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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부흥은.. 주님의 영광을 보는 것

LNCK 2011. 9. 16. 21:47

https://www.youtube.com/watch?v=baQGenP-nAk

 

 

◈참된 부흥은, 주님의 영광을 보는 것       고후3:18, 히1:3      2011.03.31.설교녹취

 

 

부흥은.. 참된 기독교 신앙의 본질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사람이 많이 모이든지/말든지

기적이 많이 일어나든지/말든지.. 그건 부차적인 현상입니다.

 

아래 설교문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중 하나를 정확히 지적하고 있습니다.

 

 

◑참된 부흥은.. 주의 영광을 보는 것이다.

 

고후3: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보니까.. 본 대로 변화된다.

여러분, 자전거 타는 모습이 멋지게 보이면.. 자기도 자전거를 타게 되고,

헤어스타일을 본 모습이 멋지게 보이면.. 그런 헤어스타일을 따라하게 되고,

선생님의 훈시가 멋지게 보이면.. 자기도 커서 선생님 흉내를 내며 훈시하게 된다.

보고 멋있으면.. 자연스럽게 내가 따라하게 되는 것이다.

 

위 본문 고후3:18은, 바로 그 말씀을 하고 있다.

성도가 주님의 영광을 보니까..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된다는 것이다.

 

주의 영광을 볼 때

그 영광과 아름다움을 내가 사모하게 되고

그때 진정한 부흥(영적 생명력의 회복)이 일어나는 것이다.

 

여기서 ‘주님의 영광’이란, 신학적 용어를 빌리면

사랑, 기쁨, 화평 같은 ‘공유적 속성’이다. 비공유적 속성이 아니라

성도가 주님의 형상을 닮는 것은, 그런 공유적 속성을 닮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의 사랑, 기쁨, 화평, 오래 참으심 등에는 별로 관심 없고,

주님의 능력, 권능, 권세.. 이런 것에만 눈독 들일 수 있는데..

그럼 주님의 비공유적 속성을 닮겠다는 것인가? 그럴 수는 없다.

 

이런 내용을 성경 전체를 통해 한 번 간략하게 훑어보려고 한다... ↓

 

 

◑1. 모세가 본 하나님의 영광

 

구약시대에는, 아직 성경이 모든 백성에게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직접 현현하셔서.. 그 영광을 보여주셨다.

 

그래서 우리는 모세에게, 영광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을 볼 수 있다.

그때 모세가 보고, 깨달아 알게 된 하나님의 영광을.. 그는 이렇게 기록했다.

 

출34:6,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민14:18,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자가 많아 죄악과 허물을 사하시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사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모세에게 보여주셨다. (밑줄 친 부분)

모세는 그 영광의 아름다움을 보고서.. 흠모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모세가 점점 그 영광의 형상을 본받아 갔다.

그 결과 성경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민12:3,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꼭 이 구절 말고도,

모세가 40년 동안 광야에서 백성들을 인도한 모습을 보면,

그는 정말 온유하고 인자한 하나님의 형상과 인격을.. 백성들에게 나타내었다.

그 이유는.. 모세가 먼저,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배웠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다.

내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본받게 되려면,

먼저 그리스도를 대면해서 인격적으로 만나야 한다.

그래서 그 영광을 보아야 한다. 자세한 설명은 아래 ◑3.에 나옴

 

 

◑2. 다윗이 본 하나님의 영광

 

다윗도 마찬가지다.

다윗에게 하나님은 영광으로 나타나셨다.

그래서 다윗은 구구절절 시편을 기록했다.

 

시편은.. 모세오경을 확대 재해석한 것인데,

시편과 모세오경.. 둘 다 그리스도를 예언한 책(성경)이다.

 

그런데 딱딱하고 무거운 그렇게 보이는 모세오경의 말씀을

시23편처럼, 부드럽고 인자하신 시편의 말씀으로 재해석한 다윗은

정말 경이로운 신학자요, 시인이었다.

-이 모든 것은, 다윗이 그런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뵈었기 때문이었다.

 

시103:8,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다윗이 이렇게 여호와를 알고, 그 긍휼과 은혜의 하나님 되심을 시편에 기록한 것은,

그런 여호와의 영광의 성품을 뵈었던 것이었다.

뵈었을 때, 그런 여호와의 성품을 본받아 살게 된다.

그래서 다윗도 훌륭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로서의 삶을 보여주었다.

 

비록 다윗이 한때 범죄하기는 했지만,

다윗은 그 자기 범죄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긍휼을 잊지 않았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구약 당시에 깨닫기가 쉽지 않았을 터인데..)

그래서 이런 시를 썼다.

시40:11, 여호와여 주의 긍휼을 내게서 거두지 마시고, 주의 인자와 진리로 나를 항상 보호하소서.

 

이것은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그가 평소에 얼마나 하나님의 (성품의) 영광을 보고, 사모하고, 묵상했는지..

그것이 그가 지은 시편을 보면 줄줄이 나타나 있다.

 

※이 설교는 이렇게 신앙생활의 방향성을 아주 귀하게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을 뵈올 때, 그 분의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그분의 (성품의) 영광을 보고 .. 사모합니까?

아니면 그저 그 분의 손에 들린, 선물 꾸러미만 보고 있습니까?

 

 

◑3.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나님의 영광

 

히1: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요, 그 본체의 형상이신 주님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셨다.

 

그 영광의 본체이요, 광채이신 그 분이 오셨다.

그런데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1:14

 

위 구절에서도,

주님의 영광을 갈릴리 사람들이 보았는데,

공유적 속성으로 기록하고 있다. 은혜와 진실로!

 

신약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고후4:6,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그래서 이제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었고, 알게 되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고 알게 된

그 하나님의 영광의 빛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

 

고전1:30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우리가 그 분의 영광을 보았다. 아버지의 영광을 보았다.. 하는 그것은

바로 주님의 지혜, 의로움, 거룩함, 구속함을 보는 것이다. (공유적 속성)

 

그것은 바로 성령의 열매이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갈5:22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요,

성령님의 열매이시다.

 

예수님은 이제 우리에게 이것을 요구하고 계신다.

   폴 워셔 '포도나무와 가지'의 오해

 

 

◑4. 말씀을 통해 보게 되는 하나님의 영광  ←이 설교문의 하이라이트

 

예수님은 2천년전에 돌아가셔서,

우리는 그 영광의 형상을, 직접 볼 수 없다.

 

그 영광을 보아야

그 영광의 형상을 우리가 본 받을 터인데,

직접 보지는 못하지만,

지금 우리는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의 영광을 보게 된다.

 

성령님의 역사로,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할 때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의 영광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는 바른 동기와 목적과 초점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말씀으로 가장 가까이, 그리고 정확하게 주님을 보고, 알 수 있다.

대부분 사람들은 너무 어렵게 (환상, 입신 등으로) 주님을 만나고자 한다.

그런데 가장 쉽게 주님을 만날 수 있는 비결은,

말씀 안에서 주님과 함께 머무르고, 기도로 주님과 교제하는 것이다.

 

우리가 성경 속에서 주님을 바라볼 때,

성령의 9가지 열매를 맺으신 주님의 영광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또는 고전1:30처럼 주님의 의로움, 거룩함, 구속함 지혜 등에 초점을 두고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면.. 그 영광을 보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른 초점이다.)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의 그 본질을 충분히 쉽게 만날 수 있는데,

그런데 성경을 읽으면서도,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보는 초점이 잘못 될 수 있다.

 

1) 예수님이 나에게만 특별히 주시는 능력, 치유의 기적, 무슨 특별한 환상..

이런 것들을 초점으로 해서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니까,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의 영광을 보려는 것은..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2) 성경은, 성경의 지식을 얻기 위해서 읽는 것이 아니다.

성경의 지식도 어느 정도는 필요하겠지만, 그 지식을 얻는 목적도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기 위한 지식’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지식적 측면으로만 가르치거나 배우는 시도는 잘못이다.

그들은, 성경을 읽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려는,

올바른 목적을 가진 사람들보다.. 훨씬 뒤쳐질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성경을 읽으면서, 그 성경 속에서, 주님의 영광/성품/마음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주님의 성품이 보이고, 마음이 알아지고, 주님의 인격을 대면하기 시작하게 되면,

 

성경을 읽다가 묵상을 하게 되고, 통곡을 하게 되기도 한다.

주님의 마음과 인격을 바라보게 될 때, 그렇게 된다.

 

또한 성경 속의 범죄한 사람들을 볼 때면,

내 모습이 그에게 투사되면서, 나를 회개하는 자리로 이끌어 가기도 한다.

 

이렇게 회개할 때,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대면하게 된다.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자와 진실이 한이 없으신.. 그 하나님의 영광을 대면하게 된다.

 

이렇게 성경속에서주님의 영광을 내가 뵈울 때,

그 영광이 너무 아름답고 찬란하다는 것을 내가 깨달을 때,

자연적으로 주님의 형상을 닮게 되어 있다.

 

반대로, 내가 아직 주님의 형상을 닮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내가 주님의 형상을 아직 보고 있지 못하다는 뜻이다.

성경을 읽기는 하지만, 초점이 잘못되어서 그런 것이다.

 

주님을 닮을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은,

진리인 성경말씀 안에서 자주 주님을 대면하고, 주님(말씀)과 함께 거하면서,

그 영광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이다. 그 사랑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 영광의 경이로운 형상과 인격을 자꾸 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주님을 닮을 수 있고,

그래야 하나님의 형상의 영광(아름다움)을 내 안에 이룰 수 있다.

보면.. 닮게 되어 있다.

 

여러분이 오늘부터 말씀을 보실 때

거기서 하나님의 인격을, 형상을, 성품을, 마음을 (통칭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시고,

그런 마음으로 말씀과 가까이 하시기 바란다.

 

주님을 닮을 수 있는 비결은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고, 음미하며, 언제 어디서나 주님을 뵙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다.

 

언제 어느 상황에서나 주님의 그 영광을 대면하는 것이다.

그것 밖에는 주님을 알 수 있는 길이 없다.

 

제일 중요한 것은,

그 말씀이 문맥 안에서 풀어지고 비밀을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내가 성경을 읽다가 하나님의 사랑을 만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인격을 만나는 것이다. 하나님의 그 성품에 감동 받아, 그것을 배우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내 안에 흘러 들어오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그렇게 바뀌는 것이다.

 

 

◑5. 계시를 통해 보게 되는 하나님의 영광

 

욜2:28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성령님은 꿈과 환상과 예언 등의 '계시적인 방편'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님의 영광을 보여주기도 하신다.

이사야에게, 다니엘에게, 사도요한과 바울에게 그러셨다.

 

그들은 주의 영광을 보았을 때,

하나님 앞에 죽은 자와 같이 엎드렸으며,

그 위엄과 영광에 압도되어, 그것을 사모하며, 일평생 헌신하였다.

 

우리가 주의할 것은, 우리에게 성경을 주셨는데, 성경은 무시하고,

단순히 은사적인 차원을 통해서 우리가 어떤 영광만을 보려고 하면 안 된다.

그것은 중심, 초점, 동기가 잘못되는 것이다.

계시적 방편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지, 추구할 것은 아니다.

(물론 계시적 방편들을 너무 제한하고, 금지해서도 안 되겠지만..)

 

그 계시적 방편을 통해서든지..

아니면 성경을 통해서든지..

중간 경로가 달라서 그렇지, 목적지는 똑같다.

 

주님의 영광을 올바로 바라보고, 그 영광을 흠모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그 영광을 사모하면서, 주님을 닮아가게 되는 것이다.

 

 

◑6. 성도를 통해 보게 되는 하나님의 영광

 

고후3:2~3, 너희는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우리 마음에

진리의 말씀이, 주님의 형상이 새겨져 있을 때,

우리를 보고, 모든 사람이 그 주님의 영광을 보게 되고, 알게 되고,

흠모하게 되고, 주님의 형상을 닮게 된다. 우리를 통해서!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편지’라는 표현을 썼다. ↑

다른 말로 하면 ‘너희가 바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여주는 일종의 성경(편지)이다’는 뜻도 된다.

 

그래서 찰스 피니는 이렇게 말했다.

‘크리스천은 모든 사람에 의해서 알게 되고, 읽혀지게 되는 산 서신이 되어야 한다.’

 

사실 우리가

성 프랜시스, 주기철 목사님, 손양원 목사님, 장기려 장로님

이런 분들의 삶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된다.

 

그래서 그 분을 보면서, 우리 자신들이 부끄러워진다.

우리 자신들이 회개하게 된다.

 

그분들 안에 있는 그 영광은,

그리스도의 영광이요, 형상이니까!

그러면서, 그 성자들을 통해서, 우리는 주님의 형상을 점점 더 닮아간다.

 

▲마치는 말

우리는 자꾸만 자꾸만 주님의 영광을 보아야 한다.

주님의 영광을 보는 성도들은.. 자연스럽게 주의 영광의 형상으로 변화되게 되어 있다.

 

오늘날 우리가 부흥을 꿈꿀 때,

그 목적과 방향이 올발라야 한다.

 

그것은.. 무조건 사람들이 많이 운집하는 것이 아니며,

무조건 기적적인 은사가 많이 나타나는 것도 그 핵심은 아니다.

 

부흥의 핵심과 옳은 방향은,

성도 각자가, 주님의 형상을 점점 본받아 가는 것이다.

그것을 먼저 내 마음으로 간절히 사모하는 것이다.

 

그 주님의 영광의 형상을 내가 본 받으려면,

성경 속에서, 내가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어야 한다.

그 예수님의 영광에 감동되어, 본받는 그것이 바로, 가장 올바른 부흥의 방식이다.

 

(※은사와 표적에 의한 부흥은.. 항상 2~3년 지나면 유야무야 되고 만다.

아예 형체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사람들이 또 다른 신비한 표적이 나타나는 곳으로, 대거 이동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성도의 신격화가 아니다.

우리가 아무리 주님의 형상을 본받아도, 스스로 황제가 되면 안 된다.

 

마치 모세가 얼굴의 광채가 났을 때, 수건을 가린 것처럼,

내 얼굴에 하늘의 광채가 반사되어 번쩍이더라도,

늘 자기를 부인하며, 수건으로 자기를 가려야 한다.

 

우리가 이렇게 점점 주의 형상을 닮아가다가,

주님의 부활 때,

정말 주님과 같이 완전하고도, 영광스러운 형상으로 변화될 것이다...

 

그 소망을 가진 성도는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요일3:3

 

..........................

 

◑부흥 관련글 중간 정리

 

어떻게 하다보니까, 최근에 <부흥>에 관한 주제의 설교문들을 모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 번 중간정리 해 봅니다.

 

1. 부흥은 열정을 회복하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

                                  신앙은 입술의 고백이 아니라 삶의 고백 

2. 부흥은 회심/회개의 역사를 통해 온다.  말씀은 신자를 '벌거벗긴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시라

3. 부흥은 공의 후에 온다.  공의 후에 부흥 온다

4. 부흥은 주님의 영광을 보는 것 (윗 글↑)  그래서 성결하게 사는 것

 

5. 그 외

- 부흥에는, 교리적 개혁이 필요하다 부흥에 관하여

- 부흥은 약한 자를 통해 올 수 있다. 경건보다 은혜다

- 부흥은 하나님의 주권적이다. 감정의 카푸치노, 즐기지 말자감정의 카푸치노, 즐기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