끝만큼도 양보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윤리 문제나, 혹은 생활 문제나, 의식 문제에 대해서는
아주 넓게 양보를 합니다.
내가 양보해서, 내가 죄인이 되어서, 내가 누명을 써서 전체가 평안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지요, 하는 마음입니다. 대단한 마음입니다. 그래서 양보합니다. 타협합니다.
그는 말씀합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 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전9:19)"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을 구원코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고전9:22~23)"
바울은 여기서 엄청난 타협을 합니다. 그러나 타협이기보다는 양보입니다.
양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복음에 참예하는 충성이요,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입니다.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이 이렇게 나타난 것입니다.
아무쪼록 몇몇 사람을 구원하고자 하고, 아무쪼록 교회를 평화롭게 하고,
아무쪼록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고자 하는 그 간절한 마음 때문에
'이 정도 양보해야 된다면 양보하지요'하는 것입니다.
신앙에는 양보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기 희생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양보할 수 있는 사람이 바울이었습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그의 타협을 높이 평가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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