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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주님을 만나려면

LNCK 2012. 4. 24. 20:42

◈부활의 주님을 만나려면        눅24:13~35         12.04.08.설교스크랩, 축약 

 

 

 

◑서론

 

▲부활은.. 끝난 경기라서.. 느긋합니다.

여러분들 모두 운동 경기를, 녹화중계로 보신 적이 있으실 겁니다.

끝을 다 알고 있어서, 긴장감은 없더라도, 좋은 점도 있습니다.


내가 응원하는 팀이 아무리 큰 위기를 맞더라도

거기에 흔들리지 않고.. 느긋하게 볼 수 있지요.


그런 것처럼.. 가끔 극을 만드는 연출자들도..

관객들에게 극 중간에 미리 결말을 알려주고.. 극을 끌어갈 때가 있습니다.


내용 자체보다.. 등장인물의 캐릭터나, 사건의 과정에 더 무게를 둘 때..

그런 기법을 쓰지요.


그런 경우, 극중에 위기가 아무리 고조되더라도

관객들은 편안히 대할 수가 있습니다.       


배우들이 울고불고 해도.. 관객들은 다 이해하고,

뜻밖의 상황이 일어나도.. 그 이유를 다 알지요.


재미가 없지 않겠느냐 하겠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이

바로 이런 기법의 매력입니다.


욥기를 읽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욥 자신이나 그의 아내나 친구들 모두 다,

하루아침에 모든 난리가 벌어진 이유를 잘 모릅니다.


본인들은 괴로워하고, 갈등하고, 논쟁하고, 암울해 하지만,

우리들은 욥기의 결말을 알기 때문에.. 모든 게 이해가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욥이 아무리 고난을 당해도.. 결말을 아는 우리는 초조하지 않고, 느긋합니다.


본문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주인공 두 사람은.. 낙담과 한숨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나 관객인 우리는, 결말을 알기 때문에, 전혀 낙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식상하지 않으려면,

최대한 관객인 내가, 두 주인공과 같은 입장으로, 감정이입을 해야 합니다.

(한 번 해 보실까요?)


서쪽으로 뉘엿뉘엿 지는 해를 따라

두 사람은 최근에 자기들에게 일어난 일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어깨는 축 쳐져 있었고.. 발걸음은 고단했으며.. 얼굴엔 핏기가 없었습니다.

한 때는 희망으로 가득 찼었지만.. 지금은 낙담과 한숨뿐인 겁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님이 분명히 이 세상을 구원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로마를 몰아내고, 유대 땅에 지상 천국을 세우실 것을 믿었습니다.


뭐 지난 3년 동안 그 분이 하신 일을 보면 그건 문제도 아닌 거예요. 

그 분은 엄청났습니다.


하나님이신 게 틀림없었습니다.

그랬던 분인데.. 기대와는 달리 어이없게도 맥없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한다고 말씀하셨지만.. 그것은 믿지 못할 희망이었지요.

    예수님이 돌아가시자.. 두 사람은 아무 소망이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고, 발걸음을 옮겨가는 중입니다...


여러분도 알고 계시지만.. 성경은 언제나 당당합니다.

뭔가 꺼림칙한 게 있어서.. 말씀 앞에 설명을 붙이거나,

또는 뒤에 사족을 다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창세기 1:1은 처음 성경을 여는 말씀인데도

밑도 끝도 없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냥 말씀을 선포하지.. 구구하게 설명이나 증명을 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부활에 관해서도 그런 태도는 똑같습니다.

한 마디로 복음서 기자들은 이 부활 이야기를

도무지 변증하려는 태도로 적질 않았습니다.


후세 사람들이 그렇게 걸고넘어질 것을 예견했다면

앞뒤를 좀 더 잘 꿰맞췄어야 했을 것 같은데,

어디를 봐도 그런 기색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다만 각 복음서마다 예기치 않은 일이 일어난 데 대한

목격자들의 충격을 그대로 담고 있을 뿐입니다.


이유가 뭐겠습니까?

자신감 때문입니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밝히는 것 외에, 무슨 증명이 더 필요하겠냐는 것이지요. 

누가 뭐라든 천지 창조나 부활은

더 이상의 증명이나 사실 확인도 필요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사실을 받아들이든 말든 그것은 독자 자신의 문제라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부터입니다.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두 제자가 가고 있는 방향은, 그리 바람직스럽지 못하다는 겁니다.


뭔가 실패해서 고향을 찾는 것을 ‘낙향’이라고 하는데

지금 이 사람들이 꼭 그런 모습입니다.


이들의 발걸음을 보면, 거기엔 쓸쓸함과 실망과 슬픔 뿐

그 외에 희망의 요소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이미 부활하셨는데도 말입니다.


이 두 제자의 모습에서, 나의 모습이 동일시됩니다.

이미 예수님은 부활하셨지만.. 양 어깨에 힘이 쭈욱 빠져서.. 현실을 사는 내 모습 말입니다.


사실은, 부활하신 주님은, 내내 그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비록 내가 느끼지 못하더라도, 혼자 걷고 있는 것 같아도,

아직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우리는 그 주님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부활의 주님이 내내 함께 계셨는데도,

두 제자는.. 부활의 주님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들의 눈이 떠지고

어떻게 이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실제 볼 수 있었지요?   ←문제 제기


    그 대답이,

    두 제자와 같은 모습을 살아가는 오늘날 우리들에게

    어떤 해답을 줄 것입니다.



◑1. 말씀을 들으므로.. 부활의 주님을 만납니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32


그렇습니다!

지금 내 앞에 예수님은 보이지 않지만,

내가 언제 예수를 만났는가 돌이켜 봤더니

말씀이 내 가슴을 때리고, 그 말씀이 내 영혼을 뜨겁게 달궜을 때였던 겁니다.


오늘 제자들 역시 부활의 주님을 느낀 때는 직접 만났던 때부터가 아니라

그 이전, 길에서 말씀을 풀어주실 때부터였던 것입니다.


본문의 두 제자가 아쉬워했던 것은 어떤 점이었을까요?

눈이 밝아져서 비로소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 본 순간

예수님은 보이지 않으셨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늘 갖고 있는 의문도 바로 그것입니다.

왜 부활하신 주님은, 좀 더 우리와 함께 오랫동안 계셔주시지 않는 걸까요?

왜 그 분은 나에게 자신의 임재를 좀 더 자주 느끼도록, 확실한 증표를 보여주시지 않는 걸까요?


실제로 부활 후의 주님의 행적은 참으로 묘연합니다.

좀 더 적극적으로 사람들에게 부활의 모습을 보여주셨으면 좋을 뻔 했는데,

본문의 경우처럼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볼라치면.. 홀연히 사라지셨습니다.


맘 같아서는 일진광풍을 몰고, 산헤드린이나 빌라도 앞에 떡 나타나셨으면

속 시원했을 텐데, 그들에게는 아예 보여주기조차 하지 않으셨습니다.


여자들에게나 제자들에게까지도.. 잠깐 잠깐 보이실 뿐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는지 하는 게.. 부활을 둘러 싼 최고의 의문점인 것입니다.


돌려 말하지 않고 직접 말씀 드린다면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은 도마에게 하신 말씀이 그 답이었습니다.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않고 (성경말씀을)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요20:29


어차피 주님은 승천하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육체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실 수 없습니다.

그 분은 갈릴리나 유대 땅에 머물러 계실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 분은 온 세계에 복음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실제로 보고 믿으려는 사람은

계속해서 자기 앞에 예수님이 보여야만.. 믿으려 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의 믿음은.. 예수님이 보이지 않으면,

얼마 안가 차디차게 식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으로 믿어야 했습니다.

보지 않고도.. 믿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 분이 돌아가신 것은 아닙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다시 나타나시지 않는다고 해서.. 부활이 부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제는 보다 많은 사람이 구원받아야 했습니다.

땅 끝까지 당신의 이름을 알려야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눈앞에 보이지 않더라도

그 분의 살아계심과 부활을 믿게 해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이 자주 보여주시지 않는 것은, 바로 그 연습을 시키기 위함이셨습니다.

육체로 보이는 것은 잠깐이지만.. (말씀으로, 인격적으로) 마음에 모시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즉 그 분은 우리와 영원히 함께 있기 위해서.. 육체를 감추신 것이었습니다.


지금 그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들 각자의 마음 속에 와 계십니다.

누구십니까? 바로 성령님의 모습으로 와 계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성령님은 다른 분이 아닙니다.

그 분은 오늘도 우리와 함께 계시고, 앞으로도 영원히 함께 하실 것입니다.


이제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 앞에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부활의 주님은, 우리가 길 위에 있을 때나,

말씀을 묵상할 때나, 식사를 할 때나

또는 혹 잘못된 길을 갈 때라도..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 사실을 믿고, 또 부활의 주님을 믿으신다면,

이 시간 실망과 좌절을 딛고 일어서시기 바랍니다.

 

    뭐니뭐니해도 믿음은 결국 들음에서 난다는 주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하지만 혼자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그 말씀이 무슨 뜻인가 씨름하는 것보다

    최고 최선의 방법은 없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영혼이 메말라 있다면,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말씀이 없어서입니다.

    말씀을 사랑할 때 주님은 자신을 우리에게 보이실 것이고,

    말씀을 들을 때

    우리는 엠마오 도상의 제자처럼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것입니다.

 

    어렵지도 않고 복잡하지도 않은 이 주님 만남의 방법이

    오늘을 기해 불같이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2. 함께 떡을 뗄 때.. 부활의 주님을 만납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두 번째 방법은 너무나 쉽습니다. 

또 그것은 첫째 방법에 비해서 우리가 너무나 좋아하는 일이기까지 합니다.

두 제자가 예수님의 실체를 발견한 것은 언제였습니까?


오늘 본문 30~31절을 보십시오!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함께 떡을 뗄 때 부활의 주님을 만납니다.

즉 함께 먹을 때 부활의 주님은 당신을 우리에게 보여주신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성찬을 말할 수도 있고, 성도들 간의 교제(애찬)를 말할 수도 있지만

어쨌든 함께 모여 먹을 때

그것은 우리 주님을 만날 수 있는 확실한 모티브가 됩니다.  


얼마나 즐거운 일입니까?

그러니 여러분이 너무 자주 모여서 식사하는 것에 대해서

누군가 지적하면, 이렇게 말씀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지금 단지 먹기 위해서 모인 것만은 아니야.

우리는 함께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중이야!” 

(물론 이것이 그저 놀고먹는 모임으로 끝나서는 안 되겠지요.)


아닌 게 아니라 성경은 참 우습게도 아주 자주,

먹는 장면을 대서특필하고 있습니다.  


사실 나누어 먹는 일, 손님 대접을 하는 일,

그리고 불우하고 고난당한 이웃과 나그네를 돌보는 일이 예수님의 일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얼마나 먹고 마시는 일을 좋아합니까?

하지만 오늘 그 일에 대해서 한 가지만 기억하십시다.


내 식탁만을 고집하는 것, 그리고 우리 식구라는 울타리를 넘어섭시다!

‘give and take’ 수준을 넘어 섭시다!


혹시 요즘, 입맛이 없으십니까? 그래서 삶의 활력을 잃어버리셨나요?


어떤 구호사역자의 간증에 의하면,

자기가 일생에 가장 맛있게 먹었던 식사는,

가난한 빈민들과 함께 어울려, 그들과 함께 식사를 나눌 때였다고 합니다.


정말 신기하고,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왜 그 변변치 못한 식사가,

진수성찬이나 값비싼 외식보다 왜 더 맛있는가! .. 하는 것입니다.

아마 그곳에.. 예수님(빈민들)이 함께 하시기 때문이 아닐까요?


오늘도 정말 식사가 필요한 사람에게.. 대접하며.. 함께 식사해 보십시오.

비록 자장면, 된장찌개라도.. 정말 맛있을 것입니다.


오늘 제자들은 동행한 나그네(사실은 예수님)를 자기들의 식탁에 초대하고

함께 떡을 뗀 후에 눈이 열리는 체험을 했습니다.


뜨내기 같아 보일지라도 그 사람을 동반자로 인정하고 함께 떡을 나눌 때

우리의 눈은 열리게 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나눔과 섬김, 그 길에 동행할 때

우리 믿음의 눈은 열리고,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렇게 떡을 떼고 나누면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U턴 합니다.


오늘 우리가 정말 해야 할 일은 이제부터입니다.

힘들여 온 길을 다시 돌아가는 것은

맥 빠지는 일이지만

하지만 그게 잘못된 길이라면,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 돌려야 합니다.

계속 가는 것은 점점 잘못되는 것일 뿐입니다.


오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은

자기들이 떠났던 예루살렘으로 U턴 했습니다.


거기가 자기들의 터전이고 일할 곳이고

뼈를 묻어야 할 곳이라는 것을 안 까닭입니다.


비록 예수의 잔당들을 색출하는 시도가 멈추지 않고,

아직도 계속 이런저런 소용돌이가 치는 현장이라 할지라도

그들은 자기들의 자리로 돌아간 겁니다.


확신하건데 아마도 그들은 그곳에서 다시 예수님을 전했을 것이고,

그 일 후에 얼마 안 가 일어난, 마가 다락방 성령체험의 주인공들이 됐을 겁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도 그런 살의 전환(유턴)이 필요합니다.

부활의 주님을 확실히 만난 제자는

반드시 U턴 하게 되어 있습니다.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들에게 있었던 일들을 가슴에 담아 두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우리 가는 길을 혼자 두시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고 변장해서 다르게 보일지언정 늘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제자들이 실제 주님을 만난 곳은 길 위에서였습니다.

우리 역시 언제나 길 위에 있고 어디론가 가고 있는데,


그게 혹 잘못된 길이라 할지라도.. 주님은 같이 가주시고,

기다리셨다가 때가 되면 강제로라도.. 우리 길을 돌려(유턴시켜)주십니다.


아울러 끊임없이 말씀을 사랑하고,

나 아닌 이웃을 향해 관심을 돌려서 그들과 떡을 뗀다면

부활의 주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자신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그것이 예루살렘과 현대의 부활을 향한 진정한 유턴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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