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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정에 장애아를 주신 이유

LNCK 2012. 2. 15. 09:52

◈우리 가정에 장애아를 주신 이유       요9:1~3      09.12.30.설교녹취


후반부를 꼭 읽어보세요! 


▲도입

본문에는, 날 때부터 소경된 자가 나온다.

‘태어날 때부터 소경된 자’ .. 우리는 그에게 아무 관심이 없지만,

주님은 그에게 깊은 관심을 기울이셨다.

그리고 ‘그를 통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하셨는데,


요9: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본문과 비슷하게, 우리 가정에 실제로 첫째 아이가 발달장애아로 태어났다.

그리고 나는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 아들을 통해 실제로 경험하였다. 그 간증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한다.


우리 가정 말고도.. 이 사회에는 많은 장애아들이 있다.

저의 이 간증이, 장애아들을 바라보는 여러분에게도, 저와 비슷한 은혜가 되시기 바란다.



◑제 청년시절, 소명을 갖게 된 계기


▲누나의 뇌종양으로.. 인간의 한계를 느끼고, 신앙을 갖다.

제가 서울에서 일반대학원을 다니고 있었을 때였다.

1학기를 마치고 방학이 되어, 고향에 내려갔는데, 진주로 시집간 누나로부터 전화가 왔다.


‘누나가 두통이 너무 심해서, 이제 큰 병원에 가야 되겠다.

진주의 이 병원, 저 병원에 다 다녀도, 진주에서는 이 병을 못 고치고,

부산에 있는 큰 대학병원에 가라 그런다.’고 했다.


그 당시 CT촬영을 한 것을 보는데, 누나의 뇌에 큰 혹이 보였다.

의사는 뇌종양이라고 했다.

부산의 대학병원에서는, 그걸 보면서,

‘이 정도까지 컸으면, 더 이상 수술도 못하고, 2개월 이상 살지 못한다’는 사형선고를 내렸다.


저는 이 사건을 통해서, 정말로 ‘인간의 한계’를 절실히 깨달았다.

저는 영남대학교를 졸업하고, 당시 서울대학원에 진학했는데,

서울대학원에 다닌다는 사실로 인해, 저는 자만심에 가득 부풀어 있었을 때였다.


그러나 젊은 누나의 ‘사형선고’를 듣고서,

정말 인간의 한계를 깨닫고, 개학이 되어서 서울에 올라왔지만,

나는 누나를 위해 해 줄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그때 문득 천주교 성당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에 누나가, 성당에 다녔던 기억이 나면서,

제가 2달밖에 남지 않은 누나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성당에 나가서, 누나를 위해 기도를 드려주는 일뿐이었다.


그래서 저는, 제 발로 서울 명동성당에 다니기 시작했다.

‘신이시여, 당신이 정말 계신다면, 제발 우리 누나를 고쳐주세요!’


성당에서 6개월간 ‘예비자교리’ 교육도 받았다.      

이 교육을 받으면서, 저는 ‘신이 살아계신다’는 정도만 겨우 믿을 수 있었다.

그러면서 신기하게 ‘신이 살아계신다면, 우리 누나가 살 수 있겠다’는 마음도 들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저는 열심히 명동성당에 다니면서, 하나님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2개월이상 못산다는 누나는, 지금 현재까지 22년간을 더 살고 있다.


▲성령체험

저는 대학원을 졸업하고, 유학을 준비하고 있을 때,

그 당시 서울 신림동 성당에서 <성령쇄신세미나> 집회가 열렸다.


가톨릭에서 <성령쇄신세미나>는, 개신교로 치면 ‘심령부흥회’이다.

이 모임은, 신부나 수녀가 주관하지 않고, 평신도들이 주관한다.

저는 거기에 참석해서 은사를 받았다.

또한 <피정>에 가서, 성령의 불세례를 받았다.      *피정: retreat, 避靜


피정에 가서, 제가 기도하고 있는데, 위에서부터 파란 불이, 제게 임하는 것이었다.

저는 나도 모르게 ‘주님, 오세요!’라고 부르짖었다.

그 불이 내 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저는 그 불을 받고서, 뜨거워서 뒹굴기 시작했는데, 얼마나 땀을 흘렸는지,

그 당시 제 앞에 있던 찬송가가 다 흥건히 젖었을 정도였다.


그때부터 저는, 변화되기 시작했고, 만나는 사람마다 ‘예수 믿으세요’ 전도하기 시작했다.


▲나의 소명과 목회 방향을 받게 되다.

그 이후로 주님은 저를 부르기 시작하셨다. ‘내가 너를 나의 종으로 부르기 원한다.’

그런데 여러분, 가톨릭에 있으면서, 소명을 받으면.. 결혼도 못하는 신부가 되어야 하니.. 난감했다.


‘주님, 그러지 마시고, 제가 열심히 공부해서 유학 갔다 와서,

돈 많이 벌어서 헌금 많이 드릴 테니까, 그것만은 시키지 마세요!’


그런데도 주님은 계속 나를 부르셨다.

어느 날 제가 길을 걸어가는데, 주님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저는 그 음성에 따라, 그 음성을 주신 그분께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교제하기 시작했다.


그때 저는 초신자라서 성경지식도 없었고, 주님에 대해서 아는 것도 없었다.

그래서 주님과 그저 사소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런 부분↑을 싫어하는 분도 있습니다만,

  개인적 체험은, 천차만별로 다양하다는 차원에서,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편.


그런데 어느 날은, 주님과 의미 있는 교제를 하기도 했는데,

주님은 눈에 보이진 않지만, 거기에 서 계심을 느낄 수 있었다.

음성이 들리지 않지만, 내적음성은 들을 수 있었다.


‘주님이 저와 이렇게 교제하시듯이, 다른 사람과도 이렇게 교제하십니까?’

그러자 주님은

‘내가 너와 이렇게 교제하기 원하듯이, 다른 사람들과도 교제하기 원한다.’


이것이 제 목회 방향이 되었다.

저는 어디를 가든지, ‘여러분, 주님은 여러분과 친구처럼 교제하기 원하십니다.

그 주님을 만나십시오. 그 주님과 함께 동행 하십시오. 주님은 너무나 좋으신 분이십니다!


또한 (제가 주의 종이 되기로 작정하고) 어느 날 제가 성경책을 읽는데,

‘사도행전의 역사가 재현되리라’는 강한 확신이 제 마음에 왔다.


그 다음부터 저는 목회하면서 2가지 방향을 잡게 되었다.

-주님과 교제하세요

-사도행전의 역사를 재현하기 위해서 우리가 준비합시다.

이것이 제 목회 방향이 되었다.


이후에 저는, 주님의 인도로, 개신교로 옮겨와서, 지금 같은 목사가 되었다.



◑우리 가정에 장애아를 태어나게 하신 이유


다른 사람은 제게 이렇게 말한다.

‘형제님은 학벌도 좋고, 체험도 많이 했기 때문에

앞으로 큰 교회를 목회하실 겁니다!’


사실 저도 처음에는 그렇게 자만했다.

‘제가 주님을 강하게 만났고, 주님의 능력을 체험했고..

그래서 나는 이제 큰 교회를 목회할거야!’

나도 모르게 이런 자만심에 붙들렸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은 그런 미성숙한 나를 통해서 일하시기 시작하셨는데...


▲장애아를 둔 가정의 아픔과 고난

제가 결혼한 이후에, 두 아들을 낳았다.

그런데 첫째 아들이, 아주 어려서부터 정신지체 1급 장애아이다.


저는 이것이 처음에는 쉽게 이해/납득 되지 않았다.

‘내가 처음 만난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이고,

정말 뭐든지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시고,

나를 만나 주시고, 나를 교제해 주셨던 그 주님!


주님은 너무나 자비하시고, 어떤 친구, 심지어 아내보다도 더 다정하신 분이신데,

왜 나에게 이 첫째 아들을 장애아로 허락하셨는가?’


나는 주님의 섭리를 쉽게 이해하지 못했다.

그건 쉽게 이해하고 납득하기에는, 너무도 감당하기 어려운 큰 고통이었다.


제가 인천 검단지역에서 교회를 개척할 당시에,

어떤 성도님이 이사 오셔서, 우리 교회에 나오셨다.

그 집사님이 우리 첫째아들을 보시더니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쯧쯧.. 장애아를 둔 목회자의 교회에, 누가 오겠노?’


▲그 장애아가 바로 너다!

제 마음이 너무나 쓰렸다.

그래서 제가 주님께 따졌다.

‘주님 왜 장애아를 주셨습니까?

저를 부르셔놓고, 목회하라고 하시면서.. 왜 장애아를 주시는 겁니까?’

하며 하나님께 항의했다.


그때 주님은 말씀해 주셨다. “네 아들 시온이가 바로 너다!”


저는 이 말을 들었을 때, 즉시로는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시온이라고? 아니 나는 멀쩡한데, 왜 시온이야?’ 하며 저는 이해 못 했다.


그런데 그 다음부터 끊임없이

제가 어떤 사건으로 인해서, 우리 첫째아이 문제로 힘들면,

주님께 항상 불평하면서, 주님께 기도로 나아갔을 때,

항상 주님이 하신 말씀은 ‘네 아들이 바로 너다!’ 이것이었다.


그래서 주님이 워낙 자주 말씀 하시니까,

‘내가 정말로 우리 아들 시온이인가?’ 하면서, 그때부터 우리 시온이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아들에게서 발견되는 내 모습

여러분, 여러분도 자녀들을 보시면, 귀여울 것이다. 저도 귀엽다.

그래서 제가 “시온아!” 하고 부른다.

그러면 우리 아들은,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자기 일을 계속한다. (발달장애)


‘주님 제가 시온이를 불렀는데,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자기 일만 계속합니다.’


주님은 바로 감동을 주셨다.

‘네가 나한테 똑같이 그렇게 하지 않느냐!’


또 제가 우리 아들이 너무 좋아서 안아주었다.

그러면 첫째 아들은 너무 답답해서 나를 밀쳐낸다.

그래서 제가 계속 껴안아주려고 다가가면, 아들은 더 멀리 도망가 버린다.


아버지인 저는 마음이 아팠다.

‘주님 제가 첫째를 사랑해서 안아주고 싶은데, 막 도망가요’


‘네가 나에게 그렇게 하지 않느냐!’


그런 과정들이 지난 이후에, 저는 고백하게 되었다.

‘주님 맞습니다. 제가 시온이입니다. 제가 장애자입니다.

제가 바로 시온이와 똑같은 발달장애자입니다.’


▲성경에 장애우가 종종 등장하는 이유

여러분, 신약 당시 유대인들은 선택받은 민족이라고, 자부심이 대단했다.

자기 조상들은 아브라함이고, 모세의 율법을 받았으며,

비록 지금 로마의 식민지 아래 있지만, 메시아가 오시기만 하면,

로마를 쳐부수고 모든 나라들 중에 으뜸으로 세워질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러분, 메시아가 진짜 오셨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바라보았는가? 못 알아보았다.

 

그들이 고대하던 메시아가 오셨고, 자기 눈으로 보았는데도.. 보지 못했다.

그들은 영적인 소경들이었다.


예수님이 오셔서 말씀을 선포하셨다.

그들은 그 말씀을 들었다.

그러나 귀머거리(청각장애우)처럼, 그들은 듣지 못했다.


예수님이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셔도, 그들은 따라가지 않았다.

그들은 앉은뱅이였던 것이다.


그러니까 성경에 수많은 소경, 귀먹은 자, 앉은뱅이 장애우가 나오는 것은,

그 유대 선민들이,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는 소경들이며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하는 귀먹은 자들이며

다리는 있어도 걷지 못하는 앉은뱅이라는 것을.. 깨달으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런 장애우들을 세상에 두신 주님의 목적이었다. ↙


      요9: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나는 소경이 아니고, 벙어리가 아니라’고 했다. 요9:40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 집에, 장애우, 중환자가 있으면,

그 사람을 보고서, 하나님은 나머지 가족들에게 메시지를 주신다.

‘너는 저 환자를 보고 깨달으라!’

그것이 바로, 그 장애우, 중환자를 집에 두시는 주님의 목적이다.


‘하나님 맞습니다.

저는 우리 아들 시온이처럼.. 장애자입니다.

저를 불쌍히 여기사, 제가 주님을 보게 하시고, 주님의 음성을 듣게 하시고,

주님께 반응하게 하소서!’


▲내가 주님을 간절히 필요로 하는 이유   ←하이라이트 단락

저는 지금까지 목회하면서도,

내가 여전히 소경이고, 여전히 벙어리이고, 내가 여전히 앉은뱅이임을 고백하면서

‘주님 맞습니다. 저는 소경이기 때문에 주님이 필요합니다.’ 라고 고백한다.


그 전에는,

-내가 더 큰 일 하기 위해서,

-내가 더 큰 목회를 하기 위해서

-내가 더 큰 능력을 나타내기 위해서... 주님을 필요로 했다.


그러나 저는 변화되었다.

내가 주님을 간절히 필요로 하는 이유는,

내가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는 소경이요,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청각장애자이기 때문이다.


‘제 말 못하는 벙어리 됨을 고쳐주셔서, 주님의 말씀을 올바로 전파하게 해 주옵소서!’

지금도 저는 이 기도를 계속 드리고 있다.


▲제가 오죽 교만하고, 제가 오죽 못 알아들으니까,

하나님은 우리 아들을, 장애아로 태어나게 하셔서,

날마다 제 귀에 확성기를 대고, 제게 교훈하시는 것이다.

‘네 아들을 봐라. 그게 바로 네 모습이란다!’


우리는 자기 내면을 잘 모른다. 그래서 그 모르는 내면을 보게 하시려고,

여러분의 가정에도, 혹은 직장에도,

여러분의 내면을 직시하게끔 만드는,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들이 있다.


여러분이 그 사람을 쳐다보며, 답답해하고, 낙심하고, 하소연하게 될 때

‘저 사람이 바로 네 모습이란다!’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시기 바란다.


그런데 오늘날 신자들은, 온통 ‘겉모습’에만 힘쓴다.

겉으로 보기에 성공해서, 뭔가 번듯한 신자가 되려고 애를 쓴다.


그러니까 자기 내면의 참 모습을 더더욱 못 보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중심(not 외모)을 보시는 분이란 사실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내 겉모습이 번듯하면, 내 내면도 번듯한 줄 안다.

그렇지 않다. 겉모습은 번듯하지만, 내면은 아주 불결할 수 있다.


나는 그런 회복과 치유를.. 장애아인 우리 아들을 통해서.. 이루어가고 있다.

부디 여러분도, 하나님이 여러분께 보내주신 사람을 통해서.. 내면적 신앙을 이루어가시기 바란다.


................................... 


▲아버지의 아픔을 깨닫다.

어느 날 제가, 우리 첫째를 데리고, 어느 큰 교회를 방문했다.

예배시간보다 좀 일찍 도착해서, 아들 때문에, 유아실에 들어가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우리 아이는, 정신지체장애이지만, 또한 뇌성마비가 조금 있어서, 뒤뚱거리면서 걷는다.

그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는지, 우리 아들보다 덩치도 작은 아이가 뒤따라와서,

음료수 페트 빈병으로, 우리 아들을 뒤따라가면서 계속 때리는 것이었다.


우리 아들이 도망가다가, 넘어졌는데,

그 아이는, 웃으면서, 넘어져 있는 우리 아들을 계속 때리는 것이었다.


저는 그 모습을 보면서, 정말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솟았다.

그래서 제가 벌떡 일어나서 다가가려고 하자,

다행히 그 작은 아이의 어머니가 먼저 달려와서, 자기 아들을 떼어 놓았다.


저는 분노가 가득한 얼굴로 하늘을 쳐다보았다.

‘하나님, 보십시오. 우리 아들이 저렇게 고통 받는 것을 보셨죠?

제 마음도 찢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게 좋으십니까?’

 

그때 주님의 성령이 제게 임하셨다.

갑자기 고요함을 느꼈다. 위로부터 주님의 내적 음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네 아들이, 아무 이유 없이 고통 받는 것을 보고, 네가 그렇게 아파했다면,

내 아들이 아무 이유 없이 십자가에 달렸을 때, 내 마음이 어떠했겠느냐?’


저는 그 음성을 듣고서,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렇구나, 내가 내 아들을 바라보면서, 아버지로서 그 고통을 느꼈는데,

예수님이 아무 이유 없이 고통을 받았을 때..

그 아버지 하나님의 고통은 말할 수 없이 컸겠구나!’


저는 예전에 그렇게까지 절실히 느끼지 못했던

‘하늘 아버지의 마음’을

고통 받는 우리 아들을 바라보면서,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같이 상급 받는다.

아들의 건강을 위해서, 저는 매일 아들과 산책을 한다.

아들은 앞에 가고, 저는 뒤에서 따라 간다.

어느 날 이런 의문이 생겼다.

‘나는 하나님께 열심히 한 만큼, 천국에서 하나님께 상급을 받을 터인데,

우리 아들은, 뭘 모르는 아이인데, 어떤 상급을 받을까?’


그때 주님은 이런 음성을 주셨다.

‘네 아들 시온이는, 너와 동일한 상급을 받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너를 위하여,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 아들을 위해서 산다고 했는데, 물론 이 말도 맞지만,

우리 아들이, 나를 위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 말도 맞다.


여러분 가정에도, 여러분이 그 누구를 위해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다른 측면도 보셔야 한다. 그가 여러분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와 여러분은, 상급도 같이 받을 것이다.


▲마치는 말/ 예수님처럼 보고, 예수님처럼 듣고, 예수님처럼 깨달아가기.

저는 이렇게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그대로 행하면, (이것은 처음부터 제 목회방향이었다)

큰 역사가 나타나고, 뭐가 장황하게 잘 될 줄 알았다.


(물론 그 외 고려해야 될 여러 변수가 있겠지만)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 음성에 잘 따라가는데도..

제 삶에는 여러 가지 곤고와 어려움들이,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요즘 제가 훈련하는 것은,

단순히 내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의 역사를 바라보는 것보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것처럼, 주님을 듣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모습을 뵈었던 것처럼, 주님을 뵙는 것이다.


지금 내가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과,

주님의 형상을 뵈옵는 것과,

하나님의 음성을 대언하는 것이.. 더욱 성숙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마치 예수님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것처럼,

마치 예수님이 하나님의 모습을 뵈었던 것처럼,

마치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전달했던 것처럼!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요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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