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계시는 듯 계시는 부활의 주님 마28:6~7 스크랩, 정리
◑안 계시는 듯.. 계시는 주님 1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마28:6
주님의 누우셨던 곳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형제들과 함께 둘러앉아 이런 저런 농담 끝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기독교 단체의 책임자로서, 또는 양육을 책임지는 지도자로서
어떤 성향의 인물이 좋겠는가.. 하는 내용을 함께 토론해 보았습니다.
결론은 이랬습니다.
-책임 맡은 사람이 너무 똑똑해도 안 된다.
-너무 잘생겨도 안 된다. 너무 완벽해서도 안 된다.
-너무 책임감이 강해도 안 된다.
-가끔씩 회의나 업무 차 자리를 비워야지, 너무 공동체에만 붙어있어도 안 된다.
-그 대신에 약간 부족한 구석이 있으면 좋다. 가끔씩 실수도 하는 사람이면 좋겠다.
-이왕이면 출장도 자주하면 더 좋겠다.
▶요즘 리더십에 대한 연구가 활발합니다.
여러 리더십 가운데 ‘없음의 리더십’이라고 들어보셨나요? 혹은 ‘부재(不在)’의 리더십!
무슨 말인가 의아해 하실 텐데,
리더가 모든 권한이나 결정권을 다 자신의 손에 넣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리더십과는 정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대표나 원장이 공동체 안에 ‘있는 듯 없는 듯’ 하는 리더십입니다.
때로는 없는 것 같지만 있고, 있는 것 같지만 없고... 좀 알쏭달쏭한 리더십입니다.
이런 경우, 각자가 자기 역할을 100% 발휘해서,
오히려 공동체가 더 원활하게 잘 돌아가게 됩니다.
▶바꿔 말하면 가정이나 공동체의 중심에 ‘텅 빈 공간’이 있어야 합입니다.
대표나 원장이나 가장이 중심이 아니라,
‘텅 빈 공간’이 가정이나 공동체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공동체 구성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공동체 작은 일에 까지 일일이 개입하는 ‘과도한 현존現存’보다
구성원들이 자발적으로 활발히 움직이도록,
또 하나님께서 활발히 역사하시도록 한걸음 뒤로 물러서는 리더십입니다.
만약 제3의 지대, 여유로운 공간이 조금도 없게 될 때,
그 공동체의 삶은 팍팍하기만 할 것입니다.
스트레스가 가중되면서, 업무 능률도 함께 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가정공동체가, 우리 신앙공동체가,
원활하게 돌아가지 않고, 그 안에서의 삶이 힘겹기만 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서로가 서로를 너무 타이트하게, 밀착해서, 밀어붙이는 방식으로
일을 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사실 현대의 ‘행정의 달인’ 또는 CEO는
그런 식으로 ‘관리’를 잘 해야.. 결과가 나타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결과’는
얼마 후에 부메랑으로 되돌아올 것입니다.
모두가 스트레스 받고 나가버리든지, 아니면 복지부동으로 일관할 것이니까요.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를 밀착해서 동행하신다면..
1년 365일 24시간
나와 함께 식사하시고, 나와 함께 사역하시고,
나와 함께 TV 보시고, 기숙사 방에서 나와 함께 주무신다면,
그게 꼭 좋기만 할까요?
아마 우리 모두는 오히려 정신적으로 피폐해져서,
사역과 섬김의 길을 중도포기 할 사람이 속출할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은
‘안 계시는 듯.. 계시는 주님’이십니다.
늘 우리 곁에 계시지만.. ‘안 계시듯 계십니다.’
우리 가정과 공동체가 행복하려면..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시아버지’께서, 외출도 안 가시고, 하루 종일 집에만 계신다면,
그거 며느리 죽어나는 일이지 않습니까!
(마28:6의 적용이 좀 그렇습니다만) 시부모님 방이 좀 텅 비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안 계시는 듯.. 계시는 주님 2
요 몇 년 사이 참으로 큰 스승들께서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이렇게 한 시대가 가는가 봅니다.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우왕좌왕 갈팡질팡하는 우리들에게
정확하게 이정표를 제시해주시던 분들,
지난 시대 우리들의 빈약한 정신세계를 그나마 정화시켜주시던 분들,
장기려 장로님, 또한 존경하는 목사님들,
그런데 이런 분들을 머릿속에 떠올릴 때 마다
참으로 특별한 느낌 한 가지가 마음에 남습니다.
분명 그분들은 더 이상 이 세상에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들 눈앞에서 장례를 치렀고, 땅에 묻혔습니다.
분명히 그분들은 더 이상 여기, 이 세상에, 우리들 눈앞에 안계십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분들은 분명히 우리들 가운데 살아계십니다.
우리 마음 안에, 우리 정신 안에, 우리 영성 안에, 우리의 사고 안에
생생히 살아 숨 쉬고 계십니다.
그 분들이 여전히 ‘안 계시듯, 살아계시는 것입니다.’
그분들이 살아 생 전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그 절절한 사랑, 그 따뜻한 인간미,
그 소박함, 그 인자로움,
가난한 이웃들을 향한 측은지심은 아직도 생생하게 제 기억 속에 남아있습니다.
▶저는 이런 현상 앞에 어렴풋하게나마 부활이 무엇인지를 가늠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경축한다는 것,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 과연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분의 자취가 우리 안에 남아있다는 것이 아닐까요?
그분께서 남겨주셨던 사랑의 삶을.. 우리 생활 안에 재현시키는 일이 아닐까요?
그분께서 온 몸으로 보여주셨던 섬김과 봉사의 삶이..
내 삶 안에서 되풀이되는 일이 아닐까요?
◑일상 속에서 부활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마26:7
무덤에 묻혀 있을 예수님을 만나러 간 여인들에게
예수님은 “갈릴리로 가면 나를 만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갈릴리는 어떤 곳인가요?
예루살렘에서 갈릴리까지는, 걸어서 2~3일 길인데,
예루살렘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은, (천사를 통해서)
왜 힘들게 멀리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만나자고 하시는가요?
▶갈릴리..
그곳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날 때까지 생업에 종사하며 살던 곳이요,
예수님을 처음으로 만난 곳입니다.
처음 뵌 예수님의 말씀에, 두 말 없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의 제자로 나섰던 곳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명절에 가끔씩 예루살렘에 올라가기도 하셨지만,
공생애 대부분은, 갈릴리에서 보내셨습니다.
※참고로, 요21장에, 제자들이 갈릴리에서 고기잡이 하다가, 예수님을 만나는데,
그건 그들이 사도직을 버리고, 과거의 직업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고,
그들은 평소에도,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여가 시간에는 그렇게 물고기를 잡았을 것입니다.
배가 고프면.. 먹어야 하니까. 고기잡이는 그들의 일상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더 이상 십자가 위에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 삶의 현장 깊숙한 곳으로 다가오셨습니다.
갈릴리는 제자들의 삶의 현장이었습니다.
유원지나 휴양지가 아니라, 생명력 넘치는 삶의 현장인 것입니다.
오늘날 부활의 사건은, (성도의 매일이 부활인데)
일상의 현장에서, 삶의 현장에서..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내가 고기잡이 하는 그곳에서
내가 식사하는 그곳에서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갈릴리에서 나와 만나자’고 하신 이유가 아닐까요?
◑인격적 부활
여인들과 남자들의 부활 체험을 비교해 보면,
여인들은 ‘인격적 부활’을 체험했고, 남자들은 그렇지 못했는데..
마28:9~15에는
두 대조되는 무리가 등장합니다.
-한 무리는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이고,
-다른 무리는 경비대원들과 원로들입니다.
이것은 마치 영화나 연극에서
주인공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반대편을 더 대조되게 등장시키는 것과 같고,
미술작품에서
중심인물이나 주제를 더 돋보이게 하기 위해
다른 부분을 어둡게 처리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을 때
여인네들은 부활하신 분의 사랑을 만나는데
남정네들은 부활한 사건을 만납니다.
여인네들에게는
인격적인 만남이 이루어지는데
남정네들에게는
인격적인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고
당황스러운 사건,
해결해야 할 사건이 그들 앞에 있을 뿐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부활을 사건으로 만나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들에게 인사말을 건네시고
여인네들은 예수님께 다가가고
그분의 발을 붙잡는 인격적인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붙잡는 것을
허용치 않는 것으로 묘사하는데 비해
마태복음은 예수께서 붙잡는 것을 허용하시는 것으로 묘사함으로
이런 인격적 만남을 더욱 분명히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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