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진 게 많아서 실패한 세 지파 민32:1~9 11.10.16.설교스크랩
◑서론/ 가축이 많아서, 요단 동편에 눌러 앉기로 한 지파들
▶환경이 좋고, 가진 게 많고, 상황이 좋은 게 꼭 유리하기만 할까요?
혹 그 모든 유리한 것들이, 우리 앞에 장애가 되는 경우는 없을까요?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런 질문에 대해 충실하게 답해 주고 있습니다.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이 40년의 광야 생활을 끝내고
약속의 땅 가나안을 바로 눈앞에 두고 일어난 사건입니다.
통상 ‘가나안’이라고 하면 요단강 서쪽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는 경로를 보면,
요단 동편에서 요단 강을 건너 가나안에 입성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치 한국전쟁 때, UN군의 맥아더 원수가, 인천 쪽에서 한반도의 허리를 자르면서
상륙한 것과 똑같습니다.
남쪽이나 북쪽 어디든 쉽게 정복해 갈 수 있기 위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우회시켜서 옆구리를 치고 들어오게 하신 거지요.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이스라엘 민족은
12지파, 즉 12개의 부족체 연합으로 되어 있습니다.
모세의 인도로 요단 동편까지 와서 이제는 강을 건너 정복전쟁을 벌일 참인데,
그때 갑자기 ‘두 지파 반’이 그곳에 그냥 머무르겠다고 하는 거예요.
지금 모두들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위해서 전열을 정비하는 참인데,
르우벤, 갓, 므낫세 半지파가, 모세에게 요단 동편에 머무르게 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이유가 뭐냐? 이 지파들에겐 가축이 많았는데,
지금 밟고 있는 이 요단 동편 땅을 보니까 환경이 너무 좋은 거예요.
땅이 비옥한데다 무엇보다도 목초지가 많아서,
자기들 목축업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천혜의 조건인 거예요.
굳이 정복 전쟁을 치르면서까지 요단 서편으로 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거지요.
그래서 거기서 정착하기로 하면서, 이게 이스라엘 전체의 문제로 비화됩니다.
이게 본문 민수기 32장의 스토리입니다.
우리도 인생을 살다 보면 이런 일이 자주 오는데,
오늘 여기에는 중요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1. 풍요로운 환경이 오히려 장애가 될 수 있습니다.
▶지금 이들이 정착하길 원하는 요단 동편은 이스라엘의 최종 목적지가 아닙니다.
어떻든 요단강을 건너 진격해야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차지할 수 있는 것이고,
바로 그것 때문에 지난 40년 동안 모진 광야생활을 했던 겁니다.
그런데 지금 목적지를 지척에 두고 안 들어가겠다는 거예요.
1절 말씀대로 “심히 많은 가축 떼”가 있었고 땅도 좋으니까
여기가 좋사오니 하면서 주저앉은 겁니다.
요단강을 건너가면 전쟁을 치러야 되는데, 그 많은 가축을 이끌고 전쟁을 하다 보면
아마 태반은 잃게 될 거라 염려했나 보지요?
사실 지금 이스라엘 민족에게 ‘꿈에도 소원은’ 뭡니까?
요단강을 넘는 겁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는 거예요.
그런데 스스로 그 땅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거예요.
‘요단’이란 뜻은, 영적으로 ‘죽음, 천국’ 그런 뜻입니다.
즉 요단을 건너야 천국에 들어간다는 의미인 겁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요단을 넘어 더 좋은 곳, 최종 목적지요,
천국 같은 가나안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겁니다.
▶우리 가운데도 그 두 지파 반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처음엔 다 따라갑니다.
고생 하면서 광야도 통과하지요.
그런데 마지막 순간에 가진 게 너무 많아서 그걸 포기 못하고
요단 동편에 머무르는 일이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 이들이 나중에 어떻게 되는지 아시지요?
다윗 왕국 때, 이스라엘이 통일 됐을 때,
요단 동편 땅이 이스라엘 땅에 포함이 되던가요?
아닙니다.
유명무실.. 이방 땅이 되어 버립니다.
제일 먼저 씨가 말라버린 곳이 어디냐? 바로 요단 동편이었어요.
왜 그렇게 됐습니까?
그 땅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겨우 두 세대를 넘지 못하고, 그 지파들은 역사 속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립니다.
다윗 시대가 되면 요단 동편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생각해야 될 게 뭐겠습니까?
우리에게 약속하신 땅이 우리 땅이지 약속하지 않은 땅,
내 눈에 보기 좋은 것이 내 땅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 따라 가면 안 됩니다.
▶한국의 고속도로 휴게소는 정말 먹거리도 많고 구경거리도 많습니다.
한 번 들어가면 떠나기가 싫습니다.
하지만 휴게소는 잠깐 쉬는 데지 목적지가 아닙니다.
그런데 거기가 좋다고 계속 머무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거기가 좋다고 “한 한달 정도 있어 볼까?”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처음 며칠 간은 좋을 겁니다.
하지만 돈이 떨어지면, 좋은 건 끝장 나고 비참하게 되는 겁니다.
비유가 좀 적절치 못했지만, 지금 세 지파가 꼭 그 짝인 겁니다.
이 상황을 목도하면서 우리는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비우고 버리는 훈련은 꼭 필요합니다.
인생은 하나를 얻으려면 반드시 하나를 버려야 됩니다.
다 취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를 얻고자 한다면
무엇을 버릴 것인가 그것부터 생각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버리는 것은 젊어서부터 습관이 되어야만 가능합니다.
중세 때 수도원에 들어가려면 세 가지 서약을 해야 했다 그러지요?
가난, 순결, 순종!
뭐겠습니까?
육적인 것을 버리지 않으면 영적인 것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겁니다.
그렇게 했는데도 육적인 것을 버리지 못할 때는 어떻게 하지요?
순례를 떠났습니다. 즉 광야로 간 겁니다.
왜요?
자신의 ‘많음’에서 해방되려고요.
많은 게 자기 성장에 방해가 되는 거예요.
광야란 비우는 곳입니다.
그런데 묘한 건 뭐냐 하면,
그렇게 광야에서 다 버리면 거기서 엄청난 것이 채워지는 겁니다.
예수님이 그러셨고, 사도 바울이 그랬고 모세가 그랬고 요한이 그랬습니다.
광야에서 다 비웠는데 오히려 그들은 충만해졌던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님만으로 가득 채워지지 않은 이유가 어디 있을까요?
사실을 말하면, 우리 심령 속에는 쓰레기가 너무 많습니다.
‘가축’이 뭐가 그리 중요합니까?
가축 때문에 요단강을 못 건넌다는 게 말이 됩니까?
우리 인생도 지금 그런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것 아닐까요?
여러분은 지금 뭐에 집착하십니까, 그것 때문에 인생 전체를 망칠 건가요?
왜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광야로 이끄셨을까요?
비우게 하셔서, 하나님만으로 채우시려고 했던 겁니다.
신8:16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내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만나만 먹이신 것입니다.
세상을 비우게 하시고, 하나님만으로 가득 채우기 위함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인생 가운데도 광야처럼 황막한 순간이 옵니다.
왜 그리로 이끄시겠어요?
광야를 통해서 우리의 ‘많음’에서 해방되라고요.
비울 줄 알아야, 채워짐을 알라고요.
쓸모없는 것들을 다 비워야
비로소 승리하고 진짜 복다운 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겁니다.
▶이 두 지파 반의 결정적 약점이 뭡니까?
비우지 못해서.. 망한 지파가 됐다는 겁니다.
주님의 메시지가 뭐겠어요?
젊어서부터 비우는 것을 배우라는 겁니다.
소탐대실 하지 말고 가장 중요한 것을 붙들 줄 알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을 생활 가운데 끊임없이 연습하라는 겁니다.
끊임없이 비우는 연습을 해서, 그 비움을 통해 채워지는 역사가
저와 여러분 가운데 있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하나님은 마지못해 허용하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뒷감당은 자기가 해야 합니다.
▶눅15장에서, 탕자는 아버지께, 미리 자기 상속분을 달라고 조릅니다.
돌아가시기도 전에 유산을 달라는 것은
‘아버지 빨리 죽어 주세요!’ 하는 얘기와 똑같습니다.
불효도 그런 불효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아들은 계속 떼를 쓰지요?
아버지는 그 아들을 잘 알았습니다.
한 재산 떼어 줘 봐야 다 털어먹고 올 텐데, 그런데도 계속 조르는 겁니다.
사실은 좀 더 재산관리 훈련을 받고,
아버지 밑에서 인성 훈련도 더 받은 다음에 유산을 물려받으면 가장 좋은 건데,
그때까지 참지를 못하는 겁니다.
아들은 막무가내로 조릅니다.
결국 어떻게 합니까? 결과가 뻔히 보이는데도 아들에게 재산을 떼어 줍니다.
무슨 말씀일까요?
하나님은 우리가 너무 조르면, 가장 좋은 게 아니더라도
할 수 없이 그냥 주시는 경우가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럴 때, 그 뒷감당은 다 우리가 해야 한다는 겁니다.
▶지금 두 지파 반이 요단 동편에 남겠다 그러니까 모세가 격노합니다.
당연하지요! 그건 불순종이고 반역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너희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우리 민족 전체를 망하게 하려고 그러느냐? 지금까지 보호해 주신 하나님을 잊었느냐?
너희 조상들이 당했던 심판을 맛봐야 정신 차리겠느냐” 호통을 칩니다.
그러면, 일이 이쯤 됐으면 자기들 고집을 꺾어야 되잖아요?
그런데도 그걸 못 버리는 거예요.
꼭 요단 동편에 남고 싶다고 조르는 거예요.
그러면서 타협안을 제시합니다.
자기들 가족과 가축은 다 여기 두고,
그대신 가나안 정복 전쟁엔 자기 남정네들이 다 참전하겠다 그럽니다.
그리고 정복한 땅을 배분할 때, 자기들은 거기서 빠지겠다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라도 자기들은 요단 동편에 남겠다는 겁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마지못해 허락하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성경을 대하면서 반드시 알아야 될 게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 ‘good’을 주시기를 원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 밖에 없는 유일한 것, 즉 ‘best’를 주시기를 원하세요!
하나님의 뜻(‘허락’의 의미)이라고 다 똑 같은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막 기뻐하시면서 “그래 이게 내 기뻐하는 뜻이야!” 하시는 게 있고,
하도 불순종하니까 “그래, 그럼 한 번 해 봐라!” 허용하시는 게 있다는 겁니다.
우리 인생이, 그 두 지파 반 같아서야 되겠어요?
그건 인생을 안 망하는 정도에서 살겠다는 겁니다.
“하나님께 완전히 버림받지 않는 정도로만 살게요” 그 얘긴데..
그렇게 살아서 되겠습니까? (얼마 안 지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문제는 이런 두 지파 반 같은 사람이 저지르는 일이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역사에 비슷한 일이 되풀이 됩니다.
사사기 끝에 보면, 이스라엘 민족끼리 벌이는 동족상잔의 얘기가 나옵니다.
베냐민 지파와 나머지 지파 연합군이 전쟁을 치르는데
첫 번째, 두 번째 전쟁에서 연합군이 대패합니다.
한 4만 명 정도가 목숨을 잃지요.
그러고 나서 그들이 통곡하면서 하나님을 원망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나가라 그래서 나간 건데 왜 지게 하셨습니까?” 그럽니다.
왜 하나님이 그런 결과를 주셨을까를, 제가 묵상해 봤습니다.
다시 면밀히 성경을 읽어봤더니 전쟁이 터지기 전에
그들이 드린 예배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전쟁처럼 큰 문제를, 그것도 동족과 싸우는 큰 문제를 앞두고
그들이 제사를 드리면서 가장 먼저 물어 본 게 뭔지 아십니까?
“하나님! 어느 지파가 먼저 나가 싸울까요?”
이게 옳은 기도입니까?
이런 중대한 문제를 두고 전쟁을 일으키려고 한다면
먼저 “하나님 이 전쟁은 옳은 것입니까?
우리가 전쟁을 시작해야 될 명분이 있는 걸까요?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이렇게 물었어야지요.
그런데 일단 자기들끼리 “전쟁은 피할 수 없다. 하자!” 라고 결론 내려 놓고
그래 놓고, ‘어느 지파가 먼저 나갈지?’ 물은 것입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하나님의 심정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 뭐 너희들이 언제 나한테 예배다운 예배를 드려봤냐?
정말 내가 원하는 기도를 한 적 있냐? 너희들끼리 다 결정해 놓고 뭘 묻냐? 그래!
뭐 전쟁을 한다니까 해 봐라. 평소처럼 유다 지파가 나가든지 말든지…”
이런 심정으로 응답을 하셨을 거라는 겁니다.
▶사실 우리가 벌이는 일 중엔 이런 일이 많다는 겁니다.
우리가 다 결정해 놓고, 하나님께 허락하시라는 거지요.
(세 지파가 그렇게 요구했고.. 하나님이 마지못해 허락하셨다는 겁니다.)
우리 뜻에, 하나님이 좀 맞춰주시라는 겁니다.
그리고 일이 잘못되면, 그 잘못된 탓을 전부 하나님께 돌립니다.
그렇게 보면 하나님처럼 억울하신 분도 없을 거예요.
일은 다 지들이 벌여놓고, 그 책임을 지라고 생떼를 쓰니, 이걸 어떻게 하겠어요?
하나님이 주시기를 원하는 베스트를 좇아가는 게 아니라
안달복달 하면서 지금 좋아 보이는 것을 취할 때.. 비극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뭘 간청하면,
하나님은 마지못해 허락하시지만
뒷감당은 우리가 해야 된다는 예를,
탕자의 경우, 본문의 세 지파의 경우, 사사기 내전의 경우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 삶의 방향을 바꾸십시다!
이 두 지파 반 사람들은 생각부터가 잘못 됐습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 아니라 the perfect will, the best will
겨우 허용하시는 뜻만 추구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good will
딱 부러지게 죄를 졌다고도 말하기도 그렇고,
불순종했다고 하기도 뭣한 어정쩡한 상태!
이게 이 사람들의 현주소였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결국 이 사람들은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다윗 왕국이 형성되었을 때,
요단 동편은, 넣지 않았습니다.
아마 이방인들과 혼합되어, 유명무실고 어정쩡하게 남아 있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거의 사라진 거나 마찬가지였죠.
▶마치는 말
우리의 목적지는 요단 동편이 아니라, 가나안입니다.
그러자면 요단을 건너야만 하고, 정복 전쟁을 치러야만 합니다.
우리 인생에서 그것은 비우기 훈련에 다름 아닙니다.
세상이라는 광야에서 우리는 계속 비우고, 버려야 합니다.
1.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 the perfect will을 따라 쫓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마지못해 나의 강청을 허락하셔도,
뒷감당은 자기가 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2. 결국 이것도 비우기 연습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입니다.
내 뜻과 당장 눈에 보이는 좋은 것들과 욕심을, 비우고 버리는 데서
이 모든 일은 가능할 것입니다.
비우지 못하고, 버리지 못하고, 꼭 붙들고 있다가는
‘가나안’에 못 들어갑니다.
3. 우리가 겪는 그 모든 훈련은
바로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직접 마련하신 것입니다.
비우고 버리는 연습에 좀 더 열심을 내십시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물질적/정신적/사회적 ‘가난’을 겪게 하실 때
그것을 오히려 ‘영적인 풍성함’을 경험하는 계기로 삼으십시다.
그것이 ‘가난’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
▲도입일화/ 환경이 좋은 것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제 중학교 시절 저랑 두 해나 같은 반에서 짝꿍을 했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이 친구가 한 번은 수학 시간에 선생님으로부터
거의 모욕에 가까운 심한 말을 들었는데, 상황이 이랬습니다.
당시에 이 친구의 아버지는 다른 중학교의 선생님이셨어요.
그때만 해도 교사는, 지방에서 대단히 존경을 받았고, 생활면에서도 아주 안정적인 직업이었지요.
그리고 당시에는 선생님들 자제 중에, 우등생이 많았는데,
어찌된 일인지 이 친구만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수학 시간에, 선생님이 이 친구한테 아주 쉬운 문제를 질문했는데
그걸 대답 못한 거예요.
그랬더니 그때 이 선생님이, 차라리 그냥 몇 대 때리고 말면 나을 걸
아주 심한 말을 한 겁니다.
“네 놈은 환경이 너무 좋은 게 독이야!
지 애비가 학교에서 잘리고 한 번 빌어먹어 봐야 정신 차리지!” 그러는 거예요.
(지역이 좁다 보니, 그 선생님도, 제 친구의 아버지를 잘 알고 있었어요.)
사실 그 친구가, 그렇게 좋은 환경에 비해서 썩 모범적이지 못했던 건 사실이었습니다.
옆에서 보면 용돈도 늘 넉넉히 갖고 다녔고,
도시락 뚜껑을 열면 늘 계란 프라이가 얹혀져 있고,
교복도 우리는 선배들 걸 물려 입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 친구는 늘 새 것을 사 입었습니다.
그리고 참고서도 누구보다도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공부에는 관심이 없었던 거예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날 수학 선생님이 그 친구한테 하신 말씀은 좀 심했습니다.
그때로부터 40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 보니까
그 선생님의 어조가 좀 독하긴 했지만
정말 그 선생님 말씀대로 그 친구가 환경이 덜 좋았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그리고 그 친구가 독자가 아니고 다른 선생님 자제처럼 4, 5남매 중에 하나였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러면 오히려 상태가 더 낫게 되지 않았을까,
어쩌면 그 친구는 정말 가진 게 너무 많아서 오히려 그게 해가 되지 않았나 그런 생각을 해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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