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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12

자유와 규제

LNCK 2012. 3. 7. 16:43

◈자유와 규제              살전5:1~3        12.02.05.설교녹취

 

 

◑규제냐, 자율이냐

 

▲잘 나가다가.. 하루아침에 원점으로 되돌아온 아이슬란드

아이슬란드는 인구가 30만 밖에 안 되는 작은 나라이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IT산업의 발달로 세계적인 급속한 경제성장을 자랑해왔다.

 

국민소득이 빠르게 증가했고, 환경이 깨끗했고,

식량을 자급자족했고, 민주주의가 발달했고, 범죄율이 낮았다.

 

그래서 아이슬란드 국민은, 바야흐로 역사 발전의 끝에 도달했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더 이상 발전할 수 없는.. 발전의 정점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경제나 문명의 진화의 마지막 단계에 도달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2008년에, 갑자기 금융위기가 닥쳤다.

아이슬란드에는 3개의 큰 은행이 있었는데, 이 3개의 은행이

국가 예산의 10배나 되는 큰 빚을 끌어다 쓰고 있었다.

 

경기가 호황일 때는, 빚을 끌어다 쓰는 것이, 잘 하는 것인 줄 알았다.

그런데 금융거품이 꺼지면서, 아이슬란드는 국가부도를 맞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일평생 일해서, 은행에 저축해두었던 돈들이 날아가 버렸다.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그것은 국가적인 재앙이었다.

 

그들은 역사발전의 끝에 도달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금융위기가 쾅 하고 닥치니까,

발전의 정점이 아니라, 밑바닥에서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도달한 것이다.

 

▲규제냐, 자유(또는 자율)이냐

요즘 전 세계적인 화두는,

기업을 규제할 것인가, 아니면 자유를 보장할 것인가? .. 하는 것이다.

 

국내에서도 선거철을 앞두고 떠오르는 주제가 바로 이것이다.

재벌 기업을 규제할 것이냐/말 것이냐.. 하는 것이다.

 

재벌이 재래시장 상권까지 위협하고,

문어발식으로 확장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지금 경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님. 경제를 예를 들어 말씀드리는 것임)

 

그런데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그러하다.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서 경제를 내버려두었더니.. 빈부(또는 선진국과 후진국)의 격차만 벌어지고,

상위 1%는 잘 되는데, 나머지 99%가 고생을 하게 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대기업, 특히 국제금융자본을 규제하자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규제와 자율의 문제.. 경제분야 뿐만 아니라, 모든 사회 분야의 문제이다.

규제할 것이냐, 자유를 줄 것이냐

이것은 윤리적인 문제요, 종교적인 문제이다.

 

자유가 존재하는 것은

자유가 자유되기 위해서는.. 먼저 성숙한 인간이 있어야 한다.

 

누가 간섭하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서 할 것 하고, 안 할 것은 안 하는

책임감 있는 성숙한 인간이 있을 때.. 자유가 자유의 역할을 제대로 한다.

 

반대로 인간이 미성숙할수록, 

규제가 필요하다.

 

학교,  군대, 교도소는.. 규제가 없이는 운영할 수 없는 곳이다.

그래서 잘 하는 자에게 상을 주고, 못 하는 자에게 벌을 주는 규율에 의존한다.

 

학창시절이 괴로운 이유는, 규제가 많기 때문에 그렇다.

두발 규제, 교복 규제, 보충수업 등등

그러나 아직 어리니까, 다들 미성숙하니까, 규제가 필요한 면이 있었다.

 

군대나 교도소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이 미성숙했다고 보고, 각종 규율과 규제로 사회를 강제로 이끌어 간다.

 

당연히 사람은 규제를 싫어한다.

사람은 자유를 목말라한다.

과거 군사독재 시절에 국민이 염원했던 것은 자유였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점점 민주주의가 발달해 왔다.

 

 

자유를 풀어놓으면.. 욕망이 제어되지 않아서.. 결국 망한다.

 

▲잘 나갈 때.. 욕망이 제어되지 못하면.. 결국 망한다.

우리는 인류의 역사를 통해, 더 많은 자유를 향해 나아왔다.

그렇게 되면, 세상이 더 나은 세상이 될 줄 알았다.

 

그래서 경제도 <자유>를 풀어놓았다. 규제하지 않았다.

그러면 다 잘 될 줄 알았는데 (자유가 많으니까)

아이슬란드처럼 쾅 하고 부딪히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것은 욕망을 제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돈을 더 벌겠다는 더 큰 욕망이.. 어느 날, 풍선처럼 팡! 터져버린 날이 오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 나라 경제가 점점 더 나아질 줄로 생각했을 것이다.

역사의 최고 정점을 향해 계속 나아갈 줄로 생각했는데..

마치 타이타닉호가 빙산에 부딪힌 것처럼,

잘 나아가던 국가가 무엇에 쾅 부딪힌 것이다.

 

이 재난의 원인이 무엇인가?

그 원인은, 근본적으로 사람의 끊이지 않는 욕망 때문이었다.

 

국가예산의 10배나 되는 빚을 끌어다가, 흥청망청 썼다.

경제가 호황일 때는, 그게 잘 하는 것 같았다.

집값도 계속 오르고, 주가도 계속 오르고, 돈 벌수 있는 기회는 많은 것 같았다.

 

돈을 빌려서, 투자하고.. 돈을 벌지 못하는 사람은 바보 취급을 받았다.

너도 나도 욕망이라는 이름의 기차에 뛰어들었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거품이 있고, 거품은 언젠가는 터진다’는 사실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욕망 때문이었다.

 

2008년,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금융위기) 사태>가 발생하기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모든 은행, 모든 금융 상품은, 최고의 신용등급을 받았다는 사실을 아시는가?

 

‘이러다가 망한다..’ 라고 말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설령 누가 그렇게 말을 했어도.. 그때는 아무도 그런 말을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너무 잘 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잘 되면.. 그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망한다.

 

▲자유가 많아지면, 욕망이 제어되지 않아서, 결국 망한다.

여러분, 아이슬란드와 같은, 금융위기의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되풀이 되는 인류역사를 볼 수 있다.

 

사람이 점점 더 성숙해져서

이제는 스스로 자기의 앞날을 책임질 수 있는 그런 상태가 될 줄 알았는데,

쾅 하면서 문제가 터지면서

사람은 원점으로 돌아가는 (다시 새 출발 해야 하는) 것을 경험한다.

 

우리가 이제는 성숙해서, 규제하지 않아도

스스로 자기 일을 책임질 수 있는 그런 단계에 이르렀다고 생각했는데,

쾅 하고 문제가 터지니까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사람의 도덕적(신앙적) 문제- 즉 욕망의 문제를 되돌아 볼 수밖에 없게 되었던 것이다.

 

톨스토이의 단편소설에, ‘해가 질 때까지 밟은 땅을 너에게 준다’..

그래서 하루 종일 뛰어다니다가 원점으로 돌아왔지만, 즉시로 죽은 이야기 (다 아시니까 중략)

 

그 사람도.. 잘 나가다가.. 욕망을 절제하지 못해서.. 결국 죽어버렸다.

차라리 잘 나가지 않았더라면.. 그런 불상사도 생기지 않았을 것인데..

 

미국의 경제가 한참 잘 나갈 때, 호황일 때,

월가 (금융, 증권의 본산지, Wall Street)의 금융인 중에

‘누군가가 우리를 규제해 달라’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누가 자기들을 규제해 주지 않으면,

스스로 멈출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욕망, 더 많이 가지려는 이 욕망

누가 외부에서 규제해 주지 않으면,

스스로 멈출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알았던 것이다.

 

‘이러다가 망한다. 이러다가 분명히 망할 터인데..’

누가 규제해 주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스스로 멈출 수 없다는 얘기다.

 

 

신앙의 문제로 돌아가서, 그러면 기독교 신앙에서 자유를 규제해야 하는가?

 

▲이슬람 신앙은 율법적이다. 어떻게 보면 이게 매력을 끈다.

여러분 왜 세계적으로 이슬람이 인기를 누리는지 아시는가?

이슬람의 매력은 철저한 율법에 의한 종교이다.

 

철저히 율법을 요구하고, 율법대로 따를 것을 요구한다.

그래서 하루에 5번씩 메카를 향해 기도하고, 여자는 율법대로 머리에 수건(히잡)을 쓴다.

 

얼마나 단순한가?

이게 불편할 것 같지만, 오히려 편리한 면도 있다.

외형적인 것 몇 가지만 지키면 되니까!

자율적으로 결정하느라, 자기가 고민할 필요가 없다.

 

기독교인은 하루에 기도 한 번도 못 하는 사람도 많은데

이슬람은 하루에 ‘법에 따라’ 5번씩 기도한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기독교보다 더 절도가 있어 보이고,

강제적인 것이 차라리 더 효과적인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이슬람 포교가 잘 되는 원인도 있다고 본다.

사람들은 율법을 싫어하면서도, 매력을 느끼기 때문이다.

 

적어도, 자유롭게 제 멋대로 믿는 것보다는

율법에 의한 강제가.. 신앙심이 더 있는 것처럼, 외적으로 멋있게 보인다.

 

▲그런데 기독교 신앙은.. 자유를 주신다.

하나님은 가급적이면 사람에게 자유를 주고자 하신다.

예수님을 보내서, 사람이 율법이 아닌, 은혜로 살도록 하셨다.

그 결과로, 인류는 율법의 멍에가 아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이끌려 살도록 하셨다.

 

더 이상 이래라, 저래라 하는 율법 조항의 요구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이끌려 살게 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인격적 교제, 동행, 동거하면서

자율적으로 사는 것이다.

 

성령이 우리 마음에 계셔서,

우리 마음에 성령이 율법이 되어서

외부의 규제가 아닌, 우리 안에 성령의 감동으로

 

우리가 스스로 자율적으로, 자발적으로, 자기의 선택으로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은혜에 이끌려

선한 일을 행하고, 선을 선택하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요, 복음의 근간이다.

 

그래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고 하셨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이 이 자유함을 감당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자유를 주었더니, 자유를 남용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유를 주셨는데,

사람이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하나님을 더 이상 공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유를 주었더니,

그 자유로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욕심을 이루기 위한 기회를 만들려고 한다.

 

그래서 행실이 더 나빠지고, 무책임해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자유를 주신, 하나님의 고민이다.

 

그렇다고 율법으로 되돌아 갈 것인가?

결코 그럴 수는 없다.

 

만일 율법으로 되돌아가게 되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부인하는 것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무효로 만드는 것이 되어버린다.

 

그러기 때문에 지금 전세계적으로 경제의 규제냐, 자유냐 하는 논쟁은

이건 경제적인 논쟁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고민이 되고 있다...

 

 

◑여기에 대한 성경의 해답은 무엇인가?

 

▲1.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번복하지 않으신다.

사람은 신실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신실하시다.

사람은 거짓되지만, 하나님은 참되시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

 

율법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어불성설이다.(말이 안 된다.)

그것은 거짓선지자요, 이단의 가르침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시작하신 선한 일(구원)을

그 분이 이루실 줄을 우리는 믿어야 한다.

최후 승리를 믿어야 한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말씀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시작하신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가

반드시 성공할 줄/이루어질 줄 믿어야 한다. (내 구원 + 전체 교회의 구원)

 

▲2. 다만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을 더욱 필요로 한다.

경제가 더 발전하고, 과학과 기술이 더 발전한다고 해서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문명이 발달하고, 의식수준이 발달한다고 해서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한다.

사람이 예수를 믿었다고 천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여전히 인간이다. 인간을 신뢰할 수 없다.

인간을 신뢰하는 것은, 생선장수가 고양이를 신뢰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든 지금이든

제3세계든, 선진국이든

인간은 여전히 예수님(과 동행, 교제, 내주)을 필요로 하고,

하나님이 필요하지 않는 시대는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우리가 발전했다, 이루었다’ 라고 자랑하는 순간에

사람은 쾅 하고 타락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본문 3절에,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 살전5:3

 

언제 멸망의 고통이 오는가?

사람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이제는 잘 살게 되었다

‘이제는 이루었다’ 라고 안심할 때,

그때 별안간 멸망의 고통이 온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서는, 사람은 평안하지도 않고, 안전하지도 않다.  

 

▲3. 그럼 자유를 줘 놓고.. 희망적 미래를 기대할 수 있는가?

이것은 답이 2가지다.

 

자유를 주었으니.. 미래가 부정적으로 변할 것이라는 답과

자유를 주었지만.. 미래가 낙관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①미래에 대한 부정적 입장

문명은 더 발달하고, 사회는 더 진보적으로 변하는데,

성경은, 종말을 말할 때마다.. 일반적으로 부정적으로, 어둡게 본다.

천지격변이 일어나고, 일월성신의 변화로.. 결국 세상은 망한다는 것이다.

 

소설이든, 영화든.. 미래에 대한 작품을 살펴보면, 

하나같이 미래를 어둡게 묘사하고 있다.

 

<타임머신>이란 소설에,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에 날아갔더니

미래가 아주 어둡고 무서운 사회가 되어있다고 묘사한다.

 

소설 <1984>를 보더라도, 미래는 '빅 브라더'가 모든 사회를 감시하는

그런 무서운 사회라고 묘사하고 있고

 

영화 <터미네이터>도, 미래는 기계가 인간을 다스리는 시대가 되었다고 묘사한다.

다른 영화도 마찬가지다. 혜성이 지구와 충돌해서, 지구가 멸망하는 것으로 그린다.

 

이렇게 미래를 그리는 작품들은, 동일하게 어둡고 두려운 것으로 그리고 있다.

그 이유는 아마, 서구사회가 기독교 문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게 때문에

<기독교 종말론>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러면 왜 기독교 종말론은 어두운가?

비관론은 아니다.

그 자체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인간의 문제를 말하는 것이다.

 

인간의 문제(죄와 욕망)가 해결되지 않는 상황에서,

자유만을 만끽했을 때,

아무리 과학이 발달하고, 문명이 발전하고,

아무리 의식수준이 발달하더라도

 

인간의 근본적인 죄와 욕망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그 모든 발전이 사람에게 복이 되지 않고,

오히려 더 큰 해를 끼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정말 소설 <1984>처럼,

국가가 개인의 자유를 통제하고, 말살하는,

그런 위기도 실제로 얼마든지 올 수 있을 것이다. 아마 온다고 본다.

 

‘자유’를 주었더니.. 사회가 통제가 안 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유’를 규제하는 쪽으로, 사회가 점점 전환되는 것이다.

     ※ <테러와의 전쟁> 이후에, 더욱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②(자유를 주었지만) 미래에 대한 긍정적 전망

그러므로 우리가 소망하는 것은, 사람의 나라가 아니고, 하나님의 나라이다.

하나님의 나라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이다. 

 

인간의 미래는, 하나님께 있다.

 

인간에게 죄와 욕망이 있지만,

그것을 주님의 통치를 받아.. 스스로 (주님의 다스림으로써) 제어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죄와 욕망의 자유가 아니라!

 

믿음의 삶이 바로 그것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김영준 목사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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