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 청년의 기대와 실망 마19:16~30 12.01.01.설교일부녹취
김성수 목사님 설교 30’~45’ (이해 안 되시면, 직접 들으세요)
▲서론/ ‘십자가 복음’의 관점으로
직전에 마20장 ☞ 포도원 품꾼의 비유 를 ‘십자가 관점’에서
해석해야 한다고 말씀드렸는데,
본문 마19장의 ‘부자 청년의 사건’도 마찬가지로 *눅18:18에는 그가 ‘관원’
‘십자가/복음 관점’에서 해석해야 한다.
왜냐하면 두 본문 다 ‘먼저 된 자, 나중 된다’는 구절로 끝을 맺고 있으며
연이어서 마20:17~19절이 <십자가에 관해>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부자 청년의 사건'과 '포도원 품꾼의 비유'는 연결되어 있고,
둘 다 '십자가/ 복음'을 설명하고 있다.
그렇게 ‘십자가/복음 관점’에서, 본문 ‘부자 청년의 사건’을 한번 해석해 보면...
▲부자의 질문, 예수님의 답변
부자 청년이 와서 ‘선한 선생님,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습니까?’ 하고 물었다.
‘뭘 해야 ..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라는 엉터리 질문을 했다.
그때 예수님은 그 부자에게, 일단 ‘율법을 다 지켜라’고 말씀하신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17
이 말씀에는 2가지 의미가 있다고 본다.
1. 유대인이 가진 구약의 전통적 관념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 의로움’이라는 개념이다. 롬10:5
그 율법을 다 지키든지, 못 지키든지..
어쨌거나 사람이 의롭게 되고, 사람이 구원을 얻으려면
‘영생을 얻으려면 율법을 다 지켜야 되는데...’
그런 일반적 원리를,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주1) 이 단락 삽입글
2. 정말 그 청년이 율법을 다 지킬 능력이 있어서, 다 지키라고 하신 것일까?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말씀만 하세요, 제가 다 하겠습니다.’
그런 자신만만한 부자 청년에게,
‘정말 그럴까? 그럼 네가 가서 한 번 해 봐, 율법, 한 번 다 지켜봐, 그게 되는지..’
즉, '너는 율법을 다 지킬 수 없다'는 뜻으로
네 힘과 공로로는 영생을 얻지 못한다며, 예수님이 반어법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그랬더니 아니나 다를까, 그 청년은
‘저는 어려서부터 다 지켰습니다. 율법을 다 행했습니다’ 라고 대답한다.
-이렇게 어려서부터 율법을 다 행했다고 말하는 이 사람이
바로 ‘포도원 품꾼의 비유’에 나오는, ‘아침 일찍부터 일한 사람’, '자기 공로를 주장하는 사람'이다.
그의 ‘저는 어려서부터 율법을 다 지켰다’는 자신만만한 대답을 들으시고,
예수님은 ‘너는 율법을 결코 다 지킬 수 없다’는 의미로, 한 마디 툭 던지셨다.
:20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 찐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러자 그는, 근심하며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22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세상 모든 사람은 ‘부자’다.
그런데 이 부자를 성경에 ‘재물이 많다’라고 했는데, :22
확장해서 보면, 꼭 돈만 의미하는 것이기 보다는,
'명예, 업적, 공로, 자아 확대’의 부자이다.
그렇게 ‘부자 청년’을 상징적으로 해석하면
‘자기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행했다’ - 즉 자기가 쌓은 공로가 많았다.
그래서 <부자>인 것이다. 물질의 부자를 넘어서, 자아 확대/자아 성취의 부자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다 ‘부자’인 셈이다.
그런데 ‘저주 받을 부자’이다.
그런데 그 부자 청년이, 결국 그 소유(돈, 명예, 업적, 공로.. 등의 자기 자아)를
포기하지 못하고.. 예수님을 떠나가고 말았다.
그 청년은 열심히 살아서,
‘나’라는 존재/자아 구축에 성공한 사람이었다.
뭔가 스스로 만족하고, 내세울게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이런 사람들이, 저주 받은 자일 가능성이 크다.
‘소유가 많으니까!’
그걸 버리기가 힘든 것이다.
아예 없는 사람은, 쉽게 다 버릴 수 있는데..
부자는.. 인간의 자기 가치와, 자기 자존심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 그가 부자이다.
부자의 의미를 좀 더 확장해서 생각해 보면 그렇다.
그들은, 절대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 앞에서 엎드리지 못한다.
내가 이루어 놓은 게 많고, 내가 나를 위해 구축해 놓은 것이 많은데,
그거 다 버리고, 그거 다 무효로 만들고, 그리고 나를 좇으라고 하시니까..
‘저런 자(예수)는 차라리 없애 버리자’ 하는 것이다.
▲부자가 천국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
그래서 예수님이 적절한 비유를 드신 것이 ‘낙타와 바늘귀’의 비유다. 마19:23
이 비유는 ‘돈이 많으면 천국에 못 들어간다’는 것만 뜻하지 않는다.
여기서 ‘부자’란, (위 단락에서 살펴 보았듯이)
‘나’ 라는 존재의 구축을 위해서, 즉 자아 확대, 자기 자존심 세우기로
이 세상의 것들로 자기를 치장해서, 비대해진 모든 아담의 후손들을 뜻한다.
주님은 그들을 ‘낙타’에 비유하셨다.
당시 유대 사람들에게, 낙타는 부리던 가축 중에 가장 큰 것이었다.
율법 아래 아담들의 모습이 바로 그렇다는 것이다.
‘자아실현, 자아 확장 (자기 체면, 자기 위신, 자기 업적 쌓기)’만을 위해서
매진하는 사람들의 존재가.. 얼마나 비대해 졌는가 하면.. 낙타처럼 커진 것이다.
‘가장 커졌다’는 뜻이다. 그래서 낙타라는 것이다.
그런데 천국은.. 그들에게 있어서.. 바늘귀만큼 작다.
그런 자아가 확장된 낙타 같은 부자로는.. 절대로 천국에 못 들어간다는 뜻이다.
▲복음은.. 십자가이며, 거기서 내가 죽어서 자기 부인, 자기 부정인데
이 낙타처럼 비대해진 내 자아를 부수어서 (십자가에 못 박아서)
바늘귀를 통과할 수 있을 만큼 작게, 티끌로 만들어 준다.
바울이 자신을 ‘죄인중의 괴수’라고 말했는데,
그건 자기가 티끌, 먼지의 자리로 내려갔다는 뜻도 된다.
그렇게 낮아져서 먼지나 티끌이 된 사람은, 바늘귀를 숭숭 통과해서, 천국에 들어간다.
성도의 삶이 바로 이런 것이다.
예전에 자기 자아를 쌓고 구축한 모든 것들을..
복음이, 나를 부수어 내신다. 나를 십자가에 못 박는다.
복음은.. ‘낙타’(부자인 나)를 다이어트 시킨다고 할까?
얼마만큼?
바늘귀를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작고 가늘게!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그런데 이 자기부인, 자기 부정이 내 힘으로 되지 않는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신다.
마19:25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26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우리는 자기 부인을, 내 힘으로 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해 주셨다.
롬6: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나의 ‘낙타’(내 존재 내세움, 내 존재 확장)가 십자가에서 부정된 것이다.
내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을 통해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를, 바늘귀를 통과할 수 있는
‘티끌, 먼지, 흙’으로 만들어 주셨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나의 죽음을 통해서!
▲정리하면
이렇게 본문 마19. 20장은,
(그리고 성경의 다른 장면들도 마찬가지로) 십자가와 예수만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본문 ‘부자 청년의 비유’, 마19:16~30
이어지는 ‘포도원 품꾼의 비유’도 마20:1~16
모두 십자가로 결론 나고 있다. 마20:17~19
다시 말하면, 영생이 주어지는 방식은, 십자가이지, 인간의 공로가 아니다. ↙
마20:17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하실 때에,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이르시되
18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19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하리니..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우리는 그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그것을 믿음으로써)
내가 구원을 얻는 것이지..
자기가 포도원에 아침 일찍부터 들어와서 일을 했다고, (포도원 품꾼의 비유)
또는 자기가 어려서부터 계명을 남들보다 좀 더 착실히 지켰다고 (부자 청년의 사건)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다.
그 결론(십자가 복음)을 마20:17~19가 해 주고 있는 것이다. ↑
▲적용하면,
오늘날 신자들이, 본의 아니게 율법주의, 바리새주의, 인본주의로 빠지게 되는 것이
철저히 십자가에서 자기 부정, 자기 죽음, 자아의 깨어짐을 망각하고,
‘제가 어려서부터 신앙생활 열심히 했는데요’
‘제가 교회봉사를, 교회건축을, 선교활동을 몇 년째 하고 있는데요..’ 하면서
자기 공로를 내세움과 아울러
더 나아가, 자꾸 보상(축복)을 해 달라는 것이다.
자기 헌신한 것, 자기가 투자한 것에 대해.. 하나님보고 갚아달라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갚아주실 것이다.
이 세상에서 안 갚아주시면, 저 천국에서 공의롭게 다 갚아주실 것이다.
그런데 마치 하나님이 갚아줄/ 보상해 줄 마땅한 의무라도 있는 것처럼
(그리고 그 실제 보상은, 십자가/ 구원/ 영생인데.. 그건 또 안 받은 것처럼)
자꾸 세상 복을 달라, 몇 배로 갚아 달라..
이렇게 요구, 기도하는 신자는,
-본문의 부자 청년과 같고,
-이어지는 본문의 아침 일찍 와서 일했다고 불평하는 포도원 품꾼과 같다.
그들에 대한 예수님의 결론은 똑같다.
‘먼저 된 자 나중 되고.. 나중 된 자 먼저 되리라’ 마19:30, 20:16
'먼저 된 자들이 나중 된다'는 말은.. 천국에 들어가기가 매우 어렵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십자가를 붙들지 않고, 자기 공로를 붙들었으니까!
◑그런데 베드로.. 부자청년과 똑 같았다.
▲부자 청년이 가진 것이 많았다면, 반대로 베드로는 가진 것이 없었다.
그러니까 베드로는 ‘예수님, 제가 다 버렸습니다.’ 하고 자신만만하게 나왔다.
자기는 부자청년과 대척점에 서 있으니까, 크게 상을 받을 것으로 예상했던 것이다.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마19:27
‘저 부자청년은, 저렇게 많이 갖고 있어서, 천국에 못 들어간다고 그러셨는데,
저는 예수님 따르면서.. 배도, 그물도, 가정도 다 버렸잖아요.
그런 제게, 예수님은, 무슨 상을 주실 건가요?’
그렇다면, 베드로가 다 버린 것은, 뭘 위해 다 버렸다는 것인가?
‘나에게 떨어질 보상을 위해, 다 버렸다는 뜻이다.’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부자처럼, 자아확장을 위해.. 자꾸 모으고 쌓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베드로처럼, 자아확장을 위해.. 다 버리는 종교가, 수행자들도 있다.
자기 존재의 선함과 고상함을 증명하기 위해
‘무소유’까지 끌어다가 자기를 치장하는 면이.. 인간 본성에 있는 것이다.
-기독교는 오직 ‘십자가’이지, ‘무소유’가 아니다.
그런 면에서, 베드로 역시 ‘부자’인 셈이다.
그는 물질적으로는 빈자였지만,
‘자기를 구축하고, 자기 자아를 확장하고 높인다는 점’에서는.. 부자 청년과 똑같이 ‘부자’였던 셈이다.
베드로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이렇게 자기 '행위'를 근거로, 보상을 요구하는 심리는..
율법주의적 언행이라는 것이다. 주2)
▲예수님의 보상 약속
그때 예수님이 뭐라고 대답하시는가?
마19:28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29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그렇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은 사람들, 즉 성도들이 받을 보상은
-1. 보좌에 앉아, 열두 지파를 심판하고,
-2. 여러 배를 받고,
-3. 영생을 상속함 등이다.
그런데 1.과 3.이 (현세를 포함하지만) 궁극적으로 내세를 설명하고 있으므로,
2.의 ‘여러 배를 받는다’는 약속도 (현세를 포함하겠지만)
궁극적으로 내세에 대한 보상의 약속이다. 즉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이다. :28
‘너희가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한다’는 뜻은
십자가의 공로를 통해 구원 받은 성도들이
자기 공로를 통해 구원 얻으려다 못 얻고 멸망당한 자들을 심판한다.. 그런 뜻이다.
▲정리하면
기독교 신앙은,
궁극적으로 영생을 추구하는 것이지,
이 세상에서 (복을 받아) 자아실현, 자아 확장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서
부자청년처럼, 뭘 모아서 부자가 되어서 ‘자아확장’(위대한 사람)되겠다는 것이나,
베드로처럼, 뭘 버려서 무소유가 되어서 ‘자아확장’(고상한 사람)되겠다는 것이나..
둘 다 안 된다.
인간의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그 십자가의 그리스도에 내가 연합되어서,
(내 마음이) 다 깨어지고, 죽고, 콩가루되고, 납짝코 되어서 죽은 후에.. 부활 해서
궁극적으로 <영생과 천국>을 내가 누리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우리는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십자가의 예수를 더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예수를 더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세상 것들을 덜 사랑하게 된다.
그런 자들만 구원 얻으며, 그것이 진짜 십자가의 예수를 ‘믿는’ 것이다. 지적 동의가 아니라
....................
주1)
2번 내용, ‘예수님이 반어법으로 말씀하셨다’는 것은, 편집자가 처음 듣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저/편집자는 2.이 ‘너무 신학에 입각한 해석이 아닌가?’ 싶어서 (물론 2.의 해석이 맞을 수도 있지만)
안전하게 1.의 해석을 삽입해 둡니다.
1.의 해석이든지, 2.의 해석이든지.. 전체 흐름에는 큰 상관없다고 봅니다.
주2)
※저/편집자는 지금까지 그냥 성경을 봐 왔을 때,
마19:27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이 베드로의 고백이 ‘잘 한 고백’이라고 여겨왔으나,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으니)
설교자는, 이 베드로의 고백이 ‘잘못된 고백’이라고 설교하고 있습니다.
최종 판단은 각자 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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