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아 산 사건은 십자가의 예표 히11:17~19 11.12.25.설교일부녹취
‘아브라함의 헌신’이 그 주제가 아니다...
▲아브라함이 독생자를 하나님께 바쳤다.
히11: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위 본문 히브리서에서는 ‘독생자’를 드렸다고 하면서,
요3:16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와 같은 단어(모노게네스)를 쓰고 있다.
이 ‘모노게네스’는 외아들이란 뜻도 되지만, 더 자세히 설명하면
모노스(alone) 기노마이(become, appear) ‘혼자 존재하는 자’란 뜻이다.
그리고 성경에, 사람의 아들이나 딸을, ‘독생자’(모노게네스)로 표시하지 않는다.
사람이 낳은 ‘독자’는, only son, only daughter, only child로 기록하며
원어 성경도, 거기에 해당하는 원어를 쓰고 있다.
즉, 독생자(헬, 모노게네스)는.. 예수님께만 적용되는 단어인데..
(성경에서는 그렇다. 성경 바깥의 세상 문헌에서는 어떤지 모르지만)
요3:16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는 것은 이해가 된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독생자를 드렸다’는 것은 이해가 퍼뜩 안 된다.
아브라함이 ‘독자’ 또는 ‘외아들 only son’을 드렸다고 해야지,
그가 이삭을 드린 것이, 왜 ‘독생자’를 드린 것인가?
※모노게네스 - 요1:14, 18, 3:16, 18 요일4:9, 히11:17 등
신약에 6번 나오는데, 모두 독생자 예수님을 가리킬 때 쓰인 단어이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교회의 대표로서, 교회를 품어 안고, 하나님께 예수를 드린 것이다.
이게 무슨 뜻인가?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살려내는 중보자의 모형인 것이다.
이삭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린 모리아산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과 예수님의 그 십자가 이야기와 함께
하나님의 자녀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성도의 역사 속 십자가의 삶을
동시에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모리아 산에서
우리는 아들을 번제물로 드려서,
당신의 언약 후손들을 창조해 내시는
‘하나님의 십자가와 새 창조의 이야기’를 읽어낼 수 있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 쉽게 이해된다.
자기 아들의 심장에 칼을 꽂아,
죽어야 할 자들을 살려내는 십자가가, 일차적으로 그 안에 그림으로 들어가 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헌신을 설명하는 그림이 (일차적으로) 아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독생자 살해 사건’에 의해서,
아브라함의 후손, 즉 약속의 후손이 살아나는 그런 그림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모노게네스, 즉 독생자를 드렸다’ 라고 히11:17에 말씀한다.
▲모든 성경은 일차적으로 그리스도에 관하여 기록한 것임
구약과 신약을 함께 아우러 공부하지 않으면, 우리는 크게 오해할 수 있다.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그 어린양의 죽음으로써
약속의 후손인 이삭이 살아나는 것이다.
그것을 모리아 산에서 모형으로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이 죽이라고 하신 이삭은, 마땅히 죽어야 한다.
에덴동산에서 정녕 죽으리라 하나님이
한 번 명령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데.. 이삭이 살아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이삭을 번제로 죽이라’고 하셨는데,
이삭은 살아난다.
어떻게 살아나는가?
어린양의 대신 죽음으로써 살아난다.
그 십자가를 설명하는 것이 성경이다.
히브리서가 이삭이 어떻게 살아나는지 이렇게 설명한다.
히11:19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여기서 ‘비유컨대’(파라볼레) .. 비유, 상징이란 뜻이다. 뭘 비유하는가?
모리아산 사건이, 십자가 사건을 비유한다는 뜻이다.
즉 본문 히11:17이
그저 한 아버지가, 한 육신의 아들을 번제로 드려서 헌신한 사건이 아니라,
그 ‘독생자(모노게네스)’를 드린 사건은.. 뭘 비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이려고 하다가,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어린양을 대신 죽이고
이삭이 살아난 것.. 이것이 어떤 것을 상징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게 무엇을 상징하느냐 하면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을 상징한다. 히11:19 ↑
더 자세히 살피면
‘죽은 자 안에서 도로 가져온 것’이란 뜻이다.
모리아 산에서 죽은 자는 ..
하나님이 준비하신 여호와 이레의 어린양이었다.
그 죽은 자 안에서 이삭이 살아났다.
‘도로 받았다’ 라는 것은,
죽을 뻔 했다가.. 안 죽었다.. 가 아니라
완전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도로 받았다)는 뜻이다.
이삭으로 상징되는 교회, 성도가
원래는 ‘반드시 죽을 운명’이었는데, 그래서 죄로 인해 죽었는데,
‘다시 살아났다’는 뜻이다.
거기서 이삭의 육적 몸은 죽은 것이라는 뜻이다.
이삭이 거기서 살아난 것은, 이삭의 육은 죽은 것이다.
그 어린양 안에서 그가 살아난 것이다.
이렇게 ‘모리아 산 사건’은
십자가를 설명하는 것이라고, 히브리서가 말씀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헌신이 아니라, 그 헌신을 포함한 모든 육신이 거기서 죽는 것이다.
이삭이(교회가).. 하나님이 준비하신 제물로, 하나님 자신 스스로의 제사로,
즉 예수를 드리는 하나님의 제사로.. 이삭이(교회가) 살아난다.
히11:18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교회가 이삭으로 말미암는다. 십자가를 통과해서 살아난 성도들을 뜻한다.
아브라함의 자손.. 이게 교회다. 그 교회를 약속하셨는데
그 교회가 이삭으로 말미암는다...
그게 '모리아 산 사건'의 이야기다.
........... 더 읽으실 분 ..........
히11장을 보면, 아브라함과 이삭의 모리아산 사건을
‘시험’이란 단어로 축약한다.
히11: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다고 한다.
이 시험이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과 똑같은 단어다. (헬. 페이라조) 히2:18등
예수님이 받으신 (십자가 지심의) 시험은,
자기를 증명하거나 자기를 입증하고 ‘하나님이 나를 도우신다’ 라는 것을 절대 드러내지 못하고,
그냥 하나님의 뜻에 의해 죽으심으로써, 하나님의 영광만 드러낸 시험이었다.
그게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이었다.
그 시험을 지금 아브라함과 이삭의 사건에서, 하나님이 보여주신다.
그 시험이 이렇게 통과되는 것이다.. 라는 것을!
자기 증명이냐, 하나님의 영광이냐? (하나님의 영광이다.)
그런데 이 시험이 우리에게 떨어져 보시라
정말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나를 죽일 수 있는가?
자기 증명이냐, 하나님의 영광이냐?
(자기 증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되어야 한다.)
나를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죽였으면 죽였지,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나를 못 죽이는 존재들이다.
우리는 이 시험에서 항상 탈락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이삭의 가슴에 칼을 못 꽂는 것으로 끝난다.
인간은 그렇게 되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의 심장에 칼이 꽂힌 것이다.
그게 십자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