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분류 없음/2011

말씀은 신자를 '벌거벗긴다'

LNCK 2011. 9. 14. 10:04

◈말씀은 신자를 '벌거벗긴다'          히4:12~13        11.03.31.설교녹취

 

히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진리는 우리를 벌거벗겨, 회개하도록 인도하신다.

 

진리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견해, 관념이 아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은 사람들을 ‘벌거벗기는’ 것이다. 회개하라고..

 

▲하나님은 우리를 벌거벗기신다.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나타나셔서, 그를 벌거벗기셨다. 그러자 이사야는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중에 살았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사6:5 

 

하나님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벌거벗기셨다.

      계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벌거벗어야 회개하고 변화된다.

예수님은 ‘죄인을 불러서 회개’시키러 오셨다. 눅5:32

 

구약의 율법도, 그 주신 목적 중 하나가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었다. 롬3:20

그래서 자신이 벌거벗어지고, 그 추함이 드러나 회개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안타까운 것은,

성경공부도 많이 하고, 강해설교도 많이 듣는데, 교회 봉사도 열심히 하는데,

그것들이 성도들을 벌거벗게 해서,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고 회개케 해야 하는데,

 

성경공부, 강해설교, 교회봉사를 하면 할수록,

벌거벗지 않고, 도리어 더 겹겹이 껴 입는 것 같다.

 

벌거벗는 ‘회개’가 아니라, 종교성으로 점점 더 덧 입혀지는 것이다.

이 점을 저는 심히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다.

 

▲오늘날 성도들을 <벌거벗기는 참된 설교>가 점점 사라져버렸다.

 

※역사적 전통으로 보면.. 청교도 설교자들, 휫필드, 에드워즈,

찰스 피니, 스펄전 등이 이런 벌거벗기는 설교를 했고,

빌리 그래함도 초기(1960~70년대)에 그런 설교를 했고,

오늘날에는 폴 워셔 목사가 ‘벌거벗기는 설교’를 하고 있다.     *폴 워셔 설교 모음 Paul Washer

 

과거에 한국에서 ‘벌거벗기는 설교’에 가장 가까운 목회자도 있었다.

                                                                                         * 주여, 한국 교회를 살려 주옵소서!

성경을 읽다가, 또는 설교를 듣다가

신자는 자기 자신이 벌거벗겨지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면서 부끄러워하면서, 자연히 회개로 인도되는 것이다.

저와 여러분에게 이 은혜가 있기를 바란다.

 

예수님은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벌거벗은 실상을 정확히 보셨다.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그러나 자신들은, 그런 자신의 벌거벗은 모습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계3:17 

 

오늘날 우리도, 자신의 벌거벗은 모습을 보지 못하고,

오히려 스스로의 신앙을 자랑할 수 있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처럼

 

주님께 ‘안약’을 사서 발라서, 우리의 실상을 볼 수 있게 되기 바란다. 계3:18

그 안약이 무엇인가?

바로 진리의 말씀이다. ←말씀이 우리를 벌거벗기니까. 그래서 보게 하니까. 히4:13

 

이 눈이 뜨여지지 않으면, 우리는 외식자가 되거나, 형식적인 신자가 된다.

‘육에 속한 신자’로 살게 된다.

우리 자신을 바로 보게 되는.. 눈이 열리는 은혜가 있게 되기를 바란다.

 

‘진리가 우리를 벌거벗긴다’는 말은,

다시 말하면 ‘진리가 우리 실상을 올바로 보게 한다’는 말이다.

원래 내가, 나의 정확한 실상을 못 보고 있었는데,

진리의 말씀이, 내 눈을 뜨게 하여, 그 정확한 실상을 비로소 보게 한다.

 

-이것이 ‘진리가 우리를 벌거벗긴다’는 말이다.

  사실은 벌거벗기는게 아니라, 실상을 정확하게 보게 한다는 뜻.

 

▲제/설교자가 벌거벗겨진 경험

제가 릭 조이너의 <하나님의 부르심>이란 책을 읽을 때,

또한 <빛과 어둠의 영적 전쟁>이란 책을 읽을 때,

 

제가 그 책을 처음 읽었을 때, 놀라웠다.

그래서 두 번째 다시 읽었는데.. 그 때는 더 놀라웠다.

왜냐하면 ‘다 제 얘기를, 그 책에 낱낱이 기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릭 조이너가 먼저, 자신이 벌거벗겨지는 경험을 하고, 그 책을 썼다.

제가 그 책을 읽었을 때, 제 자신도 마구 벌거벗겨지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여러분, 진리 중에 최고의 진리는,

바로 나 자신을 벌거벗기는 진리(말씀)이다.

 

우리가 ‘은혜 받았다’라는 표현을 종종 쓰지만,

진짜 은혜는.. 나를 ‘벌거벗기는 은혜’이다. 그냥 격려 받은 것이 아니다.

 

우리가 설교를 들을 때 '설교자가 꼭 나를 꼭 집어서 설교한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그래서 '혹시 누가 내 얘기를 헀나?'는 상상으로 발전하기도 하는데..

이것이 바로 '말씀이 우리를 벌거벗기는 역사'이다.

이때는 회개할 타이밍이지, 누구를 원망할 타이밍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고 했다.

시51: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상한 심령’이란,

자기가 말씀을 통해 벌거벗겨지고,

그래서 통회하고, 자복하는 심령을 뜻한다.

 

       ▲사실은 심각한 문제

여러분이 일평생 교회를 다니셨는데,

한 번도 자신이 벌거벗겨진 경험 없이도 다닐 수 있다.

진정한 상한 심령으로, 제대로 회개 한 번 안 하고.. 지낼 수도 있다.

 

그러나 막상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그저 ‘내가 죄인인 것을 인정하는 정도’로만 회개한 모습으로,

최후의 심판대 앞에서.. 안전할 수 있을까?

 

그건 누구도 모르지만,

우리는 커트라인을 높게 잡아야 한다.

 

‘내가 죄인인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정도’로 회개한 모습으로는,

평소에

‘진정한 크리스천의 삶 authentic Christian life’을 결코 살 수 없다.

‘명목상 크리스천의 삶 nominal Christian life’를 살게 될 것이다.

 

그런 신자가, 천국의 심판대 앞에서, 과연 안전할 수 있을까? 누구도 모르지만

그러므로 이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이다.

 

우리가 당장 예수 믿기 시작할 때는.. 쉽게 출발하더라도,

신앙 연수가 높아져 가면서.. 점점 자신이 말씀 앞에서 벌거벗겨져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참된 ‘은혜’이다. 오직 은혜로만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벌거벗겨지는 은혜’를 구해야 한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약4:2

 

▲마치는 말

말씀은 우리를 ‘벌거벗긴다.’

 

히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그러므로 설교말씀을 들을 때,

또는 우리 각자가 성경말씀을 읽을 때,

 

나 자신이 벌거벗겨지며,

상한 심령이 되어서,

회개하고 통회하는 심령이 되어가는 것

-이것이 바로 진정한 크리스천의 삶이다.

 

▲부흥이 오는 방식

부흥이 올 때,

이런 내적인 심령의 변화와 외적인 표적이 동시에 나타난다.

 

그런데 부흥이 오더라도,

얼마(길게 2~3년) 안 지나서 부흥이 ‘자동 소멸’ 된다든지..

아니면 부흥이 ‘매너리즘’에 빠지게 되는데..

 

그 이유는,

위에서 말한 내적인 심령의 변화(벌거벗겨짐, 회개)가 점점 등한시되고,

오직 외적인 표적(신유, 은사, 기적)이 강조되고, 부각될 때이다.

 

그런 외적 표적의 부흥은 전혀 겁낼 것이 못 된다.

그런 부흥은 매 10년마다 늘 있어왔고,

또한 얼마 안 가서 곧 소멸되기 때문이다.

 

성령의 역사로

내적 심령의 변화(벌거벗겨지는 회개)가 먼저 강조되어야 한다는 뜻.

 

 

....................... 전략된 부분 ..................

 

 

서론: 신약 성도의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

 

▲우리는, 예수 믿기 전 과거에 ‘흙에 속한 자’들이었다.

 

고전15:48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49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그런데 은혜로 예수를 믿고 나서, 구원의 길을 가게 되었는데,

이제는 ‘흙에 속한 자’에서 → ‘하늘에 속한 자’로 신분이 변화된 것이다.

 

▲‘하늘에 속한 자’는.. 말씀을 자기 마음에 기록하고 지킨다.

 

또 주께서 가라사대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으로 세울 (새)언약이 이것이니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   히8:10 

 

이것은 구약에 이미 예언된 것인데,

신약에서 성취된 것이다.

 

그래서 구약의 성도들은.. 율법을 외적으로 지켰지만,

신약의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하나님의 법을 마음으로 지킨다.

 

예수님이 ‘형제를 보고 미움을 품으면 이미 살인한 자다’ 라고 하신 것처럼,

살인(외적 행위) 이전에, 마음의 미움부터 제거하는 것이.. 신약 성도의 삶이다.

 

▲그런데 이것은 자동적으로 되지 않는다.

‘그럼 하나님이 그렇게 마음으로 율법을 지키도록 만들어 놓으셨으니,

자동적으로 되겠네..’ 하는 생각은 잘못이다.

 

하나님이 십자가 역사로 다 이루어 놓으신, 즉 그 밥상을 차려 놓으셨지만,

숟가락으로 떠먹는 일은, 우리가 해야 되는 일이다.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주기로 다 약속하셨지만, 들어가서 차지해야 했다.)

 

우리의 영은 거듭나서, 성령이 내 안에 거한다 할지라도,

우리의 몸과 육체는.. 너무 세속적 경향과 습관이 강하게 남아있기 때문에

거듭난 성도가, 실제 생활은 육신을 좇아서 살기 십상이다.

 

그래서 바울은 (거듭난) 고린도 교인들에게

‘너희가 아직 육신적이다’ 라고 말씀하고 있다.

 

신분은 ‘하늘에 속한 자’가 되었는데,

실제 행위는 여전히 ‘흙에 속한 자’로서.. 살아가고 있더라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되지 못한> 크리스천의 모습이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이제는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 히8:10 

하는 신약백성으로 사는 길을 열어 놓으셨다.

 

그러면 우리 각자는 ‘수저를 들어야’ 한다.

그걸 머리로 믿고 있다고, 자동적으로 내가 성숙한 크리스천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 십자가로 이루어진 신약의 언약(마음의 변화, 마음의 율법)을 믿고서,

이제는 내가 그 신약의 언약대로 살아내야 한다. 순종의 발걸음이 있어야 한다.

 

그 순종의 발걸음을 가는데 있어서.. <진리의 말씀>이 우리를 ‘발가벗긴다.’

 

※이것을 ‘행위 구원’이라고 비판하는 분들이 있는데,

‘행위 구원’이란, 믿음으로 구원 얻지 않고, 행위로 구원 얻는다.. 이다.

이것은 ‘행위 구원’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 받은 성도가, 그 구원받은 성도의 삶의 발걸음이다. 믿음의 결과반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