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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11

3230 선지자 예레미야에 대한 탐구

LNCK 2011. 10. 6. 20:20

◈선지자 예레미야에 대한 탐구                 렘20:7~18              도서 스크랩, 정리 



「예언자, 나에게 말을 걸다」기민석 교수 지음, 두란노 출판사, pp.190~206. 스크랩, 일부 편집


※예레미야서는, 배경을 공부하지 않고는, 아무리 읽어도 이해가 되기 어려운 책입니다.

아래 스크랩 글은, 예레미야서 배경 이해에 도움이 됩니다.



◑1. 예레미야의 성격적 성향


예레미야는 남유다가 바벨론 제국에 의해 함락당하는 마지막 시기를 지켜본

불운한 예언자였습니다.


예레미야서를 읽다 보면,

많은 사람들이 예레미야의 일기를 보는 것 같다고 말합니다.


그만큼 예레미야 자신의 이야기와 정보가 많이 담겨 있지요.

그래서 신학자 '스키너'는, 예레미야서를 근거로,

그의 전기를 쓰는 것이 가능하다고까지 말했습니다.

물론 약간 과장이 섞인 표현이라 봅니다. 주1)


우울한 성향의 예레미야

아모스는 사회 정의,

호세아는 종교적 타락,

이사야는 거룩,

예레미야는 눈물이 그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의 별명이‘눈물의 선지자’입니다.

하지만 눈물의 선지자보다, 좀 더 정확한 표현은

‘우울한 선지자’라고 봅니다.


※우울증 같은 정신병은 물론 아니고,

그의 성격적 성향이 평소에 우울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개인적 환경, 사회 환경이 특히 암울한 시기였습니다.


그는 다른 선지자들과는 다르게, 무척 겁이 많고 소심한 사람이었습니다.

게다가 자신이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선지자라는 사실을

썩 달가워하지 않는 비관적 성향의 사람이었습니다.


특히 이사야와 비교해 보면, 그의 성격이 어떠했는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이사야는 공부도 잘 했고, 집안도 좋았고, 진취적이며, 자신감이 넘치는 성향을 보여줍니다.

게다가 호세아와 다르게 아내 역시 여선지자였으며,

왕궁에서 왕을 보좌하며 살던 엘리트였습니다.


한 마디로 잘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의 자신감은 어찌 보면 당돌하기까지 합니다.


이사야서 6장에 보면, 이사야가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는 장면이 나오는데,

하나님께서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자

서슴없이 ‘나를 보내소서’라며, 자기를 보내달라고 자신 있게 말합니다.


위대한 선지자이자 지도자인 모세조차도

하나님의 부르심에.. 자신은 말을 잘 못한다며 몇 번을 고사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망설이거나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이사야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소유자가.. 예레미야입니다.

늘 소극적이며, 불평불만이 많은 사람이었죠.

 

렘1장에 보면,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대단히 영광스럽게 부르십니다.

그런데 예레미야의 소극적인 반응을 보십시오.


렘1:5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6 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


하나님은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마 성경의 어떤 인물도, 이렇게 영광스럽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두 팔을 활짝 벌려 예레미야를 부르시는데,

하나님께 대답하는 그의 첫 마디가 가관입니다.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1:6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슬프도소이다' 라고 한탄을 한 것입니다.

이 말은 히브리어로 극한 슬픔이나 공포를 표시하는 감탄사 ‘아하’ 입니다.


이 반응이 믿겨지십니까? 하나님은 그를 영광스럽게 부르시는데도, 

겸손하게 사양을 하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하나님께 '슬프다'는 한탄 섞인 탄식을

(감히) 첫마디로 드릴 수 있겠습니까?

그의 성향이 우울적이라는 뜻입니다. (정신병적 우울증은 아닙니다.)


뒤이어 예레미야는 어쭙잖게 모세를 흉내 내며 이렇게 말합니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1:6


자신의 부름에 대해 한탄하는 이 허무한 반응에,

두 팔을 벌리고 환영하려던 하나님은 좀 머쓱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를 달래고 격려하여, 그를 예언자로 만들어서 쓰십니다.

 

1:7~10절을 보십시다.

 

7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하든지 너는 말할찌니라


8 너는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고

 

9 여호와께서 그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10 보라 내가 오늘날 너를 열방 만국 위에 세우고

   너로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였느니라.


바람난 아내에 음란한 자식들까지 주어 호세아 가정을 콩가루로 만들어 버리시던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겐 어찌 이리도 친절하신지요?


     하지만 그는, 이렇게 친절과 위로를 받지 않고선,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너무나 고난의 세월이 많고 길었다는 뜻입니다.



◑2. 예레미야의 눈물의 고백


예레미야서에는 소위 예레미야의 고백(독백)이라고 불리는

시詩적 구절들이 여러 번 나옵니다.  

*12:1~4, 15:10~18, 17:14~18, 18:18~23, 20:7~18 (아래에서 이 구절들을 차례로 설명함. 12:1~은 생략)

스스로 자신을 한탄하는 시 입니다. 

다른 예언서에 비해 아주 독특한 특징이지요.


이렇게 그가 자신을 한탄한 것은,

그의 사역이 그만큼 힘들었다는 뜻입니다. 단순한 우울한 성향 때문만 아니었습니다.

40년 동안 충실하게 예언활동을 했는데, 다른 선지자와 비교하면, 매우 긴 기간입니다.


11:19에 나와 있는 예레미야의 고백(독백)을 들어보겠습니다.


"나는 끌려서 잡히러 가는 순한 어린 양과 같으므로

그들이 나를 해하려고 꾀하기를 우리가 그 나무와 과실을 함께 박멸하자

그를 산 자의 땅에서 끊어서

그 이름으로 다시 기억되지 못하게 하자 함을 내가 알지 못하였나이다."


이 구절을 보면, 예레미야가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많이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미움 정도가 아니라, 목숨의 위협까지도 받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도살당하는 어린 양' 같고,

그들이 자신을 ‘산 자의 땅에서 끊어 버리려 했다’고 고백합니다.


이렇게 예레미야는 자신이 당한 어려움을

하나님 앞에 숨김없이 다 고백하고, 울어 댑니다.


(같은 상황이라면) 아모스나 호세야는 어땠을까요?

그들 내면에 대한 기록이 많지 않아서,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그들도 예레미야 못지않게 어려움이 많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렇게 예레미야처럼

소상히 자신의 어려움을 토로하지는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사람들은 예레미야를 '눈물의 선지자'로 부르는 모양입니다.  주2)


하지만 하나님은 늘 예레미야를 달래십니다.

어려움이 있다고 눈물을 흘릴 때마다 달래서, 다시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의 사역이 너무 고달프고 힘들어

자기 출생과, 자기를 낳은 어머니마저도 원망합니다.

왜 자신을 낳아 이렇게 고생하게 하느냐고 울부짖습니다.


15:10, 내게 재앙이로다 나의 모친이여 모친이 나를 온 세계에게 다툼과 침을 당할 자로 낳으셨도다.

          내가 뀌어주지도 아니하였고, 사람이 내게 뀌이지도 아니하였건마는 다 나를 저주하는도다.

  

‘다 나를 저주하는도다’ 라고 할 만큼, 예레미야는 정말 힘들었는가 봅니다.

이렇게 울어대는 예레미야를 하나님은 또 위로하십니다.


15:20~21 내가 너로 이 백성 앞에 견고한 놋 성벽이 되게 하리니

그들이 너를 칠찌라도 이기지 못할 것은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구하여 건짐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너를 악한 자의 손에서 건지며 무서운 자의 손에서 구속하리라

 

예레미야를 보면, 하나님이 참 자상하십니다.

이렇게 징징대며 울어대는 예레미야도 달래고, 위로하셔야 하니 말입니다.


예레미야가 좀 너무 했다 싶은가요?

그러나 예레미야 입장에서 보면, 정말 우울하게 살 수 밖에 없겠구나 싶습니다.


17:15에 보면, 우리가 예레미야의 어려움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들이 내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어디 있느뇨? 이제 임하게 할찌어다 하나이다.’ 17:15


사역자로서 예레미야가 겪은 어려움 중 하나는

당당히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는데, 당장 이루어지는 예언도 있지만,

당장 이루어지지 않고, 길게는 5~10~20년 후에 이루어지는 예언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예레미야를 비난하는 것입니다. ‘너의 예언 언제 이루어지니?’ ↖

비아냥거린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예레미야가 얼마나 답답하고, 죽고 싶겠습니까?

그리고 예레미야도, 가끔 초조했을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자기는 하나님의 감동으로 예언을 했는데,

'혹시 내 예언이 안 이루어지면 어떻게 하나?' 하는 불안감 말입니다.


    그러나 참 예언자가, 성령의 감동으로 예언한 것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다만 성취되는 시간은 좀 오래 걸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의 예언은,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졌습니다.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 말로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 삼상3:19

  

그래서 때때로 예레미야는

자기가 다시는 예언을 하지 않겠다고 ..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기를 감동하시면,

예레미야는 견딜 수 없어서, 다시 예언하게 됩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20:9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즉 누가 예언하지 아니하겠느냐  암3:8


오죽 힘들었으면, 하나님을 자신의 ‘두려움’이라고 표현했겠습니까.


주는 내게 두려움이 되지 마옵소서. 재앙의 날에 주는 나의 피난처시니이다.’ 렘17:17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사역이 너무 힘들거나 황당하다면

누구나 도망치고 싶을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바로 그런 입장인 것입니다.


소명을 받고 열심히 일했는데,

존귀와 영광이 자기에게 오지 않고, (이게 와야 당연한데)


도리어 열심히 예언사역을 할수록,

사람들의 눈총과 조롱거리가 되었으니,

예레미야로서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두려운’ 분입니다.


이렇게 살펴보니, 예레미야의 성격이 소심하기도 했겠지만,

하나님의 섭리가 너무하다 싶기도 합니다.


우리 중 누구도, 예레미야와 같은 환경에 처했더라면,

아마 예레미야보다 더 울보가 되고, 징징거렸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연약한 인간이기에, 이제 예레미야의 우울한 심정에 동정이 갑니다.



◑3. 예레미야의 수세와 공세


어느 날 예레미야가 또 하나님 앞에 와서 이렇게 하소연합니다.


18:18 ‘그들이 말하기를 오라 우리가 꾀를 내어 예레미야를 치자.

제사장에게서 율법이, 지혜로운 자에게서 모략이, 선지자에게서 말씀이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니

오라 우리가 혀로 그를 치고, 그의 아무 말에도 주의치 말자 하나이다.’


사람들이 모여서, 예레미야를 해하기로 작당하였습니다.

예레미야 말고도 다른 제사장, 다른 지혜자, 다른 선지자들이 수두룩하니

예레미야쯤은 아예 없애버려도 될 것 같다는

아주 무시무시한 악행을 계획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예레미야가 분노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는데

그 내용이 참 심란합니다.


     18:21~23, ‘그러하온즉 그들의 자녀를 기근에 내어주시며

     그들을 칼의 세력에 붙이시며, 그들의 아내들은 자녀를 잃고 과부가 되며,

     그 장정은 사망을 당하며, 그 청년은 전장에서 칼을 맞게 하시며..


     주께서 군대로 졸지에 그들에게 임하게 하사, 그들의 집에서 부르짖음이 들리게 하옵소서,

     이는 그들이 나를 취하려고 구덩이를 팠고, 내 발을 빠치려고 올무를 베풀었음이니이다.

 

     여호와여 그들이 나를 죽이려 하는 계략을 주께서 다 아시오니,

     그 악을 사하지 마시며 그 죄를 주의 목전에서 도말치 마시고,

     그들로 주의 앞에 넘어지게 하시되 주의 노하시는 때에 이같이 그들에게 행하옵소서.’ 


예레미야가 단단히 화가 난 모양입니다.

웬만해서는 개인적인 원한 때문에 이렇게까지 하지 않을 텐데 (시편의 저주시 수준입니다.)

자신을 처단하려는 무리들을, 하나님이 저주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예레미야 같은 기름부음 받은 하나님의 종에게는

영적인 권세가 있습니다.

이 점을 간과하시면 안 됩니다.

(별로 영적 권세가 없는) 나 자신과 비슷하다고 여기다가는.. 큰 코 다칩니다.


지금 예레미야의 몰골은, 아마 딱 무시당하기 알맞았을 것입니다.

뭐 지위도, 돈도, 화려한 경력도.. 아무 것도 없습니다. 백의종군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의 권세마저도 무시하면.. 큰 일 납니다.

그는 하나님의 대리자(15:19)요, 하나님의 대변인의 전권을 위임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또는 주의 종들에게) 아무 것도 안 주셨지만,

주신 것도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권세입니다.


     예를 들면,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1:9


     -보라 내가 오늘날 너를 열방 만국 위에 세우고

       너로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였느니라 1:10


    -보라 내가 오늘날 너로 그 온 땅과 유다 왕들과 그 족장들과 그 제사장들과

      그 땅 백성 앞에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성벽이 되게 하였은즉 1:18

  

그래서 모세도 가진 것은 지팡이 한 개 뿐이었지만,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권세를 갖고 있었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쓴다는 뜻은 아니고요, 하나님의 권세의 대리자였습니다.


그래서 시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르시기를 나의 기름 부은 자를 손대지 말며 나의 선지자들을 해하지 말라 하셨도다.’ 시105:15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선지자의 고유한 권세'를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예레미야를 조롱합니다.


그런데 왜 예레미야는 그토록 사람들로부터 조롱을 받아야만 했을까요?


20:8 ‘대저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강포와 멸망을 부르짖으오니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여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거리가 됨이니이다.’


예레미야는 항상 사람들에게

파멸과 멸망만 예언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미움을 받은 것입니다.


그는 왕궁에 가서 ‘이 나라가 파멸할 것이다.’ 라고 외쳐야 했고,

성전에 가서는 ‘이곳은 하나님이 계시지 아니하고 곧 멸망할 것이다.’ 라고 예언해야 했습니다.

그러니 그 나라 사람들이 예레미야를 정상인으로 생각했겠습니까?


그야말로 진퇴양난입니다.

입을 열어서 예언하면.. 사람들에게 맞아 죽을 것 같고,

입을 닫아서 예언을 안 하면.. 자기 속에서 불이 나서 견딜 수 없고..


20:9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이제 그의 갈등이 극에 달했는지, 예레미야는 급기야 이상 행동을 보입니다.

하나님께 그렇게 울고불고 하다가.. 갑자기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20:13 ‘여호와께 노래하라. 너희는 여호와를 찬양하라.

가난한 자의 생명을 행악자의 손에서 구원하셨음이니라.’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하다가,

바로 다음에서는 돌변하여 자기가 태어난 것을 저주하기 시작합니다.


20:14 내 생일이 저주를 받았더면, 나의 어미가 나를 생산하던 날이 복이 없었더면,

15 나의 아비에게 소식을 전하여 이르기를 네가 생남하였다 하여 아비를 즐겁게 하던 자가 저주를 받았더면..

  

이렇게 예레미야는 하나님 앞에서 울다가 웃다가 또 울다가 웃습니다.

 

      ※이런 증상을 흔히 우울증 혹은 조울증이라고 부릅니다. (울다가, 웃다가 하는 것)

      주로 마음이 극심하게 어둡고 병든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물론 이런 한 번의 경우만 놓고서, 그 분을 환자로 취급해서는 안되겠습니다.

      그는 기름부음 받은 선지자입니다.


하나님은 더 나아가 선지자에게 기이한 행동을 요구하십니다.

소들이 하는 멍에를 어깨에 메고 있으라는 겁니다.

가뜩이나 밉보인 예레미야가, 그러고 다니니 미쳤다는 소리도 들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왜 멍에를 지고 다니느냐고 물으면 그는 말하기를

'우리가 포로로 잡혀 이렇게 바벨론의 멍에를 멜 것이다'(렘27장)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니 예레미야는, 민족의 반역자로 낙인 찍혔던 것입니다.

교회의 반역자는 말할 것도 없고요..



◑4. 예레미야가 몰랐던 자기의 놀라운 사명


놀랍게도 하나님은 그의 입을 통하여

40년의 긴 세월 동안, 장장 52장이나 되는 긴 예언을 남기십니다.

 

더 놀라운 것은, 이 우울한 예레미야를 통해

기독교 신학에 있어서 너무나도 중요한 예언을 말씀하십니다.


이는 구약성경의 분기점이 될 만한 위대한 예언이지요.

예레미야31:31~34를 보면, 예레미야를 통해 하나님의 새로운 약속이 선포됩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말씀은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주어졌던 돌판에 새긴 그 옛 법을 뛰어넘어,

이제 그의 백성에게

마음에 새긴 새로운 법(신약 복음)을 주시겠다는, 신학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선언입니다.


옛 언약의 '돌판' 즉 율법의 시대가 지나가고,

새 언약의 ‘마음’ 즉 성령의 시대가 올 것이라는

매우 의미심장한 암시가 담겨 있습니다.


이렇게 중요한 말씀이.. 우울한 성향의 예레미야의 입을 통해 예언된 것입니다.

어찌된 섭리일까요?

 

예레미야 본인은, 자기 자신이 얼마나 한심하고 미웠을까요?

하나님께 원망을 쏟아 붓긴 하지만,

자기 자신을 결코 구제받을 수 없는 못난이로 자학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의 이런 성격은

당시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을 잃어버릴 위기에 처한 이스라엘 백성과도 같았습니다.

(예레미야와 이스라엘이 동일시됩니다. 신학적 해석인데,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대로 살아 의로운 백성이 되길 원했지만

그 어떤 인간도 율법대로 살 수 없었고,

오히려 율법의 정죄 속에 죄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를 일컬어, 후에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롬3:20


이스라엘이.. 하나님 뜻대로 살고자 하였으니 쉽지 않았습니다.

 

예레미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의 종으로서 당당히 살고 싶었으나,

그에게 맡겨진 사명이 너무나 가혹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그는 종종 하나님을 원망하고 좌절하곤 했습니다.


이런 예레미야였기에,

자기 자신을 획기적으로 변화시켜 줄, 뭔가 새로운 하나님의 역사를

간절히 바랐을 것입니다. 


그(예레미야)의 간절함과 소망이 어느 누구보다 강력했기에,

하나님은 그를 통하여

자학과 좌절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에게

새로운 약속(새 언약, 신약의 복음)의 소식을 전하신 것입니다.


이를 바울의 설명과 함께 이해해 보실까요?


3:21 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로마서 구절은, 렘31:31~34의 로마서 버전입니다.)


이 새로운 약속의 기쁨을 가장 잘 아는 예레미야가

이 소식을 전할 자격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우울한 자였으므로

누구보다 희망과 소망의 맛을 잘 전할 수 있었습니다.

즉 못난 우울질 성향의 예레미야는

바로 못나게 살다가 나라를 잃게 되는 이스라엘의 우울을 대표합니다.


그래서 우울하던 바로 그 시기에

우울적 성향의 사람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예언자로서 활약한 것이 아닐까요?


하나님의 역사가 참 놀랍지요?

우울한 성향의 사람마저도, 하나님께는 목적과 뜻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자신의 과거 삶이나 연약한 부분을

너무 비관적으로 볼 필요가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이 우리를 하나님의 일꾼으로 쓰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이기 때문입니다.

 

..................................

 

주1)

예언자의 이름을 딴 예언서들은,

대개 예언자 개인의 정보를 많이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지만,

사실 예언자의 신상 기록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예레미야서는 다른 예언서와 차별되는 면이 있습니다.

예레미야서에는, 예레미야의 개인적 심정이.. 많이 표현되어 나옵니다.


주2)

‘눈물’ 이란 단어로 검색해 보면,

<예레미야서>에는, 예레미야가 눈물을 흘렸다는 직접적 표현이 많이 안 나온다.

9:1, 14:17를 보시라.

  

그런데 <예레미야애가>에서는,

그가 눈물을 흘렸다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1:2, 1:16, 2:11, 3:48, 3:49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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