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sgh5mUOVEgc
◈말씀은 ‘찔러 쪼갠다.’ 히4:12 설교녹취
*전편 <말씀은 신자를 벌거벗긴다> 에 계속 이어지는 설교입니다. 길어서 나눈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히4:12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말씀은, 성도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는 힘이 있다.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더 예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양날 검'이, 우리의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한다.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 ‘막 찔림 받는 역사’가 나타나야 한다.
막 나를 ‘찌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아야 한다.
늘 그럴 순 없겠지만, 가끔씩은 이런 역사가 나타나야 정상이다.
내 속에 있는 간사함과 포장된 부분이.. 말씀을 들을 때, 찔림을 받아야 한다.
만물보다 심히 거짓되고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이라고 했다. 렘17:9
그 부패한 마음에서, 각종 악한 생각들이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진리의 말씀이, 검보다 더 예리해서,
그 말씀이 내 마음속에 들어올 때,
내 마음에 찔림이 일어나고, 내 마음이 쪼개지는 역사가 나타나는 것이다.
내 속에 있는 간사함이, 내 마음의 교만이, 악독과 이기심이,
내 속에 있는 음란, 탐욕, 시기, 거짓이.. 막 부대끼고 견딜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주님 앞에 다 내어놓고 회개하기까지는.. 내 마음이 편치 않게 된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 할꼬?’ 하거늘 행2:37
베드로도, 말씀을 제대로 전할 줄 아는 설교자요, 사도였던 증거는,
진리의 말씀을 전하자, 듣는 사람들의 마음이 찔리는 역사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곧장 그들은 회개의 심령과 태도를 나타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 할꼬? 하거늘’
이렇게 통회하는 심령으로 나아갈 때.. 예루살렘에 회개의 역사가 나타났던 것이다.
▲‘찔림’은.. 다른 말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깨달음’도 된다.
찔림은.. 말씀에 대한 깨달음인데,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깨달음으로 연결된다.
그 말씀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래서 말씀을 듣고 찔림을 받으면..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알게 된다.
예수님의 마음, 형상, 예수님의 아픔, 그 분의 소원과 눈물..
-이런 것들을, 내 마음에 찔림이 일어나면서, 비로소 알게 된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깨달음이 있을 때,
자기 자신에 대한 깨달음도 동시에 일어나게 된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 책에서
인간이, 자신에 대해 참된 지식을 갖게 되는 때는,
인간이 하나님에 관한 참된 지식이 있을 때라고.. 강조했다.
인간이.. 인간 자신을 들여다본다고.. 인간의 존재를 제대로 파악하는 게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알게 될 때.. 인간 자신도 제대로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때 비로소 영안이 뜨여지고, 그 영안으로 인간 자신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날 때,
자기 자신이 너무 왜곡되어져 있고,
자기 속에 있는 하나님 형상이 너무 일그러져 있음을 절실히 깨닫게 된다.
그때 우리는 부끄러워하고, 벌거벗겨지고, 통회하는 것이다.
그때부터, 자신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수준의 거룩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갈망이 생긴다.
오늘날 말씀을 통해서 ‘지식과 정보’를 얻으려는 시도들이 많다.
하나님이 말씀을 주신 원래 목적은, 우리에게 그런 ‘세상 처세술’을 주려는 것이 아니다. 주1)
▲그러므로 설교는 ‘찌르는’ 것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히4:12절에,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검이니까,
말씀을 전하는 것은.. 좌우에 날선 예리한 말씀의 검을 휘두르는 것이요,
그러면 설교는.. 청중을 찌르게 되어 있다.
그런데 이것은 고도의 기술을 필요로 한다.
자칫 잘못하면, 일을 그르치기 쉽기 때문이다.
저/설교자도 처음에 잘 모르고, 설교시간에 무조건 소리만 질렀다.
그렇게 하면 ‘성도들을 말씀으로 찌를 것 같아서’ 제가 일부러 큰 목소리로 톤을 높혔다.
결과는 안 좋았다.
왜냐하면 말씀이 찔러야 했었는데, 내가 찌르려고 했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제게 이런 습성이 조금 남아있는 것 같다.
‘말씀이 찌르는 게 아니라, 내가 찔러서 성도에게 상처를 주는 일!’ 조심하자는 겸손한 표현
그러므로 설교자가 먼저, 말씀으로 찔림을 받는 체험을 하고나서,
그 체험과 경험을 나누는 것이 좋다..
*관련글 ‘말씀’이 그를 교정하게 하라
솔로몬도 이렇게 말씀했다.
말씀이 ‘찌르는 송곳(또는 채찍)’과 같다고 말이다.
‘지혜자들의 말씀은 찌르는 송곳(또는 채찍) 같은 것이고,
목자가 든든히 박은 말뚝 같은 것이다.
금언집은 만민의 목자이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전12:11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들을 때마다 찔림을 받아야 한다.
자기가 성경을 읽고 큐티를 할 때나,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면서 설교를 들을 때.. 찔림을 받는 일이 종종 일어나야 한다.
그래서 일년 내내 한 번도 ‘찔림을 주지 못하는 설교’,
아니 십년 내내 한 번도 ‘찔림을 주지 못하는 설교’,
-하나님이 그 설교자를 기뻐하지 않으실 것이다.
설교가 성령의 검으로 찌르고 쪼개는 설교가 되어서, 히4:12
성도가 자기 자신의 영적 실상을 정확히 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성도가 말씀 앞에서, '벌거벗김'을 당해야 한다.
히4:1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저도 그런 느낌을 받을 때가 있는데,
설교자가 마치 ‘투시의 은사’가 있는 것처럼, 나를 다 꿰뚫어 볼 때가 있다.
실제로 그가 투시의 은사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성령이 투시의 은사가 있어서, 또는 말씀이 찌르고 쪼개는 역사가 있어서,
설교를 들을 때, 성령과 말씀이 역사하시면,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막 설교자를 보면서, 분노가 치밀 때도 있다.
나를 막 대하는 듯한 느낌을 갖기 때문이고, 나를 지목해서 설교하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그 설교자가, 나를 속속들이 다 아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성령이.. 나를 속속들이 다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때는, 내가 회개해야 할 타이밍이다.
▲징계 전에 반드시 경고 하신다.
시49:20절에는 이렇게 말씀한다.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라야, 즉 찔림을 받는 자라야
자기의 멸망의 길에서.. 돌이키게 된다.
그러나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하면.. 그래서 회개하지 않으면,
얼마 안 지나면.. 짐승들처럼 멸망을 받게 된다.
멸망을 받기 이전에 반드시 일어나는 일이,
-말씀을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일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갑자기 불현듯 징계하시는 것이 아니라,
먼저 파수꾼, 선지자, 설교자, 멘토를 보내사, 아니면 개인큐티시간을 통해,
반드시 먼저 경고를 주신다. 회개하고 돌이키라고 나를 찌르신다.
그러나 그 경고를 무시할 때..
우리는 무시무시한 징계를 당하게 된다. 마치 멸망(도살)당하는 짐승처럼...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히4:12
▲그래서 말씀이 들어오면, 가만히 있지 않는다.
말씀이 막 자기 속에서 살아서 운동하기 때문이다.
여러분, 살아있는 물고기를 보셨는가?
퍼더덕 거린다. 쉴새 없이 움직인다.
말씀도 그와 같이 살아있다.
죽어 있지 않다. 아무 운동도 없이 가만히 죽어 있는.. 그런 말씀이 본래 그 속성이 아니다.
▲말씀은 믿는 자 속에서 반드시 역사(운동)한다.
(너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살2:13
말씀이 선포될 때.. 내 속에서 역사(운동)하여, 내 마음을 새롭게 바꾼다.
그래서 아버지의 뜻대로 순종하는 사람으로.. 내가 변화되어 진다.
내가 말씀을 순종하기가 왜 그렇게 어려운가?
내가 말씀을 순종하고 싶어하는데, 왜 순종이 되지 않는가?
순종은.. 말씀이 내 속에서 역사(운동)할 때.. 순종이 되어진다.
말씀을 지식적으로 많이 알고 있다고.. 암송하고 외운다고.. 선포한다고..
순종이 되는 게 아니다. 저 자신부터가 그렇다.
순종은.. 말씀이 내 속에서 막 살아서 역사(운동)할 때..
비로소 내가 말씀에 순종되어 진다.
▲그럼 언제, 어떻게 말씀이 내 속에서 살아서 역사(운동)하는가?
그것은 은혜로 된다고 본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모하는 마음, 말씀이 내게 역사하는 은혜를 구하는 마음이다.
이때 말씀이 운동력있게 살아서 역사할 것이고,
나는 그 말씀에 순종하게 될 것이다...
벧전1:22,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진리(말씀)는 그저 듣고 깨닫는 차원이 아니라,
반드시 순종하는 차원에 이르러야 한다.
이 순종하는 차원에 이르려면,
말씀이 내 속에서 ‘살아서 운동’해야 한다.
그런 은혜가 있도록,
우리가 할 일은.. 늘 기도로 그 은혜를 간구하는 일이다.
.......................
주1)
책 내용이 어떤지는 모르나 <CEO 예수>는 책의 제목부터 잘못되었다.
예수님은 ‘CEO’가 되는데 도움을 주는 분이 아니라, 구세주로 오셨다.
하나님의 말씀/설교는.. ‘사업’에 도움을 주지 않고, ‘지식과 정보’를 주지 않는다.
단, 그러나 사람이 말씀을 통해 찔림을 받고, 자신이 벌거벗겨지고..
그래서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면,
CEO를 하든지, 사업을 하는데 있어서, (부차적인) 도움을 받을 수는 있다.
자기 마음이 훨씬 안정되었고, 경건하며, 소명과 목적이 뚜렷하니까.. 그런 (간접적) 도움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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