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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를 헛되이 받지 마시라

LNCK 2011. 12. 21. 09:17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마시라        고후6:1, 고전15:10     09.04.17.설교일부녹취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고후6:1


 

◑은혜를 헛되게 받는.. 두 극단적 태도


▲1. 성령의 은혜를 무시하고, 내 인간적 힘으로만 뛰는 것

‘힘으로도 안 되고, 능으로도 안 된다’는 슥4:6절처럼

신앙생활도, 기도도, 우리 열심으로,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태생적으로 ‘열심 은사’를 타고난 분들을 위시해서, 우리 모두가

이런 극단에 빠지기 쉬운데,

성령의 인도, 감동, 주도하심을 무시하고.. ‘자기 열심’으로 맹렬하게 달리는 분이다.

-성령님을 무시하기 때문에, 당연히 (성령의) 은혜를 헛되게 받는 것이다.


내 힘으로 죽도록 해 봐도.. 그게 안 되니까.. 성령님이 계신다.

우리 힘만으로 신앙생활이 안 되고, 목회가 안 되고, 설교가 안 되기 때문에,

가정을 잘 이끌 수 없기 때문에, 내 스스로 변화되지 않기 때문에..

성령님이 계신다. 내주하시는 성령님이 나를 도우시고, 이끄신다.


그런데 은혜를 헛되이 받는 첫째 이유는.. 내 힘만으로 하는 것이다.

성령님의 인도와 도우심을.. 내가 무시하는 것이다.

특히 성령의 역사에 캄캄한 교회에서.. 이런 일이 종종 발생한다.


물론 내가 성령의 역사에 캄캄해도,

성령님이 주도적으로 역사하셔서, 나를 인도하실 때도 있다.

그러나 어쩌다가 그렇게 하는 것이고,


평소에 성령의 인도와 도우심을 항상 내가 받으려면,

내가 성령님께 열려 있어야 한다. 


오늘 날에도 수많은 교회에, 주님이 문을 두드리고 계신다.

주님은 사랑이시고, 너무 귀한 분이기 때문에

우리가 원수 되었고,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분이기 때문에

이 도시에 있는 모든 교회에.. 주님은 친히 찾아오셔서 문을 두드리신다.


그런데 인간의 지성이 그 소리를 막고 있다.

인간의 목회 철학이 막고 있다.

교리, 철학, 심리학, 상담, 매너리즘에 빠진 시스템이 막고 있다.

내 인간적 열심이 그것을 막고 있다.


-이 모든 이유가, 평소에,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 민감하지 않기 때문이다.

보통 이런 교회는, 일년내내 강단에서, ‘성령’이란 단어가 한 번도 안 나온다.


▲2. 두 번째로 은혜를 헛되이 받는 것은, 나의 거부이다.

이것은 영적으로 ‘패배주의’에 빠진 것인데, 무슨 말인가 하면,

성령님이 다 알아서 해 주실 줄 믿는다면서.. 미뤄버리고.. 자기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궁극적으로 ‘성령님이 자기를 변화시켜서, 성숙함/온전함으로 이끄신다’고 믿지 않는 태도인데..


교회 생활 꾸준히 하면서, 주님을 찾는 것 같은데

사실은 ‘하나님 나를 좀 변화시켜 보십시오! 나는 스스로 포기 했습니다.’ 하면서,

자기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두 번째 극단이다.

첫 번째 극단은, 자기 힘으로만 하는 것이고, 두 번째 극단은 자기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옛말에 ‘말을 물가에 끌고 갈 수는 있지만, 물을 먹일 수는 없다’고 했다.

물가로 끌고 가시는 일은.. 성령님의 역사이고,

거기서 물을 마시는 일은.. 내가 해야 될 일인데..

자기는 가만히 있으면서, 모든 일을 성령님보고 다 해 달라는 태도이다. 극단이다.


     주님을 진짜 신뢰하기 때문에, 내 가슴을 제끼면서(열면서)

     ‘나를 수술해 달라고, 주님이 나를 수술하실 줄 믿는다’고.. 이것은 믿음이다.


     그런데 자기 마음에 두꺼운 장벽을 친 채로

     ‘나는 못 하니까,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해 주십시오!’

     -이게 좋은 믿음 같아 보이지만, 믿음이 아니다. 불신앙이다.


주님을 진짜 믿는 성도는,

내가 주님의 음성을 들을 때, 내게 주님의 뜻이 포착되어 질 때,

나는 기꺼이 순종할 자세를 갖고 있는 사람.. 그 차이이다.

 

그런데 극단적 믿음은,

내가 주님의 음성을 들을 때, 주님의 뜻이 포착되어 질 때에도,

가만히 앉아 있는다. 주님이/성령님이 알아서 다 해 달라는 것이다.


이것은 믿음이 좋은 게 아니라,

-사실은 진실로 자기가 주님 뜻에 순종할 마음이 없든지,

-아니면 패배주의에 빠져서 ‘나는 해 봐도 안 되더라’로 일관하는데..

참 믿음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주님이 자기를 변화시킬 줄.. 의심하지 않는다.


또 어떤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것만 딱 순종한다.

내 입맛에 맞는 것만 딱 순종하고, 내 입맛에 맞는 것만 회개하고 변화되고,

그렇지 않는 분야는

‘하나님 저를 한 번 변화시켜 보십시오!’ 하고 거부한다.

즉, 자기는 다 맡겼다고 하면서, 손 놓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

-이것도 은혜를 헛되이 받는 것이다.


▲은혜를 받는 면 + 내가 해야 되는 면.. 둘이 같이 가야 한다.

여러분 우리가 해야 되는 부분이 있다.

우리가 주님께 적극적으로 동참해야 할 부분이 있다.


아래 사도바울의 고백을 들어보면,

주님의 은혜를 받았으니까.. 가만히 있은 게 아니라..

자기가 다른 사도들보다 더 열심히 일을 했다고 고백했다.


고전15: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내 힘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다.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주님의 은혜에 따라, 자기가 애를 썼다. 순종했다.


수많은 고통과 고난을 겪으면서, 포기하지 않고, 남들에게 오해받고,

매 맞고, 갇히고, 만물의 찌끼같이 되는 일을 당해도,

포기하지 않고, 주의 일을 향해서 달려갔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모든 게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이니,

자기가 꼼짝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는 것이 아니다.


그 은혜가 부어져서,

자기가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은혜+열심이다.)


나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동참하지만,

그 궁극적 원인자는 하나님이요, 성령님이라는 것이다.


▲정리하면, 은혜를 헛되게 받는 양극단

-사람의 노력으로만 다 하는 것, 내 생각대로 열심 내는 것

-하나님 그냥 알아서 하십시오.. 하면서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다.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되는데.. 손 놓고 있는 것

  여러분은 이것이 믿음인줄 아시는가? 아니다. 몸부림쳐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지면, 다른 모든 사도들보다 더 열심히 수고하게 되어 있다.


세상 일도, 대학에 떨어지면 재수하고, 삼수도 하는데,

영원한 가치가 있는 예수님을 향해 달려가는 건데

회개할 때 회개해야지

왜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거기에 멈추시는가?


하나님이 그거 해 주실 줄 아시는가?

내가 거기에 마음과 몸을 쏟을 때, 하나님이 나를 만져주신다.


진짜 하나님께 대한 갈망이 있으면, 멈출 수가 없다.

‘나는 안 되던데?’

‘아, 나는 안 되나 보다.’

‘나는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너무 힘들다.’


아니다. 여러분, 다시 열심 내셔야 한다.

내가 몸과 마음으로 그 일에 동참해야 한다.


▲내가 해야 되는 부분이 있다.

고후7:1,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


복음의 약속,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약속을 가졌다고 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을 깨끗케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무조건 다 해 주시는 것은 아니다.


여러분, 흐지부지 신앙생활 하시면 안 된다.

흐지부지 대충 기도하시면 안 된다.

깨어나시고, 몸부림쳐야 한다. 그건 가치 있는 일이다.


저와 여러분이 수고하는 일은, 가치 있는 일이다.

내 죄성과 교만과 싸우는 일, 내 자아를 쳐서 복종시키는 일은, 가치 있는 일이다.

주님을 향해 달려가는 일은, 가치 있는 일이므로.. 중도에 멈추시면 안 된다.


내가 해야 하는 일이다.

성령과 은혜가 역사하는 사람은, 자기가 나아가게 되어 있다.

주님이 그 길로 나를 이끌어 가신다. (주님+자기가 악수하듯이)


여러분, 다 상황이 틀릴 것이다.

조금 안 되는 일 때문에.. 뒤로 물러 서셨는가?

예수님 따르시고, 성령과 은혜가 역사하는 사람은.. 결코 뒤로 물러서지 않는다.


자기 성품이 절대 변하지 않는다는 사람

끝까지 발버둥 치시고, 뒤로 물러나지 마시고, (은혜를 헛되게 받지 마시고)

태어난 유전자 탓 하지 마시고,

자기 주어진 상황, 환경 탓하지 마시고,

열심히 도전하시라.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실 때에도,

무덤 문의 돌은.. 우리를 보고 옮겨놓으라고 하셨다.

그리고 수족을 감쌌던 베도.. 우리 보고 풀어놓으라고 하셨다.

주님도 하시지만, 내가 해야 될 부분도 있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속의 은혜는.. 모두 주님이 하셨다. 내가 할 일은 '믿는' 것뿐이다.

그런데 믿은 이후로 성화, 성장, 성숙, 믿음의 삶을 사는 일에는..

성령님이 주도하시는 일에.. 거기에 나도 순종해야 한다. (성령님+나)


‘죽은 자(나사로)를 살리는 것’은 주님의 영역이다.

즉 내 삶 가운데서 나를 변화시키는 부분은.. 주님의 영역이다.

거기에 내가 동역(순종)해야 될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변하지 않는 이유가 뭐냐면

주님이 은혜를 안 베풀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주님의 은혜를 헛되게 받기 때문이다.

즉, 은혜를 받아도..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


◑서론 : 은혜를 헛되이 받을 수 있다.


▲성령이 내 성화와 성숙을 주도해 나가신다.

우리가 십자가의 은혜를 받을 때,

회개와 산 믿음의 과정을 통해서,

십자가의 공로가 우리를 변화시키는데,

공로는 예수님의 십자가 피 밖에 없다.


그러면 내 신분이 바뀌어버린다.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죄인의 삶에서,

이제는 주님의 자녀로, 메신저(使者)로, 대사ambassador로서 우리 소속이 완전히 바뀐다.


소속이 바뀔 뿐만 아니라, 성령께서 계속해서 우리를 그 소속에 맞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부르심을 향해서 계속 밀고 나가신다.


진짜 새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은,

그 신분에 걸맞는/합당한 사람이 되도록,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성화와 성숙의 과정을 주도해 나가신다.

이것이 바로 성령님의 역사이다. 그래서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신다.


그 부르심을 이루기 위해서 결정적으로 필요한 것이 하나님을 알아가는(친밀히 교제하는) 것이다.

신앙생활은 어디서 뭘 배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귐이다.

길, 진리, 생명, 빛이신 주님과 사귐이기 때문에,

주님을 더욱 더 사귀면서 알아가게 된다.


성령님은 계속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나고, 생각나게 하시면서

예수님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계속 증거해 주시면서

우리를 주님께로 계속 (성숙으로) 이끄신다.


▲성령님은.. 성화로/성숙의 길로 나를 주도하신다.

성령님이 역사하시는 교회는,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시고,

어떤 목회 전략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은사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핵심은 아니다.


성령님 사역의 진짜 핵심은, 우리를 예수님께로 계속 인도하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가 성령님을 인정하지 않으면,

본질과 생명을 놓칠 수 있을 만큼 위험하다.

성도들을 예수님께로 (성숙으로) 계속 인도하는 일이, 둔화되어지니까!


여러분과 제가 성령으로 충만하면,

기적도 일어나고, 지식도 뛰어나겠지만,

모든 일에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처럼

예수님 자체가 사랑이시니까,

그 사랑이신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아, 내가 계속 그 길로 인도되어지게 된다.


성령님의 인도.. 너무 중요하다.

우리를 예수님께로 계속 (성령님의) 은혜로 이끄신다.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 받는 것이고, 내 신앙의 성숙의 길이다.


▲은혜를 헛되이 받을 수 있다.

그런데 본문에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고후6:1


은혜를 헛되이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공동체가 성령님을 인정하면,

성령께서 우리를, 신앙의 본질적인 부분(성화)으로 계속 우리를 인도해 가신다.


그런데 우리가 이것을 막을 수 있는데

내 자유의지가, 성령의 역사를 이길 때이다.


성령님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내 옛 자아이다.

성령의 은혜가 주어져도, 내가 계속 헛되게 받을 수 있다.

마치 깨진 독에 물을 붓는 것처럼,


성령님이 내게 아무리 역사해 주셔도,

내가 은혜를 헛되어 받음으로써

우리 스스로 성령의 역사를 방해할 수 있다...

 

그 헛되게 받는 길이.. 2가지 방면으로 나타나는데, 위에서 살펴보았다.

-성령님의 인도를 깡그리 무시하고, 내 힘/내 이성/내 능력으로 활동하는(날뛰는) 것과

-성령님으 인도를 받는다고 하지만.. 나는 가만히 앉아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이런 극단적 태도를 가지는 사람은.. 은혜를 헛되이 받아서.. 그의 삶에 성화/성숙이 일어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