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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게디 광야의 하나님

LNCK 2012. 6. 6. 19:48

◈엔게디 광야의 하나님         삼상24:1~7              출처보기

 


◑다윗에게는.. 기적적인 응답이 없었습니다.


▶내가 곤경에 처해도.. 기적이 안 일어나네요..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이 만만하지 않습니다.

앞뒤가 꽉 막힌 곤경에 빠져, 기적만이 나를 이 곤경에서 구해줄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여러 번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모세가 홍해바다를 건너고,

베드로가 물 위를 걷은 등 많은 기적이 있지만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내 삶에서 기적은 그렇게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성경의 인물들도, 대부분은 기적이 일생에 몇 차례 일어났습니다.

 우리 각자도, 작은 기적은, 10년에 한 번꼴은 일어날 것입니다.)


저는 60평생을 살면서, 다른 사람들이 다 인정할만한 기적이 일어났던 적은 없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의 삶에 그러한 기적이 있었습니까?


우리가 처한 곤경에서 구해 줄 분은 하나님뿐인데

하나님께서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시는 것을 보며, 하나님을 원망하게 됩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였던 다윗도

평생 동안 뚜렷한 기적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성경에 가장 많이 기록된 사람입니다.

양을 치던 어린 시절부터 40년 동안 왕노릇을 하고 죽는 순간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나의 신실한 종 다윗’ 이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셨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복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성경 그 어디에도,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기적을 베풀었다는 말은 없습니다.


물론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친 것도.. 기적이고,

다윗이 사울왕의 칼을 피해 다닌 것도.. 기적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우연 같은 기적’이었고,


다윗이 위급한 상황에서, 꼭 어떤 기적적인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을 때,

하늘에서 기적이 뚝 떨어진 적은 없었다는 뜻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묵묵부답, 무응답하신 적이 더 많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다윗의 삶에 기적이 필요할 만큼의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다윗도 우리와 비슷한 삶을 살았습니다.

아니 우리보다 더 힘들고 어려운 때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아버지를 배신하고 역모를 꾸몄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도망을 가는 다윗의 모습이, 이렇게 나옵니다.

다윗이 감람 산 길로 올라갈 때에 그의 머리를 그가 가리고 맨 발로 울며 가고

그와 함께 가는 모든 백성들도 각각 자기의 머리를 가리고 울며 올라가니라. 삼하15:30


얼마나 다급했으면 신발도 신지 못하고 울며 도망친 것입니다.

이때 다윗에게, 하나님의 기적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사실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무응답

성경을 읽어보면 다윗은 온갖 고난을 다 당했습니다.

백성들의 민심이 다윗에게 쏠리는 것을 본 사울왕이 삼천 명의 용사들을 데리고

다윗을 잡으려고 했습니다. 다윗은 사울왕을 피해서 필사적으로 도망을 다녔습니다.


본문은, 다윗이 엔게디 광야의 동굴에 깊숙이 들어가 몸을 피신했습니다.

얼마나 절박한 상황입니까? 자칫하면 죽을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입니다.

죄송한 표현이지만, 다윗은 오금이 저렸을 것이고, ‘실수piss’하기 일보직전이었을 것입니다.


이때의 심정을 다윗은 시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시10:1


자신을 도와주고 힘을 주어야 할 하나님이, 멀리 서서 숨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습니다.


시편 13:1절 말씀에도 그러한 다윗의 절규를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시13:1


다윗이 이런 위기를 당하게 된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닙니다. 한 달, 두 달이 아닙니다.

일 년, 이 년을 기다려도.. 하나님의 응답이 없는 것입니다.


다윗은 지금, 하나님께서 혹시 다윗을 잊으신 것이 아닌가 묻고 있습니다.

성경 그 어디를 보아도.. 하나님께서 다윗의 부르짖음을 듣고..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즉각 나타나셔서

그를 도와주시고, 그에게 기적을 베푸셨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기적’으로 변장한 유혹을 거절한 다윗


그런데 본문 말씀에 보면 다윗이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푸시는구나...’ 라고

생각할 만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다윗이 사울의 추격을 피해 엔게디 광야의 굴속에 깊이 들어가 숨었는데

사울이 그 굴속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다윗을 잡으러 들어온 것이 아니라 용변을 보러 들어온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윗이 어떤 생각이 들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나의 간구를 들으시고 원수를 내 앞에 보내셨구나.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를 주셨구나.’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기적을 베푸셨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왕을 죽이지 않고, 그의 옷자락만 조금 베었습니다.

다윗은 사울왕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삼상24:6절에 보면 다윗의 이러한 생각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


사울왕을 죽일 수 있는 좋은 기회였지만, 다윗은,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란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사울왕을 죽이지 않고 살려서 보냈습니다.


먼 훗날 역사가들은 다윗의 입장에서 볼 때, 아쉽기 그지없는 이 사건을 통해서,

다윗이 위대한 사람이었다고 평가했습니다.

다윗이 사울을 죽이지는 않았지만,

결국 다윗은 승리하여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평소에’ 기적으로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깊이 깨달아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고난을 당하여 낙심 가운데 있을 때

그 문제를 기적으로 해결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기적으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당하는 고난을 잘 견딜 수 있는 힘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진정한 기적이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붙잡히시기 전날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모습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하나님께 기적을 이루어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십자가를 지지 말게 해달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나에게 다가오는 십자가의 죽음을 감당할 믿음을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알고 있듯이, 십자가의 사건에는 아무런 기적이 없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님을 보면서 사람들은 실망을 하였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셨다고 절규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읽어보셨을 엔도 슈샤꾸의 <침묵>이라는 소설은

16세기 일본 도꾸가와 막부 시대의 기독교 박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기독교도를 잡아서 예수님의 사진에 침을 뱉고 발로 밟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부인한 사람은 살려주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처형을 했습니다.


이때 예수 믿는 사람들을 죽이는 방식이, 참으로 잔인하기 그지없었습니다.

큰 구덩이를 파고 거기에 막대를 세워 거꾸로 매달아놓고, 목에 약간 상처를 내어,

온 몸의 피가 다 빠져서 죽을 때까지, 그 구덩이에 거꾸로 매달아 놓았습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비참하게 죽어가는 데도, 햇빛은 쨍쨍 내리쬐고,

매미는 맴맴 울고, 파리는 왱왱 날아가는 것을 보고..

작가는, 만약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이런 순간에 왜 가만히 계신 것인가? .. 하는 것을 묻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침묵하시냐는 것입니다.


또 다른 처형 방법은, 바닷물이 다 빠졌을 때 바다에 기둥을 세우고

사람을 거기에 묶어두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서서히 물이 들어오기 시작하면 발목에서 가슴으로

그리고 온몸이 물에 잠겨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순교자를 삼킨 바다는, 그 위로 무심한 갈매기가 날아갑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까?

‘왜 기적적으로, 그 독실한 신자들을 구원해 주시지 않느냐?’는 질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엔게디 광야의 다윗에게도, 갈보리 산위에 예수님에게도,

강물에 휩쓸려 죽어가는 순교자들에게도 기적을 베풀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이렇듯 절박한 상황에서조차 침묵하시는 것입니까?’

이것이 기독교 2000년 역사 가운데 가장 많은 사람들의 질문입니다.


출3장에 보면 모세가 하나님께 누구냐고 묻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하나님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I am who I am.” 나는 무엇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냥 있는 자라는 것입니다.

‘to do’ 가 아니라 ‘to be’입니다.


다윗의 생명이 위태로울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위해서 무엇을 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다윗의 고난과 아픔가운데 함께 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괴로움을 당할 때

무엇을 행함으로 그를 돕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 가운데 같이 아파하고, 같이 조롱을 당하고

결국에 같이 죽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바다에서 신앙을 지키기 위해 죽어가는 순교자를 건져내는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 바닷물에 잠겨 고통을 당하는 분입니다.


여러분이 여러 인생의 짐으로 고난을 당할 때

여러분을 위해 기적을 일으키는 분이 아니라

여러분의 아픔 가운데 함께 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아플 때 함께 아파하며, 우리가 외로움을 당할 때,

함께 외로움을 당하는 분이십니다.


고후12장의 말씀에 보면 사도바울에게 육신을 찌르는 가시가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 앞에 세 번 이것을 없애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의 병을 고쳐주지 않으신 대신,

하나님은 은혜로써, 그 아픔에 함께 하시고, 동참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고후12:10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고

나의 고난조차도 기뻐하게 되었다는 사도바울의 고백입니다.


▶마치는 말

하나님은 여러분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는 분이 아니라

여러분의 어려움에 함께 하시는 분입니다.

결국에는 믿음으로 이겨 승리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우리에게 문제가 없기를 기도하거나,

우리가 당하는 어려움을 기적을 베풀어 해결해 주실 것을 기도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할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을 승리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이러한 축복이 여러분 가운데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관련글 네 분의 하나님   따뜻한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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