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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남자 이야기

LNCK 2012. 5. 29. 19:00

◈두 남자 이야기             삼하6:1~15           11.07.03.설교스크랩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 오려는 다윗


실로에 있던 언약궤(법궤)가 기럇여아림으로 옮겨지게 된 경위는 이렇습니다.

엘리 제사장 시대에 이스라엘과 블레셋 사이에 전면전이 벌어지지요.

이스라엘이 연전연패하자 엘리의 아들들이 법궤의 신통력을 믿고

그것을 전장으로 내옵니다.


그랬던 이유는, 과거 자기 조상들이 법궤를 앞세웠을 때 요단이 갈라지고,

여리고가 무너졌기 때문에 다시 한 번 그 신적인 힘에 의지하고자 해서였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승리는커녕.. 대패하고, 법궤도 블레셋에 뺏깁니다.


하나님 임재의 상징이요, 이스라엘의 수호신인 법궤를 빼앗긴 것은

이스라엘로서는 재앙 중의 재앙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잃은 법궤를 되찾을 길은 요원했습니다.

 

한편 블레셋으로 간 법궤는 블레셋의 5대 도시를 돕니다.

돌리려고 돌린 게 아니라

전리품으로 생각했던 법궤가 가는 곳 마다 재앙을 가져왔기 때문이지요.


가는 곳마다 독종에, 전염병을 퍼뜨렸고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쓰러뜨렸습니다.

마지막 도시였던 에그론이라는 곳에서는 법궤가 들어온다는 소식이 들리자

폭동이라도 일으킬 태세였습니다.      


결국 블레셋의 지도자들은, 전리품인 줄 알았던 그 ‘흉뮬’을

이스라엘로 되돌려 보내기로 결정하고, 수레에 태워 이스라엘 땅 벧세메스로 보냅니다.

이스라엘로서는 경사 중의 경사였고,

마치 하나님이 떠나셨다가 다시 돌아오시는 것처럼, 즐거워했습니다.


그런데 재앙은, 이스라엘 땅에 와서도 계속 됩니다.

호기심으로 그 법궤를 봤던 벧세메스 사람들이

모두 죽어 넘어지게 되는 일이 생긴 겁니다.

그쯤 되니 그 누구도 법궤를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법궤는 기럇여아림의 산(山) 사람인

아비나답의 집으로 모셔지게 되고

거기서 20년을 소리 소문 없이 안치되게 되었던 겁니다.  삼상7:2


오늘 본문은 바로 이 시점에서 시작됩니다.


오늘의 주인공인 두 남자는 아비나답과 오벧에돔입니다.

아비나답은 사울 왕 때의 사람이었고, 오벧에돔은 다윗왕 때의 사람입니다.


우리가 수학에서 배운 비율공식으로 이들의 관계를 나타내면,

아비나답 : 오벧에돔 = 사울왕 : 다윗왕이 됩니다.


우선 같은 세대를 살았던 사울왕과 아비나답은 법궤에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원래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법궤를 어떻게 생각했냐?

세계의 중심은 이스라엘이고, 이스라엘의 중심은 예루살렘이고,

예루살렘의 중심은 성전이고, 성전의 중심은 지성소고,

지성소의 중심은 법궤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법궤가 어느 정도 귀한 것이었는지는, 충분히 짐작이 갈 것입니다.

 

물론 사울왕 역시 40년 재위 기간 중 늘 제사를 드렸고 기도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모든 종교적 행위는 형식이요 의례적인 것이었습니다.

제사장이 오든 말든 자기 나름대로 제사를 드리고 전쟁터에 나갔던

그런 인물이었던 겁니다. 


백성들 역시 왕을 닮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고,

그 결과로 소중한 법궤는 수 십 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모두에게 잊혀졌고  주1)

따라서 그 존재 또한 방치되어 있었던 겁니다.

누구 하나 법궤에 관심을 가지질 않았습니다.

 

그랬던 것이 다윗이 왕이 되자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다윗은 왕이 되자마자 법궤를 생각했고,

그 성물이 기럇여아림에 있다는 것을 알아냈고,

곧 그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 오기로 작정했던 것입니다.


다윗이 얼마나 그 일을 기뻐하고 소중하게 생각했던지 법궤를 호위할

군사만 3만 명을 뽑습니다.

백성들도 덩달아 흥분했고 그래서 온 나라가 축제 분위기에 빠졌습니다.


20년 이상 동안 산 속에 내동댕이쳐졌던 이스라엘의 최대 보물인 법궤는

가장 아름답고 화려한 수레에 모셔져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수송의 총 책임은 지난 20년간 대를 이어 법궤를 맡아온

아비나답의 두 아들 아효와 웃사가 맡게 되었습니다.

법궤를 모시는 행렬은 장관을 이뤘고, 축제 분위기는 점점 더 고조되어 갔습니다.


그런데 행렬이 나곤의 타작마당까지 왔을 때

그 축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수레를 끄는 소들이 뛰었고, 그래서 궤가 기울어지려는 것을 웃사가 붙들었는데,

바로 그 순간 웃사가 즉사한 겁니다. 


사람들은 놀랐습니다. 이해할 수 없었어요.

왜 웃사는 죽어야 했을까요?


웃사는 20년간 법궤를 자기 집 마당에서 관리했던 아비나답의 아들입니다.

왜 아비나답에게 재앙이 왔을까요?

물론 이것은 이스라엘 전체에 미치는 재앙으로 번졌습니다.

 

다윗은 그 궤를 예루살렘까지 모셔 갈 마음을 잃었습니다.

엄두가 나질 않았어요.

기대가 컸기 때문에 실망도 그만큼 컸던 겁니다.


그래서 그 일을 포기하고, 법궤는,

현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오벧에돔의 집으로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석 달 후쯤, 다윗은 법궤를 모시고 있던 오벧에돔이    대상13:14

큰 복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거기에 힘입은 다윗은

다시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올 작정을 했고,

기쁨 가운데 궤는 드디어 예루살렘에 무사히 도착합니다.

 

 

◑오벳에돔의 등장


먼저 오늘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그것입니다.

누구는 20년간을 모셨는데도 저주를 받고, 그 아들 웃사가 죽었습니다.

누구는 단 석 달을 모셨는데도 복을 받았습니다.

그 석 달이 20년의 세월보다 더 값어치 있었다는 데 있습니다.

 

오늘 이야기의 초점은 단연 오벧에돔입니다.

그의 뒤를 따라가 보면 그의 석 달이 어떻게 20년을 이길 수 있었는지,

그만이 알았던 사실은 무엇인지,

상대적으로 아비나답이 모르고 있었던 게 뭔지,


그리고 온 가문이 복 받을 수 있었던 그의 비밀이 뭔지 등등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 얘기는 다윗왕마저 귀를 쫑긋 세우고 들었음직한 이야기일 겁니다.

 

무엇보다 오벧에돔이 누군지를 아는 일이 급선무입니다.

그가 어떤 인물인지 추적하는 데는 좀 시간이 걸렸습니다.


오벧에돔은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 중 레위 지파에 속한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듯이 그들은 평생 성전 일을 보면서 살도록 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레위 지파 안에도 여러 갈래가 있어서

자손 별로 섬길 일이 다 따로 있었어요.

같은 레위 지파 일지라도 하는 일은 다 달랐다는 거지요. 


그 중에 고핫 자손이 하는 일은 특별했습니다.

그들은 광야에 있을 때부터 법궤 운반을 맡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성막을 이전할 때마다 법궤는 그들 소관이고 그들 책임이었습니다.


따라서 법궤에 관한 한 그 누구보다도 잘 알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늘 아버지나 할아버지에게 철저한 교육을 받았던 것입니다.

법궤는 어떻게 운반해야 하고, 어디다가 모셔야 되고, 어떻게 관리해야 할지를

귀가 따갑게 들어왔던 겁니다.


그것은 법궤가 있든 없든 상관이 없었습니다.

실제로 그 많은 자손들이 어떻게 그 거룩한 법궤를 다 볼 수 있었겠어요?


어떤 자손들은 평생 말씀으로만 들었지

실제로는 법궤를 단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죽는 이들도 허다했던 겁니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그들은 늘 법궤를 마음에 그리고,

어떻게 모셔야 할 지를 알아왔던 겁니다.

오벧에돔은 바로 고핫 자손이었습니다.   *이 부분, 성경구절이 어디?

 

이제부터는 우리의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성경은 언제나 최소한의 것만 말씀합니다.

그렇다고 내용이 빈약한 것입니까?

그게 아니라 반대로 성경은 그 행간의 수많은 풍성한 사실을 우리 몫으로 남겨 둡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수면 아래 있는 사실들을 건져 올려서

내 소유로 확실히 붙들어야 하는 겁니다.

 

어느 날 오벧에돔은 그토록 궁금해 했던 법궤의 소식을 듣습니다.

다윗 왕이 수소문 끝에 찾아내고

이제 그 법궤가 아미나답의 집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겨져서 성전에 모셔지게 된다는 거였습니다.


법궤는 이제야 제 자리를 찾게 되는 거였습니다.

생각해 보면, 원래 법궤는 자기 선조들에 의해서 모셔져야 했고,

거기엔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야 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법궤의 행방은 묘연해지고, 따라서 영광도 떠나버렸고,

그것은 자기들 고핫 자손에게 평생 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부담에서 이제는 자유로워지게 된 것입니다.

법궤는 사라지지 않았고, 이제 다시 성전의 중심이 될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은 다시 나타나게 될 거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자기 평생에 단 한 번이라도 봤으면 하고 열망했던 그 법궤가

자기 집 앞을 지나간다는 게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먼발치에서라도 법궤를 볼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운인지요?

인생 최고의 복이었던 겁니다.     

 

기다리던 그 날은 마침내 왔습니다.

더 이상 화려할 수 없는 법궤의 행렬은 수천 명의 성가대와

악단의 음악과 함께 점점 자기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전설로만 듣던 다윗 왕의 모습도 보였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법궤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단지 소 두 마리가 끄는 화려하게 치장된 수레가 보였고,

그 앞에는 두 사람이 오만하게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가까이 오고 나서야 법궤가 수레에 실려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순간 오벧에돔은 경악했습니다. (상상이 필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자기가 배운 바로는 법궤는 소 따위가 끄는 게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멀어도 사람들이 어깨로 매서 운반하는 거였습니다.

감격과 흥분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대신 알 수 없는 깊은 의문과 불안감이 몰려왔습니다.


마음 한구석에서는 끊임없이 어떤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그러는 사이 일은 바로 자기 앞에서 터졌습니다.

소들이 뛰었고 법궤를 잡았던 웃사가 수레 아래 나동그라졌습니다.

그는 곧 죽었습니다.

 

이 사태에 놀란 사람은 비단 백성들만이 아니었습니다.

다윗 왕마저 이 사태 앞에 뭘 어떻게 해야 할지 황망스러워 할 뿐이었습니다.


성가대의 노래소리와 악단의 연주는 멈췄고,

행렬 주변의 사람들은 누구랄 것 없이 모두 공포에 떨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그 자리를 떠나갔습니다.

그 수많은 사람들이 사라지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화려했던 수레는 치장과는 달리 한없이 초라해졌고

거기에 실려있던 법궤는, 그 순간 누구의 보호도 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오벧에돔은 자기 속에서 분명한 자기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하나님의 음성인지도 몰랐습니다.

그것은 엄청난 굉음으로 계속 자기 마음을 때렸습니다.

“네가 모셔야 해!  너 밖에 없어! 너만이 하나님을 제대로 모실 수 있어!” 일리가 있는 상상입니다.

    

다윗 왕도 감당 못한 한 그 법궤를 오벧에돔은

아들들을 시켜 어깨에 메게 하고 집으로 모셨습니다.

 

그리고 채 석 달이 못되어 그의 가정은 모든 게 변했습니다.

그의 자손들 모두는 역대상26장에 나와 있는 대로

62명 모두가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능력 있는 하나님의 일꾼(성전 및 곳간 문지기)으로 쓰임 받게 되었고,

그의 집안은 쌓을 곳이 없도록 주님의 복이 넘쳐났습니다.


이 소식은 다윗 왕에게도 알려지고 오벧에돔은 왕 앞에서 간증했고,

다윗은 거기에 힘입어 용기를 내서, 다시 법궤를 예루살렘까지 모셔갈 수 있었습니다. 

이게 오벧에돔에게 일어났던 일입니다.

 

 

◑해석 및 적용


우리가 성경을 알아야 하고, 하나님을 아는 실력이 있어야 되는 이유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모르면 가치를 모르고, 사랑할 수 없고, 그래서 거기서 누리는 풍요도 없습니다.


▶1. 여러분! 오벧에돔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가 복 받으려고 법궤를 모셔왔습니까?


그 법궤를 모신 후 정확히 석 달 만에는 모든 게 달라질 줄 알고

 그 궤를 모셔왔냐 그 말입니다.


그는 복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단 한 번이라도 봤으면 했던 법궤를 봤고, 그 행운이 자기에게 떨어지자

오래 사모했던 연인을 만난 듯 더 없이 사랑했던 겁니다.


그의 행복은 하나님의 법궤를 모시는 것 자체에,

다른 말로 바꾸면 하나님 모시는 것 자체가 행복이었던 겁니다.


그 석 달은,

대를 이어서 보관했지만 아비나답의 20년 세월을..

오벳에돔은 단 3달의 기간이었지만, 가치로서 압도했고,

아미나답을 부끄럽게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은 연약해서 연약한 게 아닙니다.

몰라서 연약하고,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않는 무성의 때문에 연약하고,

따라서 사랑이 생길 구석이 없어서 연약한 겁니다.

실력은 다름 아닌 사랑이 우리의 실력입니다.

나는 아비나답입니까, 오벧에돔입니까?

 

오늘 사건의 중심엔 다윗이 있습니다.

물론 오벧에돔은 다윗의 그림자입니다.

따라서 두 사람의 얘기는 서로 자기 얘기입니다.

 

▶2. 오늘 우리가 한 가지 더 생각해 볼 게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블레셋 사람들이 수레에 태워 보낼 때는 가만히 계시다가,

왜 20년을 산 속에서 천덕꾸러기로 있을 때는 거미줄 떼느라 만지고, 청소하느라

이리저리 굴려도 가만히 계시다가, 왜 이번 일만큼은 참지 못하셨을까요?


왜 하필 다른 사람 집이 아니라, 오벧에돔의 집 앞에서 일을 벌이셨을까요?

 

대답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무에게나 섬김을 요구하시지는 않습니다.


사랑과 섬김도.. 헌신된 사람, 즉 오벳에돔 같은 사람에게.. 받고 싶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연 같지만, 섭리라고 봅니다.

소가 뛰고, 웃사가 죽는 사건이, 오벳에돔의 타작마당 앞에서 일어난 것은,

하나님은, (법궤는) .. 오벳에돔의 집에 머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대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요구하시지도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무시를 당해도 괜찮고, 무관심을 받아도 괜찮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에게야 수레에 실려와도 괜찮고,

아무 관심 없는 사울이나 아비나답 같은 작자들에겐 20년 괄시를 받아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다윗 너한테는 아니라는 겁니다.

너마저 나를 이렇게 대접하게 할 수는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준비가 되어 있는 오벧에돔의 집 앞에서 스스로 뛰신 겁니다.

“다윗! 오벧에돔! 너희들에게는 내가 하나님이고 싶어!

너희들마저 저들처럼 섬기면 안 돼!”


“OO교회 교인들아! 너희에게는 내가 하나님이고 싶어!

너희들마저 다른 저들처럼 섬기면 안돼!” 

그래서 하나님이 피눈물을 흘리시면서 그들을 찾으신 겁니다.   

 

▶3. 지금 여러분이 봐야 될 것은 하나님의 그 피눈물입니다.

여러분에게만큼은 괄시 받고 싶어하지 않으십니다.

여러분에게만큼은 억지로 끌림을 당하고 싶어하지 않으세요.

 

힘들더라도 여러분의 어깨에 메이고 싶어하십니다. 

 

때때로 하나님 일을 하면서 그런 생각 들 때가 있지요?

‘하나님, 왜 일이 제게만 몰립니까? 왜 하필 제게만 이렇게 무거운 십자가를 주십니까?’


그럴 때마다 여러분들은 불평 불만할 게 아니라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얘야! 나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너에게 매임을 당하고 싶구나. 너만이 이 일을 감당할 수 있단다!’


여러분에게 거는 기대가 있기 때문에 여러분의 집 앞에서 뛰시는 겁니다.

여러분만이 준비되어 있기 때문에 그만큼 기대를 거시는 겁니다.

모두 감당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여러분! 이제 우리가 할 일이 있습니다.

우리 일생이 20년이라도.. 그 세월은.. 의미 없는 시간으로 지나갈 수 있습니다.


아미나답의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법궤(하나님)를 모시고도, 그 귀중함과 영광을 망각하고,

그저 세월만 보내고 사는 것입니다.


반대로 오벳에돔처럼 준비하고 계시기 바랍니다.

영적인 실력, 믿음의 실력을 쌓고 기다리면.. 반드시 때는 옵니다.


남들이 무섭고 두려워서 다 도망갈 때,

오벳에돔은 실력이 있었고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에

여유 있게 그 일을 맡을 수 있었던 겁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다들 꺼려하는 일처럼 보일지 몰랐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자산이 워낙 소중했던 것이라 그 일을 감당할 수 있었고,

사람들은 그를 우러러 봤으며, 왕마저 그에게 가르침을 받았던 겁니다.

 

웃사는 아비나답의 그림자이고 아비나답 그 자체입니다.

궤가 움직였을 때 그가 궤를 붙든 것은 원어상의 의미로 보면 컨트롤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든 컨트롤 당하시지 않습니다.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베레스 웃사’라는 말의 뜻대로 있는 능력까지 쳐 버리십니다.

하나님을 컨트롤하거나 이용하지 마십시오.

 

아비나답은 아는 것도 없었고,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고,

사랑할 게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은 두 남자 중에 누구에게 더 가깝습니까?

아비나답입니까, 오벧에돔입니까?

 

여러분, 20년을 믿어도.. 헛될 수 있고,

3달을 주님을 사랑하며 섬겨도.. 주님께 인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믿고 한 번 지금부터 석 달 만이라도 하나님을 잘 섬겨보십시오!

물론 딱 석 달만 섬기고 마치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하지만 어쨌든 지금부터 석 달 만이라도

몸과 마음과 정성을 다 해 주 우리 하나님을 섬겨 보시라는 겁니다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우리 석 달 후에 서로들 돌아보고 간증하십시다.

우리가 석 달만 잘 해도, 주님은 얼마든지 승리케 하시는 분입니다.


더구나 오늘 오벧에돔 이야기 속에는

그의 가족들의 믿음이 어떻다 하는 얘기는 전혀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 뿐 아니라 노아의 열 식구를 구원하실 때도 마찬가지였고,

라합을 구하실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노아 아들이나 자부들의 믿음이 어떻다는 기사는 창세기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라합의 가족들 믿음이 어떻다 하는 얘기 역시

여호수아서나 히브리서 그 어디에도 언급된 바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오벧에돔이나 라합이나 노아, 다들 그들이 잘 섬기니까

자기가 축복의 통로가 되어서 온 가족이 구원받고 복 받았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에는 여러분이 그런 축복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한 사람이 석 달만 잘 섬겨도 온 가정이 구원받고 복받는 게 하나님 뜻이라면

왜 우리가 가만히 있어야 합니까!

....................


주1)

아미나답의 집 말고도, 다른 곳까지 포함하면, 빼앗겼던 법궤가 다윗 왕때 예루살렘으로 오기까지 

기간이 약70년이라고 합니다. 사울 왕의 재위기간은 40년이니까, 40년은 더 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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