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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뱀과 놋뱀의 해석

LNCK 2012. 1. 13. 10:41

◈불뱀과 놋뱀의 해석           민21:4~9, 요3:14       11.12.25.설교일부녹취

 

고요한 시간에 보셔야, 이해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 무슨 뜻인가?  영어로 ‘so loved’

이렇게 서두를 꺼내는 이유는,

그게 우리의 평소 생각처럼, 그렇게 달콤하고 사랑스럽지는 않다는 뜻이다.

 

거기서 ‘이처럼’이 가리키는 내용은, 바로 앞 구절에 나온다.

요3:14 모세가 광야에서 (놋)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놋뱀이 장대에 매달린 것처럼,

예수님이 그렇게 매달려서.. 우리를 구원받게 해 주셨다는 뜻이다.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인가?

 

민21장에, 광야에서 출애굽 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불뱀에 물려서 고통 받게 되는데...

 

▲그 불뱀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뱀들이었다.

하나님이 뱀을 보내신다.

 

에덴동산에서도 뱀을, 하나님이 보내셨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사건이라는 뜻)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울타리 밖에서, 우발적으로 존재하는 사건은 있을 수 없다.

 

불뱀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보내서 물게 하시고,

그 물린 자들에게 놋뱀을 바라보게 하심으로써 살려내는 게.. 구원이다.

그것이 요3:16의 뜻이고, 성경 전체의 내용이기도 하다.

 

요지는,

불뱀에 물려서 거의 죽게 하신 분(장본인)은..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왜냐하면 불뱀에 물려서, 거의 죽게 된 그들만이.. 놋뱀을 쳐다보게 되어 있으니까!

 

멀쩡한 사람들은, 놋뱀을 쳐다볼 필요가 없다.

오직 불뱀에 물린 자들만, 놋뱀을 쳐다보게 되어 있다.

그래서 놋뱀을 쳐다보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백성들을 불뱀에 물리게 섭리하신다.

 

▲내 인생에서 ‘나는 불뱀에 물린 자’라는 자의식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불뱀에 물리지 않은 자들은,

십자가나, 그 장대에 달린 놋뱀이 아무 가치가 없다.

 

그렇다면 놋뱀이 달린 십자가를 바라보게 되는 성도,

놋뱀이 매달린 장대가 십자가니까     모양도 십자가와 비슷할 수 있다. 놋뱀이 가로로 달렸을 경우

그 놋뱀이 되어서 매달린 예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성도는,

이 세상에서 ‘반드시 불뱀에게 물려야 된다’ 라는 결론이 나온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자만, 구원 받으니까,

십자가만 바라보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구원 받을 백성들을, 불뱀에 물리도록 섭리하신다. 허락하신다.

 

그래서 ‘나는 불뱀(죄, 마귀)에 덥썩 물린 자입니다’ 라는 자의식은

구원 받은 성도에게 반드시 필요하다.

 

▲불뱀에 물리기 전에는.. 자기가 스스로 하나님 노릇 한다.

광야의 백성들은, 불뱀에 물리기 전에,

하나님을 오히려 종 취급하면서, ‘왜 우리를 이렇게 불편하게 만드냐?’고 하면서,

(자기가 더 높은 자인 것처럼) 하나님을 원망했다.

 

이 모습이 최초에 어디에 나오냐 하면,

에덴동산에서 그 뱀이 아담과 하와를 부추긴 내용이다.

‘너희가 하나님처럼 되리라’

 

정녕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즉 불뱀에 물리지 않은 사람은)

끊임없이 ‘자기중심적인 신앙생활’을 하게 되어 있다.

자기가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있게 된다.

 

지금도 우리는 하나님을 종으로 부리면서

내가 하나님이 되어서 살고 싶어 한다.

 

그래서 하나님이 애굽에서 그들을 끌어내 오자마자

첫 번째로 주신 계명이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이다.

 

너희들 자신이.. 스스로 신이 되어 살려고 하는 그것이 바로 멸망이다.. 라는 것을

알려주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죄성으로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고 할 때’ .. 불뱀에 물리게 하신다.

성도는 자기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어서

끊임없이 하나님께 불평, 원망하고, 하나님을 판단한다.

 

광야의 이스라엘이 그렇게 하다가 불뱀에 물렸고,

오늘날 크리스천도 그렇게 하다가 불뱀에 물린다.

 

이것을 ‘하나님의 섭리’ 측면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불뱀을 풀어서, 그들을 물게 하시는 것이다.

그들이 ‘놋뱀을 쳐다보고 구원 받게 하기 위해서’이다.

 

구원 받는 성도의 삶이란,

불뱀을 막아주시는 것이, 성도의 삶이 아니라,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반드시 불뱀에 물리게 하신다.

 

그래서 성도는, 이 세상에서 반드시 불뱀에게 물려야 한다.

그래야 놋뱀을 쳐다보게 되고, 하나님께서 그를 살려주시니까!

 

불뱀에 물린 자들의 입에서만

‘하나님 제발 저를 살려주세요!’

이 부르짖음이 터져 나오면서, 놋뱀을 쳐다보게 되어있다.

 

 

▲말씀이 곧 불뱀이다. (환란 풍파 보다는 약한 불뱀) 

오늘날 성도는.. 말씀에 의해서.. 자기 심령과 관절과 골수가 쪼개져서 죽게 된다.

 

<내셔널 지오그라피>에 보면, 광야의 (방울)뱀은 맹독을 갖고 있다.

그 뱀에 물리면, 몇 분 안 되어 경련을 일으키다가, 즉사한다.

 

그렇다면 불뱀에 물리자마자,

‘아 나는 이제 죽었네, 큰 일 났네. 누가 나 살려주지 않으면 큰일이네!

이 고백을 할 수 있게 만드는 것.. 그것이 말씀이다.

 

성도에게 말씀이 떨어지면,

성도는 ‘아, 나는 지금 죽어도 아무 할 말 없는 자네’ 하면서

자신의 죄인됨을 폭로 당한다.

 

그런데 말씀은 곧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이 이 땅에 내려오시자마자 (=말씀을 전파하시자마자)

세상이 마귀로/악으로 폭로되었다.

 

그래서 예수님 이 땅에 내려오셔서

그 불뱀의 역할을 하신 다음에, (말씀으로 세상 사람들을 불뱀처럼 무신 다음에)

친히 놋뱀이 되셔서 장대에 매달려 죽으신 것이다.

 

※앞뒤 다 잘라먹고 ‘예수님이 뱀이래’ 하시면, 큰 일 난다.

 

▲이처럼 말씀이.. 불뱀처럼 물어서.. 죄인 됨을 깨닫게 하신다.

 

롬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말씀)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요일1:10,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나 죄인 아니에요 하는 자들은, 그 속에 말씀이 없다는 것이다.

말씀이 들어가면.. '나는 죄인 맞아요' 라는 고백이 나온다.

 

불뱀의 역할을 하는 것이, (여러 개가 있지만, 그 중 하나가)  말씀이다.

 

▲그렇다면 왜 장대 위에다 놋뱀을 매달게 하셨을까?

그냥 그 불뱀 하나 잡아다가, 매달면 안 되었을까?

왜 굳이 놋뱀을 달아야 했을까?

 

물론 당시 사회가 청동기(놋)사회라서,

아직 철기시대가 도래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하지만,

 

그걸 신학적으로 해석하면,

 

성경에 보면 항상 놋은 심판을 상징한다.     *놋 : 주석, brass

 

그래서 다니엘서, 계시록에 보면, 예수님의 손과 발이 놋(주석)으로 되어 있다.

‘심판의 주’라는 뜻이다.

 

놋은 구부러지지 않는다.

그래서 항상 놋으로 어떤 조형물을 만들려면, 불과 망치가 필요하다.

예수님을 잡으려고 할 때, 횃불과 망치가 등장했다는 것을 참고하시라.

 

즉, 놋뱀이나, 예수님이나

불과 망치로 심판을 당하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놋처럼)

먼저 불과 망치로.. 내 대신.. 심판을 당하신 것이다.

 

그래서 심판 받은 예수, 심판 받은 놋뱀이 되어서

예수님이 장대에 달리신 것이다.

 

놋뱀에 물린 자는 나인데,

예수가 내 대신 심판 받아 죽으셔서 대신 달리셨다.

 

그걸 바라보면서 ‘저게 내 모습인데..’ 라고 고백할 수 있는 자가 성도이다.

그 사람이 구원 받는다.

 

여러분이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그 고백이 나와야 한다.

아니면 십자가 붙들고 ‘이거 도와주세요, 저거 도와주세요!’ 하시는가?

 

십자가는 여러분에게 그런 이 세상 문제를 해결해주는 ‘우상’이 아니다.

십자가를 주신 목적은 ‘저 심판받아 죽은 예수님이 바로 나인데’ 라는 것을 깨달으라고 주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십자가를 승용차에 매달고 다니는데,

만약 사고 나지 말라고 매단 것이라면.. 그거 부적처럼 사용하는 것이다.

십자가는.. 부적이 아니라.. ‘내가 거기 매달려서 죽을 운명인 것을 깨달으라’고 주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깊이 묵상하는) 자가 구원 받는다.

 

▲주도권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세상에 내려오셨다.

그런데 이 세상이 온통 어두움이어서, 빛이신 예수님을 못 알아보았다.

 

성도 역시 마찬가지로, 성도가 예수님을 알아보는 게 아니라

우리는 못 알아본다.

 

그런데 하나님이 불뱀에 우리가 물리게 하셔서

의에 주리고 목마르게 하셔서.. 뒤집어서.. 구원해 내신다.

이 길을 가는 것이.. 성도의 인생이다.

 

▲정리하면

‘내가 이미 에덴동산에서, 아담 안에서, 뱀에 물린 자다!’

이 자각을 갖게 하는 것이.. 말씀이다.

 

그리고 그들이 ‘이제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구나’ 하고

예수가 놋뱀이 되어 매달린 십자가.. 그것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 성도의 신앙생활이다.

     ※그런데 그렇게 구원 받은 성도는, 그 후로 예수의 형상을 본받아 살아가려는 변화가,

        즉 성화의 추구가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불뱀에 물린 자가 어떤 부르짖음을 토해내는지 보시라.

    민21:7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몸이로다. 누가 이 사망한 몸에서 나를 건져 내랴..’ 롬7:24

위 두 구절은 같은 맥락의 말이다.

 

그때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민21: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이것이 십자가다. 이것이 기독교이고, 구원이다.

쳐다보는 자/바라보는 자가.. 사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구원 받은 성도는, 그 후로 예수의 형상을 본받아 살아가려는

       변화된 자기 내면에서 오는, 성화의 추구가 자연스럽게 뒤따른다.

 

'맞아요, 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요. 아무 공로도 없어요.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나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며 길입니다.'

이 고백하고,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를 믿는 사람이.. 구원 받는다.

 

(아래 단락 중복되는 내용이므로 점프 가능)

모든 인간은, 이미 에덴동산에서, 아담 안에서,

불뱀에 물린 상태였다.

 

뱀으로 이 역사 속에 태어나게 되었다.

그들에게 말씀이 임하셨다.

그 말씀이 자기들의 존재성과 주체성을 부정해 버리고, 죄인으로 폭로해 낸다.

 

즉, 선악과 입에 문 사람들은, 절대로 그 말씀 앞에서 복종하지 않는다...

자신들의 선행으로.. 자기를 높이 드러내고.. 예수를 도리어 십자가에 못 박는다.

 

그러나 말씀에 의해 공격당하는 무리들.. 그들이 바로 성도들이다.

말씀이 그들을 (불뱀처럼) 물고.. 놓지 않는다.

아니 말씀이 그들을 물도록.. 하나님이 그 불뱀의 말씀을 보내셨다.

 

그리고 우리가 ‘나는 내 죄로 죽었습니다. 제발 저를 살려주세요.’

이 비명이 우리 입에서 터져 나오게 하신다.

 

그들은 말씀에 의해서, 자신들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폭로당한다.

그들은 말씀 앞에서 자기들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폭로당한다.

그들은 자기들의 열심과 노력으로 생산해 낸,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완전한 요구에 부응이 안 된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게 된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 저는 이 사망의 몸, 죽어야 되는 거 맞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길이 있다면 저를 좀 긍휼히 여겨 주세요!’

이것이 성도의 처절한 고백이 된다.

 

▲결과는 행복하지만, 과정은 결코 행복하지 않다.

그러니까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은

결국 어떤 과정을 통과하게 되는가 하면,

‘아 하나님이 그 사랑으로 우리를 마구 죽이신대..’ 하는 과정을 통과한다.

 

그러면 그 말씀으로 이 세상에 불뱀이 되어서 오신 예수가

진짜 이렇게 기쁘기만 한 것인가?

 

결과적으로는 대단히 기쁘지만,

그 중간과정에는 결코 기쁘지 않다. (불뱀에 물리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는데,

그 독생자가 하시는 일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전에

불뱀을 보내사 우리를 다 물리게 하신다.

 

그래서 (구원을 받기 위한 중간 과정으로) 그 불뱀에 물린 자들은,

이 세상에서 자아실현, 승승장구, 일취월장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상실, 자아 해체의 십자가의 길을 가게 된다.

 

그거 하기 위해 예수님이 오신 것이다.

정말 그게 기쁘기만 한 것인가?

 

※오늘 성탄절 아침에, (성탄절 설교임)

우리가 예수님의 탄생을 모두 즐거워하지만,

결과는 물론 구원 받아 기쁘지만, 그 과정은 결코 기쁘지 않다.

예수님이 오셔서 '말씀의 불뱀'에 물려 죽음의 고통을 내가 당하게 되니까!

 

내 구원이 .. 이미 완료되어 있으니까.. (하나님은 미래까지 다 내다보시고 창조하셨다.)

결과적으로 기쁘긴 하지만,

그 중간 과정은.. 결코 예수님의 오심을.. 환영 할만 하지 않다.

 

왜냐하면, 내가 광야의 불뱀에게 물리듯이

내 죄의 자각으로 인한 고통을, 내가 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아파하고, 고통당하는 사람만이

놋뱀처럼 달린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게 되고

그 바라본 사람만.. 구원을 받게 된다.              (김성수 목사)

 

............

 

*위에서 불뱀을.. 마귀/예수님/말씀 등 여러 가지로 설명했는데,

  셋 다 맞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