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가룟 유다의 결별 포인트 마26:14~25 설교스크랩, 축약
▲도입
가룟 유다가 태어날 때부터 특별히 악질로 태어났다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와 같은 성정의 인간이었지요.
그러니까 3년 동고동락한 스승을 배반해서 죽음의 자리에 내어줌에 있어
고민과 번민이 있었을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까지,
가룟 유다가 번민하고 고민해야만 하는 이 지점까지
우리 각자는.. 가룟 유다와 함께 가야 됩니다. 일단 넘어가세요, 아래에 자세히 설명합니다. 주요 논지.
가룟 유다의 이 번민의 자리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진정한 기독교인이 될 수도 없습니다.
여러분, 도대체 가룟 유다와 함께 우리가 도달해야 하는 이 지점,
그래서 그 지점까지는 함께 갈 수밖에 없지만
그 지점 이후부터는 가룟 유다와 결별해야 되는 그 지점은
과연 어떤 지점일까요?
◑1. 가룟 유다와 함께 가는 단계
▲본문에 가룟 유다가 은30개에 예수님을 넘겨주기로 구두로 계약을 맺습니다.
왜 하필 은30세겔일까요?
주석가들에 의하면, 결코 많은 돈이 아니라는 거예요.
구약에 은30세겔은 ‘노예의 몸값’ 이었습니다.
우리 집 황소가, 남의 집 노예를 뿔로 받아서 죽게 했을 때,
내가 죽은 노예의 주인에게 물어주어야 될 돈이 은 30세겔이었습니다. 출21:32
예수님의 3년 공생애 동안 떨쳤던 그 명성에 비하면
예수님이 메시아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단순히 랍비라고 하더라도,
그 명성을 떨치고 있던 랍비의 생명 값으로는
은30세겔이 너무나도 사소한 돈이라는 얘깁니다.
그러면 왜 유다는, 이 얼마 되지 않는 (푼)돈에, 스승을 넘겨주기로 결심할까요?
이것은 그가 돈궤를 맡고 있던 자라서, 특별히 돈에 욕심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하지만,
그건 너무 단순한 해석이고요..
사소한 돈을 받고 스승을 넘겨준다고 하는 것은
유다의 독특한 심정의 표현이었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더 이상 쓸모없다’라는 평가가 드러난 것이
은30세겔로 나타난 겁니다.
만약에 돈에 대한 탐욕이 있었다면,
얼마든지 대제사장들과 거래deal를 했을 것입니다. ‘은 30에는 못 넘겨준다’
그런데 지금 예수를 넘기는 것은, 돈에 대한 관심이 아니에요.
그러면 무엇의 표현이냐?
예수가 더 이상 쓸모없어졌다고 하는 것에 대한 실망의, 경멸의 표현입니다.
옛날에 강냉이나 엿을 사먹을 때, 돈을 주고 사먹는 사람은 거의 없었어요.
빈 병이나 신문지, 못 쓰는 양은 그릇, 이런 것들로 강냉이나 엿을 바꿔 먹었어요.
다시 말해 못 쓰는 것을 주고, 강냉이나 엿을 헐값으로 받은 겁니다.
마찬가지예요.
30세겔은 엿에 불과해요, 예수님 가지고 엿이나 강냉이 바꿔 먹은 겁니다.
예수님이 쓸모없다고 생각하고, 헐값에 폐기처분한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무엇에 쓸모가 없다는 얘깁니까?
자기 가정이든/ 직장이든/ 사회든 무엇이든지
자기 소신과 신념이 있었는데,
그 자기 소신과 야망을 달성함에 있어서
예수님이 더 이상 쓸모없는..
그래서 폐기처분해야 마땅한 폐품이라고 단정 해버린 것입니다.
그 마음의 표현이
‘고작 은30세겔 받고 자기 스승을 팔아넘기는’ 배신이었습니다.
▲참고로/ 예수님을 ‘넘겨줘야’ 했던 이유
그냥 가룟 유다를 통하지 않고, 예수님을 직접 잡아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꼭 가룟 유다를 동원해야 했을까요?
넘겨준다는 건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포박해서
공회에 넘겨준다거나 법정에 고소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할 때
민란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했다고 했습니다. 민요가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말자 하더라. 마26:5
예수님이, 민중들에게서 정당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가룟 유다가 판 것이, 왜 대제사장들에게 필요했는가 하면,
3년 동안 동고동락했던 최측근 중 한 명이, 예수님의 부당함을 들고 나올 때,
민란을 두려워하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있어서는
이 보다 더 큰 호재가 없다는 겁니다.
측근 중에서 예수님이 잘못 됐다고 들고 일어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예수를 잡아 죽일 수 있는 명분을, 백성들에게 강력하게 제시할 수 있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대제사장 측에서는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넘겨주는’ 일이 꼭 필요했던 것입니다.
자기들이 직접 나서면.. 소요사태가 일어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가룟 유다가 무슨 군호(암호)로, 예수님과 입맞춤을 한 것은
그래야 군인들이 예수가 누구인지 정확히 확인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당시에 무슨 사진도 없었고, 또한 캄캄한 밤 시간이라.. 누가 누군지 분별이 힘들었습니다.
이래저래 가룟 유다가 자기 역할을 한 몫 단단히 했던 것입니다. 마26:48
▲우리가 바로 이 점까지 도달해야 된다는 거예요.
예수님을 믿으면,
내가 이 세상에서의 삶에 대해서 더 나아질 것으로 기대했는데,
신앙생활 하는 것이
그런 내 세상 소원/야망에 대해 아무 쓸모없다고 실망하는 지점까지 와야 됩니다.
가룟 유다와 같이!
이 지점까지 도달하지 못하면,
진정한 기독교인으로 거듭날 수도 없습니다.
반드시 이 세상을 향해서 갖고 있는 나의 소원에 대해서
예수님이 죽어도 내 소원을 안 들어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내 소원에 대해서 아무 쓸모없는 분이라는 사실을.. 유다처럼 반드시 깨달아야 됩니다.
가룟 유다와 함께, 그 실망하는 지점까지 와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왜 그런 지점까지 도달해야만 합니까?
누구나 다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그 관계의 시작이 잘못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은30세겔은 ‘노예의 몸값’이라는 겁니다. 출21:32
그러니까 이것은 예수님을 아예 노예의 위치에 두고,
유다 자신은, 주인의 위치에서 보았다는 것입니다.
“아유, 그럴 리가 있겠나?”
아니에요, 여러분.
우리가 주님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내용적으로는 종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주인’이라는 별명을 가진 ‘종’이고,
나는.. ‘종’이라는 별명을 가진 ‘주인’입니다.
내가 이 세상 삶에 대해서 갖고 있는 소원에 대해서
예수님이.. 아무 쓸모없다고 하는 것을 느껴본 적이 없습니까?
만약 그러면, 그는 아직 가룟 유다가 도달한 지점까지도 오지 못한 거예요.
아직 ‘기적의 예수님’ ‘능력의 예수님’만 보고 쫓아가는 겁니다.
-그렇게 아직도 가룟 유다가 도달한 지점까지도 못 온 교인들이 많습니다.
-가룟 유다가 도달한 지점까지 와서, 가룟 유다처럼.. 배신하는 교인도 있습니다.
-정답은, 가룟 유다가 도달한 지점까지 와서, 그것을 극복하고, 넘어서야 합니다.
그러려면 반드시 가룟 유다가 번민한 이 지점까지 와야 됩니다.
나도 번민, 갈등 해 보고, 신앙으로 극복해야 합니다.
이 지점까지 와서부터, 이제 진짜 기독교인이냐/아니냐가 결정됩니다.
▲주님이 우리의 의식주를 채워 주신다고요?
내가 이 세상에서 이루고 싶은 것에 대해서, 예수님은 전혀 도움을 주지 않으시고
가룟 유다가 가졌던 세상적 소원을 가졌던 것에 대해
예수님은 눈곱만큼도 움직여주지 않으십니다.
물론 예수님이 나의 의/식/주와 모든 필요를 다 채워주시지만,
믿는 자/안 믿는 자.. 선인/악인을 막론하고.
햇빛과 비를 함께 내려주시듯이.. 마5:45
그런 일반적 차원에서 우리를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특별한 물질의 사명자 예외 있음)
다만 차이가 있다면,
성도는 하나님이 주시는 걸 알고 감사하는데,
악인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걸 모르고 감사하지 않는 것이.. 그 차이입니다.
◑2. 가룟 유다와 결별하는 단계
▲1. 세상에서 빠져나오라고.. 내 세상적 소원을 안 들어주십니다.
그런데 세상을 버리지 못한 ‘가룟 유다’는,
이 세상에 대한 나의 소원, 내 소원을 결코 놓지 않습니다.
끝까지 놓지 않을 때는
반드시 예수님을 버리게 되고, 예수님을 배반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내 소원을 들어주는 분이 아니니까... 절대로 안 들어주십니다.
왜요? 그분은 내 주인이니까요. 내가 그 분의 종이니까요.
주인은.. 종의 소원을 꼭 들어줄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세상에서 빠져나오라고.. 절대로 그 세상적 내 소원.. 안 들어주십니다.
▲2. 또 다른 이유로는 예수님께서 내 인생을 주인으로서 이끌어 가실 때에
내 인생에 대한 하나님아버지의 소원만 있으면 되기 때문인 거예요.
예수님이 보실 때는
‘하나님이 내 인생에 대해 갖고 계신 소원’만 있으면 충분하고,
‘내 스스로 내 인생에 대해 갖고 있는 소원’은, 폐기처분해도 된다고 느끼시기 때문입니다.
사소한 거라도, 길에 지나가는 외제차를 보고
‘아, 저 차 좋다!’라는 생각이 날 때조차도, 그 소원을 버리라는 거예요.
그 소원을 갖고 예수님을 좇아가지 말라는 거예요.
아름다운 여인을 보면서, ‘아, 저런 아가씨와 결혼하면 좋겠다’
그런 마음도 총각들이여, 갖지 말라는 얘깁니다.
내 결혼에 대해서 예수님이 갖고 계신 소원이면 충분하다는 거예요.
내 소원은 폐기처분하라는 겁니다.
▲모든 기독교인들이
자기 죄악된 소원을 갖는 욕망을 가지고, 예수님을 믿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신앙이 점점 성숙하면서..
예수님은 내 소원을 이루어주시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깊이깊이 깨닫게 되는 (가룟 유다의) 자리까지 와야 됩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번민하더라도
예수님을 폐기처분하는 대신에,
세상에 대한 내 소원을 죽이고, 폐기처분해야 하는 겁니다.
여기서부터 참 신앙으로 거듭나기 시작한다는 겁니다.
▲이렇게 완전히 세상에 대해서 소원을 가지려는 마음이 죽어버릴 때,
내 마음이 하늘나라에서 거듭나고
그리고 세상에 보내졌을 때…
하나님 만나서, 하나님으로 배부른 상태에서
어떤 것도 세상에 대해 갖고 싶지 않을 때에
주님이 넣어주는 소원이
내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라는 거예요.
당신은 오늘을.. 자기 뜻(야망과 욕망)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직 가룟 유다와 결별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당신은 오늘을.. 하나님의 뜻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가룟 유다와 결별하고, 그 시험을 극복한 상태입니다.
설교제목이 ‘가룟 유다와의 결별 포인트’입니다.
우리가 아직 여기까지 도달도 못한 상태로 있을 수도 있습니다.
여전히 내 소원을 가지고 주님께 나와서 이루어달라고 기도할 때,
하나님은, 전혀 내 소원을 들어주실 마음이 없는 분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시점부터
여러분이 가룟 유다와 결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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