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원 품꾼의 비유 마20:1~19 12.01.01.설교일부녹취 ro#57
천천히, 끝까지 읽으셔야 이해됩니다.
◑서론
▲여러분, 포도원 품꾼의 비유가 ‘십자가’로 결론 남을 유의하셔야 한다.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말씀하신 직후에, ‘십자가’에 관한 구절이 나온다. ↙
마20:18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19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하리니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바꾸어 말하면, 십자가에 대해 설명하시기 위해
‘포도원 품꾼의 비유’ 마20:1~16
‘부자 관원/청년의 비유’ 마19:16~30
가 그 직전에 배치되어 있는 것이다.
즉, 본문 ‘포도원 품꾼의 비유’는 (부자 관원의 비유와 함께)
‘십자가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이다. (‘천국 비유’라고 볼 수도 있다.)
▲천국의 개념.. 주인의 마음(아가페)을 아는 것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시는데
‘천국은.. 주인과 같다’고 하신다. ↙
마20:1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천국은’ 어떤 공간적이고, 장소적 개념이기 이전에,
‘주인의 마음을 아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비슷하게 요17:3에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영생’도.. 뭘 ‘아는’ 것이다.
천국은.. 예수 안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아가페)을 알고, 주1)
그것을 누리고 찬송하는 상태이다.
그러니까 그 주인의 마음(아가페, 사랑, 은혜)를 아는 자들은
‘아,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사랑하시는구나!’ 하고 감격하면서,
초막이나 궁궐이나.. 그 어디나 천국으로 살아낸다..
그 주인의 사랑/은혜의 마음을 아는 것.. 이것이 천국이다.
그 주인이, 본문에 어떻게 설명 되는가?
그래야 우리가 천국에 대해, ‘알 수’(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본론
▲1. 주인은 일을 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포도원(천국)에 들여보내려고.. 일꾼을 찾으신다.
그 주인은, 자기 포도원에 들여보내기 위해.. 일꾼을 찾아 나선다.
본문에 ‘일을 시키기 위해’라는 말이 결코 나오지 않는다.
즉, 천국은 인간의 ‘공로’로 들어가는 곳이 아니다.
:1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물론 포도원에 들여보내는 것은, 일을 시키기 위함이지만,
주인이 진짜 일을 시키기 위함이, 품꾼을 찾는 목적이었다면,
이른 아침에 일꾼을 충분히 뽑아서, 일괄적으로 포도원에 들여보냈을 것이다.
주인이 우리 시각으로 이른 아침(오전6시)부터
9시, 12시, 오후3시, 오후5시
이렇게 다섯 차례나 품꾼을 구하러 장터에 나간 것은,
어떤 경제적 논리나, 실용적 논리에 의해서, 품꾼을 구한 것은 아니다.
주인의 목적은, ‘일을 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일꾼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기 위해서’이다. 주2)
그러니까 주인이 이른 아침부터 일꾼을 구하러 장터에 나간 것은,
이른 아침부터 일찍 일꾼을 부려 먹으려는 것이 아니라,
이른 아침부터 일찍 천국 일꾼(백성)을 찾아 나서신 것이다.
천국(포도원)안으로 그들을 들여보내기 위해서이다.
주인은 품꾼을 찾아다니셨다.
품꾼이 주인을 찾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 품꾼을 ‘나가서’ 찾았다.
:3 또 제 삼시에 나가 보니 장터에 놀고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5 제 육시와 제 구시에 또 나가 그와 같이 하고
이것은 잃은 양을 찾으시고, 잃은 드라크마를 찾으시고,
세상으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 찾아오신 예수님의 성육신 등
성경 전체 맥락과도 일치한다.
▲2. 아무도 그들을 쓰는 자가 없었다.
품꾼들은 장터에서 허탈하게 놀고 있었다.
(장터는.. 그냥 광장이라고 보시면 된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특별한 의미 없음)
:3 또 제 삼시에 나가 보니 장터에 놀고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그들이 놀고 있었던 이유는, 아무도 그들을 쓰는 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7 가로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섰느뇨?
가로되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가로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지금도 ‘인력시장’에 나가보면,
뭔가 기술이 있거나, 기운이 좋은 사람들은
이른 아침에 다 뽑혀 간다.
그런데 낮 시간, 심지어는 저녁 5시에까지
아무도 그들을 뽑아가지 않았다는 것은,
뭔가 비리비리 한 사람들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을 절대로 뽑아서 쓰지 않지만,
‘주인’은 그런 비리비리한 사람들도 뽑아가서, 포도원(천국)에 들여보내셨다.
주인은, 그 사람에게도 ‘한 데나리온’(생명)을 주셨다.
이것은, 오직 은혜요/사랑의 선택이다.
▲3. 율법주의에 입각한 사람들은.. 은혜를 깨닫지 못했다.
아침 6시, 9시, 12시, 오후3시, 5시에 온 사람.. 모두 행복한 일꾼들이었다.
모두들 행복하게 포도원에서 일을 했다.
그런데 문제는, 임금을 나눠줄 때.. 발생했다.
오후 5시에 와서, 고작 1시간 일한 사람이 한 데나리온을 받자,
아침부터 일한 사람들은, 품삯을 더 받을 줄 알았는데.. 한 데나리온 똑같이 받았다.
내가 일한 만큼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그 행복이 깨어졌다.★
처음에는, 자기들에게 한 데나리온을 약속하고 써 준 주인이.. 마냥 고마웠는데..
자신이 한 일의 양과, 다른 사람이 한 일의 양을 비교하면서,
은혜가 망각되기 시작하면서, 원망과 불평이 터져나왔다.
‘내가 더 많이 일했고,
내가 저 사람(1시간만 일한 사람)보다 더 가치 있는 사람인데,
왜 나를 저 사람과 똑같이 대우하느냐?’는 불만이었다.
‘주인은, 왜 똑같이 공평하게 은혜로만 대하느냐?’는 것이다.
‘청함을 입은 자는 많은데, 택함을 입은 자는.. 별로 없다’ .. 는 뜻도 된다.
‘은혜의 자리로 불러들이기는 했는데,
그 은혜를 진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이 없었다’는 것이다.
자기는 더 오랜 시간, 더 많이 일했으니, 보상을 더 달라는 것이다.
-이것이 율법주의 아래서 길들여진, 인간의 본 모습이다.
나의 모습일수도 있다.
▲4. 주인은 <은혜>로 판단하신다.
:14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15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이런 주인의 판단에는.. 그 바탕에 <은혜주의>가 깔려있다.
그러니까 아침에 일찍 온 일꾼들은 <율법주의>적 판단으로 항의하고,
주인은 <은혜주의>적 관점에서 답변하고 있다.
비슷한 장면이 성경에 종종 나온다.
‘저 세리와 창기들이, 나와 똑같은 대우를 받는다면.. 나는 싫어!
그런 예수 믿기 싫어!’ 자기 배가 아픈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는 근사하다는 것이다.
자기는 실족하지도 않았고, 크게 잘못한 것도 없고, 아침부터 열심히 일했다는 것이다.
‘왜 저 사람과 나를 기분 나쁘게 동일하게 취급하느냐?’는 것이다.
▲5. 차등 상급론.. (※보는 각도에 따라, 일면 맞으면서도) 일면 고려해야 한다. ※표는 편집자 삽입구
성도는 자기 효용가치나, 헌신도, 자기 능력에 따라 구원 받지 않는다.
모든 성도는 다, 죄와 허물로 죽어 있었다.
모든 인간이 다 죽은 상태로 태어난다. (아무도 포도원에 못 들어갈 운명이었다.)
그들 각자의 지위, 스펙, 외모, 재산이 각기 다를지라도,
그래도 모두 다 ‘사망’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모두가 다 죄인이었고, 하나님의 원수들이었다.
포도원에 들어온 우리 모두는,
누가 더 성숙하고, 누가 덜 성숙하며,
누가 더 헌신했고, 누가 덜 헌신했으며,
누가 더 착했고, 누가 약간 덜 착했는지.. 그게 그렇게 중요할까?
그게 중요하다고 우긴 자들이.. 바리새인들이었다.
그러니까 이 본문은, 그들의 ‘율법주의적 잘못’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6. 결론
:16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나의 공로/ 나의 선함/ 나의 괜찮음을 바라보는 순간,
또는 내가 이루어낸 업적(자기 공로)들을 바라보는 순간..
‘그래도 나는 이 정도면 꽤 성공한/헌신한 사람이야!’
‘나만큼만 해 보라고 해!’
이런 생각들이 무서운 이유는
더 이상 은혜가, 은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먼저 된자, 나중 된다’고 그러셨다. :16
천국에 들어가기가, 천국 생활을 누리기가 그만큼 힘들다는 뜻이다.
그러나 오후 3시, 5시에 온 사람,
그래서 주인이 너무 고마워서.. 제대로 고개도 못 드는 사람(너무 송구스러워서)
이런 사람들이 ‘먼저 된다.’ .. 이들을 성도라고 그런다.
이들은 ‘한 데나리온’을 받을 자격이 없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이, 주인을 사랑한다.
자기가 어떤 사랑을 받았는지 알기 때문에!
본문은 (5시에 온 사람처럼) 게으르게 살아라는 뜻이 아니라,
성도의 처음 자리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성도가 하나님 앞에서의 본 모습이, 이렇게 ‘면목 없는 자’라는 것이다.
‘뭘 내세울 수 있는 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무슨 업적을 쌓고, 내가 무슨 위대한 사역에 봉사했더라도,
성도가 가져야할 마땅한 자세는
‘면목 없음, 자기 부정, 그 은혜를 찬송함’이지,
‘면목 있음, 자기 긍정, 내가 남보다 열심히 일했다’ .. 가 아니라는 것이다.
다른 각도로 말하면,
주인의 마음을 알라는 것이다.
‘주인의 긍휼, 주인의 사랑, 주인의 그 은혜’를 알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천국을 누리는 것이다.↙
:1 천국은 마치 품군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천국은, 그 주인의 마음/사랑/은혜를 아는 것과 같으니..)
▲적용하면
여러분 ‘우리가 뭐 회장, 교수, 세계적인 뭐가 되자’ .. 이게 복음 아니다.
‘우리가 뭐 세계적인 업적을 쌓아, 주님께 영광을 돌리자..’ 이게 기독교 아니다.
(물론 꼭 그게 되지 말자는 것도 아니다. 되든지/말든지.. 상관없다.)
구원은 doing의 문제가 아니라, being의 문제이다.
‘내가 무엇을 했느냐?/얼마나 스펙이 높으냐/얼마나 일류가 되었느냐’에 근거삼지 않는다.
내가 세상에서 성공/출세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지고.. 그래서 내가 구원 받고
그렇게 안 되면.. 하나님께 영광이 가려져서.. 내가 구원 못 받고.. 가 아니다.
내가 아무리 무슨 총장이 되고, 대장, 회장이 되었다 하더라도,
내가 ‘쓸모 없음, 면목 없음, 자기 부정’의 상태로 내려가는 그것이
즉 ‘오후 5시에 온 사람의 심정을 갖는 것’ - 그것이 바로 구원의 상태요, 천국을 누림이다.
아무 쓸모도 없는 내가, 포도원으로 불림을 받았다는 것.. 그것에 감격하는 것이지,
내가 그 속에서 남보다 많이 일했다고.. 자긍심을 갖는 것은.. 성경적인 기독교가 아니다.
....................
주1) 예수 안에 아가페가 담겨 있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라고 했을 때,
원어는 ‘이는 내 아가페, 내 아들이요’이란 뜻이다.
즉 아가페가, 아들 안에 들어가 있었다. (아가페와 아들이 동격처럼 나오니까)
그 아가페를 아는 것은, 곧 아들을 아는 것이다.
주2)
한 데나리온은, 당시 일반사람(빈자)들에게 하루 먹거리를 구할 돈이었다.
그게 없으면, 온 식구가 하루를 굶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한 데나리온은, 그들에게 ‘생명’이 된다.
영적으로 풀이하면 ‘생명, 영생’
비슷한 내용의 설교 보기 ☞ 몸값이 낮아야 천국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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