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시작하려면 행15:36~41 12.01.22.설교스크랩
▲공부 못 하는 사람의 특징 - 시작이 어렵다.
제가 20대 초에 한 6개월 정도 산사에 있는 고시촌에서 지낸 적이 있습니다.
(저는 고시공부를 하러 간 건 아니었고 다른 이유 때문에 갔었는데)
거기서 분명히 깨달은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고시에 붙는 사람과
떨어지는 사람은 분명히 차이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고시에 붙는 사람, 또는 공부를 잘 하는 사람은,
<공부할 때 쉽게 시작하더라>는 겁니다.
‘공부하자’ 마음 먹으면, 금방 공부에 집중하면서
자투리 시간이나 쉬는 시간에도 공부의 끈을 놓지 않는 겁니다.
반대로 낙방하는 사람, 또는 공부를 못하는 사람들의 한결 같은 특징은,
<공부를 시작하는 게 너무 어려운> 거예요.
그런 사람들의 흐름은 대체로 이렇더군요.
공부를 시작하려면 먼저 결심부터 합니다.
그리고 그 결심을 스스로 확인하기 위해서 뭔가를 씁니다.
일사각오, 삼당사락(三當四落), *3시간 자면 합격, 4시간 자면 불합격
초지일관, 고진감래 등등.. 격문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러고 나서는 그걸 꼭 주변 사람들한테 간증하지요.
“야! 나 이제부터 죽기 살기로 공부만 하기로 했다!”
그리고는 ‘결심 의식’을 치릅니다.
“영식아! 아래 마을회관 내려가서 소주 두 병만 사와!”
그래서 사온 소주를 사람들과 나눠 마시면서, 또 한 번 자기 각오를 밝힙니다.
“봐! 이제 내가 공부하다가 죽을 거야!”
그러다 보면 밤이 되고, 그러면 다음 날을 기약하면서 잠자리에 드는 겁니다.
(그렇게 그 날은 공부를 공쳤습니다.)
무슨 얘기일까요?
자기 시간의 절반을 시작하는데 씁니다.
그리고는 시작도 못합니다.
한 마디로, 시작이 어려운 것입니다...
▲성도의 순종과 결단은.. 시작이 빨라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생활도 똑같습니다.
뭔가 하려고 하면, 시작을 너무 어렵게 한다는 겁니다.
이건 마귀가 주는 생각입니다.
마귀의 특징은 시작을 못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
주님의 길을 발견하는 데는.. 깊이 기도하고, 신중하게 판단해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말씀에 순종하거나 (서로 사랑하라 등)
명백하게 하나님의 뜻으로 발견되어진 사안에서는.. 신속하게 결단하고 움직여야 합니다.
이때는 미적거려서는 안 됩니다.
우리도 새 일을 하는 게 쉬워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겁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들과 바로 그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어떻게 해야 쉽게 시작할 수 있을까요?
▲본문은 사도 바울이 제 2차전도여행을 시작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그 대단한 일을 시작하는데 별 계기가 없습니다.
그냥 시작하는 거예요.
무슨 시작하는 행사(출정식 등)를 거창하게 치르지 않습니다.
대단하게 시작하는 것처럼 보이려고, 처음부터 뜸 들이는 게 없는 겁니다.
분문 행15:36절에 “며칠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고..”
그냥 “며칠 후에”, 옛날 성경에는 “수일 후에”
이게 2차 전도 여행의 계기가 됐습니다.
별 이유가 없어요.
그냥 생각이 났다는 겁니다.
‘우리가 1차전도여행 때 돌았던 데를 다시 한 번 돌아볼까? ’
그러면서 갔다는 거예요.
시작이 얼마나 쉽습니까?
이게 믿음입니다.
물론 그들이 2~3년을 장기적으로 계획하고 간 것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쉽게 시작은 했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
2차전도여행이 점점 확대되고..
특별히 행16장부터는, 아시아에서 유럽지역으로 진로가 옮겨졌습니다.
‘순종의 걸음을 옮기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뜻을 계속적으로 발견한 것이지요..’
▲사실 1차전도여행을 끝낸 사도 바울의 현재 형편은 그다지 좋지 않았습니다.
그 후유증이 아직 시간적으로 가시질 않은 때였던 겁니다.
무엇보다 루스드라에서 있었던 일을 돌이켜 보면 끔찍한 겁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동족인 유대인들이, 안디옥와 이고니온에서 찾아와서 대단한 열심이지요?
복음 전하는 사도 바울을 돌로 칩니다.
그래서 거의 죽음 직전까지 갑니다.
실제로 돌로 쳤던 유대인들은 사도 바울이 죽은 줄 알고
시내 바깥에다 내다 버릴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구사일생으로 예루살렘에 돌아왔더니
이번에는 또 바리새파 출신 유대인들이 들고 일어납니다.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도 할례를 받아야만
교회 공동체로 받아들일 수 있다. 없다 하면서.. 얼마나 다툼과 논쟁이 격렬하게 벌어지는지요.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공의회가 소집됩니다. 행15장
이방인 출신의 그리스도인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오랫동안 논쟁합니다.
결국 마지막 결의에 의해서
할례 받지 않더라도 공동체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결정하지요.
그러나 그 과정 속에서.. 사도바울은 얼마나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고단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쉽게 시작합니다.
이것이 대단한 능력입니다.
무슨 특별한 계기가 없어요,
그냥 시작 했습니다.
바울은 정말 계기를 만드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꼭 무슨 계기가 있어야 시작하잖아요?
갑자기 자고 있는데 하나님이 꿈에 나타나서
“2차다, 2차다!” 그래야 떠나려고 하잖습니까?
걸어가고 있는데 갑자기 돌멩이가 나타나서 팍 넘어졌는데
일어나서 보니까 돌멩이에 “2”자가 딱 써져 있는 거예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런 것도 없고
그냥 ‘며칠 후에…’ 에 하면서 쉽게 시작했다는 겁니다. (양쪽 면을 다 봐야 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일을 할 때 그냥 시작하는 게 중요합니다.
너무 벼르지 마십시오!
물론 하나님의 뜻인지/아닌지.. 그것은 신중하게 분별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이 든 상태에서는.. 신속하게 움직여야 합니다.
시작이 쉬워야 합니다.
한국에서나 여기서나 새벽기도를 가장 많이 나오는 날이 언제냐 하면,
월요일과 1일이 겹치는 날입니다.
(이번 달에는 새벽기도 잘 하리라고) 자기가 결심했다는 증거겠지요.
며칠 지나면 예전과 똑같아 집니다.
그런데 정말 훌륭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 목요일 쯤 새벽기도에 나오기 시작하고,
한 19일쯤 새벽기도에 나오기 시작하는 사람들입니다.
(꼭 1일부터, 꼭 월요일부터 나오실 필요 없습니다.)
벼르는 게 없는 거예요.
깨달으면 즉시 시작하는 겁니다.
서두에 고시촌 얘기를 했는데, 거기서도 보면, 고시가 63일 남았다 그러면
꼭 삼일은 놀고 60일 때부터 시작해야지.. 하는 사람이 있더라고요.
이런 사람은 인생을 힘들게 사는 사람인 것 아시지요?
깨닫는 순간 즉시 하는 것, 벼르지 않고 바로 시작하는 것,
이게 대단히 중요합니다.
▲주변에 보면 꽤 괜찮은 사람 같은데, 의외로 리더십을 발휘 못하는 사람을 봅니다.
이유가 뭔가 봤더니 너무 잘 하려고 하는 거예요.
한 마디로 완벽주의자들입니다.
완벽주의가 왜 나쁘겠습니까?
주의 일을 잘 해 보려고 하는데 그게 왜 나쁘겠어요?
문제는 그게 너무 강해서.. 시작을 못하게 한다는 겁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느끼셨는지 모르겠지만, 요즘 저는 제가 하는 설교가 맘에 들지 않습니다.
준비를 한다고는 하지만 뭔가 부족한 게 있는 겁니다.
이유가 뭔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바로 그 문제였습니다.
제가 ‘시작을 어렵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이란 시작부터 끝까지 성령께서 주신다 맘 먹고
편하게 준비하면 되는데,
너무 잘 하려고 하다 보니까.. 무리가 생기는 겁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고후4:7
이 말씀을 믿고, 영감이 안 떠오르더라도
먼저 원고를 쓰기 시작하면서.. 책상에서 버티다보면..
영감이 오는 것인데..
영감을 먼저 받아서
원고를 쓰려고 하다보니까..
아예 (원고작성) 시작부터가, 쉽게 시작이 안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앗 예수님이다’ 발견하고는.. 즉시 물 위로 첨벙 뛰어내렸습니다. 요21:7
신속합니다. 옷이 물에 젖을 것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도 베드로와 같이
(주님의 뜻이라는 확신을 전제하고서) 신속히 뛰어드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무 완벽주의에 빠지지 말고
하나님이 주시는 대로, 준비가 완벽하지 않더라도 즉시 시작하십시오!
그게 믿음이고, 그래야 열매가 풍성해집니다.
우리가 뭔가를 시작하려면.. 본문의 바울의 이 능력을 깨달아야 합니다.
즉시 시작하고 쉽게 시작하는 것! - 이게 핵심입니다.
◑쉽게 시작하려면..
▲1. 즉시 시작하고 쉽게 시작하려면
첫째는, 에너지가 있어야 됩니다.
기본적인 에너지, 즉 에너지 상태가 높아야 시작하는 게 쉽다는 겁니다.
에너지 상태가 낮으면, 시작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
행4장에, 베드로와 요한이 잡혀서 산헤드린 의원들에게 심문 당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앉은뱅이를 일으킨 것 때문에 문제가 된 것이지요.
‘네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묻습니다.
그랬더니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아주 쉽게 대답합니다.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이 예수는 너의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행4:9~13
여러분! 이 네 절 가운데 느끼시는 게 뭡니까?
무식한 베드로가 설교를 참 잘한다는 느낌을 받지요?
베드로가 이 정도 요약 능력이 있나?, 뭐 버릴 말씀이 없습니다.
아주 알차고 핵심적이고 폭탄을 집어 던진 것 같은 느낌인 겁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 말을 베드로가 했다? 믿어지질 않습니다.
우리만 이상한 게 아니라 당시 사람들도 이상히 여깁니다.
13절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어떻게 이상하게 여길 만큼 묻자 마자
즉각적으로 힘 있는 말씀을 그토록 조리 있게 증거할 수 있었을까요?
베드로와 요한은 영적 에너지 상태가 굉장히 높은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항상 기도하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서, 늘 준비된 상태에 놓여 있었다는 겁니다.
4:8절에 보니까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그랬습니다.
21세기의 일상용어로 표현하자면 ‘그들의 영적인 에너지 상태가 높아져 있었습니다!’
여러분! 축구장 가 보셨지요?
가서 보면 경기장의 한 귀퉁이에서 자기 혼자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선수가 있습니다.
지금 주전들은 경기를 뛰고 있는데 자기는 거기에 끼지도 못하면서
혼자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겁니다.
감독이 불러 주리라는 보장도 없습니다.
감독에게 불림을 받지 못하고 그냥 경기가 끝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거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워밍업을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의 에너지 상태를 높이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감독이 부르면, 언제든지 달려 갈 준비를 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 많은 사람들이 시작을 잘 못하는 이유가 뭐냐?
에너지 상태가 너무 낮아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에너지 상태가 높아 있지 않으면 시작이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똑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너희를 회당이나 위정자나 권세 있는 자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 눅12:11~12
마땅히 할 말을 가르치신대요. 무슨 얘기입니까?
우리는 많은 순간에 ‘How to’ 를 생각합니다.
‘무슨 말을 할까’를 생각한다는 거예요.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건 그게 아닙니다.
무슨 말을 할 지, 어떻게 할 지 그건 너희들이 신경 쓸 게 아니라는 거예요.
신경 쓸 건 딱 한 가지! 영적인 에너지 상태를 높게 유지하라 그 말씀입니다.
구체적으로 뭘 할까 신경 쓰지 말고
하나님과의 관계, 교제, 주의 성령과 동행하는 관계!
그런 영적 에너지 상태를 높게 유지하면.. 뭘 하든지 승리할 수 있다 그 말씀입니다!
우리는 많은 순간에 여기서 실패합니다.
자꾸만 ‘how to’, 방법만 생각합니다.
공부하려고 하지만, 전공 실기 연습하려고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에너지가 하나도 없는 거예요.
에너지 없으면 아무 일도 못합니다.
발레를 봐도 그렇고, 음악 연주를 봐도 그렇고,
뭘 봐도 테크닉이나 스킬에는 별 감동이 없습니다.
뭔가 꿈틀거리는 에너지를 봐야 감동이 됩니다.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이 연주를 하면서 감동을 줄 수 있는 것은
화려한 기교나 정확한 음정이나, 다른 무엇이 아닙니다.
연주를 통해서 폭발적인/잔잔한 에너지를 느낄 수 있어야 됩니다.
바이올린을 연주한다면, 청중들 모두가 그 거대한 에너지에 끌려서
연주자와 함께 몸이 이리 저리 비틀려야 합니다.
그런 연주, 그런 에너지 넘치는 연주를 해야 비로소 사람들은 감동받는 것입니다.
▲아까 제 설교에 관해 말씀을 드렸는데, 진짜 문제가 뭔지를 알았습니다.
정리가 아무리 잘 되면 뭐합니까? 아무리 기승전결이 뚜렷하고,
아무리 간단 명료하면 뭐합니까? 말씀 자체에 에너지를 느낄 수 없는데요.
정말 내가 이 말씀을 전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심정이 있어야 되고,
내가 이 말씀을 전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어서 불타는 것 같은 마음이 있어야 되는데,
그게 없는 겁니다.
그 영적 에너지가 바로 주님이 말씀하신 성령충만인데.. 그게 부족한 겁니다.
▲2. 요지는 우리의 에너지 상태를 높여야 된다는 건데,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에너지 상태를 높이는 것일까요?
그 반대를 알아보면 쉽겠지요?
낮은 에너지 상태가 어떤 것이겠습니까?
한 마디로 성경에서 말하는 죄입니다.
시기, 질투, 미움, 원망, 두려움…이런 걸로 차 있으면
에너지 상태는 바닥으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밤낮 시기 질투하고 원망합니다. 일이 되겠습니까?
일.. 안 됩니다.
자기에게 주신 은사도 활용 못 합니다.
시기 질투로 망친 대표적 인물이 누굽니까? 사울 왕입니다.
시기 질투 속에 에너지 상태가 최하로 떨어진 겁니다.
또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 보십시오!
밤낮 원망하니까.. 어떤 일이 생깁니까?
에너지 상태가 바닥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너희들 가나안 못 들어간다 그러시잖아요?
너희 같은 에너지 상태의 사람들이 들어가면 가나안 땅 망친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들이 다 죽고 난 다음, 그 다음 세대가 들어가잖아요?
결국 문제는 에너지 상태라는 겁니다.
▲십자가를 묵상하든지, 하나님을 앙망하든지.. 끊임없이 주님을 바라십시오.
“야곱아! 어찌하여 네가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이르기를
내 길은 여호와께서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 하느냐..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사40:27~31)
무슨 얘기지요?
낮은 에너지 상태에 머무르지 말라 그 얘기 아닙니까.
여호와를 앙망하면 어떤 상태가 된다구요?
높은 에너지 상태가 유지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통해 하고 원망하면 낮은 에너지 상태가 된다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보면 그게 다 사라지고 확신 가운데 거한다는 거예요.
피곤에서 능력으로, 무능에서 힘으로, 넘어짐에서 비상함으로 날아오른다는 겁니다.
여러분의 에너지 상태를 점검해 보십시오!
일도 해야 하지만..
평소에 자기 영적인 에너지 상태를 높이는 데 주력하시라는 말씀입니다.
에너지 상태가 바닥에 있으면서 무슨 일을 하겠어요?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가 바로 이것입니다.
프로페셔널은, 항상 자기 영적 컨디션 상태를 최고조로 유지할 줄 압니다.
눅24:49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
영적인 능력이 높아질 때까지 성에 머물라 하십니다.
즉 기도로 말씀으로 충만해 질 때까지 기다리라는 겁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말씀에 순종할 때
우리에게는 영적인 에너지가 생긴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다음에는 뭐든 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면 시작도 쉽다는 겁니다.
▲3. 사도바울에게 시작이 쉬웠던 이유가 뭐냐?
방해를 각오하고 그냥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2차 전도 여행을 시작하기 전 갈등이 생깁니다.
우리 삶 가운데도 하나님의 일 가운데 방해 없는 사역은 없습니다.
방해 없는 사역은, 사실 의미 없는 사역이기 쉽습니다.
왜냐하면 의미가 없으니까.. 마귀도 방해하지 않는 겁니다.
진짜 생명력 있고 중요한 사역이라면 마귀가 가만 두겠어요?
가만 두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게 뭐지요?
방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그냥 시작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방해나 홍역을 한 번 치르고 나면 상심합니다.
그래서 기도원으로 들어가서 식음을 전폐하고.. 그렇게 지내다가 은퇴했다 그럽니다.
태클이 있고 난관이 있더라도 시작하는 게 중요합니다.
하나님 사역할 때 왜 걸리는 게 없겠어요? 왜 마음 상하는 일이 없겠습니까?
그렇다고 일 중단하고 잠수타면 되겠습니까?
문제가 있더라도 불구하고 시작해야지요.
우리가 밤낮 레드 카펫만 밟겠어요?
때로는 상처와 아픔과 조롱과 핍박이 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쉽게 시작하는 사람, 이런 사람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변에 있던 방해라고 생각했던 많은 방해들은 사실은 허상입니다.
마귀가 주는 허상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그냥 시작해 버리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시작하십시오!
그러면 길이 열리고 뚫리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도 악한 마귀들은 우리를 방해하고 있습니다.
어떤 때는 완벽주의로 , 또 어떤 때는 에너지를 갉아먹는 것으로 방해합니다.
시작할 수 있는 길이 뭐겠습니까?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서 에너지 상태를 점검하십시오!
항상 충만한 에너지 상태를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언제든 시작은 쉽습니다.
▲마치는 말
시작을 잘 하는 사람의 특징은,
자기 속에 영적 에너지가 충만하니까.. 시작을 아주 쉽게 생각합니다.
‘며칠 후에 ..’ 그러면서 아무 계기도 없이 시작하잖아요?
제2차전도여행을 시작하는 사도 바울을 기억해 보십시오!
눈에 보이지 않는 그의 내면세계를 보세요!
그렇게 바울처럼 저와 여러분도 에너지 상태가 충만해서
언제 시작해도 쉽게, 즉시 시작할 수 있는 믿음의 종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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