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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11

시험과 원망

LNCK 2012. 5. 22. 16:21

◈시험과 원망                 마4:1~11                11.06.19.설교스크랩, 녹취



◑절박한 상황에 가면, 자기 본심이 튀어나온다.


세계적인 전자 기타리스트 산타나는, 자기가 기타를 연주할 때

2가지 감정을 표현해 내는데, 그것은 욕설기도라고 말했다.


얼핏 들어보면, 좀 의아한 얘기다.

욕설과 기도, 어떻게 전혀 상반된 2가지 감정이

그 속에 함께 내재되어 있고, 그것을 또 같은 연주시간에 표현해 내는지..


그러나 인간의 내면을 정직하게 들여다보면, 이 2가지 요소가 함께 들어있다.


제 의사 친구의 말에 의하면, 수면내시경 검사를 받는 사람들 중에,

수면(무의식)상태에서. 욕설을 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다고 한다.

자기 내면의 욕구가.. 무의식 상태에서, 여과 없이 표출되는 것이다.

(이 말을 듣고, 수면내시경 검사 받기가 두려워졌다는 사람들도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한편 강도는 예수님께 욕을 했고, 한명은 예수님께 기도를 드렸다.

절박한 순간에서 한 사람은 욕을 하고, 한 사람은 기도를 했다.


둘 다 정직한 외침이었다고 본다.

욕했던 사람이든, 기도드린 사람이든.. 그 속의 본심에는 거짓이 없었다.

둘 다 절박함과 고통 속에서 비롯된 것인데,

절박한 환경에서 (마치 수면내시경처럼) 자기 본심이 드러난 것이다.


다만 욕을 하는 사람은, 너무 고통스런 나머지, 누군가를 원망하고 저주했던 것이고,

반대로 기도하는 사람은, 너무 고통스런 나머지, 누군가를 의지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 각자도 절박한 상황에 처하면,

욕을 하는 사람도 있고, 기도하는 사람도 있고, 두 감정이 교차될 때도 있다.


결국 ‘절박한 상황’은.. 수면내시경처럼.. 우리의 무의식 세계를 들여다보게 한다.

거기서 ‘욕과 원망’이 나오는 사람이 있고,

또한 ‘하나님을 의지하는 기도’가 나오는 사람이 있다.


하늘을 향해 삿대질 하는 사람이 있고,

하늘을 향해 긍휼을 간구하는 사람이 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셔서 가장 힘든 순간에, 기도하셨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 순간만큼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버리신 것처럼 느끼셨던 것 같다.


1) 이 기도는,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2) 그렇지 않고, 이것은 절박한 순간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간절히 신뢰하는 기도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시는 그 순간에도,

나는 아버지를 버리지 않겠습니다.

나는 아버지를 신뢰합니다.

나는 아버지를 결코 떠날 수 없다는.. 그런 사랑의 표현인 것이다.


물론 정확한 사실은,

현장에서 예수님이 위 말씀을 외치신 ‘어감과 뉘앙스’를 들어봐야 할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불가능하다)


다만 우리가 백부장의 증언에서 ‘진실로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또한 한편 강도의 기도에서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들어갈 때, 나를 기억해 주소서’

예수님이 2)의 어감과 뉘앙스로 말씀하셨다고 결론내리게 된다.


왜냐하면 만약에 예수님이, 하늘 아버지께, 절망과 탄식과 원망이 섞인 어조로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말씀하셨다면,

근처에서 그 말을 들었던 백부장과 한편 강도는

‘십자가에 달릴만한 사람이 달렸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런 예수님께, 아무런 감동도 받지 못했을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예수님이 굉장히 힘들고, 괴로우셨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평소에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하다 보니까,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잊어버릴 때가 많다.

하지만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시오, 동시에 완전한 사람이셨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시험을 당하실 때, 우리와 마찬가지로 괴로우셨다.

슬픈 일을 당하시면.. 우리처럼 슬프셨다. 주리시면.. 우리처럼 배고프셨다.

예수님도 우리처럼 고독하실 때가 있었고,

우리처럼 믿음으로 행해야 될 필요가 있었다. ↓


히4:15, 예수님은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하지만 예수님은, 괴로운 순간에서,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으셨다.

절대적인 믿음과 신앙이었다.

어려운 순간에, 예수님은, ‘하나님은 어디계십니까?’ 라고 묻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하나님은 왜 제 기도소리를 듣지 아니하십니까?’ 라고

외치지 않으셨다.


◑시련을 당하면, 사람은, 원망하고 절망하게 되어 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라고 묻는 사람들이 여러 명 나온다.

시편에 보면, ‘왜 하나님은 응답하지 아니하십니까?’ 라고 묻는 구절이 종종 나온다.

 

욥기, 예레미야서에도

‘하나님, 나는 내 생일을 저주합니다. 어서 나를 죽여주소서!’ 이런 항의가 종종 나온다.


지금 ‘절박한 상황에서’ 하나님께 원망하는 신자들이 많은데,

예수님은 같은 상황에서, 절대적으로 하나님만 신뢰하신 믿음을 보이셨다..’

주제를 말씀드리는 중이다.

참 신자는, 절박한 상황에서, 예수님을 원망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북한을 방문한 어느 목회자는,

수 십 년간 헤어져 이산가족이 된 어머니를 처음 만났다고 한다.


이 목회자가 기억하는 어머니는, 늘 기도하는 분이셨다.

그런데 625후에 처음으로, 수 십 년 만에 상봉하고, 여쭈어보았다.

‘어머니, 요즘도 기도를 열심히 하십니까?’ 했더니,

그 어머니 대답이 ‘기도하면 뭐하냐, 응답도 없는데!’

이런 대답이 나와서.. 정말 가슴 아팠다고 한다.


아마 어머니가 전쟁과, 그로 인한 이별과, 북한 생활의 괴로움 등으로

너무 극심한 시련과 고난을 겪으시니까.. 이렇게 사람은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도 자신할 수 없다.

시련이 너무 오래 동안 계속되면,

우리도 욥처럼, 예레미야처럼, 시편기자처럼, 하나님께 대들고, 원망하게 된다.


그런데 여러분, 정치적인 고난보다도, 물질적인 가난보다도,

인간적인 아픔보다도.. 그 무엇보다 제일 슬픈 것은,

사람이 자기 영혼 속에 하나님이 안 계신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것처럼 비극적인 것은 없다.

그것은 완전히 인간이 절망에 도달했다는 얘기다.


반대로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기쁨은,

‘정말 하나님이 계시구나!’ 라고 느끼는 순간이다.


그 순간에 사람은, 그 영혼의 기쁨을 경험한다. 그 영혼이 살아나는 것을 경험한다.

아마 여러분도 경험해 보셔서 아실 것이다.


우리가 시련을 겪을 때, 시련 자체도 괴롭지만,

그 시련이 더 괴로운 이유는,


1) 그 시련의 의미를 알지 못할 때 더 괴롭다.

‘이 시련이 무슨 유익이 있을까, 무슨 목적이 있을까?’를 알지 못할 때,

그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시련은, 물론 아직 몰라서 그렇지, 모든 시련에는 의미가 있다.

더 우리를 낙심하게 만들고, 더 우리를 괴롭게 만든다.


2) 위에서 말씀 드렸듯이

시련을 겪을 때, 그것이 더 괴로운 이유는, 하나님이 느껴지지 않을 때이다.

하나님이 느껴지지 않을 때, 하나님이 안 계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

그 시련자체와 싸우는 것도, 괴로운 일이지만,

‘하나님의 부재’ 그것이 우리의 영혼을 낙심하게 만들고, 우리의 믿음을 시험한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이 겪는 모든 시련은, 영적인 시련이다.

그게 무슨 말인가 하면, 어떤 시련을 겪던 간에,

그것은, 궁극적으로 그 사람의 믿음을 시험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겪는 모든 시련은, 결국은 영적인 시련이다.

이 사실을 잊어버리면 안 된다.


욥의 시련이 위험했던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욥의 신앙을 흔드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의 몸에 병이든지, 그의 사람의 실패이든지, 가정의 비극이든지..

그것이 욥의 신앙(영생)을 흔들었다는 점에서 큰 위험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마귀가 우리를 시험할 때, 굳이 신앙 자체를 시험할 필요 없다.

그저 우리에게 아픔을 주기만 하면 된다.


우리에게 아픔을 주기만 하면.. 그것이 우리의 신앙을 흔들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제적으로 시험에 져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신앙을 버리는 사람도, 간혹 있다.

성경에도 나온다. 가룟 유다 같은 사람.


◑예수님의 광야 시험


1. 육체적 괴로움을 당하셨다.

40일 금식은, 육체적 괴로움의 극치였다.

주님은 40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셨다. 그래서 완전히 주리셨다.


그 시점에 마귀가 예수님을 찾아왔다.

그러니까 신체적인 괴로움, 그 자체가 사람을 흔드는 것이다.


옛말에 사흘 굶어서 도둑 되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 했는데,

신체적인 괴로움 자체가 사람을 연약하게 만드는 면이 있다.


2. 심리적인 괴로움을 당하셨다.

마귀는 예수님의 약한 점을 알고 있었다.

약한 점이 없는 사람은, 시험을 당하지 않는다.


우리가 시험을 당하는 이유는, 우리에게 약한 점이 있기 때문에,

마귀가 그것을 노리는 것이다.


지금 예수님의 약한 점은, 몹시 시장하셨다는 것이다.

그것을 마귀가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로 떡으로 만들라’고 시험한 것이다.


만일 그때 예수님이 금식하고 계시지 않았다면,

마귀의 말은 시험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떡이 필요 없었으니까!

그러나 시장하실 때는, 그것처럼 매력적인 시험은 없다.


예수님은 당신의 약점이 노출되고,

원수가 그 약점을 가지고 당신을 시험한 것이

심리적인 시련이 된 것이다.


3. 예수님은 영적인 시험을 당하셨다.

마귀의 유혹은 내용 자체도 시험이지만, 마귀가 유혹하는 순간에,

예수님은 믿음이 흔들릴 수 있었다.


왜냐하면 자신의 배고픔은 당연하게 느껴지고,

마귀의 시험은 강렬하게 다가오고 있다.


그런데, 같은 순간에,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나님이 어디서 나를 도우시는지.. 하나님이 과연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인지..

그게 (그 당시에는)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반면에 현실에 느껴지는 것은 신체적인 배고픔, 그리고 마귀의 시험,

그로 인한 괴로움, 이것이 강렬하게 느껴지는데 비해서,

하나님의 존재가 느껴지지 않는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그냥 방치하신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이것이 영적인 시험이다.

 

     마귀는 이전에도 똑같은 시험을 써먹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전에 시험한 사람들은, 많이 굴복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광야와 같은 현실에서,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도 않고, 느껴지지도 않고,

     배가 고프고, 마귀의 시험이 강력하게 다가올 때,

     거기에 굴복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출애굽 백성들이 거기에 굴복했다.

 

우리도 이렇게 영적인 시험을 받기도 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묻는다.

‘하나님이 계신다면, 왜 내가 이런 고생을 해야 되느냐?

이런 순간에 하나님은 왜 나를 안 도와주시느냐?

어디 계시느냐, 왜 침묵 하시느냐?’


익숙한 질문들이다.

왜냐하면 크리스천이라면 이런 질문을 안 해 본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함으로써, 마귀를 물리치셨다.

여기에 중요한 믿음의 원리가 있다.


▲1.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시면서,

절박한 순간에, 시험을 이길 수 있는 권능을 경험하셨다.

그러나 이 주제는, 오늘 설교에서 길게 다루지 않고 넘어간다.


▲2. 성령이 시험을 이끄셨다.

마4:1절에, ‘그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려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성령에게 이끌리셨다고 했다.

성령이, 시험을 당하도록, 예수님을 이끌어 가셨다.


그러므로 이 시험은, 괴로운 시험이지만,

하나님의 허락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원리다.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았다면, 예수님은 이러한 시험을 당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우리 각자도 마찬가지다.

     고전10:13절에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신다’고 했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가 당하는 모든 시험은,

     하나님의 허락의 범주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시험 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허락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시험을 받는다. 그 사실을 알아야 된다.


     그냥 우연한 일이 아니고, 무의미한 게 아니고,

     하나님이 아시고, 이미 계획하시고, 허락하신 가운데 이루어지는 일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함으로써, 마귀를 물리치셨다.

여기에 중요한 믿음의 원리가 있다.


▲3. 마귀의 시험이 3번으로 끝났다는 사실이다.

11절에, (3번 시험을 한 뒤에)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마귀는 떠났다. 두고두고 예수님을 시험한 것이 아니고,

일정한 분량의 시험을 한 다음에, 떠나갔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더라도,

당신이 감당할 만큼, 필요한 만큼만 시험을 당하시고,

그 이후에는 마귀가 떠나갔다. 시련이 끝났다.


시련/시험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정하신 범주 안에서만 이루어진다.


4.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와서 수종드니라.  마4:11


이 말씀은, 시험당할 때는 괴로웠지만, 일단 시험이 끝나니까,

위로와 평안이 되돌아왔다.

괴로울 때가 있었지만, 그때가 끝나고 나니까, 천사들이 나아와서 도와주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시험이 끝나면

천사들이 우리에게 베푸는 평강, 위로를 경험할 수 있다.

시험을 물리치고 나면,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이 밀물처럼 찾아온다.

 

그럼 왜 좀 더 일찍, 천사들이 우리를 수종들면 좋지 않을까?

그건 그때까지 우리가 감당해야 될(극복해야 될)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때도, 주님은 시험 당하는 자와 함께, 견뎌주신다.

마치 시험공부 하는 자녀 곁에서, 부모님이 같이 성경책을 읽으시며 견뎌주시듯이..


예수님도 예외는 아니셨다.

당신의 몫, 하나님이 정하신 몫을 감당하고 나니까,

그 시험이 떠나가고, 하나님의 위로와 평강이 찾아오더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