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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을 넘어선 사랑

LNCK 2012. 4. 24. 09:51

◈배신을 넘어선 사랑        막14:18~21          12.02.25.설교일부녹취



▲도입/ 배신의 상처

사람이 인간관계로 겪는 큰 상처는.. 배신의 상처이다.

사랑하고 믿었던 사람의 배신 뒤에는, 깊은 분노와 고통이 찾아온다.

 

많은 사람들이 이 배신의 상처를 치유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역사적으로 알려진 유명한 배신들이 있다.

로마의 시저도, 친자식처럼 여겼던 부루투스에게 암살당했고,

다윗 왕도 자신의 아들 압살롬에 의해 배신을 당했고,

참모인 아히도벨에 의해서 배신을 당했다.


역사적으로 가장 유명하고 악한 배신은, 본문의 가룟 유다의 배신이다.

예수님께 있어서, 육체적 고통보다도 더 큰 고통은

바로 사랑하는 제자의 배신이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손과 발에 못이 박혔지만, 사실 손과 발에만 못이 박힌 것이 아니라,

그 가슴에도 못이 박히셨다. 배신이야 말로, 가슴에 못을 박는 일이기 때문이다.


가룟유다는, 공동체의 재정까지 맡길 정도로, 믿고 사랑하던 그 제자이었는데,

그 신뢰받던 제자의 배신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배신하는 방식도 얼마나 가슴에 못을 박는 방식이었는지 모른다.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하는 신호로 택한 것은, 자신의 ‘입맞춤’이었다.

예수님을 신뢰하고 사랑하는 표시인 ‘입맞춤’을 이용해서 예수님을 배신하는 것은..

가장 사랑과 존중의 표시인 입맞춤을, 배신의 신호로 바꿔버렸던 것이다.


그 배신의 대가도 참으로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은 삼십. 예수님을 돈과 바꾼 것이다. 그 어떤 위대한 이념이나 비전도 아니었다.


결국 자신이 후회함으로 팽개칠 돈, 그 돈 몇 푼으로 사랑하는

예수님의 가슴에 못을 박았던 것이다.


▲여러 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물론 베드로도 예수님을 부인하고, 다른 제자들도 도망감으로써 예수님을 배신했지만,

그러나 베드로의 배신과 가룟유다의 배신은 큰 차이가 있다.


베드로의 배신은 즉흥적, 충동적이었지만,

그러나 가룟유다의 배신은 계획적, 의도적인 배신이었다.


베드로에게도 경고하셨다. 한 번 경고하셨지만,

가룟유다에게는 복음서 전체를 보면, 여러 번 기회를 주시고, 기다려 주시고,

경고하셨다. 


베드로는 결국 회개하고 돌아와서 주님을 전파하는 사도가 되었지만,

그러나 가룟유다는 후회는 했지만, 진정한 회개는 하지 않았다.

그 결과 그는 자살로 생을 마무리하고 말았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만찬을 나누시는 중에,

이 가룟유다의 배신을 이렇게 예고하셨다.


막14:17~18, 저물매 그 열둘을 데리시고 가서

다 앉아 먹을 때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 하신대

 

이 배반에 대한 예고가 없었다면,

예수님은 예기치 않은 제자의 배반으로, 뜻밖의 죽음을 맞이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운명의 희생자가 아니셨다.

뜻밖의 배신을 통해서 죽임당한 분이 아니시다.

예수님은 운명의 희생자가 아니라, 운명의 주관자이시다.


예수님은 가룟유다의 배신을 미리 다 아셨다.

그리고 그의 돌이킴을 기다려주시고, 경고하시고, 돌아오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고통스러워 하셨다. 요한복음의 병행구절에 의하면,

‘몹시 괴로워하며 말씀하셨다’ 라고 되어있다. 요13:21


‘나와 함께 먹는 자 중에 나를 팔리라..’ 그렇게 아무렇게나 쉽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몹시 괴로워하심 가운데, 예수님의 가슴은 찢어질 정도로 아프셨던 것이다.


이 말씀은 다윗에 의하여 메시야가 가까운 친구에 의하여

배신당할 것을 예언하는 시41:9절이 이루어진 것이다.

‘나의 신뢰하는바 내 떡을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시41:9


다윗이 함께 식사하고, 함께 삶을 나누었던 신하 아히도벨에 의해서 배신당한 후에 쓴 고백이다.

이것은 장차 다윗의 후손이신 메시야도 가까운 친구, 빵을 함께 먹던 사람에게

배신당할 것을 예고하신 것이다.


‘함께 빵을 먹는 사람에 의해 배신당한다’.. 이것은 깊이 묵상해야 될 내용이다.

예수님을 가까이 하는 자 중에 배신자가 있을 것이다.


함께 식탁에서 빵을 같이 찍어 먹을 정도로 가까운 자 중에,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를 체험한 자 중에 예수님을 배반할 자가 있을 것이다. ..

이것은 우리에게 큰 경고를 준다.


예수님께 가까이 갔다고.. 내가 방심해서는 안 된다.

내가 교회 생활에 익숙해 졌다고.. 방심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가까이 하고, 함께 먹던 자 중에도 배반자가 나왔기 때문이다.


우리도 언제든지 이런 배신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때로는 탐욕과 이기심 때문에, 혹은 명예와 감투 때문에,

초신자는 초신자대로, 오래된 신자는 오래된 신자대로

어쩌면 목회자처럼 예수님을 가까이 섬긴다는 사람 중에서도

배신자는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


교회의 다툼과 분열 속에 불신자가 있는가?

타종교인이 교회를 어렵게 하는가? 혹시 있다고 해도 그 파장은 크지 않다.


그런데 실제로 교회(그리스도의 몸, 즉 그리스도에 대한 배신)의

다툼과 분열을 일으키는 장본인은, 교회를 다 안다고 하는 사람이다.


너무나 익숙해져서, 어쩌면 예수님과 함께 떡을 찍어 먹던 자,

그 가운데서 배신자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내가 예수님을 배신할 수 있다는 것에서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특이한 것은, 유다의 배반을 예고하셨지만, 끝까지 그 이름을 말씀하지 않으셨다.

 

‘나와 함께 먹고 있는 자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막14:18

‘나와 함께 한 그릇에 빵을 찍어 먹는 사람이 나를 팔리라’ :20


예수님은 왜 유다의 이름을 말씀하지 않으셨을까?

1) 배신자 유다에게 기회를 주시고, 보호해 주시는 것이다.

만약 예수님께서 유다를 가르치시거나, 혹은 이름을 거명하시면서

이 가룟유다가 나를 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면,

바로 그 순간, 가룟유다는 베드로에 의해서 머리채가 끌려 나갔을 것이다.


이름을 말씀하지 않으신 것, 회개의 기회를 주신 것이다.

‘내가 다 안다. 너 그러면 안 된다. 네게 화가 임하는 것이다.’ 간접적으로 말씀하심으로써,

유다가 돌아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시는 예수님의 인격적인 사랑을..

우리가 알 수 있다.


2)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표현을 보면,

‘나와 함께 먹고 있는 자’가 나를 팔리라  막14:18

‘지금 나와 함께 한 그릇에 손을 넣는 자(빵을 찍어먹고 있는 자)’ :20

그렇다면 유다를 포함한 모든 제자가, 여기에 해당된다.

누구인지 정확히 잘 모른다.


가룟유다의 이름을 거명하지 않은 두 번째 이유는,

함께 식사하고 있는 나머지 11명의 제자들에게도 경계심을 주신 것이다.


12명 중에 한 사람.. 단지 가룟유다만 아니라, 나머지 모든 사람들도,

동일한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경계해주신 것이다.

실제로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근심과 슬픔에 잠겼다.


막14:19, ‘그들이 근심하며 하나씩 하나씩 나는 아니지요 하고 말하기 시작하니’ 

바로 예수님께서 이런 반응을 기대하신 것이라고 본다.


예수님을 배반하고는 견딜 수 없는 마음, 근심하는 마음,

혹시 나는 아닐까 하는 경계심,

‘설마 저는 아니지요?’ 라는 근심, 슬픔, 염려..

바로 이런 근심이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


믿음의 생활은 기쁨과 감사와 평안의 생활이지만,

그러나 우리 마음 깊은 곳에는, 바로 이런 근심이 있어야 한다.

‘내가 지금 예수님을 팔아먹는 자는 아닌가? 예수님을 배신하는 배신자는 아닌가?’

이런 근심이 있어야 한다.


손양원 목사님께서 신사참배를 거부할 때

1938년 장로교총회에서 신사참배는 단지 예의에 불과한 것이므로,

우상숭배가 아니라고 했고,

그래서 지도자들이 솔선해서 신사참배를 하러 가기도 했다.


그러나 그 때, 주기철, 손양원, 한상동 목사님 및 일부 성도들은

‘설마 저는 아니지요?’하는 심정으로..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반대하다가.. 심한 옥고를 치렀다.


바로 우리에게 이러한 근심, 이러한 아픔, 이러한 슬픔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고후7: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우리에게도 이러한 근심이 필요한 것이다.

언제든 우리가 예수님을 배신할 수도 있는 위험이 있는 사람인 것을 인정하고,

자신 스스로를 의심할 수 있어야 한다.


교만한 자는.. 자신을 의심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의심하고, 성경을 의심하고, 다른 사람을 의심하고, 세상을 의심하지만

정작 자기 자신은 의심하지 않는다. 자기 스스로 너무 확신에 가득 차 있다.


자만심 conceit은 언제나 ‘넘어짐’ 전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자만하는 자/ 자기를 의심하지 않는 자/자기를 돌아보지 않는 자/

자기를 점검하지 않는 자의 다음 단계는.. ‘넘어짐’이요, ‘배신’인 것이다.


진정한 겸손은, 자신에 대한 의심부터 시작한다.

혹시 나는 아닌가? 나는 아닌가?


성경을 읽을 때, 창문으로만 읽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성경은 일차적으로 거울로 읽어야 한다.

이 성경을 보면서, 나를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구원 받은 사람은 겸손히 자신부터 의심한다.

‘혹시 내가 유다처럼 예수님을 배신하는 자가 되면 어떻게 하나?’

하는 이런 근심이 있는 신자가.. 정상이다.


놀라운 것은 유다가 ‘나는 아니겠지요?’하고 물었다는 점이다.

마26:25 ‘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가로되 랍비여 내니이까?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하시니라.’


얼마나 뻔뻔스럽고, 가증스러운가?

가룟유다가 지금 배반할 계획을 가진 것을, 예수님이 아셨는데,

유다가 이렇게 질문했다. 예수님 저는 아니겠지요?


우리는 어떤 대답을 기대하는가? 

‘바로 너다!’
예수님이 그렇게 확 놀라게 해 주셨으면, 얼마나 시원했을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반응하지 않으셨다.

‘네가 말했다.’

예수님은 끝까지 가룟유다의 책임 있는 행동을 원하신 것일까?

그런 예수님의 인격적인/사랑의 반응인 것이다.


막14:20, 그들에게 이르시되 열둘 중의 하나 곧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니라


요한복음에 보면, 이런 우회적인 예수님의 경고와 기다림에도 불구하고,

가룟유다에겐 변화가 없었다.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빵조각을 주셨다.

 

요13:2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찍으셔다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주시니..


유대인의 관습에, 식사 중에 그 집 주인이,

빵 한 조각을 찍어서 주는 사람은, 바로 그 식탁의 주인공이나 VIP이다.

가장 최고의 존중의 표시인 것이다.


유다는, 자신의 존경했던 스승인 예수님을 입맞춤으로 배신했지만,

예수님은 자신을 배신할 자에게 최고의 사랑의 표현을 끝까지 해 주신 것이다.


   이러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변화되지 않자,

   직접적으로 유다에게 화가 있을 것을 예언하셨는데...


막14:21,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어떤 사람들은 유다를 동정하지만, 위 구절에 의하면 옳지 않다.

아무리 유다가 성경에 ‘가까운 자 중에 배신할 것’이라는 예언이 있다고 해서,

유다가 그 예언을 성취를 이룬 공로자(희생자)가 될 수 있을까?


어떤 죄든지, 어쩔 수 없는 죄는 없다. 그것은 가룟유다의 선택이었다.

하나님이 배반하라고 지시한 것도 아니요, 예수님이 부탁한 것도 아니다.

자신의 탐욕에 이끌려서, 스스로 그 죄를 선택한 것이다.


가룟유다가 배신하지 않아도,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셨다.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여러분, 자기 죄에 대한 변명은, 하나님께 하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어쩔 수 없는 죄란 없기 때문이다.

모든 죄는 나의 인격적인 선택에 의해 이뤄지는 것이므로,

그 죄에 대한 책임을 자신에게 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호소한다. 그러나 강제적이지 않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경고하신다. 그러나 강제적이지 않다.

예수님은 강제적으로 말리지 않으셨다. 제지하지 않으셨다.

우리의 그 인격적인 선택을.. 하나님은 존중하신다.


    예수님은 유다의 배신에도 불구하고, 감사하셨다.

    그리고 유월절 식사를 성찬으로 제정해 주시는 장면이, 본문의 아래에 계속해서 나온다.    

 

    (다음 호에 계속) ☞ 배신을 넘어서는 성찬

 


▲적용 및 묵상

1. 배신자를 대하는 주님의 자세에 대해서..

끝까지 사랑과 인격으로 대하셨던 예수님을.. 묵상해 봅시다.

나를 향해 베풀어주신, 그 사랑과 은혜에 감사드립시다.

 

2. 그리고 그 은혜와 용서를 받은 나는

다른 사람의 배신에 대해 어떠한가요?

일례로, 배우자가 배신적인 태도를 보일 때,

나는 '예수님처럼' 반응하고 있습니까?

 

언제든지 예수님의 방식이 진리요.. 내가 사는 길입니다.

배우자가 배신할 때,

덩달아 망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자기도 똑같은 방식으로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3
. 나도 언제든지 가룟유다가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어떤 탐욕에 이끌리고,

-내가 ‘나는 아니야!’ 하며 자만할 때

-나를 격동시키는 마귀의 유혹에 굴복할 때..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내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언제나 사랑과 인격적으로

유다가 돌이키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런 주님의 인격적 사랑에.. 베드로처럼 돌이킬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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