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자손들이 묻거든 여호수아4:장 21~24 출처보기
▲빨간 줄장미가 흐드러지게 핀 23년 전 6월 1일 우리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23년이 넘는 세월이 되었으니, 지나간 갈릴리교회의 발자취를 역사라 불러도 무방할 것입니다.
역사란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 이제는 갈릴리교회라는 존재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 대답할 수 있어야 하고
또한 그 존재의미를 객관화하고 냉정하게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갈릴리교회의 역사적 의미와 평가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우리 자신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하며
사람들 앞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여호수아서 4:21절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후일에 너희의 자손들이
그들의 아버지에게 묻기를, 이 돌들은 무슨 뜻이니이까 하거든..’
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으로 들어갈 때
요단강에서 12개의 돌을 들어 길갈에 세우면서
여호수아가 백성들에게 한 말입니다.
그리고 오늘 ‘후일에 사람들이 너희 갈릴리교회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이 질문에 대해 무엇이라고 대답할 것인가?’
우리에게 묻고 계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는 23년이 지난 지금 갈릴리교회가 역사 가운데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사람들과 하나님께 질문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 갈릴리교회가 여기에 대답을 해야 합니다.
▲1986년 6월 1일 갈릴리교회를 처음 시작할 때 첫 번 읽은 성경 말씀이
마가복음 16:장 1~8절 말씀이었으며, 그 제목이 <갈릴리에서 만나자>였습니다.
이것이 갈릴리교회의 시작이요, 지나간 우리 교회의 역사입니다.
우리 교회가 시작되던 1986년은 격동의 시대였습니다.
30년 동안 이어져오던 포악한 독재정치는 민주주의를 외치는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거치면서도,
특별히 1980년 광주에서 엄청난 희생이 있었음에도 끝날 줄 몰랐고
캄캄한 어둠이 짙게 깔려있던 질곡의 시대였습니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어디에도 희망이 보이지 않던 절망의 시기였으며
경제 발전이라는 풍요 속에서도 가난한 이들의 고난의 눈물이 끊이지 않았던 시기였습니다.
이때 이 땅의 많은 젊은이들은 더 이상 방법이 없다고
노동자들과 민중의 힘으로 혁명을 해야만
이 독재와 억압의 질곡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혁명을 꿈꾸고 모의하고 실제로 그 혁명을 실천해 보려고 했습니다.
이때 구로지역에만 대학을 그만두고
노동자로 취업한 대학생의 수가 일만 명을 넘었다고 합니다.
우리 사회가 온통 절망에 빠져있을 때 어디에 희망이 있는가
어디에 길이 있는가 방황하던 때였습니다.
▲이때 아주 적은 몇 사람이, 이 민족의 구원은, 그 어떤 이념이나 주체사상이나
민중혁명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길이요 해답이요 소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와 같은 우리의 생각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용기와 믿음이 없으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시대였습니다.
모든 세상 악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만이
우리 민족을 이 질곡의 역사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으며
이 나라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막스도 모택동도 김일성의 주체사상도 이데올로기도 아니고
사상이나 혁명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 우리의 결론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은
지금까지도 변치 않는 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우리의 소망이며 모든 문제의 해답이라는 우리의 결론은
토론이나 학습을 통해서 얻은 것이 아니고
산속 기도원에서 들은 소리도 아니었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질곡의 역사 속에 처절한 몸부림을 치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어놓고 헌신하고,
차디찬 감옥에서 생사를 넘나드는 무서운 정보부 고문실에서 깨달은 말씀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계시입니다.
이와 같은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은, 역사 현실에 대한 도피도 아니고,
역사 현실에 대한 후회나 변절은 더더욱 아니었으며
온 삶을 건 역사에 대한 새로운 도전이었으며,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우리의 결론은 예수다, 예수를 만나야 우리의 꿈이 실현되고
가난한 이들의 소망이 성취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모인 사람들이
예수를 찾은 것이 갈릴리교회의 시작입니다.
우리 갈릴리교회는 소망이신 예수를 찾아서 길을 나선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어디에 가면 예수를 만날 수 있는가
성경에서 그 대답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마가복음 16:7절 말씀을 보면,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예수님은 갈릴리에 계시니까 예수님을 만나려면 갈릴리로 오라는 이 말씀을 읽고
예수님께서 계신 갈릴리로 가기로 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러 갈릴리로 길을 떠난 사람들의 모임이 바로 우리 갈릴리교회입니다.
20여 년 전 이 땅의 갈릴리는 이곳 구로동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구로동은 이 땅의 가난한 사람들이 살던 가난한 사람들의
눈물과 한숨이 출렁이던 곳이었습니다.
날마다의 고달픈 노동에 지쳐 눈물짓던 곳,
20~30가구가 사는 벌집에 화장실을 가기 위해, 한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곳이었습니다.
이곳 구로동이 부활하신 예수님이 찾아가신 갈릴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서울 시내 각지에서 예수가 계신 구로동으로 예수를 만나러 왔습니다.
'구로동이라는 이름을 바꿔보자,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동네라는 이미지를 바꿔보자'고
구로동에 사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구로동에 사는 것을 자랑스럽게 행복하게 생각합니다.
이 구로동은 예수님께서 사시는 땅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은 모르지만 적어도 우리가 교회를 시작할 때는 그랬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찾아서 구로동 갈릴리로 왔을 때
정말 성경에 말씀하신 대로 예수님께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잘 지어놓은 교회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호화로운 집에 사시는 것이 아니라
부엌 한 칸, 방 한 칸 쪽방에서 아침이면 화장실 앞에서 허리춤을 움켜쥐고
어쩔 줄 몰라 하며 길게 줄을 서던 가난한 사람들, 야윈 사람들 틈에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맞벌이 부부가 공장에 나가면서 아이들을 맡길 데가 없어
단칸 쪽방에 아이들을 놓아두고 밖에서 문을 잠그고 내버려둔 아이들을 돌보아주셨습니다.
부모가 일 나가면 올데 갈데 없어 뒷골목을 헤매는 아이들을 찾아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이 모습을 보고 시작한 것이 <희망 어린이집>입니다.
▲그 어느 해 겨울 갑자기 교회 문 밖에 어수선해서 나가보니
외국인 여성노동자가 교회 문 앞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외국인 담당목사가 이 여자를 엎고 병원에 갔는데
큰 병에 걸려 종합병원으로 가라고 해서 여의도 성모병원에 갔더니
급히 수술을 해야 살 수 있다고 했습니다.
수술비가 1천2백만원인데, 교회가 보증을 서야 수술을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때 우리 교회의 일 년 예산이 일억이 안 되는 때여서
1천3백만원은 우리 교회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큰돈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 사정을 아시는데 돈이 없어서 못하는 것은 이해하시겠지 생각하면서도
사람이 죽어가는데 돈 때문에 수술을 안 할 수 없었습니다.
그 여자는 왜 큰 교회도 많은데, 우리 교회 앞에서 쓰러진 것일까 원망하며 고민하다가
제 마음 속에 갑자기 이 사람이 예수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이라면 그냥 모른 척 할 수 없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교회가 책임을 지기로 했습니다. 그 다음 주가 성탄절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설교를 했습니다.
여러분 일주일 뒤면 성탄절인데 성탄절이 무슨 날입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날인데 금년에는 일주일 먼저 우리 교회로 오셨습니다.
병이 들어서 우리 교회 문 밖에 쓰러져 수술을 해야 하는데
수술비가 1천3백만원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주일학교 어린이들은 돼지 저금통까지 털고, 온 교회가 헌금을 하였는데
수술비 1천3백만원하고, 팔백만원이 더 나왔습니다.
우리 교회의 일년 예산의 1/5인 2천1백만원이 나왔습니다.
그 여자는 세 딸을 둔 필리핀 여자로 필리핀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하다가
우리나라에 돈을 벌러 왔는데, 자신의 생각에 죽을 병이 걸린 것 같은데
갈릴리교회에 가야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그 여자가 일하는 의정부에서부터
죽을힘을 다해 갈릴리교회까지 와서 쓰러졌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갈릴리 사람들은 지나간 18년 동안
이 땅에 와서 힘겹게 살아가는 이주 노동자들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고달픈 나그네의 모습으로 병들고 배고픈 모습으로
우리 교회를 찾아오는 이주노동자들의 모습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제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이주노동자들을 예수님처럼 섬겨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주일 오후가 되면 우리 교회를 찾는 이주 노동자들을 보면서
저는 예수님이 우리 교회를 찾아오셨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갈릴리교회 목사인 것을 참으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은퇴)
틀림없이 언젠가 여러분이 저를 고마워할 날이 있을 것입니다.
세상을 떠나면 우리가 모두 예수님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내가 배고팠을 때 먹을 것을 주었으며
병들었을 때 나를 돌보아주었는가 질문을 할 것입니다.
이 질문을 받으면 우리가 당당하게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옛날에는 대중목욕탕에 외국인들을 받아주지 않아서 목욕을 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 교회가 샤워실을 마련해 놓고 목욕을 할 수 있게 해주고
병들었을 때 치료해주고 머리도 깎아주었습니다.
예수님 앞에 섰을 때 갈릴리교회를 다니길 잘 했다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갈릴리의 예수님은 그냥 한 곳에 머물러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어느 날 판잣집 쪽방에서 버려진 아이들을 돌보시고
어느 날은 병들고 배고픈 나그네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시고
어느 날은 저 캄보디아에서 아프리카 가나에서 또 베트남으로 가십니다.
그리고 이제는 구로동에는 예수님은 안 계시는 줄 알았는데
구로동 아파트 뒤에서 밥을 굶고 있는 노인들과 함께 계십니다.
그리고 또 얼마 전에는 몽골에서 나무를 심고 죽어가는 호수를 살리고
울란바트라에 내가 머물 교회를 지어야겠다고 하십니다.
지나간 20여 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기가 숨이 벅차기 그지없습니다.
여기 계신가 하면 저기 계시고 열심히 따라 가보면 또 다른 곳으로 가시고
이제 또 어디로 가셔서 우리들을 부르실지 모릅니다.
▲예수님을 따라서 살아간다는 것이 보통 힘든 일이 아닙니다.
돈도 보통 많이 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교회가 열심히 헌금을 하지만
예수님을 따라가는 경비를 대기가 늘 힘에 벅찹니다.
갈릴리교회 23년의 역사가 무엇입니까?
갈릴리를 찾아서 여기저기 다니시는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역사가
바로 우리 교회의 역사입니다.
쪽방에 계신 예수님, 뒷골목에 계신 예수님, 나그네의 모습으로 찾아오신 예수님
가나, 캄보디아, 베트남과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몽골에서
지나간 20여 년 동안 우리는 열심히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이것이 갈릴리교회 23년의 역사입니다.
▲마가복음은 누구든지 예수를 믿고 싶은 사람은 갈릴리로 오라는
16:장 말씀으로 끝났습니다. 마가는 당연히 갈릴리로 예수를 찾아간 사람들이
어떤 일을 했는가 어떤 역사가 일어났는가 마가복음 17장을 써야 하는데
마가복음 17:장은 쓰지 않고 붓을 놓았습니다.
마가복음 17:장은 우리들의 몫입니다.
갈릴리로 찾아가 예수를 만난 사람들의 기록이 바로 마가복음 17장인 것입니다.
지나간 갈릴리교회 23년의 역사는 마가복음 17장을 기록한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되돌아보면, 하나님 앞에 자랑할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부족한 모습이 많았습니다.
우리 모두가 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따르지 못한 부끄러운 모습도 있습니다.
때로는 예수님을 따라가기가 힘들어 못가겠다고 떼를 쓰기도 하고,
슬쩍 뒤로 물러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놓치지 않고, 예수님을 따라가려고 애쓰며 살아왔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산다는 것이 힘들고 어렵고 고달픈 것이지만
지나간 23년의 삶은 너무도 행복하고 기쁨이 넘치는 삶이었습니다.
예수를 따라가는 우리의 삶이 힘들고 고달픈 것이었지만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가 가슴을 늘 설레게 하고 행복하게 했습니다.
지나간 23년의 우리 갈릴리교회의 삶은 행복이 넘치는 삶이었습니다.
부끄러움이 없는 자랑스러운 삶이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를 믿는 사람이고, 이런 사람들의 모임이 바로 교회입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예수님을 따라 사는 우리의 삶을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마가복음 17:장을 계속 써나가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의 눈을 떠서 예수님이 어디에서 우리를 부르시는가
예수님이 부르시는 갈릴리라면 어디든지 달려가는 믿음의 결단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그날까지
우리 갈릴리교회의 아름다운 신앙의 고백과 결단이 늘 이루어져서
갈릴리에서 사는 삶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귀한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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