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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가 아니라 초월입니다

LNCK 2012. 1. 14. 13:50

◈(세상에서) 승리가 아니라 (천국으로) 초월     마14:22~36      설교스크랩



‘링 위에서의 제3의 길’

여러분, 지난 2011.11.09. 뉴스에 나온 기사내용입니다.

‘링의 전설, 세상을 떠나다’ 이런 제목으로 기사가 났습니다.


미국의 전설적인 헤비급 복서 중에 조 프레이저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분이 간암으로 진단받은 후, 한 달 만에 67세로 세상을 떠났다는 겁니다.


이 조 프레이저 선수에게는 ‘스모킹 조’라는 별명이 있었습니다.

‘스모킹 조’라는 건, 총을 탕하고 쏘고 나면, 그 총구에서 연기가 나지 않습니까?

마치 총알이 나가듯이 주먹을 휘두르는 사람이라는 뜻에서 지어진 별명입니다.


이 사람의 레프트 훅은 전매특허였습니다.

전광석화 같이 빠른 속도로 예측을 불허한 상황에서 레프트 훅을 날려버리는 ‘스모킹 조’,

그러다가 무함마드 알리에게 패해서, 점점 무대에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링 위에서는 두 가지 길밖에 없습니다.

내 눈앞에 주먹을 불끈 쥐고 다가오는 적을 때려눕히거나

판정으로라도 이겨야 되는 <승리의 길>이 있고,


또 하나는 내가 승리하지 못하면 중도의 길이 있는 게 아니고

반드시 좌절하고 패하는 <패배의 길>이 있습니다. 중간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사각의 링’의 상황이 인생의 상황과 너무 비슷합니다.

자, 사업의 문제가 생겼습니다.


링 위에 올라 선 권투선수가 상대방을 무찔러 이겨야 되는 것처럼,

사업문제도 그 문제가 생기자마자, 내 인생을 사각의 링으로 만들어버립니다.


그 문제를 어떻게 극복하느냐/극복하지 못 하느냐,

두 가지 길이 항상 놓여 져 있습니다.


이렇게 인생은 언제나 매순간마다 다양하게

끊임없는 문제들에 의해서 우리를 사각의 링으로 끌어들입니다.

‘생존 경쟁’이라 그럽니다.


그런데 인생의 링 위에서는 제 3의 길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이에요.


극복하고 승리하느냐, 좌절해서 실패하느냐, 이 두 가지 길 말고도

인생의 링에는 제3의 길이 있다는 겁니다... (천국으로 초월입니다)


‘제3의 길’ 그게 뭡니까?

그 기사의 제목이 그랬어요, ‘링의 전설, 세상의 링을 떠나다’


세상의 링을 떠난다.. 이것이 바로 ‘제3의 길’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믿음의 길입니다.


여러분, 기독교의 믿음이 뭡니까?

삶의 링에서, 예수님의 힘으로 승리하는 것이 믿음의 길이 아니에요.

좌절을 벗어나서 승리의 길로 다시 재기하는 것이, 믿음의 길이 아닙니다.

엄청난 오해가 여기에 스며들어 있어요.


믿음의 길은 제3의 길입니다.

승리하는 것도 아니고, 좌절해서 실패하고 포기하는 것도 아닙니다.


제3의 길은 링을 떠나는 겁니다. 승리가 아닙니다. 패배도 아니고요.

삶의 현장에 대해 집착하는 내 마음이 떠나는 거예요. 그래서 천국생활로 초월하는 겁니다.


몸이 있음으로 부딪히게 되고 만나게 되는 그런 상황 속에서의

모든 문제들 과제들과의 관계에서

그 문제가 있는 삶의 현장을 떠나는 게.. 믿음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그것은 아예 체념하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냐?

포기하는 것과는 달라요, 여러분!


‘포기’는 링 위에 있으면서, 상대방 선수의 강력함 앞에서

상대적으로 내 능력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겁니다.

포기는 내 능력에 좌절하는 거예요.


그러나 믿음의 길, 제3의 길은 포기/기피가 아니에요.

삶에서 주어지는 문제를 내가 싸워 극복하겠다고 하는 것은

그게 오버라는 거예요.


아니, 내 삶인데 내가 극복하고 승리해야지 무슨 말이냐?

그게 바로 마귀의 가르침입니다.


‘이 세상에 주어지는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내가 극복해야 된다,

기도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빌어서 내가 극복해야 된다,’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거예요, 하나님의 능력을 빌린다는 그게 믿음입니까?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문제의식을 갖고 그것을 극복해야 된다는 마음이 충만해서

하나님을 끌어들이는 게 믿음입니까?


아니라는 거예요.


본문에 예수님께서 바다 위를 걸으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바다 위를 걸으신 사건의 전후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참 재미있어요.


자,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이 쇼크를 받았습니다.


자기들의 이 땅에서의 인생의 미래를 향한 모든 두려움,

앞으로 다가올 지도 모르는 수없이 많은 과제와 문제들 앞에서

걱정하고 두려워하고 떨어야 되는 모든 부정적인 그림자들을

한 방에 날려버리는 (5병2어) 기적이었다는 겁니다.


이 오병이어의 현장,

한번 보세요, 내 손에 든 보리떡과 물고기가 떼서 주는데

또 생기고 또 생기고 하는 거예요, 내 손 안에서 지금.

허~ 이건 기절할 일이에요, 기절할 일, 호흡이 멎을 일입니다.


이 사건을 경험한 현장에서 제자들의 마음은

이제 미래를 향하여 조 프레이저의 레프트 훅을 날리면서

미래에 다가올 모든 문제들의 중압감을 한 방에 해결할 상태입니다.

“됐다, 됐다 이제, 내 인생은 끝났다,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되겠다!”


그런데 예수님의 태도가 이상해요.

본문에 보니까 22절에 ‘예수께서 즉시…’ 


끝나자마자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재촉한다’는 말은 강제로 내몰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제자들은 등 떠밀려 가는 거예요.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로 나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무리를 보내기 전에 제자들을 먼저 보내버렸어요.

그 다음에 무리들을 다 흩어버리시고 혼자 산으로 들어가서 기도하시는데

무려 여섯 시간 이상을 기도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여섯 시간 이상 동안 배를 타고 바다 위에서

풍랑과 싸우며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 주님이 바다 위로 걸어오신 것이에요.

베드로가 허락을 받고 내려옵니다, 그리고 내려오다가 바다에 빠집니다.


이때 주님이 오셔서 손을 잡아 건져주시면서 ‘믿음이 없는 자’라고 나무라십니다.

그 다음에 사람들이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고백을 합니다.


자, 이 사건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제자들이 이 세상에서 삶의 승리를 확신하는 순간

주님은, 제자들이, 이 세상이라는 바다에 빠져 들어가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세상 속에서 내 마음이 성공을 해야 되겠다고 마음을 먹고

성공한 모습이 바로 앞에 나왔던 헤롯 왕가의 모습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이 죽임을 당했어요. 이건 헤롯 왕가의 제동장치가 없어졌다는 걸 의미합니다.


이게 바로 세상에서 성공한 결과, 마음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싶다고 한 결과인데

이것이 바로 ‘세상의 바다에 마음이 빠져버린 것’이라는 것을

본문을 통해 보여주는 겁니다.


이제 제자들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면서

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승리하는 길을 찾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생각을 갖자마자 즉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재촉해서

바다 위로 보내시고 바다에 빠져 죽을 위협 앞에 세웁니다.


헤롯은 이 세상의 바다에 이미 빠져버린 겁니다, 성공했어도 빠진 것이에요.


제자들은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이 나오고  :33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믿음이 없는 자’라는 핀잔을 하시게 됩니다.  :31


다 조합해보면 어떤 얘기가 됩니까?

베드로가 세상의 바다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길은 믿음이었습니다.


그러면 믿음이 뭡니까?

하나님을 이 세상의 그 어떤 문제보다도

더 앞서 있는 현실로 보고 느끼고 맞이해 들이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제1의 현실, 이 세상의 그 어떤 문제보다 먼저

절대적인 현실로 바라볼 때 하나님은 하늘이십니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이 세상의 그 어떤 문제보다도 먼저 현실로 볼 때

내 마음은 이 세상바다를 떠나는 것이에요.

세상바다 안으로 빠져 들어가지 않는 겁니다.


천국이 세상에 맞닿아 있어요.

세상을 고해라고 하지 않습니까? 주어지는 문제, 과제와 씨름해야 되니까.


이겼다 해도 그 다음에 또 문제가 주어지고, 또 사건 사고가 계속 됩니다.

다 승리했다고 할 때, 마지막에 돌아보니

자아의식의 골수까지 썩어버린 병이 나타나고 퇴폐가 나고

이 세상에 먹혀버린 상태에서 온갖 부패가 나타나기 시작한다는 거예요.


이 세상의 바다에 천국이 접해 있는데, 어떻게 이 세상의 바다에 빠지지 않느냐?

그것이 바로 믿음의 길이고,

믿음은 하늘을 마음에 갖는 것이기 때문에

세상바다 안으로 들어가지 않게 되는 겁니다.


그걸 보여주신 거예요.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았느냐?

그래서 너희가 이 세상에서 성공하겠다고 마음을 먹느냐?


세상에서 모든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찾았다고 생각하느냐?

그래서 이 세상에서의 성공을 향해 가느냐?


너는 바다에 빠질 수밖에 없다.

너의 성공은 하나님을 제1현실로 마음에 모셔 들이는 것이다.”

라는 것을 가르쳐 주시는 겁니다.


여러분, 지금 돈 문제 때문에 걱정하시죠?

바다에 빠진 거예요.

돈 문제라고 하는 라이벌을 앞에 두고 링 위에서 지금 싸우고 있는 겁니다.

제3의 길이 아니에요.


믿음의 길은 떠나는 거예요.

그러면 이렇게 물어보지요, ‘아니, 그럼 왜 삶을 주셨나?’


삶을 왜 주셨는지 아십니까?

마음이 몸으로 만나게 되는 삶을, 떠나라고 삶을 주신 겁니다.

삶의 문제를 극복해서 승리의 삶으로 만들라고 준 게 아닙니다.


혹시 실패해서 좌절하게 되더라도 ‘실패는 병가지상사다’ ‘칠전팔기다’

이런 말을 듣고 다시 일어나라고 삶을 주시는 게 아닙니다.


삶의 길은 승리하는 것도 아니고 패배하는 것도 아니에요.

삶에 처한 우리가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제3의 길, 삶을 떠나는 거예요.


삶을 왜 주신다고요?

삶을 떠나라고 주십니다.


믿음의 길은 링을 떠나는 겁니다.

링 위에서 문제와 씨름해서 이기느냐 지느냐가 아니라,

제1의 길은 ‘승리의 길’, 제2의 길은 ‘실패의 길’이라면,

믿음은 제3의 길로 세상을 떠나는 거예요.


세상을 떠나게 될 때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창조의 길이 열립니다.

우리가 완전히 떠날 때.


우리가 붙잡고 있으면서 하나님의 능력을 끌어들이는 게 아니에요.

그건 사이비 이단입니다.


‘이 세상에서 잘 살아보자’ 이건 인본주의자들의 모토입니다. 유토피아.

교회 안에서 이 세상에서 잘사는 것을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그건 사이비입니다.


잘사는 것 같은 모양이 하나님의 창조적 역사에 의해서 벌어질 수는 있어요.

또 얼마 못살고 순교하는 모습이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에서 벌어질 수 있어요.


그러나 세상에서 잘사는 것을 목표로 해서 나가는 이 모든 기독교는

다 사이비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에 따라서.. 잘사는 것 같은 모양새가 벌어질 수도 있고,

못사는 것 같은 모양새가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에 둘 일이 아니에요.

우리 마음은 오직 세상이라는 링을 떠나는 겁니다.

그래야 세상바다에 빠지지 않는 거예요.


문제가 주어지면 그 문제와 씨름하는 게 아니라

그 문제가 있는 세상이라는 사각의 링은 마음이 십자가 붙잡고

그 링에 대해, 그 문제에 대해 죽고 마음이 떠나서

아버지하나님을 제1현실로 절대적인 현실로 마음에 모셔 들이고 갖는 거예요.


링을 떠납시다! 승리할 필요도 없고, 패배할 이유도 없습니다.

제3의 길이 우리의 길입니다. 그건 천국생활로.. 세상을 초월(뛰어넘음)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