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률 마7:7~12 출처, 정리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마7:12
▲‘그러므로’가 꼭 들어가야
12절의 말씀을, 우리가 인용할 때, 주의해야 합니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때 ‘그러므로’를 빼고 인용하면 (우리는 종종 빼고 인용합니다.)
예수님의 황금률의 의미를 ‘청동률’주1)로 강등시켜버리는 겁니다.
그 앞에 ‘그러므로’가 반드시 포함이 돼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그러므로’가 뭡니까?
바로 앞에 7~11절까지 나오는, 너무 유명한 구절입니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그러면 하늘아버지께서 너희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리라’
‘너희가 천국과 하나님이 배고파서
간절히 천국과 하나님을 구하고/ 찾고/ 두드릴 때
너희에게 천국과 하나님을 주셔서 만족을 주실 테니까.. 7~11절까지
그러므로,,
즉 그렇게 너희 배가 부른 상태에서, 만족한 상태에서.. 남을 대접하라’는 겁니다.
▲내가 먼저 배불러야 된다.
대접하라는 말도.. 원래는 ‘대우하라’는 뜻이죠.
내가 충분히 받아서 배부릅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요구하고 바라지 말라는 뜻입니다.
아버지가 너를 대우해 주신 것처럼,
충분히/만족스런 상태로
남을 대우하라.. 이런 뜻으로 봅니다.
사실 우리가 가장 부담스러운 친구, 형제가 누굽니까?
서로 편하고 자연스럽게 만나지 못하고 ‘뭘 부탁/청탁/요구할 때’입니다.
내게 ‘뭘 부탁/청탁/요구하는 사람’은
그가 친구라도, 형제라도.. 만나기가 껄끄럽습니다.
‘너희는.. 남에게서 대우받기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 에서
<내가 남에게 대우받기 바라는 것>은,
<그가 나에게 ‘뭘 부탁/요구’ 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아가 <그가 나를 편안하게 해 주기를> 바랍니다.
그런 식으로
내가 남에서 ‘뭘 부탁/요구’ 하지 않고
또 ‘내가 그를 편안하게 해 주라’를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내가 먼저 배 불러야 가능합니다.
내가 배부르지 못하고, 뭔가 갈급한 상태에 있으면,
결코 내 주변의 사람을, 편안하게 대해주지 못합니다...
12절 서두의 접속사 ‘그러므로’가 중요합니다. *헬 ‘가르’
7~11절까지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천국과 하나님을 충분히 공급받아서
내 배가 불러졌으므로..’ 그런 뜻입니다. (그러므로.. 라는 뜻이)
내 배가 불러졌으므로.. 내가 이웃을 편안하게 대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에게 아무 요구도 하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이웃의 요구를 들어줄 수 있는 입장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내가 편안해 졌으므로, 내가 만족해 졌으므로, 내 배가 불러졌으므로!
▲더 나아가면,
‘네가 아직도 사람에게서, 그가 가족이건 친구건 회사동료이건,
사람에게서 무언가 받아서 너의 빈속을 채우려고 하느냐?
너는 아직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온전히 받을 것을 받지 못한 것이고
온전한 하늘아버지의 자녀가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너는 하늘 아버지의 자녀로서의 신분에서
지금 벗어나 있다.. 이 얘깁니다.
‘아직도 네가
다른 사람에게서 뭔가를 원하고 있다면,
그들로부터 주어지는 것으로 네 마음에 만족과 기쁨을 찾으려 한다면,
사람에게서 뭔가 채워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면
넌 아직도 하늘아버지의 자녀가 아니다.
네가 채워질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은 하나님뿐이다,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채워진 뒤에/충분히 만족한 뒤에,
이웃을 대하라.
그때 너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무엇을 받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네 주위 사람들의 부족함에만 관심을 갖게 될 것이다.’
실제 현실의 삶에서도,
천국과 하나님을 소유해서, 만족해진 사람은,
끊임없이 남에게 사랑/은혜/관심/물질을 나눠주려고 합니다.
자기는 물질적으로 개뿔도 없어도, 오히려 빈곤해도,
그래도 자기 가진 범위 안에서, 남을 도와주려 합니다.
그의 마음이.. 천국과 하나님을 소유해서.. 부요해 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2절 서두에 ‘그러므로’를 빼 버리면
예수님의 황금률은, 완전히 오해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주1)
▲좋은 것으로 주시리라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더 고려할 내용이 있습니다.
구하는 사람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마7:11
예수님께서 ‘좋은 것’으로 주신다는 이 말씀이 무지 불안하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생각하기에 좋아 보여서,
내가 구하고 찾고 두드린 그것을 주시면 되는데,
아버지께서 좋은 것으로 주시겠다고 합니다.
불안하지 않아요, 여러분?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과
아버지가 좋다고 느끼시는 것이 너무 다르기 때문에…
여기에 우리의 불안함이 있는 겁니다.
그냥 내게 돈이 필요하면, 돈을 주시면 되지,
왜 하나님 생각에.. 나한테 돈보다 더 좋은 걸 주시려고 하느냐 이겁니다.
그러지 않으셨으면 좋겠는데…
이 ‘좋은 것’이 뭡니까?
‘하나님/천국/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 좋은 것(하나님/천국)을 받으면,
우리에게 참 만족이 생긴다는 겁니다.
그래서 부모/자녀/동료/형제/교인 등 누구를 볼 때
그가 ‘나의 필요를 채워주는 자’로 보이지 않게 됩니다.
나는 이미 ‘하나님/천국’으로 만족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부모/자녀/동료/형제/교인 등 누구를 볼 때
내가 ‘그의 필요(사랑, 관심, 물질)를 채워주는 자’로 보이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를 대우하셨듯이, 그를 대우하게 되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적용하면,
‘하늘에 계신 천지를 지으신 아버지가 너의 마음을 채워주실 텐데
아버지가 채워주시는 것 말고.. 아내에게서 채울 것이 있단 말이냐?
남편에게 아직도 기대하는 것이 있단 말이냐?
자식을 통해서 채워야 할 부분이 남아있단 말이냐?
내가 생각하기에 너에게 좋은 것으로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럴 수는 없다.’
‘이제는 아내를 만날 때,
아내가 나의 부족을 채워주는 도구가 아니라,
내가 아내의 부족을 채워주는 사명자로 보이면
너는 천국의 아들이 되었다는 증거다.’
▲사도바울이 아그립바 왕 앞에 섰을 때,
그를 비판하지 않고
‘나처럼 되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하늘에 있는데, 아그립바 왕은 땅에서 걸어(기어) 다니니까…
그러므로 진정 천국을 소유한 사람은,
상대방을 비판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그를 불쌍히 여깁니다.
그리고 ‘나처럼 되기를 원한다.’
즉 ‘하나님/천국으로 배부르고 만족한 사람이 되기 원한다’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천국이 아니라) 세상 것으로 배부르고, 만족하려는 바리새인, 서기관이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다 지킨다고 생각해서 의롭다고 생각하고 있고,
자기 의 안에서 주어진 자아만족과,
이 세상의 부귀를 절대 놓지 않을 것이니까.
그들이 개와 돼지이다, 전해봐야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힘들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붙잡는 게 있으니까, 붙잡을 만한 것이 있으니까…
반면에 세리와 창기는 온 세상이 죄인이라고 욕하지만
그들은 실제로 마음을 까보면 세상에서 붙잡을 게 없어요.
(후략)
.............................
주1) ▲유사 황금률(청동률) *황금에 빗대어 ‘청동’
12절,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을 우리는 흔히 ‘황금률’이라고 일컫고 있습니다.
마치 황금처럼,
오랜 세월 동안에 변하지 않는, 또는 고귀한 인간윤리의 총화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만 이런 말씀을 하신 게 아니라
‘유사 황금률’들이 도처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 공자님께서 논어에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 말라’
또, 유대의 유명한 랍비인 힐렐도
‘남이 너희에게 하지 않기를 원하는 것을, 너희도 다른 이에게 행하지 말라’
같은 뜻일까요, 다른 뜻일까요? 물론 다른 뜻입니다.
그럼 뭐가 다른지.. 한 번 같이 살펴봅시다.
내가 대접을 받고 싶은 그 내용이
과연 내가 남에게 행하는 것의 기준이 될 수 있을까요?
예를 들어, ‘사자와 소가 서로 친구’라고 가정했을 때,
소가 사자에게 받고 싶은 대접은.. 최고급 야채 세트입니다.
그래서 소가, 최고급 야채 세트를 사자에게 선물을 했습니다.
예수님의 황금률을 읽고.
사자가 좋아라 하겠어요?
반대로, 사자가, 최고로 대접을 받고 싶은 것은 소갈비 세트입니다.
그래서 사자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소갈비 세트를 소에게 주었습니다.
과연 내가 대접받고 싶은 그것이, 남에게 행하는 행동의 기준이 될 수 있을까요?
내가 엄청난 죄인인데, 내 죄로 타락한 인격이
내가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남에게 해주면 되겠느냐.. 이겁니다.
저는 실제로 그런 걸 봤습니다.
<여전도회 회장선거> 하는데, 자기를 추천했다고
추천한 집사님과 말다툼 하는 걸 봤어요.
‘내가 하기 싫다고 그러는데.. 왜 내 이름을 추천하느냐고..’
물론 추천한 집사님은, 상대가 좋아할 것 같아서 추천했겠지요.
그러나 사실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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