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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나이까?

LNCK 2011. 10. 4. 09:46

◈주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나이까?            말1:1~5         인터넷설교스크랩



문제 제기, 독생자 말고, 돈이나 좀 주시지..


요3:16절, 기억하지 못하는 기독교인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사실 자식을 키우고 있는 부모 입장에서 생각할 때,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 그거 정말 대단한 것입니다.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그 사랑이 그냥 군중을 향해서 던져진 사랑이 아니라,

나 한 사람을 개인적으로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생각할 때,

그런 사랑을 받고 살아가는 우리들로서는, 사실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문제가 있을 수 있어요.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은, 사실 일상의 삶을 살아갈 때 잘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러나 실제로 우리 일상의 삶의 현장에서, 직장에서, 가정에서

내가 진짜로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매개물은 ‘독생자 예수님’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강하게 내가 느낄 수 있는 매개물인 ‘돈’을.. 내게 좀 더 주시면 됩니다.


그냥 독생자 말고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성도들이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돈 좀 넉넉히 주시면

하나님의 사랑이 팍팍 느껴질 것입니다.


그 사랑이 강하게 느껴지고, ‘하나님 살아계셔! 하나님 분명히 살아계셔!’ 하며

어디 가서든지 간증하며 살 수 있어요.


말대로라면 엄청납니다, 독생자를 주셨으니까.

근데 ‘독생자를 주셨다’는 말은, 별로 내 피부에 와 닿지를 않는 말이에요.


뭐 그렇게 굳이 값비싼 독생자까지 주실 거라면,

거기에 값싼 사은품 하나씩 곁들여서 주시면, 얼마나 좋습니까?


‘독생자’만 주시니까,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잘 못 느끼니까,

‘독생자’에 비교하면 너무나 보잘 것 없는


‘로또, 자식 명문대, 건강’ .. 그 하찮은 것 한 두 개만 끼워 주시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팍팍 느낄 것 아닙니까!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아주 감격해서

목이 터져라 하나님의 사랑을 전도하면서 다닐 수 있습니다.



◑본문 설명


오늘 본문 말라기 1장에 기가 막힌 대화가 나옵니다.


‘주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나이까?’ 말1:2


다시 말하면 현실을 살아야 되는 우리로서는

도대체 하나님이 천지를 지으신 분이고, 우리를 선택하시고 사랑 하신다는데..

도무지 그걸 피부로 느낄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 사랑을 현실에서 잘 느낄 수 가 없다는 겁니다. 말1:2 ↖


본문에서 하나님과의 대화가, 심히 답답하게 느껴집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시나’ 말1:2a


그런데 나는 지금 현실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없어서

    ‘주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나이까?’ 라고 반문하자 말1:2

    (독생자 그 딴 것도 필요하지만, 좀 피부에 와 닿는 것 주세요.. 반문하자)


그때 하나님의 대답이 마치 동문서답 같습니다.

1500년 전에 있었던 에서의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가십니다.

    ‘여호와가 말씀 하시기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1:3


하나님이 나를 선택해 주신 것 자체가.. 큰 은혜라는 것입니다.

요3:16절을 통해, 나를 구원해 주신 것이.. 큰 축복이라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지금 성도들은, 현실 속에서 시장에서 장사하며, 가정생활하고,

학교 다니고, 직장 생활하는 이런 실제 민초들이에요.


이렇게 현실에서 살아야 되는 사람들에게

본문 말라기 시대보다 1500년 전에 내가 에서는 장자이지만 제쳐버렸고,

야곱을 선택했고 너희가 그 야곱의 자손이다,

그러니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 거 아니냐?’


이걸 우리 역사에 빗대어 설명하면,

‘그 왜 발해를 세운 대조영 있지 않니?

그 대조영이 너의 시조야. 그러니까 너는 왕손이거든?

그러니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이 맞거든?’


이렇게 뜬구름 잡는 말씀을 하시는 것보다는,

차라리 돈 10만원이라도 내 손에 쥐어주시는 것이,

훨씬 더 그 사랑이 실감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1500년 전에 있었던 에서, 야곱 이야기를 뭣 때문에 지금 얘기합니까?


때는 BC 432 년쯤으로 여겨집니다. 말라기 선지자가 이 말라기를 쓴 년도가.

포로귀환 한 게 BC 537년 아니었습니까?

그러니까 약 100년 세월이 흘렀어요.


100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참 여러 가지 일이 있었습니다마는

그 중에서 특기할만한 게, 성전이 재건되었고, 예루살렘 성벽이 재건되었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성전재건과 성벽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제 선민으로서의 외형적 조건이 갖추어진 거예요.


이런 상황에서 이사야가 40장 ~ 55장까지 예언한 메시아의 예언이,

이 당시 포로귀환이후에 활동한 학개, 스가랴 같은 선지자들에 의해서

다시 한 번 되풀이되며 확증됩니다.


그래서 포로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성전재건하고 성벽재건하고 모양을 갖춘 뒤에

이 메시아 도래에, 나라의 운명을 걸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근데 10년 지나고 20년 지나고 30년 지나도

메시아가 도래할 기미가 보이질 않습니다.


여전히 대제국 페르시아의 식민지로서,

그 대제국 한 귀퉁이에 놓여져 있는 아주 하찮은 나라로 여김을 받으면서

조공과 세금을 바쳐야 되는 상황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병충해가 심하고 특히 메뚜기 떼의 습격을 받게 되면서

사람들이 기근에 허덕이게 됩니다.


정치적으로는 식민지하에서 압박과 학대를 받고 있고,

경제적으로는 정말 바닥을 치고 있는 가난이 온 나라를 지배하고 있는 상황에서

40년이 지나도, 50년이 지나도,


학개나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을 통해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는 중에

70, 80년이 지나고 100년이 다 지나가는데도 메시아가 올 기미가 보이지 않고

이 땅,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이스라엘의 경내에서

그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마음속에 이런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선민이라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말이 되냐?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사랑하신다 그러면,

그리고 메시아를 보내주시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러면,

우리 할아버지 메시아 기다리다 돌아가셨어,


우리 아버지 메시아 기다리다 지금 80세가 되셨어,

나? 메시아 기다리면서 지금 60이 되었어,

내 아들 메시아 기다리면서 40이 되었고, 손자는 20살이 되었어.

메시아? 그딴 게 어디 있냐?’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이게 남의 말이 아닙니다.

정말 우리자신을 봐도 구질구질한 하루하루의 삶, 별 볼이 없는 하루하루의 삶,

그날이 그날이고, 어제와 오늘과 내일이 똑같은 삶,

뭐 대박이라는 게, 다 뉴스에 나오는 남의 얘기 아닙니까?


하나님을 믿고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셨다 그러는데,

그 사랑 받은 나의 현실의 꼴이 이게 뭐냐 이겁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다고 했는데..

그 고귀한 값비싼 독생자를 주실 때,

그 고귀한 독생자에 비교해서 정말 하찮은 물질의 복 좀 사은품으로 끼워 주셨더라면,

요3:16절이 피부에 팍팍 와 닿을 것 아닙니까?


그게 하나님께 어려운 일도 아니고, 힘든 일도 아닐 텐데

아까워서 그러시는 것도 아닐 텐데,

하나님 도대체 나를 어떻게 사랑하신다는 것인가요?


여러분, 뭐가 잘못된 겁니까?

자, 그러면 말라기시대 이후 400년이 지났다고 가정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메시아로 오셨을 때를 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로 오셨는데

말라기시대 때에 선민들이 간절히 원하던 것들이 이루어집니까?


페르시아가 망했으면.. 이스라엘이 독립을 해야지.. 왜 또 로마의 식민지가 됩니까?

메시아가 오셨다는데, 이게 다 뭐에요?


예수님 때도 가난이 팔레스틴을 지배하고 있었어요.

3끼를 제대로 먹는 사람이, 평민들 가운데 없었다고 합니다.

세금이 가혹했으니까요.


예수님 오셔서 돌아가셔서 승천하실 때까지

실제로 이런 측면에서 이 지상의 삶의 변화는 하나도 없었어요.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그리고 그 독생자를 통해서 얻게 되는 게 영생이라는 거예요.

천국의 삶이라는 겁니다, 천국의 삶.


그러니까 독생자를 통해서

돈을 주시겠다는 것도 아니고, 건강을 주시겠다는 것도 아니고,

번영과 성공도 아니에요.

독생자를 통해서 천국과 영생을 주시겠다고 얘기하십니다.


그 천국과 영생은 실제로 주셨습니다.

도대체 이게 뭘까요? 


 

◑이스라엘 지경 밖에서 크시다 하리라


‘너희는 목도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지경 밖에서 크시다 하리라.’ 말1:5


‘이스라엘 지역 밖에서도 크시다 하리라’

그게 메시아가 오신 이유라는 거예요.


지금 선민들이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실까’라고 하는 의심하게 되는가 하면

이스라엘 경내 안에서만 들여다보고 있기 때문인 거예요.


내 삶의 현장 (안에)만 들여다보고 있는 거예요.

내 마음의 시선이, 온통 거기에 다 사로잡혀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누구를 못 보냐 하면.. 하나님을 못 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겁니다.


쉽게 예를 들어, 이렇게 얘기해 볼까요?

여러분 <여행의 목적>이라는 책이 있어요.

그 책에 이런 구절이 나와 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 안에 있을 때, 나의 사람들은 얼마나 필요한 존재였던가?

허겁지겁 엽서를 써서 짧은 안부를 전하는 것만으로는, 그리움의 크기가 나를 괴롭힌다.


재충전을 하면 결국 사람들 생각으로 가득하고 절실해진다.

그런데 이때 옆에서 나를 지켜준 사람들에 대한 고마운 감정이 폭발할 듯 부풀어 오르며

무엇보다 행복한 것은, 갑자기 내가 선한 눈의 사람으로 바뀐다는 사실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아무것도 안할 자유, 즉 여행을 떠났습니다. 삶의 현장을 떠난 거예요.


그래서 제주도든지, 해외에서든지, 일상을 벗어나서 나를 돌이켜 볼 때,

내 삶의 현장에서 내 옆에 있던 사람들이 그리워지고

그들이 얼마나 귀한 존재였던가를 알게 되고..  같이 있을 때는 서로 싸웠는데..


그래서 엽서를 써서 안부를 전하게 되는데,

그 엽서 쓰는 정도로는.. 그들에 대한 고마움과 그리움이 다 채워지지를 않는다는 거예요.


그리고 자기가 발견하는 게 뭐냐 하면,

그 삶의 현장을 떠나서야 비로소,

이 내게 주어진 삶에서 만난 사람들이 얼마나 소중했고

내게 주어진 삶의 현장, 일상의 삶.. 이런 것들이 얼마나 귀했던 가를 느끼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선한 눈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 무엇보다 더 행복하다.’고 얘기합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외국에 나가면 다 애국자가 된다.. 그러고

직장 다닐 때는 불평이 많지만, 막상 그 직장을 떠나면.. 그리워집니다.


부부지간, 부자지간, 형제지간.. 서로 늘 티격태격 싸워도,

서로 멀리 떨어져 있으면, (바깥에 나가서 바라보면)

서로를 그리워하게 됩니다.


그래서 <바깥에서 내 현실을 보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의 지금 삶이 구질구질해 보여요? 현실이 답답해 보입니까?


남편을 봐도, 자식을 봐도, 직장에 나가도,

그거 뭐 시원한 꼴이 하나도 없어요. 그거 왜 그러신 줄 아십니까?

-너무 마음이 이스라엘 경내, 삶의 현장에 꽂혀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보세요, ‘하나님이 이스라엘 지역 밖에서도 크시다 하리라’ 말1:5


‘독생자를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보다는

차라리 급할 때 돈 백만원이 더 현실적인 사랑으로 느껴질 때는,

(그런 일이 보통은 안 생기니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으신다고 느껴질 때는)


큰 하나님,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보려면.. 여기를 떠나라.. 이겁니다.

‘이스라엘 지역 밖에서 하나님이 크심을 너희 눈이 보고 알리라.’

현실과 일상의 바깥에 나가서.. 안을 보면..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이 보인다.. 는 겁니다.


‘현실과 일상의 바깥’이 어딥니까?

죄송하지만, 큰 병에 걸려보고, 사업에 망해보고, 자녀에게 큰 불행이 닥쳐보고..


그때 오히려 역설적으로 ‘하나님이 그동안 나를 그토록 사랑하셨구나!

그런데 내가 모르고 살았구나!’ 하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 사람이 한국 안에서, 한국을 바라보는 인식과

    외국 사람이 한국 바깥에서, 한국을 바라보는 인식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진정한 의미의

‘현실과 일상의 바깥’은.. 따로 있습니다.  ↓ 

그것은 바로 <천국과 영생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당신은 지금,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세요? 그래서 괴로우세요?

천국과 영생을 주셨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내 발이 이 땅 현실을 디디고 있지만, 영혼의 발은 천국을 디디고 있는 것입니다.

-내 눈이 이 땅 현실을 보고 살지만, 영혼의 눈은 영생을 보며 사는 것입니다.


여행을 빗대어 설명 드리면,

우리는 이 땅에서 벗어나는 여행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천국에 가서, 이 땅 바깥에서, 이 땅을 바라보는 겁니다.


그때 우리는 ‘이스라엘 지경 바깥에서 여호와는 크시다!’ 하는 겁니다.

우리가 육신의 눈과, 현실적 가치로 하나님을 바라보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맞지요?


우리 마음이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천국 시각으로.. 이 현실적 땅을 내려다 볼 때에,

이렇게 구질구질해 보이고 한심해 보였던 내 삶,

돈 한 푼 제대로 여유가 없고,

건강은 점점 나날이 나빠지는 이 삶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게 없고

하나님의 사랑이 아닌 게 없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겁니다.


*관련글 겸손의 옷 Rick Joyner 을 꼭 읽어보세요.

겸손하고, 낮아지고, 섬기는 사람이.. 천국에서 오히려 큰 자라는 겁니다.


내 가치관이 바뀌어야 합니다.

내가 세상적/현실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으니까.. 신앙생활이 딜레마에 빠지는 겁니다.

그런 눈으로는.. 예수님의 복음을 절반도 깨닫지/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 그랬어요.

‘회개는 가치관의 혁명’이라고요!


내가 세상 가치관에서 → 천국 가치관으로 바뀌지 않으면,

‘진정 회개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관련글/  회개, 가치관의 혁명


심지어는 이런 세상적 가치관을 내가 갖고서,

복음과 성경을 거기에 끼워 맞추고 있습니다.

그게 <기복주의, 성공주의, 자기계발 메시지>입니다.


천국 여행을 떠납시다.

삶의 현장을 떠나야..

(지금 불평하고 있는) 내 삶의 현장이.. 은혜임을 알게 되고,

그 구질구질한 아내/남편이 가장 소중한 줄 알고,

공부 못하는 그 자식들이, 주님의 선물인줄 알게 되는 거예요.

천국을 가진 자만이. 천국 시각으로 보는 사람만이!


천국으로 여행 떠나지 않고 이 삶의 현실에만 내 마음의 관심이 머물러서

그야말로 현실에 찌든 장아찌들이 되어버릴 때

이 ‘장아찌’들에게, 하나님이 뭘 주셔도.. 감사가 안 나와요,

어떤 것을 봐도..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가 없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경건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하루 아침에 되지 않습니다. 구도제자의 길을 오래, 일평생 가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세상 현실에서 점점 자유하게 되며,

천국생활에 더욱 친밀해져 가는.. 예수님 닮은 삶의 모습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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